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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01:43:38

루이 1세 드 푸아티에

성명 루이 1세 드 푸아티에
Louis Ier de Poitiers
생몰년도 미상 ~ 1345년 10월 21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사망지 프랑스 왕국 오베르슈
아버지 아이마르 5세 드 발렌티노아
어머니 보의 시빌
형제 폴리, 마르그리트, 기욤, 오통
배우자 마르그리트 드 베르지
자녀 아이마르 6세, 마르그리트, 엘리노어
직위 발렌티노아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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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발렌티노아 백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오베르슈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발렌티노아 백작 아이마르 5세와 아벨리노 백작 레몽의 딸인 시빌 드 보의 아들이다. 형제자매로 폴리[1], 마르그리트[2], 기욤[3], 오통[?]이 있었다. 1345년 8월 중순, 그로스몬트의 헨리 베르주라크 전투에서 베르주라크에 집결하고 있던 남부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때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페리괴로 도주했고, 헨리는 페리괴를 봉쇄하고 도시로 향하는 주요 경로를 지키는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했다. 이에 그는 병력을 모집한 뒤 페리괴로 진격했고, 헨리는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리보르네로 철수했다.

루이는 페리괴를 구조하는 데 성공한 뒤 잉글랜드-가스코뉴 수비대가 주둔한 페리괴 인근의 요새들을 탈환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1345년 10월 초, 그는 페리괴 남동쪽 요새인 오베르슈를 포위했다. 그는 주력군을 성 남쪽에 배치했고, 소규모 부대를 오베르슈 북쪽에 별도로 진영을 세워서 북쪽에서 적의 원군이 오는 걸 저지하게 했다. 당시 오베르슈를 지키고 있던 브라반트 출신의 군인인 프랭크 반 할렌은 헨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오베르슈에서 헨리에게 가려던 전령이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투석기를 통해 오베르슈 성으로 발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전령은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헨리에게 도착했는데, 이때 헨리는 이미 400명의 중장병과 8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오베르슈로 향하고 있었다.

1345년 10월 21일,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1,2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숲을 통해 적진에서 수백 야드 이내까지 접근했다. 프랑스군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자, 헨리는 궁수들에게 프랑스 진영의 서쪽 언덕에서 적진을 향해 사격하라고 명령했고, 기마병들에게 남쪽에서 진영으로 돌격하라고 지시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하자, 곤잠에 빠져 있던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무기나 갑옷을 챙기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적 궁수가 쏜 화살에 맞거나 돌격해오는 기마병들에게 사살되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내지르는 함성과 프랑스군 병사들의 비명은 오베르슈 성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이에 성내에 있던 중장병들이 출격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고, 궁수들은 성벽 위에서 적진을 향해 화살을 쐈다. 전면과 후면에서 협공을 받은 프랑스군은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허물어졌고, 북쪽 진영에 있던 프랑스인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급히 후퇴했다.

루이 1세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부상이 악화되면서 얼마 안 가 사망했다. 여기에 릴 백작, 7명의 자작, 3명의 남작,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조카 클레르몽, 배너렛 기사 12명, 툴루즈의 세네샬과 클레르몽의 세네샬, 그리고 수백 명의 기사들이 생포되었으며 그 외의 이름없는 병사들이 사살되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했을 것이다. 필리프 6세는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왕실 재무부에서 막대한 금액을 차출해야 했고, 헨리는 최소 5만 파운드에 달하는 몸값을 받아냈다. 한편 그로스몬트의 헨리를 물리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남진하던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후계자 은 오베르슈 전투 소식을 듣고 낙담해 앙굴렘으로 철수한 뒤 1345년 11월에 군대를 해산했다.

3. 가족



[1] ? ~ ?, 담마르탱 백작 르노 3세와 초혼, 폴리냐크 자작 기욤 아르망과 재혼 [2] ? ~ ?, 보몽 자작 장 2세의 부인 [3] 랑그레스 주교 [?] ~ 1352, 베르됭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