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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 드 몽포르

<colbgcolor=#C2D0DE><colcolor=#000000> 제6대 레스터 백작
시몽 5세 드 몽포르
Simon V de Montfort, 6th Earl of Leicester
파일:Simon_Leicester.jpg
이름 시몽 드 몽포르
(Simon de Montfort)
출생 1208년
프랑스 왕국 몽포르라모리
사망 1265년 8월 4일 (향년 56-57세)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셔 이브샴
배우자 잉글랜드의 엘리너 (1238년 결혼)
자녀 앙리, 시몽, 아모리, 기, 리차드, 엘레오노르
아버지 제5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어머니 몽모랑시의 알리스
형제 아모리, 기, 페트로니

1. 개요2. 생애
2.1. 부친(5대 레스터 백작)2.2. 제6대 레스터 백작2.3. 헨리 3세와의 대립2.4. 옥스퍼드 조례 (1258년)2.5. 헨리의 반격 (1261년)2.6. 반란의 지도자 (1263년)
2.6.1. 루이스 전투 (1264년)
2.7. 잉글랜드 의회 개혁 (1265년)2.8. 왕당파의 반격
2.8.1. 이브셤 전투와 전사
3.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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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랜태저넷 왕조 시기 잉글랜드 프랑스 귀족. 헨리 3세 마그나 카르타의 후신인 옥스퍼드 조례(Provisions of Oxford)를 제대로 지키지 않자 귀족(Baron)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1264년의 루이스 전투에서 국왕군을 격파하고 왕을 포로로 잡았다. 1265년 1월, 그는 영국 최초의 의회인 모범의회를 소집하였으나 그해 8월에 벌어진 이브셤 전투에서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의 군대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비록 1년 남짓한 기간만 집권하였지만, 그는 근대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다. 여담으로 시몽은 헨리 3세의 매부였다.

2. 생애

2.1. 부친(5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는 잉글랜드 중부의 도시인 레스터의 5대 백작(Earl) 시몽 4세 드 몽포르의 3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가문은 10세기 후반 몽포르 영주 작위를 차지한 이래 노르망디와 파리의 중간에 끼어있었던 몽포르 지방의 특성상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파워게임에서 아슬아슬하게 편을 바꾸며 살아남았다. 그러던 중, 시몽의 고조할아버지인 아모리 3세가 노르망디에 속했던 에브뢰 백작령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2] 헨리 1세와 전쟁을 벌인 것을 계기로 에브뢰 백작으로 취임,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사이에서 이중 봉신이 된다. 몽포르 가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할상속으로 영지를 쪼개 상속해 주었다. 시몽의 증조할아버지인 시몽 3세 사후 분할상속으로 장남이 에브뢰를, 차남이 몽포르를 상속받으며 이중봉신 상태가 해소되나 싶었지만, 에브뢰 백작위를 가져간 시몽의 큰할아버지 아모리 3세의 아들 아모리 4세가 존왕에게 영지를 몰수당한 후[3] 시몽의 아버지인 시몽 4세가 모계로부터 레스터 백작위를 상속받으면서 다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중봉신 상태는 시몽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형제들 사이에 분할상속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해결된다.

시몽의 아버지 역시 대단한 인물이었다. 5대 에브뢰 백작이던 시몽의 아버지는 4차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이후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를 절멸시킨 알비주아 십자군의 지휘관으로서 활약, 서유럽 세계에 이름을 날린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비주아 십자군 후반기에 일어난 툴루즈 포위전에서 전사하였다.

2.2. 제6대 레스터 백작

포위전 중 차남인 기도 전사했고 장남인 아모리는 프랑스에 남고 시몽은 아버지의 레스터 백작위를 이으러 찾으러 떠났다. 헨리 3세는 그를 레스터 백작으로 인정하길 한참동안 거부했지만 그는 사실상 그러거나 말거나 레스터 백작으로 통치했으며, 결국 1239년에야 공식적으로 작위 계승을 승인받았다. 아버지를 따라 유년기를 프랑스에서 보낸 시몽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당시 잉글랜드 귀족들도 마찬가지여서 괜찮았다고. 영주가 된 시몽은 영내의 유대인들을 추방하였고 1238년에는 헨리 3세의 누이이자 존 왕의 딸이며 윌리엄 마셜의 야째 아들 윌리엄 마셜(...)의 과부인 엘레노어와 결혼하였다.[4] 로마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시몽은 1239년에 공식적으로 레스터 백작이 되었고 왕의 조언자이자 갓 태어난 왕자 에드워드[5] 대부가 되었다. 훗날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2.3. 헨리 3세와의 대립

왕실과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나 싶던 시몽은 사보이아 백국 측에 처남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의 이름으로 빚을 진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에[6] 분노한 헨리는 시몽을 런던 탑[7]으로 불러 크게 화를 내며 협박하였고[8], 1239년 말에 시몽 부부는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결혼 1년 만의 일이다. 콩가루 집안

프랑스에서 도피 생활을 한 지 1년 만인 1240년에 시몽은 로마 방문 시에 교황과 약속한 대로 십자군 전쟁에 참가, 귀족 십자군(Barons' Crusade)의 일원으로 레반트로 떠났다. 그는 아이유브 왕조와의 협상을 통해 포로로 잡혀 있던 형 아모리를 보석금을 내고 석방시켜 주었다. 한편, 당시 헨리 3세는 양아버지[9]인 위그가 푸아티에에서 반프랑스 봉기를 일으키자 그를 명분으로 존 왕 때에 상실한 고토 회복 원정에 나섰다. (1242년)

1241년 말에 서유럽으로 돌아온 시몽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헨리와 화해하고 잉글랜드 편으로 참가하였으나 반란군-잉글랜드 연합군은 루이 9세의 프랑스군에게 패하였고, 툴루즈에서 호응하여 봉기한 레몽 7세 또한 알비주아 십자군에 패하였다. 결국 1243년에 이자벨 & 위그 10세와 레몽 7세가 항복, 헨리 3세가 배상금으로 8만 에퀴를 바치며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루이 9세 7차 십자군을 준비하였다.

시몽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헨리[10]에게 10세기 초의 샤를 3세[11]처럼 유폐되어야 한다고 독설을 퍼붓고는 루이를 따라 십자군 원정을 떠나버렸다. 다만 시몽은 헨리가 용서해 주어 원정에서 돌아와 가스코뉴의 공작이 되었는데 자치 도시들을 탄압하다가 주민들이 헨리 3세에게 항의하여 헨리도 묵과할 수 없어 결국 해임되었다. (1252년)

2.4. 옥스퍼드 조례 (1258년)

1254년, 시몽은 헨리와 다시 화해하였고 국정 운영에서 서로 협조했다. 하지만 헨리가 혼란에 빠진 시칠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차지하려 많은 돈을 쏟아붓고도 실패하자 시몽은 재차 의회에 대한 헨리의 세금 요구에 반발하였다. 1258년에 봉기한 귀족들은 그해의 옥스퍼드 조례와 이듬해의 윈체스터 조례를 통해 24인의 위원회를 결성, 국왕이 재정적 측면에서 의회의 감시를 받게 하였다. 한편, 헨리는 1259년의 파리조약에서 가스코뉴를 유지하는 대신 선조들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서약하였다.

2.5. 헨리의 반격 (1261년)

1260년 4월, 파리에서 돌아온 헨리와 시몽 간의 군사적 충돌이 임박하였는데 왕제인 리처드의 중재로 겨우 무마되기도 하였다. 이후 헨리는 옥스퍼드 조례에 순응하며 귀족들을 잠재웠고 오히려 시몽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였다. 페이크다 이것들아 헨리는 몰래 로마 교황인 우르바노 4세와의 협상을 통해 옥스포드 조례의 무효성을 주장하는 한편 용병을 구하는 등 귀족들을 족칠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특히 1261년 6월에, 헨리는 교황청이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화하였다고 선포하여, 시몽과 귀족들에게 충격과 파문의 공포를 주었다. 그리고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귀족들 수십명이 숙청되었고 24인 위원회에 의해 압류된 국왕령 성채들도 헨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용병대들이 설치자 귀족들도 다시 왕 앞에 무릎을 꿇었고, 결국 시몽은 그해 말에 아내 엘레노어와 함께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2.6. 반란의 지도자 (1263년)

귀족들을 억누른 헨리 3세는 유화 정책을 펴나 싶더니 다시 시칠리아에 집착하였고 징하다 웨일스 인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국왕과 귀족들을 조율하던 원로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마저 사망하였다. (1262년)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의 대표 글로스터(Gloucester)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12]는 강경파였고 이 기류를 탐지한 교황이 태도를 바꿔 옥스퍼드 조례 무효령을 철회하자 귀족들은 재차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1263년 4월에 시몽이 귀국하여 옥스퍼드에서 25인위원회를 열어 의회파 귀족들을 소집하였다. 1263년 가을에 이미 국왕과 귀족측의 군대가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시몽의 군대는 런던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존 왕 때에 일어난 제1차 남작 전쟁(1215~1217년)에 이어 그 아들인 헨리 3세 대에 제2차 남작 전쟁(1263~1267년)이 일어난 것이다.

헨리는 진압하려했으나 헨리의 수탈에 불만이 많았던 런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 부부를 붙잡아 런던 탑에 가두면서 시몽의 반군은 런던에 귀환한다. 시몽은 국왕을 유폐하고 헨리의 이름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러던 찰나에 헨리 3세는 가족과 함께 도시를 탈출하였고 주교들을 공갈설득하여 다시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화시켰다. (1264년 1월) 이에 흔들린 일부 귀족들은 헨리에 귀부하였으나 시몽이 이끄는 급진파는 그대로 국왕군과 싸우기로 하였다.

2.6.1. 루이스 전투 (1264년)

1264년 봄, 왕당파는 노스햄프턴을 함락시켰고 의회파는 켄트의 왕당파 요새인 로체스터 함락에 실패하였다. 이에 기세를 얻은 헨리 3세의 국왕군은 런던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이에 귀족들의 반란군도 남하하여 5월 14일에 서식스 평원에서 마주쳤다. 루이스 전투라고 불리는 이 회전에서, 초반에는 수적 우위를 앞세운[13] 에드워드 왕자의 국왕군이 선전하였으나 그가 도주하는 반란군을 추격하느라 주력인 기병대를 이끌고 전선을 이탈하는 바람에 숨겨둔 시몽의 반란군 예비대의 공격으로 헨리의 국왕군이 포위되었다. 이를 알게 된 에드워드가 놀라서 돌아왔으나 매복에 걸려 포로가 되었으며 사기가 떨어진 국왕군 병력이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국왕군은 사상자 2700명을 내며 참패한다. 이에 헨리는 시몽과 협상하게 되었다. 이 루이스 협약에서 헨리는 옥스퍼드 조례를 재확인하였고 사실상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 시몽 드 몽포르가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2.7. 잉글랜드 의회 개혁 (1265년)

1264년, 시몽은 대자문 회의를 통해 9명으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가 통치의 실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이때는 고위급 성직자와 귀족들이 국사를 논의한 경우였다. 왕이 없는 나라를 귀족 과두제 체제로 통치할 수밖에 없었으나, 여전히 헨리 3세의 지지자들의 존재와 일부 개혁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다는 잠재적 위협이 있었다.

이 위협을 잠재우기 위해 다음해 1265년에 대자문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모인 회의의 명칭이 '팔리먼트(Parliament)'였는데 '논의한다'라는 뜻이었다. 이 의회는 120명의 성직자와 23명의 귀족 대표 이외에도 각 샤이어(Shire), 즉 백작령들에서 선출된 2명의 기사 대표와 각 자치도시(town)에서 선출된 2명의 시민 대표가 참여했다. 이전 버전에는 이것이 최초의 잉글랜드 의회라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시몽이 소집한 의회는 최초의 잉글랜드 의회가 아니다. 다만, 이전까지는 성직자와 귀족, 기사들만이 소집되던 것을 시민들과 부르주아 계급이 주로 거주하는 자치도시에 헌장을 뿌려 의회 의석을 배당해준 것이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자치도시에 헌장을 뿌리는 관행은 이후로도 쭉 이어져, 후대의 잉글랜드 국왕들은 도시들에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서 각 백작이 통제하는 영역을 줄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비록 실질적인 국사는 몇몇 고위층에서 행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문위원 정도의 자격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의회와는 거리가 있지만, 의회는 왕권에 대항한 귀족들의 권한을 상징하였고, 훗날 시몽 드 몽포르 의회라 불렸다.

2.8. 왕당파의 반격

1265년 5월, 왕자 에드워드는 런던의 감금지에서 탈출하였고 서쪽의 웨일스와의 변경지대에 위치한[14]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몽의 동맹이자 1263년의 봉기 시에 귀족들의 대표였던 글로스터(Gloucester)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가 점점 커지는 시몽의 권력을 시기하여 왕당파로 전향해 버렸다.[15] 한편 시몽은 북부 웨일스의 지배자 리웰린에게서 지원받은 보병을 포함하여 군대를 편성했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과 시민들은 그가 외세의 간섭을 자청한 것이라고 여겨 지지를 철회했다. 1265년 6월 29일, 글로스터의 시몽 군대를 격파한 에드워드의 왕당파는 시몽의 본거지인 레스터를 향해 북진하였다. 이에 시몽은 런던에 있던 아들 시몽[16]에게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게 하였는데, 아들 시몽이 늑장을 부렸다.

반면에 에드워드는 귀족들을 규합하여 매우 빠르게 진군하였고, 글로스터와 레스터 사이에 있는 코번트리[17]에 도달하였다. 그곳에는 시몽 측의 요새가 있어 아버지 시몽도 하는 수 없이 홀로 출정하여 왕당파와 대치하였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수적 우위를 이용하여 시몽의 군대를 격파하고 남하하였는데,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깃발들을 내세워 (지원군으로 착각한) 시몽 측의 요새들에 무혈 입성하고 속은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페이크닷 그리고 에드워드는 런던-레스터 사이의 강들을 건너야 했던 아들 시몽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다리들을 파괴하여 시몽 부자의 군세가 합치는 것을 지연시켰다.

2.8.1. 이브셤 전투와 전사

코번트리에서 남쪽으로 30여 km 떨어진 이브셤에서 에드워드와 시몽의 군대는 대치하였다. 1265년 8월 4일 왕당파는 이때 1만의 병력으로 수적우위를 가졌고 고지대를 선점하고 있었다. 반면에 시몽의 군대는 5천 명으로 왕당파에게 불리한 터라 시몽은 적진의 가운데를 집중 공격하여 적을 둘로 쪼개려는 작전을 세웠다. 전술 자체는 정말 좋았다 하지만 전투 초반에 리웰린이 보냈던 웨일스 보병대가 전장을 이탈하였고, 2배나 되는 왕당파 군대는 시몽 군대를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여러 시몽 휘하의 귀족들이 항복을 제안하였으나 1년 전의 수모를 기억하는 에드워드와 왕당파는 자비를 보이지 않아 도주한 1천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인 4천 명이 살해되었다. 혼전의 와중에 시몽 역시 전사하였고, 그 시체는 머리, 손, 발, 고환이 잘려져서 시몽의 적이었던 왕당파들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그리고 시몽의 장남 앙리 역시 전사하였고, 시몽이 죽은 후에야 도착한 차남 시몽은 도주하여 동생 기와 함께 잉글랜드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하였다.[18] 한편, 그해 9월에 윈체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반란에 조금이라도 연루되었던 귀족들은 전부 작위와 영지, 세습권을 몰수당하였다. 시몽이 제시했던 입헌군주제는 13세기의 상황에 맞지 않았고 이후 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의 카리스마에 잉글랜드 왕권은 오히려 전보다 강해진다.

3. 영향

몽포르의 천하는 1년 밖에 가지 않았지만, 그는 의회민주주의의 대부로 받아들여진다. 영미권에서 평가가 좋으며[19] 미국 의회 건물에 그의 흉상이 있을 정도이다. 나폴레옹 역시 몽포르를 "가장 위대한 영국인 중 하나"라고 격찬했다. 다만 유대인에 의한 영국인들의 채무를 탕감한답시고 곳곳에서의 유대인 학살을 방조한 점은 두고두고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남아있다.

잉글랜드는 원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였지만 몽포르 이후로는 국왕끼리의 주종 관계만 유지할 뿐 완전히 별개의 역사를 걷게 된다.

[1] 시몽과 그의 아버지는 동명이인이다. [2] 에브뢰 백작 윌리엄이 후계자 없이 죽었는데, 아모리 3세가 그의 조카였다. 그런데 헨리 1세는 후계자가 없으므로 작위를 몰수한다면서 아모리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참고로 이 아모리 4세는 이후 어머니로부터 글로스터 백작위를 상속했다. [4] 재미있게도 헨리 3세의 왕비 이름도 엘레노어였다. 그녀는 프로방스 백작의 딸이었다. [5] 후에 시몽과 대립하고, 그를 전사시킨 에드워드 1세다. [6] 그러나 시몽 입장에서는 전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었다. 헨리 3세가 시몽과 결혼한 여동생의 몫으로 줘야 할 지참금을 자기가 보관(이라고 쓰고 삥땅이라고 읽는)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몽은 헨리 이름으로 돈을 빌리면 헨리가 아직 미지급된 지참금에서 지불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물론 헨리는 그 지참금을 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7] 참고로 이 감옥 요새를 하얗게 칠하게 한 사람이 바로 헨리 3세이다. [8] 헨리는 플랜태저넷 혈통답게 화를 내며 시몽에게 '네가 내 누이를 유혹했지! 그래서 관대하게도 내가 결혼시켜 줬는데 이게 뭐냐! 가둬 버리겠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헨리 3세가 이렇게 크게 화가난 이유는 시몽이 멋대로 국왕의 이름으로 빚을 진 것이 국왕에게 빚을 떠넘기는 행위라서 반역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9] 헨리의 어머니인 앙굴렘의 이자벨은 1217년에 존 왕이 죽자 1220년에 뤼지냥 가문[20]의 라마르셰 백작 위그 10세와 결혼하였다. 이자벨은 동시에 앙굴렘 여백작이었다. [10] 중간에 프랑스군에게 포위되자 동생보고 협상하라 하고 그 틈에 도망가는 추태를 보였다. [11] 서프랑크 왕국의 군주. 노르망디 공국을 세워 노르만인들을 정착시켰으나 한 여자에 푹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자 923년에 폐위되었고 파리 백작이자 왕이었던 오도의 동생 로베르가 즉위하였다. [12] 리처드 드 클레어의 아들이다. [13] 이브셤 전투처럼 국왕군은 1만, 시몽의 반란군은 5천으로 국왕군이 2배 정도 더 많았다. [14] 일명 '웨일스 변경백령'이라고도 하는데, 웨일스 동부 및 남부 지역과 잉글랜드 서부의 웨일스 접경지대로 구성되어 자치권을 행사했다. [15] 애초에 에드워드의 탈출을 도운 사람이 길버트다. [16] 아버지 시몽 드 몽포르와 동명이인이다. [17] 정확히는 시내 남서쪽의 케닐워스 [18] 여담으로 시몽의 자녀들은 그나마 58세로 천수를 누린 삼남 아모리를 제외하면 모두 그 끝이 좋지 않았는데, 전술했듯 장남 앙리는 전사했고, 차남 시몽은 도주했으나 6년 후 이탈리아에서 풍토병에 걸려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남 기는 후일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사망, 딸인 엘레오노르는 시몽이 죽고 에드워드 1세의 포로로 지내다 전술한 웨일스의 리웰린과 결혼했지만, 이후 딸을 낳다가 산고로 사망했다. [19] 다만 그를 죽인 에드워드 1세 명군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 기 드 뤼지냥의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