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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0:51

그로스몬트의 헨리

<colbgcolor=#C9A89F><colcolor=#000000> 초대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
Henry of Grosmont, 1st Duke of Lancaster
파일:henry of grosmont.jpg
이름 그로스몬트의 헨리
(Henry of Grosmont)
출생 1310년
웨일스 공국 몬머스셔 그로스몬트 그로스몬트 성
사망 1361년 3월 23일 (50-51세)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레스터 레스터 성
장례식 1361년 4월 14일
뉴어크 성모 수태고지 교회
배우자 이사벨라 드 보몽 (1334년 결혼)
자녀 모드, 블랜치
아버지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어머니 모드 차워스
형제 블랜치, 모드, 조앤, 이자벨, 엘레노어, 메리
1. 개요2. 생애
2.1. 가문과 초기 생애2.2. 스코틀랜드 전쟁2.3. 백년전쟁
2.3.1. 초기 경력2.3.2. 남부 프랑스에서의 맹활약
2.4. 랭커스터 공작2.5. 1350년대의 군사 활동2.6. 사망
3. 거룩한 의사들의 서(Le Livre de Seyntz Medic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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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이자 군인. 백년전쟁에서 활약하였다. 가터 기사단의 창립 멤버 중 한명이다.

당대 잉글랜드에서 국왕 에드워드 3세 다음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딸 랭커스터의 블랜치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과 결혼해 헨리 4세를 낳으면서 국왕의 외할아버지가 되었다.

2. 생애

2.1. 가문과 초기 생애

1310년경 웨일스 공국 몬머스셔 그로스몬트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헨리는 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남동생이었으며, 어머니 모드 차워스는 카마던셔의 키드웰리 남작 페트릭 드 차워스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보샹의 딸인 이사벨라 드 보샹의 딸로, 웨일스에서 광대한 영지와 부를 상속받은 귀부인으로 유명했다. 아버지 헨리와 삼촌 토머스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남동생인 초대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의 아들들이었다. 따라서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부계를 통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사촌이자 에드워드 3세의 2번째 사촌이었으며, 친할머니인 블랑슈 다르투아[1]를 통해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의 증손자이기도 했다.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학자들은 무척 다사다난한 시절을 보냈을 거라고 추정한다. 삼촌 토머스는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인 피에르 가베스턴을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체포해 참수한 일로 에드워드 2세의 원한을 샀고, 가베스턴의 뒤를 이어 권신이 된 휴 디스펜서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영주들을 끌어모아 1321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1322년 버리브리지 전투에서 참패해 생포된 후 에드워드 2세의 명령으로 즉결 처형되었다. 아버지 헨리는 토머스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고, 반란이 끝난 후 왕실에 몰수된 토머스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에드워드 2세와 협상한 끝에 레스터 카운티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영지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아버지 헨리는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고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으로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아버지 헨리는 데스펜서 재판을 주도한 공을 인정받아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맡은 프랑스의 이자벨에 의해 제3대 랭커스터 백작으로 선임되었고,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가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아버지 헨리는 모티머를 몰아내기 위해 1328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패배했고,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토지 수입에 절반에 해당하는 11,000 파운드의 벌금을 물고 프랑스 주재 외교관으로 배정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어머니와 모티머를 실각시키고 친정을 시작했을 때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이 때는 건강이 악화되어 실명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1330년 기사 작위를 받고 의회에서 랭커스터 가문을 대표했으며, 1331년 런던 시의 칩사이드에서 열린 기사 토너먼트에 참여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저서 <거룩한 의사들의 서(Le Livre de Seyntz Medicines)>에서, 본인은 젊었을 때 키가 크고 금발이고 날씬했으며, 지적인 문제보다 펜싱, 사냥 등에 관심이 많았고, 무술에 재능이 뛰어났다고 밝혔다. 또한 글쓰기를 늦게 배웠고 프랑스어가 불편했기 때문에, 이 책이 프랑스어 방언인 '앵글로-노르만어'로 쓰여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큐피드의 금상을 소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사랑을 논하는 낭만적인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스코틀랜드 전쟁

1328년,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자벨과 권신 로저 모티머는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와 협상한 끝에 20,000 파운드를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하고, 브루스 가문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이어가는 걸 수용하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경 지대를 스코틀랜드 국왕 알렉산더 3세 통치 기간(1249 ~ 1286)에 정해진 대로 돌려놓는 노샘프턴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많은 잉글랜드 귀족들은 노샘프턴 평화 협약을 "겁쟁이들의 평화"라고 부르며,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 역시 브루스 가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다가 상속권을 박탈당하자 스코틀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존 발리올의 아들이며 잉글랜드로 망명한 에드워드 발리올에게 가담했다.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5살의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에 선임되었다. 1331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요크셔에 모여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왕위 복위를 위한 스코틀랜드 침공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는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장인인 링컨 백작 헨리 드 보몽도 가담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넘어갔다. 1332년 7월 31일, 에드워드 발리올의 군대는 스코틀랜드로 진군했다. 그 해 8월 10~11일, 에드워드 발리올이 이끄는 군대는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의 지지자들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스콘에 도착한 발리올은 9월 24일 스코틀랜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데이비드 2세 지지자들이 반격을 개시했고, 1332년 12월 16일 아난 전투에서 발리올의 군대를 궤멸했다. 발리올은 맨몸으로 말을 타고 잉글랜드로 도주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33년 3월, 에드워드 3세는 정당한 스코틀랜드 국왕 에드워드 발리올을 복위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 침공을 단행했다. 이때 그로스몬트의 헨리도 원정군에 가담했다. 원정군은 스코틀랜드의 베릭어폰트위드 마을을 포위 공격하던 중, 스코틀랜드군 20,000명이 베릭에서 3.2km 떨어진 할리돈 힐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물리치러 이동했다. 1333년 7월 19일에 벌어진 할리돈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장궁병과 기사들의 활약 덕분에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 전투에 참가했는지, 베릭 수비대가 출격하지 않도록 배치된 분견대의 일원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릭 요새 수비대는 전투 다음날 항복했고, 헨리는 항복 협상에 참여했다.

이후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복위했지만, 대다수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지원 약속이 있자, 스코틀랜드인들은 1334년 8월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발리올을 또다시 축출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34년 12월 스코틀랜드로 진격했고, 그로스몬트의 헨리도 동행했다. 4,000명의 잉글랜드군은 록스버그에 이르렀으나, 몹시 혹독한 겨울 날씨 때문에 막심한 피해만 입고 1335년 2월에 철수했다. 이때 헨리는 노팅엄에서 스코틀랜드 반란군과 짧은 휴전이 체결되는 데 일조했다.

1335년 7월, 헨리는 에드워드 3세와 함께 1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해 로우랜드 전역을 약탈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전투를 회피하고 하이랜드의 산맥 지대에 숨어서 농성하자 물러났다. 1336년, 헨리는 에드워드 3세와 함께 퍼스로 진군한 뒤, 왕으로부터 전권을 부여받고 500명의 맨앳암즈와 1,000명의 장궁병을 이끌고 100km 떨어진 에버딘으로 진군했다. 2주 후에 도착한 그는 에버딘 시와 주변 지역을 초토화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돕기 위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프랑스군을 저지하기 위해 남하했고, 헨리는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스코틀랜드 영토를 다스렸다. 그러다가 플란데런 백국으로 상륙해 프랑스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에드워드 3세의 지시를 받고 스코틀랜드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하고 런던으로 이동했고, 템즈 강 어귀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영국 해협 항구를 방어했다.

2.3. 백년전쟁

2.3.1. 초기 경력

1337년 초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현지군을 인솔했고, 그 해 중반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337년 11월 월터 매니와 함께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항구도시인 슬로이스 시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카잔트 전투에서 현지 수비대를 격파하고 슬로이스 항구 앞의 카잔트 섬을 공략했지만, 슬로이스 공략에는 실패하고 런던으로 귀환했다. 1338년 에드워드 3세와 함께 플란데런으로 재차 원정을 떠났고, 코블렌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접견한 뒤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에드워드 3세가 황실 대리로 지명되고 군대를 제공받는 데 일조했다. 1339년 9월 20일, 에드워드 3세는 12,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프랑스 오드프랑스 지역의 노르주에 위치한 캉브레로 진군했다. 헨리는 이 원정대의 일부 부대를 지휘했다. 이 곳은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자유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캉브레에는 300명의 프랑스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캉브레 주교 기욤 도손이 수장으로 군림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곳을 공략해 루트비히 4세에게 넘김으로써 황제의 지지를 보다 확실히 얻어내고,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러 달려온다면 즉시 요격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9월 26일 캉브레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기욤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지만, 기욤은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표명하며 거부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공성전을 벌였지만, 프랑스 수비대가 대포 10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공략에 실패했다. 그러던 중 필리프 6세가 두 배 이상의 병력을 콩피에뉴에 집결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 3세는 포위를 풀고 캉브레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 즉시 요격하여 끝장내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의 재정 상태가 지극히 열악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자신이 캉브레에 대한 이권을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라도 하면 루트비히 4세 역시 에드워드를 더는 지원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하고 콩피에뉴에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어떻게든 필리프 6세와 승부를 빨리 보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프랑스 영내로 진입했다. 이에 필리프 6세가 군대를 이동시켰고, 양군은 페론 시 인근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곳은 필리프 6세의 확고한 영토라서 전장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야음을 틈타 동쪽으로 후퇴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생캉탱 동쪽의 소도시인 오리니를 점령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성채와 마을과 소도시들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에 필리프는 10월 17일 에드워드에게 야전으로 한판 붙자는 내용의 도전장을 보냈고, 에드워드는 이를 수락한 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에노 백국 국경지대로 후퇴했다. 10월 21일, 에드워드 3세와 헨리는 에노 백국 국경 근처에 있는 소도시 라 카벨을 점령한 뒤 도시와 북서쪽의 숲 사이의 경사진 장소에 진지를 세웠다.

1339년 10월 22일 프랑스군이 라 카펠에 도착했고, 양군은 곧바로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프랑스군이 회전에 응하지 않고 물러나면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도망쳤으므로 자신이 전투의 재판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뒤 안티베르펜으로 돌아갔다. 그 후 1340년 1월 26일 헨트 시에서 프랑스 국왕 '에두아르'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국왕 즉위를 기념하는 토너먼트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헨리는 1340년 3월 29일부터 4월 3일까지 의회에 참석해 에드워드 3세를 돕기 위해 전쟁세를 새로 부과하도록 투표했다. 그 해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 참전해 잉글랜드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그러나 그해 하반기에 플란데런 상인들로부터 빚독촉에 시달리던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빚을 꼭 갚겠다고 보증하면서, 헨리를 인질로 넘겼다. 헨리는 이듬해까지 인질로 남아있었고, 석방을 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자신의 친구를 그 꼴이 되게 만든 것에 미안한 감정이 있었던 에드워드 3세는 돌아온 그를 북부 지역의 부관으로 선임했다. 헨리는 1342년까지 록스버그에 머물면서 스코틀랜드를 견제했고, 1343년에는 플란데런 백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청과의 외교 협상에 참여했다.

2.3.2. 남부 프랑스에서의 맹활약

1345년, 1343년 1월 19일에 체결된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만료되자,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3개의 전선에서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은 분견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가스코뉴에서 활동하며, 에드워드 3세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은 플란데런 백국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3월, 헨리는 2,000명의 병력을 모집한 뒤 가스코뉴로 가서 추가 병력을 모집하기로 했다. 그의 부대는 5월 말 사우샘프턴에서 151척의 함대에 몸을 싣고 출항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몇 주 동안 플리머스 항에 대피했고, 5월 23일에 날이 개자 다시 출발해 7월 9일 보르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와 함께 프랑스군을 상대할 예정이었던 가스코뉴인들은 스태퍼드 백작 랄프의 지휘하에 먼저 행동을 개시해 6월 초 도르도뉴에 있는 몽트라발과 몽브레톤을 손쉽게 공략하고 보르도 남쪽의 랑곤을 포위 공격했다. 여기에 가스코뉴 귀족들이 조직한 소규모 민병대가 가스코뉴 주변 지역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3세의 주력군은 6월 29일 출항했다. 그들은 7월 22일까지 플란데런의 슬로이스 항에 정박하다가 재차 바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잉글랜드의 여러 항구로 흩어졌다. 그 후 병력을 재규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데다 왕과 의회가 앞으로의 계획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느라 시간을 더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재출항이 힘들어졌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내년에야 프랑스에 올 거라는 정보를 파악하자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병력을 파견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분견대를 궤멸시키려 했다.

이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헨리는 중장병 500명, 기병 500명, 잉글랜드 및 웨일스 출신 장궁병 1,000명과 함께 랑곤으로 진군하여 스태퍼드 백작과 합류했다. 그는 지금까지 소규모 요새에 대한 포위 공격에 치중했던 스태퍼드와는 달리 적군이 집결을 완료하기 전에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정찰병이 프랑스군이 베르주라크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곳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분쇄하고 도시를 공략하기로 했다. 보르도와 가론강으로 연결된 베르주라크를 장악한다면, 보르도의 안전이 확보되고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작전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중순, 헨리는 1,200명의 중장병, 1,500명의 장궁병, 2,800명의 가스코뉴 보병대를 이끌고 베르주라크로 진군했다. 당시 베르주라크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중장병 1,600명과 다수의 보병대가 있었다. 그들은 몽퀴(Montcuq) 마을과 베르주라크 시 사이의 도로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았는데, 그들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학자들은 베르주라크에 있다가 헨리의 유인책에 넘어가 도로로 쫓아갔다가 매복에 당했거나 몽퀴 마을을 포위 공격하다가 뒤늦게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던 중 도로상에서 급습당한 것 중 하나일 거라 추정한다.

헨리는 장궁병을 동원해 적군에 화살비를 퍼부은 뒤 기사들을 앞세워 돌격했다. 프랑스군은 갑작스러운 급습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베르주라크 시의 다리 남쪽 끝에 있는 생 마들렌 성당 교외 지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추격이 너무 가까워서 성당 문을 미처 닫지 못했고, 잉글랜드군은 다리를 향해 밀고 들어가서 양 끝을 장악한 뒤 다리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프랑스군을 가론 강둑으로 밀어붙여 모조리 사살했다. 그 후 베르주라크 시로 방향을 돌려서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오지 못한 프랑스군을 몰살시킨 뒤 성문에 불을 질러 손상을 입혔지만 당일에 공략하지는 못하고 생 마들렌에 진을 친 뒤 포획한 음식과 포도주를 즐겼다.

비록 당일에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베르주라크의 주요 강변 방어 시설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남은 방어시설은 약하고 구식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며칠 후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가스코뉴군은 짧은 공성 끝에 도시를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지휘를 받으며 페리괴로 퇴각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600명 이상의 프랑스 기사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많은 수가 포로로 잡혔으며,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에는 앙리 드 몽팅니와 다른 10명의 고위 귀족, 그리고 다수의 하급 귀족이 포함되었다. 헨리는 몸값과 전리품을 챙김으로써 34,000 파운드(2023년 기준 3500만 파운드)를 챙겼다. 이 수익은 그가 영지에서 확보하는 연간 수입의 약 4배였다고 한다. 잉글랜드-가스코뉴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했을 것이다.

헨리는 베르주라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2주 동안 주변 지역을 평정한 후 병사들을 휴식시킨 뒤 베르주라크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이 도주한 페리괴로 진격했다. 페리괴의 방어 시설은 낙후되었지만 그곳에 모인 프랑스군 병력이 잉글랜드군과 맞먹었기에 공성전은 불가능했다. 이에 페리괴를 봉쇄하고 도시로 향하는 주요 경로를 지키는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가스코뉴 전선이 위급해졌다는 급보를 전해듣고 노르망디 공작이자 후계자인 에게 병력을 규합하여 가스코뉴로 향햐게 했다. 여기에 루이 1세 드 푸아티에가 이끄는 남부 프랑스군이 페리괴로 진군하자, 헨리는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리보르네로 철수했다. 페리괴를 구조하는 데 성공한 뒤,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수비대가 주둔한 페리괴 인근의 요새들을 탈환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1345년 10월 초,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페리괴 남동쪽 요새인 오베르슈를 포위했다. 당시 오베르슈를 지키고 있던 브라반트 출신의 군인인 프랭크 반 할렌은 헨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오베르슈에서 헨리에게 가려던 전령이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투석기를 통해 오베르슈 성으로 발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전령은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헨리에게 도착했는데, 이때 헨리는 이미 400명의 중장병과 8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오베르슈로 향하고 있었다.

헨리는 펨브로크 백작 로렌스 헤이스팅스가 이끄는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올 기미가 없었다. 헨리는 몰랐지만, 당시 노르망디 공작 장 휘하의 9,000 ~ 10,000명으로 구성된 또다른 프랑스군을 이끌고 헨리의 잉글랜드군이 있는 곳과 40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10월 20일, 헨리는 더 이상 기다리면 프랑스군이 추가로 합류할 거라 여기고 오베르슈로 야간 행군했다. 그의 부대는 도르도뉴 강의 남쪽 지류인 오베르제르 강을 두 번 건넌 뒤 오베르슈에서 1.6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자리잡았다.

헨리는 언덕에 올라가 적진을 살펴봤다. 당시 프랑스군 일부는 오베르슈 북쪽에 작은 진지를 마련했고, 주력군은 성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숲이 우거진 지역을 소리없이 이동한 잉글랜드군은 10월 20일 수목한계선에 도착하자 그곳에 숙영지를 세운 뒤 병사들이 숙영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 적이 근처에 아군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펨브로크 백작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면서 빨리 합류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10월 21일 펨브로크 백작의 군대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헨리는 그날 아침이 끝날 무렵 전쟁 회의를 소집해 어찌할 지를 논의한 끝에, 비록 프랑스군이 7,000명이고 아군은 1200명이니 수적으로 매우 열세하지만 기습의 효과를 잃느니 지금 공격하기로 결의했다.그는 몸소 잉글랜드 정찰병들과 함께 숲에서 빠져나와서 프랑스군 본진에서 수백 야드 이내까지 접근했다. 프랑스군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자, 헨리는 궁수들에게 프랑스 진영의 서쪽 언덕에서 적진을 향해 사격하라고 명령했고, 기마병들에게 남쪽에서 진영으로 돌격하라고 지시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하자, 곤잠에 빠져 있던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무기나 갑옷을 챙기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적 궁수가 쏜 화살에 맞거나 돌격해오는 기마병들에게 사살되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내지르는 함성과 프랑스군 병사들의 비명은 오베르슈 성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이에 성내에 있던 중장병들이 출격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고, 궁수들은 성벽 위에서 적진을 향해 화살을 쐈다. 전면과 후면에서 협공을 받은 프랑스군은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허물어졌고, 북쪽 진영에 있던 프랑스인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급히 후퇴했다. 펨브로크 백작의 군대는 전투가 끝난지 며칠 후에 뒤늦게 도착했다. 헨리는 펨브로크 백작을 아래의 말로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펨브로크 사촌이여, 환영하오. 당신이 할 일은 시신에 성수를 뿌리는 것이오."

오베르슈 전투는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드 푸아티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부상이 악화되면서 얼마 안가 사망했다. 여기에 릴 백작, 7명의 자작, 3명의 남작,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조카 클레르몽, 배너렛 기사 12명, 툴루즈의 세네샬과 클레르몽의 세네샬, 그리고 수백 명의 기사들이 생포되었으며 그 외의 이름없는 병사들이 사살되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했을 것이다. 필리프 6세는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왕실 재무부에서 막대한 금액을 차출해야 했고, 헨리는 최소 5만 파운드에 달하는 몸값을 받아냈다.

오베르슈 인근에 있던 노르망디 공작은 아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그의 군대는 적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월했지만, 적군을 이길 거라는 희망을 접고 앙굴렘으로 철수한 뒤 1345년 11월에 군대를 해산했다. 그 바람에 헨리를 저지할 남부 프랑스군은 6개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헨리는 이 때를 틈타 몽셰귀르, 라 레올, 에귀옹 등 남부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공략해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및 남부 프랑스에 대한 지배력을 성공적으로 강화했다. 또다른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 사령관인 스태퍼드 백작 랄프는 가론강 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프랑스 남서부의 요충지인 에기용으로 진군했다. 주민들은 잉글랜드군이 접근해오자 수비대를 축출한 뒤 그들에게 성문을 열었다.

1346년 초, 노르망디 공작 장은 적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들어 오를레앙에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는 먼저 에기용을 탈환한 뒤 라 레울을 공략하고 뒤이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장 왕자의 지휘하에 아쟁에서 가론 계곡을 따라 행진하여 4월 1일 에기용에 도착했다. 스태퍼드 백작은 이에 맞서 300명의 중장병과 600명의 장궁병을 통해 요새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후 벌어진 에기용 공방전에서, 헨리는 군세가 압도적으로 많은 노르망디 공작의 프랑스군과 섣불리 맞붙지 않고 기론 강을 통해 에기용 요새 수비대에 물자와 증원군을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으나 스태퍼드 백작 랄프의 결사적인 항전에 가로막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56년 7월 초, 프랑스군 보급로를 경비하던 바하몽 성이 잉글랜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7월 말 아쟁의 세네샬인 로베르 드 우데토가 2,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탈환을 시도했지만, 가이야르 1세 드 듀퐁이 이끄는 수비대가 이를 격파하고 로베르를 생포했다. 이로 인해 보급로가 끊겨버리자, 프랑스군은 굶주렸고 수많은 말이 사료 부족으로 죽었으며, 이질은 갈수록 널리 퍼졌다. 이에 절망한 많은 장병들은 끊임없이 탈영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346년 7월 12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약탈 행진을 이어간 끝에 7월 26일 노르망디에서 루앙 다음으로 큰 도시인 캉을 점령하고 주민 수천명을 학살하고 200여 명의 기사와 향사들과 수많은 도시 유력자들을 생포했다.( 1차 캉 공방전)

필리프 6세는 아들 장에게 당장 에기용 포위를 중단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장은 에기용을 공략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며 거부했지만, 8월 12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32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1356년 8월 14일, 장은 헨리에게 지역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곤경을 사전에 파악한 헨리는 거부했다. 8월 20일, 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에기용 수비대를 비롯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들을 추적해 수많은 보급품과 공성 무기 및 말 등을 포획하고 장의 개인 수하물 일부를 입수했다. 프랑스군이 론 강 상류에 설치했던 소규모 요새들은 잉글랜드군에 공략되었다.

이후 장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아버지와 합세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남부 프랑스 일대가 무방비가 되자, 헨리는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가이야르 1세 드 듀퐁이 이끄는 앙주의 친잉글랜드 군대는 앙주와 포르생트마리(Port-Sainte-Marie)의 봉쇄를 시작하고 쿼리를 침공했다. 셍뜨-바제이으의 영주인 알렉상드르 드 코몽이 이끄는 가스코뉴 부대는 가론 강 남쪽과 서쪽의 가스코뉴 일대에 여전히 남아있는 프랑스군을 모조리 몰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헨리 본인은 1,000명의 멘앳암즈와 비슷한 숫자의 기병을 이끌고 북상하기로 했다. 가이야르가 이끄는 400명의 기병은 쿼리까지 80km 이상 침투하며 진군로 주변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고, 오베르뉴 지방 전역의 주민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각지로 달아났다. 한편 코몽의 군대는 바자스를 가로지르며 큰 손실 없이 수많은 프랑스 도시와 요새를 공략했다. 바자스 자체는 한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했다. 이리하여 가스코뉴 전역에서 프랑스군의 존재는 사실상 사라졌다.

헨리는 가스코뉴에서 북쪽으로 260km 떨어져 있으며 프랑스 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부유한 지방 수도인 푸아티에를 목표로 삼았다. 그의 군대는 강행군을 이어간 끝에 8일 만에 130km를 행진하여 샤토네프-쉬르-샤랑트에 도착해 그곳을 단숨에 점령했다. 이후 북서쪽으로 65km 떨어진 생장달젤리에 억류된 잉글랜드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진군하여 시장 기욤 드 리옹의 항복을 받아낸 뒤 8일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 후 일부 수비대를 남겨둔 뒤 하루에 32km를 이동하면서 생메상, 멜레, 뤼지냥 등 여러 도시를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했다. 니오르 시는 입성을 거부했지만, 그가 그곳을 지나쳐서 북상했을 때 후미를 공격하거나 보급로를 노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10월 3일 저녁 푸아티에에 도착한 헨리는 즉각 공격했지만 지역 귀족들이 조직한 민병대에 격퇴되었다. 그는 도시의 방어 상태를 살펴보다가 마을 주민들이 인근 물레방아로 쉽게 접근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의도적으로 허물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일부 병사들에게 물레방아로 접근해서 숨어있게 했다. 이들은 10월 4일 아침 허물어진 성벽을 넘어 도시로 진입해 저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살육했다. 결국 푸아티에 귀족과 시민들은 백기를 들었고, 도시는 8일 동안 약탈되었다. 이후 대다수 주민들은 추방되었고, 몸값을 지불할 만큼 부유해 보이는 이들은 가스코뉴로 끌려갔다. 헨리는 뒤이어 푸아티에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몽트뢰유보냉을 습격해 프랑스 왕실이 관할하는 화폐 주조소를 약탈하고 모든 수비대를 사살했다.

당시 에드워드 3세가 칼레를 포위한 것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있던 필리프 6세는 푸아티에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헨리가 파리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그를 먼저 격퇴하려 했다. 하지만 헨리는 더 이상 북상하지 않기로 하고, 방어 상태가 형편없는 푸아티에를 방치하고 성벽 상태가 양호한 푸아투에 소규모 병력을 남겨둔 뒤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후 로슈포르의 주요 항구와 올레롱 섬의 요새를 포함한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가스코뉴 인근의 주변 마을과 요새들을 추가로 점거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10월 31일 가스코뉴의 주도인 보르도에 입성하여 작전을 마무리 한 뒤 1347년 1월 14일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4.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1337년 3월 에드워드 3세로부터 아버지의 칭호 중 하나인 더비 백작을 수여받았고, 1,000마르크의 왕실 연금을 받았으며, 수익성이 좋은 여러 영지를 제공받았다. 1345년 9월 22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랭커스터 백작에 등극했다. 1347년 칼레 공방전에 참여한 그는 칼레가 공략된 뒤 에드워드 3세로부터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링컨 여백작 엘리스 드 보몽이 사망했고, 그는 엘리스로부터 볼링브로크 성을 포함한 링컨 백작령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351년, 에드워드 3세는 랭커스터 공작위를 창설하고, 그동안 수많은 승리를 왕국에 안겨준 것에 보답하고자 헨리를 초대 랭커스터 공작에 선임했다. '공작(Duke)'라는 작위는 잉글랜드 내에서는 1337년 흑태자 에드워드를 위해 만들어진 '콘월 공작'만 있었는데,[2] 그가 두번째로 공작이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랭커스터 공작은 랭커셔 카운티를 독립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에드워드 3세의 헨리에 대한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헨리에게 남성 상속자가 없기 때문에, 그가 죽으면 왕실에 도로 귀속될 게 분명하므로 에드워드 3세가 이토록 큰 권한을 부여할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2.5. 1350년대의 군사 활동

1350년, 헨리는 윈첼시 해전에 참여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때 그는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곤트의 존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1351년 고대 프로이센에 대한 십자군에 참여한 그는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 4세와 심하게 다툰 끝에 파리에서 결투를 벌이려 했지만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1353-1354년 긴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으며,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와의 협상을 주도해 그를 잉글랜드 진영에 확실히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두 협상 모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56년 카를로스 2세가 장 2세에게 체포된 뒤 카를로스 2세의 추종자들이 노르망디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에드워드 3세는 헨리에게 이들을 도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헨리는 프랑스군이 보위한 나바라 요새인 퐁 오데메르, 브레퇴유, 틸리에르 쉬르 아브르를 구원하는 데 초점을 뒀다. 5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그의 부대는 코탕탱 반도 북동쪽의 생바스트라후그에 상륙했다. 이후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필리프가 필리프가 지휘하는 200명의 노르만 병사들과 합류했고,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브르타뉴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800명의 추가 병력이 몽트부르에서 가세했다.

이후 헨리는 여러 요새를 우회하고 시골들을 약탈하면서 4일만에 130km를 질주한 끝에 퐁 오데메르에 이르렀고, 프랑스군은 헨리가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포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헨리는 프랑스군이 남긴 물자와 무기로 재무장한 뒤 100명의 병력을 퐁 오데메르 요새에 추가해 수비를 강화하게 한 후 이틀 뒤 출발했다. 사흘 후 브레퇴유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군이 또다시 전투를 회피하고 도주한 덕분에 브레퇴유 구원에 성공했다.

한편, 장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샤르트르를 떠나 망트에 이르렀다. 헨리가 베르퇴유로 가던 중 디브 강을 가로지르는 요새화된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자, 장 2세는 그가 루앙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루앙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헨리는 루앙이 아닌 남쪽으로 이동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장 2세는 방향을 돌려 헨리를 추격했다. 브레퇴유에서 휴식을 취하던 헨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10km 떨어진 베르누이로 진군해 그곳을 약탈하고 몸값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을 생포했다. 가장 부유한 시민들은 가족과 귀중품을 가지고 성채에서 농성했지만, 7월 6일에 모든 재산을 내놓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약속받은 뒤 항복했고, 성채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던 중 장 2세가 10배나 많은 대군을 이끌고 베르누이에서 11km 떨어진 콩데쉬르이통에 주둔했다는 첩보를 접한 헨리는 베르뇌유 외곽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했다. 프랑스군이 콩데쉬르이통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낙오병들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 헨리는 그들과 3~5km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했다. 장 2세는 헨리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헨리는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는 애매한 답을 했다. 그 후 헨리는 밤에 숙영지를 철거하고 45km 떨어진 아르장탕까지 강행군했다. 장 2세는 이들을 추격하는 대신 브레퇴유를 재차 포위하기로 했다.( 브레퇴유 공방전) 한편 헨리의 구원을 받지 못한 틸리에르 쉬르 아브르도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헨리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래 22일 동안 530km를 질주하면서 포위된 3곳 중 2곳을 별다른 전투 없이 구원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하는 위업을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명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356년 8월, 헨리는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르타뉴 동부에서 출발해 가스타뉴에서 북상 중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합세하고자 했다. 두 영국군은 투르 인근에서 만나기로 계획했지만, 루아르 강의 수위가 높았던 데다 프랑스군이 강에 있는 다리를 파괴하거나 요새화했기 때문에, 헨리는 루아르 강을 좀처럼 건너지 못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브르타뉴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에드워드 왕자는 투르에 도착해서 헨리가 오기를 헛되이 기다리다가, 장 2세의 대군이 밀려오는 걸 알게 되자 급히 철수했으나 푸아티에에서 따라잡혔다. 에드워드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장 2세는 지금이 적을 섬멸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묵살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참패했고, 장 2세는 생포되었다.

장 2세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의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잉글랜드군에 투항했다. 1341년부터 이때까지 10여 년간 공작위 계승을 놓고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브르타뉴에서도 귀순 행렬이 이어졌다. 하지만 몇몇 도시들은 여전히 프랑스 블루아 왕조에 충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이었다. 1356년 10월 3일, 헨리는 브르타뉴 내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렌을 침공했다.( 렌 공방전) 당시 그가 거느린 병력 규모는 불분명하나, 학자들은 당대 연대기 기록들을 종합해 1,500 ~ 4,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욤 드 페뉴와 베르트랑 드 생페른이 도시 방어를 지휘했다고 전해지며, 수비대 규모는 알려진 바 없으나 잉글랜드군보다 약간 많았다고 한다. 헨리는 당장 공격하는 것은 승산이 적다고 보고, 도시를 에워싸서 굶겨죽이기로 했다.

1357년 2월, 렌의 일부 주민들은 지하에서 땅을 파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성벽 아래에 터널을 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페뉴는 성벽 근처의 집 주인들에게 금속 공이 들어있는 구리 대야를 걸어두도록 명령했다. 이후 어느 곳에서 금속 공이 구리 대야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페뉴는 그곳으로 달려간 뒤 지하에서 땅굴을 파고 있던 적병을 쳐 죽이고 땅굴을 지탱하기 위해 설치된 목조 벽에 불을 질렀다. 알랭 부샤르는 <브르타뉴 연대기>에서 잉글랜드군이 땅굴을 파던 지점 위의 건물은 생 소뵈흐 성당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성당 예배당에 있던 성모상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프랑스군에게 적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르켜줬다는 전설이 돌았고, 이 동상에 대한 숭배 의식이 브르타뉴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

헨리는 땅굴을 파는 시도가 실패하자 적군이 식량난에 시달리는 점을 이용하기로 하고, 모르델레 성문 앞에서 돼지 떼를 잔뜩 풀어서 먹이를 먹였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돼지를 먹일 정도로 식량이 남아도니 어서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다. 페뉴는 이에 대응해 성문 기둥에 암돼지 한 마리를 매달아뒀다. 잉글랜드군이 잔뜩 풀어놓은 돼지들은 기둥에 매달린 돼지의 울음을 듣고 이에 호기심을 품은 나머지 잉글랜드 병사들이 막기 전에 성으로 달려들었다. 수비대는 이 황당한 상황에 얼이 빠져 있는 잉글랜드군을 향해 이렇게 조롱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이제 너희 돼지를 사육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삯을 갚아라!"

한편 브르타뉴에서 민병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고 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렌을 구하기로 했다. 그는 장병들을 독일인 용병 복장으로 갈아입힌 뒤 식량 수송 마차들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에 접근했다. 잉글랜드 장병들은 그들이 아군과 합세하러 온 용병들이라 여겨 경계하지 않았고, 그들은 잉글랜드 진영을 그대로 통과해 렌 시에 식량을 전달했다. 이후 게클랭은 잉글랜드 진영을 야간에 습격하고 반격이 오기 전에 철수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한 전투에서 잉글랜드 기사 윌리엄 밤브로우(William Bamborough)가 일기토를 신청하자, 베르트랑은 바로 응전해 그를 처단했다.

이렇듯 렌 공략이 뜻대로 되지 않고 베르트랑이 유격전으로 괴롭히는 상황에 시달리던 헨리는 1357년 7월 에드워드 3세로부터 장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으니 렌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헨리는 10만 리브르를 보상금으로 받고 렌 시가 명목상으로 항복하면서 잠깐동안 성벽에 자신의 깃발을 세우는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제안했고, 렌 수비대는 이를 받아들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연이어 안겼던 헨리를 물리친 게클랭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장차 프랑스를 구할 영웅으로 거듭났다.

2.6. 사망

1358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헨리는 1359년 에드워드 3세의 마지막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때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360년 5월, 헨리는 브레티니 평화 협약을 성사시킨 주요 잉글랜드 협상가 중 한 명이었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확실하게 종식되기를 진심으로 원했으며,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조약을 받아들이라고 간곡히 설득했다고 한다. 그해 11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1361년 초 중병에 걸렸고, 1361년 3월 23일 레스터 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 사망 원인은 불확실하나, 학자들은 이 시기에 잉글랜드를 재강타한 중세 흑사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의 유해는 뉴어크에 있는 성모 수태고지 교회에 안장되었다.

헨리는 보몽 남작 헨리 드 보몽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해 두딸 모드와 블랜치를 낳았다. 모드는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백작 빌헬름 1세의 부인이 되었고, 블랜치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인 곤트의 존과 결혼했다. 곤트의 존은 아내를 통해 헨리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랭커스터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거룩한 의사들의 서(Le Livre de Seyntz Medicines)

헨리는 1354년경 친구 또는 고해신부의 요청으로 세인츠 의약품의 서를 집필했다. 앵글로-노르만 어로 집필된 이 저서는 종교와 경건 문제에 관한 그의 생각이 깊게 담겨 있으며, 그가 활동하던 시대상도 많이 반영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7개의 상처를 입었으며 책을 집필하는 시점에서는 통풍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입은 7개 상처는 7가지 대죄를 상징한다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먼저, 그는 젊은 시절에 자신이 교만했다고 밝혔다.
내가 젊고 민첩했을 때, 나는 아름다운 외모, 몸매, 고귀한 혈통, 그리고 주님이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에게 주신 모든 자질과 은사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부, 보석, 옷, 갑옷 뿐만 아니라 춤 실력도 자랑스러워했으며 칭찬받기를 좋아했다.

그는 아침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어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며 게으름의 죄를 고백했고, 좋은 음식과 좋은 음료, 특히 독한 와인을 탐했다며 폭식의 죄도 인정했다. 또한 자신이 "음욕에 찬 키스"를 좋아한다며 정욕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했다. 이렇듯 여러 죄를 진솔하게 적은 그는 신학적 상징의 관점에서 다양한 의학적 치료법을 설명하고, 독자들에게 더 큰 도덕성을 가질 것을 권고했다.


[1] 루이 8세의 손녀로, 나바라 왕국 헨리케 1세와 결혼해 호아나 1세를 낳고 헨리케 1세 사후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와 재혼해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를 낳았다. [2] 노르만 출신의 초기 잉글랜드 국왕들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임했지만, 이는 프랑스 국왕에게 수여받아서 프랑스 내에서나 통용되는 칭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