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5:30:51

부빈 전투

파일:부빈 전투.jpg
오라스 베르네[1] 작, <부빈 전투[2]>(1827)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3.2. 연합군
4. 전투 경과5. 평가

1. 개요



서기 1214년 7월 27일, 프랑스 왕국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신성 로마 제국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1세, 플랑드르 백작 페랑이 이끄는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 프랑스를 완성시킨 전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럽사에서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2. 배경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왕국군을 격파하고 윌리엄 1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된 이래,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 자격으로 노르망디 공령을 보유했다. 이후 헨리 1세의 딸 마틸다가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과 결혼하면서 앙주 일대가 잉글랜드 국왕의 수중에 들어갔다.

여기에 아키텐 공작 기옌 10세의 유일한 상속녀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루이 7세와 이혼하고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투 등이 추가로 넘어갔다. 여기에 브르타뉴까지 확보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서부 일대를 영유하게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소속의 프랑스 영토는 프랑스 국왕의 영토보다 훨씬 넓었다.

역대 프랑스 국왕들은 자기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국왕을 겸임하면서 이토록 방대한 영토를 확보하는 이 상황에 불만과 위협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은 플랜태저넷 왕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왕의 자식들을 꼬드겨서 반란을 유도하기도 했고, 플랜태저넷 왕조에 귀속된 영주들을 매수하여 자기 편을 들게 만들기도 했으며, 때로는 군대를 동원하여 찔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헨리 1세, 헨리 2세, 그리고 리처드 1세 대까지 플랜태저넷 왕조의 역대 국왕들이 하나같이 거물이라서 좀처럼 쉽게 공략되지 않았고, 영주들도 딱히 호응해주지 않았기에, 프랑스 국왕들의 음모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199년 4월 6일 리모주 자작이 농성하던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하던 리처드 1세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동생 존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존 왕은 1200년 첫 번째 부인이었던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했던 앙굴렘의 이자벨과 재혼했다. 약혼녀를 빼앗긴 위그 9세는 자기 주군인 필리프 2세에게 재소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잉글랜드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형태였기 때문에,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가 주군이고 존은 가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가능했다.

존 왕이 소환령을 거부하자, 필리프는 존 왕이 보유하고 있던 봉토를 몰수하겠다고 선언하고,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존 왕은 필리프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영국 왕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 내 봉토 중 아키텐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빼앗기고 말았다. 존 왕은 이에 격분하였고, 어떻게든 봉토를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는 시칠리아 정복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하다 1210년과 1211년에 잇달아 파문당했다. 교황은 필리프의 조언을 받아들여 호헨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2세를 새 독일왕으로 선출하여 오토에 대항하게 했다. 오토 4세는 이 일로 필리프에게 불만이 있던 데다, 어머니가 존 왕의 누이였으므로 존과 가까운 관계이기도 했다. 둘은 이해관계가 일치하다는 걸 확인하고, 힘을 합쳐 필리프를 협공하기로 한다.

플랑드르 백작 페랑 역시 필리프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는 포르투갈 왕 산슈 1세의 아들로, 아내로부터 백작령을 물려받은 뒤 프랑스 국왕의 승인을 받기 위해 에르와 생토메르의 성들을 양도한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봉신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다가 1213년 필리프의 침공을 받아 영지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 일로 필리프를 증오하여 연합에 가담했다.

불로뉴 백작 르노 1세는 필리프와 유년시절 친구였으며, 그로부터 기사로 선임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르노는 주군을 배신하고 리처드 1세의 편이 되었다. 필리프는 어떻게든 그를 포섭하기 위해 자기 사촌을 시집보냈지만, 르노는 1190년 그녀를 버리고 부유한 상속녀인 불로뉴 백작 부인과 결혼하여 백작이 되었다. 필리프는 불로뉴가 잉글랜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인 점을 감안하여, 르노의 동생과 자기의 질녀를 결혼시키고, 르노의 딸과 자기의 둘째 아들을 약혼시키는 등 어떻게든 르노를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르노는 필리프가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연합에 가담하기로 했다.

1214년 5월, 연합군이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다. 존 왕은 아키텐에 상륙한 뒤 프랑스 남부 일대를 공격했고, 오토 4세와 프랑드르 백작, 불로뉴 백작은 북부에서 파리로 진군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왕자 루이 8세가 로슈 오무안 공방전에서 존 왕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존 왕은 2차례의 걸친 전투 모두 패하자 7월 3일 아키텐으로 퇴각했고, 신성 로마 제국군, 플랑드르군, 불로뉴군의 연합이 제때에 이뤄지지 않으면서 진격이 지지부진해졌다. 필리프는 이 틈을 타 발랑시엔에 병력을 집결하는 데 성공한 뒤,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북상했다.

오토 4세는 프랑스군이 재빨리 오고 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는 어떻게든 적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릴로 보내 프랑스군의 좌측면을 우회하여 파리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즉각 기병대를 급파하여 이들을 물리친 뒤 7월 27일 연합군이 모인 부빈 평야에 도착했다. 이날은 교회가 전투를 금지한 일요일이어서, 필리프는 다음 날로 전투를 미루려 했다. 그러나 적군이 평원에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접근해오면서 전투가 불가피해졌다. 이에 필리프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연설했다.
"제후여, 기사여! 우리는 믿음과 희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노라. 오토와 그의 부하들은 신성한 교회의 적이요, 파괴자이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다. 그들이 받아먹은 돈은 빈민들의 눈물이요, 교회와 성직자들로부터 강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이고, 신성한 교회의 관습을 지킨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죄인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신성한 교회를 거역하지 않는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신성한 교회를 지킬 것이노라.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확신한다. 주님은 우리가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다."

필리프는 연설을 마친 뒤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내리기를 기도했다. 이후 프랑스군이 전장에 출진하면서 부빈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연합군

4. 전투 경과

전투 당일, 프랑스군은 우익에 샹파뉴와 부르고뉴의 기사들을 배치했고, 정면에는 부르고뉴, 샹피뉴, 파카르디 출신 기병 150명이 이끄는 민병대가 배치되었다. 중앙 부대는 필리프 2세와 그의 주요 기사 175명이 친히 이끌었고, 이들 앞에는 노르망디 출신의 2,150 명의 보병이 있었다. 좌익에는 드뢰의 로베르가 드뢰, 페르슈, 퐁티외, 브르타뉴 등지에서 모인 민병대를 지휘했다. 또한 유일한 퇴로인 부빈 다리에는 150명의 기병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비군 역할도 겸했다.

한편, 연합군 좌익엔 플랑드르 백작 페랑의 지휘 아래 플랑드르 기사들과 플랑드르 보병대가 배치되었다. 중앙에는 오토 4세와 로렌 공작 시오볼트,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나무르 후작 필립 쿠르테네이의 지휘하에 브라반트와 독일에서 온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전면에는 독일 출신의 파이크 창병들이 배치되었고, 작센 보병대가 제2 대열을 형성했다. 오토는 50명의 독일 기사들과 함께 제1열과 제2열 사이에 섰다. 우익에는 불로뉴 백작 르노 1세가 이끄는 브라반트 보병대와 영국 출신 기사단이 배치되었으며, 최우익에 영국 궁수대가 포진했다.

전투는 프랑스 최우익에 배치된 경기병 150명이 연합군 좌익의 프랑드르 기사들을 향해 돌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플랑드르 기사대는 이 공격을 쉽게 격퇴했지만, 일부 기사들이 명령도 받지 않고 후퇴하는 경기병을 추격하다가 대형을 이탈했다. 우익의 프랑스 기병대는 이 기회를 틈타 대형을 이탈한 적을 습격했고, 플랑드르 기병대는 순식간에 제압되어 전장을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 우익 기병대는 신속히 플랑드르군을 덮쳐서 대열을 돌파했다. 많은 플랑드르 장병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했지만, 플랑드르 백작 페랑을 위시로 수백 명이 남아서 3시간 동안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페랑은 결국 중상을 입은 채 두 명의 프랑스 기사에게 잡혔고, 연합군 좌익은 궤멸되었다.

한편, 중앙에서는 오토 4세 휘하의 연합군 기사들과 보병들이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이들의 공세는 상당히 강력하여 프랑스 보병대의 대열을 거의 뚫을 뻔했고, 필리프 2세는 본진까지 밀고 온 신성 로마 제국 보병대와 맞서 싸우다가 창에 찔렀지만 두터운 갑옷이 뚫리지 않아서 목숨을 건졌다. 프랑스 기사들이 왕의 위기를 인지하고 급히 달려와 구원했다. 이후 프랑스군이 거세게 반격하였고, 이번엔 오토 4세가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 기사 제라르가 오토를 단도로 찔렀고, 오토는 이로 인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부하들이 급히 구원해 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한 영주가 내어준 말을 타고 전장을 도주했다. 독일 기사들은 뒤에 남아서 황제를 추격하려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거세게 저항하다가 모두 죽거나 붙잡혔다.

한편, 프랑스군 좌익 역시 성공적으로 상대를 압도했고, 12개의 적기를 확보했다. 불로뉴의 르노 1세는 400~700명가량의 브라반트 파이크병들과 함께 전투 막바지까지 항전했으나 대세를 뒤집지 못했다. 그들은 완전히 포위된 뒤 사방에서 공격한 적군에 의해 섬멸되었고, 르노는 생포되었다. 이리하여 부빈 전투는 프랑스군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5. 평가

부빈 전투의 영향은 실로 거대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엮여 있던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 로마 제국은 그 영향이 금세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우선 승자였던 프랑스는 필리프 2세의 치세하에 비로소 중앙집권 국가의 면모가 갖춰지기 시작하고, 유럽 당대 최강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반면 패자였던 잉글랜드는 상실한 땅을 회복하는 것을 실패하면서 앙주 제국이 사실상 붕괴했고, 존 왕은 신하들의 압박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게 된다. 또 다른 패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는 힘이 급격히 약화된 것을 기점으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며 몰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정적 프리드리히 2세와 권력 암투에서 패배하면서 황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영향을 유럽 세계에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역사가들은 부빈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에 대해선 이렇다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적이 죽었다",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다"라고만 기재했을 뿐이다. 예외적으로 보주에 있는 세논 수도원의 수도자 리세는 1255~1264년에 기술한 연대기에서 오토 황제가 전투 당일 3만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손실을 입었고, 프랑스 진영에서는 기적적으로 기사와 세르장 각 한 사람만 죽었다고 적었지만 신빙성은 없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전사한 연합군 기사는 169명이며, 131명의 기사는 생포되었다. 400~700명가량의 브라반트 파이크 창병들은 전투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전사했다.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엔 불로뉴의 르노 1세와 플랑드르 백작 페랑도 있었다. 기욤 르 브르통은 필리프 2세가 포로들을 관대하게 대우했다고 기술했다.
왕과 제후들이 숙소로 돌아오자, 왕은 그날 밤 사로잡힌 고귀한 전사 모두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도록 명하였다. (중략) 이들이 왕 앞에 끌려오자, 왕은 비록 그들 모두가 프랑스 왕국에 속한 자신의 봉신들로서 왕을 시해하고자 한 모반자들이므로 왕국의 법과 관행에 비추어 목을 베는 것이 마땅한 것이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한 없는 자비와 동정심으로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포로들은 쇠사슬에 묶여 여러 지방의 감옥들에 이송될 것이었다.

역사가 조르주 뒤비가 집필한 <부빈의 일요일>에 따르면, 사건 당시부터 13세기 말까지 기록된 275편의 글 가운데 92편에 부빈 전투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한다. 이 중 9편은 전투가 일요일에 일어났다고만 기술했고, 19편은 전투가 금지되어 있는 날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간략히 기술했다. 기록은 주로 북부 일대에서 나왔고,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부빈 전투에 대해 침묵했다. 독일측 기록에서는 황제의 패배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은 대신 프랑스 왕이 두려워했음을 강조했다. 황제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부하들을 온전히 거느리고 전장을 떠났다는 것이다. 한편, 아라스의 도시 성문에는 샤를마뉴의 진정한 계승자인 프랑스의 왕들이 독일의 군주들에게 거둔 일련의 승리를 기념하는 비문이 세겨졌는데, 이 중에는 부빈 전투도 포함되었다.

14세기에 접어들면서 부빈 전투의 기억은 빠르게 사라졌다. 당시 기록이 필리프를 찬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는 '존엄자'가 아니라 노르망디와 앙주의 부를 장악한 '정복자'로 불렸다. 부빈 전투도 중요성을 상실했다. 잉글랜드의 국왕은 프랑스의 적으로 간주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프랑스 국왕의 선량한 사촌으로 인식되었고, 이 때문에 부빈 전투를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았다. 특히 필리프의 손자인 루이 9세가 '성인'으로서 칭송받았기에, 필리프에 대한 세간의 기억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19세기 7월 왕정 시기에 부빈에 대한 기억이 다시 부활했다. 프랑수아 기조 코뮌 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부빈 전투는 봉건 전쟁의 한계를 뛰어넘어 국민 전체가 참여하고 계급들의 결합이 이루어진 전쟁이라고 찬양했다. 아돌프 티에르 역시 제3신분의 참여를 주목했다. 그러나 반교권주의자인 미슐레는 부빈 전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는 필리프가 성직자들이 조종한 꼭두각시였을 뿐이며, 카타리파같이 자유를 열망한 사람들을 박해한 위선적인 교황, 냉혈한 인간들의 무지한 도구였을 뿐이라고 간주하며, 차라리 파문에 굴하지 않고 성직자들을 제어한 오토 4세와 존 왕이 더 나았다고 주장했다.

1845년 부빈에 전투를 기념하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졌지만, 벨기에를 의식해 1214년이라는 연대만 새겨졌다. 그러다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빈 전투는 프랑스인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부빈 교회에는 독일에 맞서 조국을 수호한 영웅들을 기념하는 채색유리가 제작되었고, 부빈은 로마에 대한 갈리아인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알레시아에 버금가는 프랑스 애국주의의 표현이 되었다. 라비스는 부빈 전투를 "기사, 성직자, 코뮌 민병대를 포괄하는 국가의 모든 계급"이 전투에 참가한 "최초의 민족적 승리"라고 규정했으며, 1903년에는 "부빈은 독일인들에 대한 최초의 승리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1914년 6월에 조직된 부빈 기념위원회는 부빈 전투 700주기를 기념하여 "조국의 살아있는 수호화신"인 존엄왕 필리프가 전투마를 타고 있는 거대한 상과 중세의 성채를 나타내는 기념물을 부빈에 세우고,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공화국 정부는 사제들이 참석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6월 27일 <에코 드 파리>는 사설에서 부빈 전투와 라이프치히 전투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라이프치히는 남부 지방과 북부 지방이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인위적인 하나의 독일을 만들었다. 부빈은 1214년에서 1914년까지 지속되는 항구적인 하나의 프랑스를 보장했다."

그러나 3주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전쟁의 참상은 프랑스 인들이 부빈 전투의 기억을 망각하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부빈 전투는 프랑스를 만든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나, 그것이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우월함으로 강조되지는 않고 있다.


[1] Horace Vernet. [2] La Bataille de Bouvines, 27 juillet 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