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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의 리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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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
콘월의 리처드
Richard of Cornwall
파일:콘월의 리처드.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리하르트 (Richard)
출생 1209년 1월 5일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윈체스터
사망 1272년 4월 2일 (향년 63세)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버크햄스테드 성
재위기간 로마 왕
1257년 1월 13일 ~ 1272년 4월 2일
콘월 백작
1227년 5월 30일 ~ 1272년 4월 2일
푸아투 백작(명목상)
1225년 ~ 12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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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이사벨라 마셜 (1231년 결혼 / 1240년 사망)
프로방스의 산차 (1243년 결혼 / 1261년 사망)
팔켄부르크의 베아트릭스 (1269년 결혼)
자녀 존, 이사벨라, 헨리, 니콜라스, 에드먼드, 필립 ( 사생아) , 리처드 (사생아) , 월터 (사생아) , 조안 (사생아)
아버지 존 왕
어머니 앙굴렘의 이자벨
형제 헨리, 조안, 이사벨라, 엘레노어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형을 상대로 반기를 들다2.3. 프랑스 원정과 마셜 가문과의 동맹2.4. 피에르 데 로슈의 협력자2.5. 리처드 마셜의 반란 시기의 행적2.6. 십자군 참여2.7. 생통주 전쟁2.8. 두 번째 결혼2.9. 헨리 3세의 통치 협력2.10. 로마왕2.11. 제2차 남작 전쟁2.12. 말년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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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랜태저넷 왕조 왕족이자 콘월 백작, 명목상 푸아투 백작, 로마 왕. 존 왕 앙굴렘의 이자벨의 차남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209년 1월 5일,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윈체스터에서 잉글랜드의 존 왕 앙굴렘의 이자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렸을 때 말버러 성에 있는 어머니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1213년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로 여행을 떠났고, 1214년 아버지의 푸아투 원정에 동행했다. 1215년 잉글랜드 귀족들이 존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 때, 그는 코페 성으로 피신해 푸아투 영주이자 존 왕의 기사인 피에르 드 몰리의 보호를 받았으며, 요크셔의 몰리 영주인 아스카스터의 로저의 후견을 받았다. 리처드는 훗날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줬던 로저에게 콘월의 수입을 수여했다.

1216년 10월 존 왕이 사망하고 리처드의 형 헨리가 8살의 나이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되었다고, 섭정 위원회가 헨리 3세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었다. 몇 달 후, 어머니 이자벨은 프랑스로 돌아갔고, 1220년 푸아투 대귀족 위그 10세 드 뤼지냥과 재혼했다. 리처드는 1220년 5월 형의 2번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할 때까지 몰리 영주의 보살핌을 받았다. 1221년 서퍽의 아이 마을을 받았다. 1223년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가 캔터베리에 있는 토머스 베켓의 무덤을 순례할 때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16세 생일 직후인 1225년 2월 2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리 3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고, 며칠 후 콘월의 행정권을 받았다.

1225년 3월, 리처드는 프랑스가 정복한 프랑스 남서부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아직 어렸고 전투 경험이 없었기에, 실질적인 지휘권은 리처드의 삼촌인 윌리엄 롱게스피 필립 도비니에게 넘어갔다. 원정군은 가스코뉴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리처드가 그해 8월부터 푸아투 백작으로 칭해졌음에도 푸아투를 탈환하지 못했다.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는 헨리 3세가 리처드에게 가스코뉴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후 리처드와 레온 왕국 국왕 알폰수 9세의 딸 사이의 결혼이 합의되는 듯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1226년 11월 프랑스 국왕 루이 8세가 사망하고 12살의 루이 9세가 왕위에 오르자, 프랑스의 여러 귀족은 이 틈을 타서 카페 왕조로부터 벗어나 잉글랜드 국왕 밑에 들어가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헨리 3세는 이들을 도울 준비를 한편, 리처드에게 샹파뉴 백작 티보 4세, 바르 백작 앙리 2세와 투아르에서 접견해 동맹을 맺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리처드는 프랑스에서 2년여를 버틴 후 1227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2. 형을 상대로 반기를 들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1227년 5월 30일 헨리 3세에 의해 초대 콘월 백작으로 선임했으며, 이전에 그가 일시적인 행정을 위해서만 받았던 토지를 세습 영지로 삼게 되었다. 1227년 7월, 리처드는 왕을 섬기는 용병이었던 "독일인 웨일런"을 콘월 백작령에서 쫓아내려 했다. 웨일런은 즉시 헨리 3세에게 항의했고, 헨리 3세는 리처드에게 재산을 웨일런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는 이에 화가 나 왕실을 떠난 뒤 레딩에서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1]과 함께 왕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체스터, 글로스터, 워렌, 헤리퍼드, 더비 및 워릭 백작들이 동맹에 나중에 합류했다.

리처드가 속한 반란군은 스탬퍼드에 집결한 뒤 왕과 왕실 대법원장 휴버트 드 버그에게 사절을 보내, 왕실 숲 경계를 재검토하고 수정할 것이며, 휴버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니 줄이라고 요구했다. 또한 리처드 본인은 베캄스테드 성에 대해 순회 판사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고, 1227년 7월 휴버트 드 버그의 조카 레몽에게 이 성을 넘겨야 했다. 그 후 헨리 3세가 형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1227년 8월 11일 협상을 위해 노샘프턴에 찾아간 뒤, 어머니가 과거에 맡았던 잉글랜드 영지를 헨리 3세로부터 받았다. 이후 리처드는 헨리 3세와 화해했고, 반란은 수그러들었다.

2.3. 프랑스 원정과 마셜 가문과의 동맹

1229년 월링포드 성의 행정권을 도맡았으며, 거의 동시에 버크햄스태드의 행정권을 수행했다. 1230년 리처드가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 마을의 소유권이 확인되었고, 1,000 마크를 받았다. 또한 아일랜드의 제2대 수석 집사이자 제2대 버틀러 남작 테오발드 버틀러 상속인의 후견인이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있는 테오발드의 재산 관리자로 선임되었다. 1230년 5월, 리처드는 헨리 3세의 푸아투 원정에 참여했다. 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 그는 프랑스와의 새로운 휴전 협정 체결과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 드 브르타뉴와의 동맹 연장 협상에서 협상가로 활동했다. 1230년 10월 잉글랜드로 귀환한 뒤, 그는 왕에게 푸아투와 노르망디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하지 말라고 조언해 일을 그르쳤다며 당대의 실권자 휴버트 드 버그를 비난했다.

1231년 3월 30일, 리처드는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자매이자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미망인인 이사벨라 마셜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식은 옥스퍼드셔에 있는 보안관의 사유지인 헨리온템스 인근의 폴리에서 거행되었다. 그 결과, 그는 당시 휴버트 드 버그가 주도하는 잉글랜드 정부를 상대로 반목을 벌이던 펨브로크 백작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몇 주 후 펨브로크 백작이 예기치 않게 사망했고, 뒤이어 남동생 리처드 마셜이 제3대 펨브로크 백작이 되었다.

리처드는 윌리엄 마셜이 사망한 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있는 제7대 브로스 영주 윌리엄 드 브로스의 사유지 관리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헨리 3세는 리처드가 리처드 마셜과 동조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그 결과 1231년 5월 초에 월링포드 영지 및 성의 행정권을 리처드에게서 회수했다. 그리고 1231년 5월 20일, 휴버트 드 버그가 브로스 가문 소유의 행정권을 인수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리처드는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리처드 마셜이 왕실과 화해하자 마음을 바꿔 헨리 3세와 화해했다.

1231년 8월 30일, 헨리 3세는 웨일스 원정 중에 페인스 성의 세습 영지로서 콘월, 월링포드, 아이, 버클리에 대한 행정권이 리처드에게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헨리 3세는 리처드 마셜을 펨브로크 백작으로 인정했으며, 프랑스 출신의 시몽 드 몽포르도 레스터 백작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당시 헨리 3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처드는 잠재적인 왕위 계승자였다. 1232년 1월 아들을 낳은 뒤 아버지의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존이라고 지었다.

2.4. 피에르 데 로슈의 협력자

1231년 웨일스 원정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뒤, 잉글랜드 대법원장 휴버트 드 버그는 헨리 3세의 총애를 잃었고, 그 대신 정적인 재무장관이자 윈체스터 주교 피에르 데 로슈가 헨리 3세의 신임을 얻었다. 리처드는 피에르 데 로슈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어렸을 때 그의 후견인을 맡았던 피터 드 몰리는 피에르 데 로슈와 정치적 동지였으며, 리처드가 1227년 헨리 3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 때 피에르 데 로슈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리처드는 명목상 푸아투 백작으로서 휴버트 드 버그가 단호하게 거부했던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기에, 이 정책을 주장하는 피에르 데 로슈에게 호감을 품었다.

1232년 여름, 휴버트 드 버그가 체포되고 피에르 데 로슈가 집권했을 때, 리처드는 공개적으로 피에르의 편을 들었다. 1232년 9월 중순에 휴버트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여부를 논의하는 의회에 참가했다. 휴버트는 데비지스 성에 구금되었고, 리처드는 그의 감시를 책임지는 백작 4명 중 한 명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 그는 이전에 휴버트 드 버그가 글로스터 명예 관리자로서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내 이사벨라의 지참금 관리를 맡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던 1232년 11월 10일, 잉글랜드 정부는 이듬해 1월에 콘월에 순회 판사를 파견해 그곳에서 소송과 불만 사항을 심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콘월은 지금까지 백작이 자체적으로 통치하고 판결을 임의로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왕실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리처드는 항의했고, 순회 판사 파견은 1233년 4월로 연기되었다.

이후 리처드와 피에르 데 로슈 사이의 불화가 커졌고, 정부는 리처드가 제5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의 후견인을 맡던 걸 취소하고 피에르 데 로슈가 후견인을 맡도록 했다. 급기야 1233년 봄, 정부는 리처드 마셜의 가신들에게 수여되었던 어폰 영지를 회수한 뒤 피터 드 모레이에게 넘겼다. 이에 리처드 마셜 측은 분개했고, 리처드도 이에 동조해 반란 계획에 참여했다.

2.5. 리처드 마셜의 반란 시기의 행적

1233년 3월, 리처드는 제3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과 함께 웨일스 국경지대에서 웨일스 영주 레드너를 몰아냈다. 그는 이 조치를 통해 자신의 관리하에 있던 브로스 가문 영지를 웨일스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몰아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웨일스 대공과 휴전 중이었는데, 두 사람이 왕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웨일스인들과 전쟁을 벌였기에 정부의 분노를 샀다. 1233년 4월, 잉글랜드 정부는 순회 판사를 콘월에 파견했다. 이들은 콘월에서 막대한 벌금을 부과해 막대한 돈을 런던으로 보내려 했다. 이에 현지 영주와 백성들은 분노해 반란이 일어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 리처드가 반란에 가담하는 건 당연한 수순인 듯했지만, 그는 돌연 마음을 바꿔 피에르 데 로슈와 화해하기로 했다. 연대기 작가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페이르 데 로슈는 리처드에게 리처드 마셜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면 리처드에게 수여된 크라이스트처치 성, 카리스브룩 성을 포함해 데번주의 행정을 리처드에게 위임하겠다고 약속했고, 리처드는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1233년 8월 리처드 마셜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리처드는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에 리처드 마셜은 함께 반란 계획을 세워놓고 이제 와서 참여하지 않은 걸 배신으로 간주했고, 리처드가 통치하던 웨일스의 헤이 성이 그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그 후 리처드 마셜의 지지자들은 1233년 겨울 내내 웨일스에서 잉글랜드로 급습했는데, 특히 리처드의 영지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또한 반군 기사 리처드 시워드는 리처드가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였던 옥스퍼드셔의 베클리를 불태웠다. 이런 상황에 부담을 느낀 리처드는 다시 리처드 마셜과 손잡는 쪽으로 넘어가는 듯했지만, 1234년 3월 14일 휴버트 드 버그의 영지에 속했던 서퍽의 하울리 영지를 자신에게 영구 봉토로 주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받고 도로 정부 편에 섰다.

1234년 4월 2일 캔터베리에서 열린 에드먼드 대주교의 서품식에 참석했다. 이때 행사에 참석한 대다수 주교는 내전을 초래한 피에르 데 로슈에 대한 반대 의사를 명백히 밝혔고, 결국 피에르 데 로슈는 국정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리처드는 정부로부터 요크셔의 나레스버러 성과 서식스 및 웨일스 국경지대의 모든 브로스 가문 영지 관리권을 부여받았다. 이 무렵 리처드 마셜이 아일랜드 원정을 떠났다가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펨브로크 백작이 된 길버트 마셜은 마침내 3,000 마크를 잉글랜드 정부에 바치는 대가로 자기의 직위를 인정받은 뒤 반란을 중단하고 사면받았다.

한편, 이전에 휴버트 드 버그의 소유였던 하울리와 크레디턴에 대한 리처드의 소유가 헨리 3세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렇듯 그는 리처드 마셜의 반란 과정에서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마셜의 전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리처드를 배신자라고 비난했으며, 이는 그의 명망이 떨어지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에 대한 복수로 베클리를 불태운 전 반군 기사 리처드 시워드를 1236년에 왕실에서 추방했다.

2.6. 십자군 참여

1236년 초, 헨리 3세와 리처드 형제의 여동생 이사벨라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헨리 3세에게 반(反) 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자고 제안했다. 헨리 3세는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리처드도 찬성했지만, 대다수 귀족이 단호히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1236년 6월, 리처드는 윈체스터에서 십자군 서약하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그는 이를 위해 1237년 1월 유대인들에게 3,000 마크 이상의 부과금을 지불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1237년 2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서신을 보내 출발을 지연하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이 편지에서 그가 떠나면 잉글랜드의 안보가 위협받을 것이므로, 왕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는 십자군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십자군에 꼭 나서고 싶었던 리처드는 형이 교황더러 이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거라고 여기고 분노했다. 게다가 그는 형의 아내인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와 사보이아 출신의 발랑스 주교 기욤 등 사보이아 출신 인사들이 잉글랜드 국정에 상당히 개입하는 데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1238년 1월, 헨리 3세와 리처드의 여동생인 엘레노어가 시몽 드 몽포르와 비밀리에 결혼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리처드는 제4대 펨브로크 백작 길버트 마셜, 제2대 윈체스터 백작 로저 드 퀸시와 동맹을 맺고 킹스턴에서 군대를 소집해 반기를 들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1238년 2월 말에 헨리 3세와 화해했고, 그로부터 앞으로는 사보이아 출신 인사들을 지나치게 총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238년 4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리처드가 십자군을 위해 잉글랜드에서 모집한 모든 자금을 자신의 십자군에 사용하는 걸 허락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국에서도 5월에 리처드에게 6,000 마크를 빌려줘서 군자금에 보태게 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9세는 자신의 적수인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서는 데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역기고, 리처드에게 레반트로 가지 말고 이탈리아로 방향을 바꾸라고 권고했다. 리처드가 이를 원하지 않자,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한 라틴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지휘하라고 권유했다. 여기에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 대한 우려로 인해, 리처드의 출발은 더욱 지연되었다. 1239년 여름, 리처드는 이 시기에 태어난 헨리 3세의 장남인 에드워드 대부가 되어줬다. 그 후 헨리 3세와 길버트 마셜 및 시몽 드 몽포르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1239년 크리스마스를 윈체스터 궁궐에서 보내면서 왕을 설득해 데본 백작위를 볼드윈 드 레비에르에게 넘기도록 했다.

1240년 1월, 리차드의 아내 이사벨라가 출산 중 사망하면서 그의 출발이 더욱 지체되었다. 1240년 5월, 리처드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가 사망한 후 허웰린의 후계자 및 다른 웨일스 영주들과 평화 협상을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후 그는 런던으로 여행해 6월 5일에 자기 아들이자 상속인인 헨리의 양육을 헨리 3세에게 맡겼다. 1240년 6월 10일, 리처드는 윌리엄 롱게스피와 피터 드 몰리를 포함한 기사 수십 명과 함께 도버에서 출발했다. 이후 파리에 들러 루이 9세의 환영을 받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휴전 협정을 갱신했다. 이후 론 계곡을 거쳐 프랑스 남부로 이동했고, 9월 중순에 마르세유를 출발하여 1240년 10월 8일에 아크레에 도착했다.

리처드는 아크레에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이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 왕위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혼란이 벌어지는 상황을 목격했다. 또한 그들은 십자군 국가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리처드는 이 논쟁을 해소하려 노력했고, 1241년 4월 십자군 국가들이 이집트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휴전 협정을 맺는 데 일조했고, 시몽 드 몽포르의 형제인 아마우리 드 몽포르를 포함한 프랑스 출신 기사들이 풀려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리처드는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고 5월에 십자군 국가를 떠났고, 1241년 7월 1일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그는 뒤이어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 방문해 후한 대접을 받으며 몇 달간 머물면서 교황청과 프리드리히 2세의 화해를 주선했지만 실패했다. 1241년 말 이탈리아를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고, 1242년 1월 7일에 도버에 도착해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 왕비의 환영을 받았다.

2.7. 생통주 전쟁

리처드는 잉글랜드에 돌아온 직후 헨리 3세의 생통주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헨리 3세와 함께 의원들을 설득하여 추가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마련한 뒤, 헨리 3세의 군대에 배속되어 1242년 5월 지롱드 어귀에 도착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영주들과 합세했지만, 프랑스군과 대결하길 꺼려서 휴전 협상을 오랫동안 이어갔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루이 9세는 1242년 7월 샤랑트 강변의 타이부르 다리로 진군했다. 이후 7월 20일 타이부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맞붙었을 때, 리처드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섰지만 끝내 다리를 상실했다.

그 후 리처드는 프랑스 반군 귀족 위그 10세 드 뤼지냥이 자신을 제대로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를 잃어버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 후 리처드는 루이 9세와 협상하기로 마음먹고, 무기와 갑옷을 챙기지 않고 오직 순례자의 지팡이만 들고 프랑스 진영으로 갔다. 당시 프랑스 진영에는 그 덕분에 지난해에 이집트에서 풀려난 귀족들이 있었고, 리처드는 그들의 지원 덕분에 루이 9세가 24시간 동안 휴전을 맺는 걸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생트로의 철수 길에 올랐다.

그러나 24시간 후 추격해 온 프랑스군이 후위대를 몰아붙이자, 헨리 3세는 포로나 전사의 운명을 피하고자 리처드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생트 성채로 도피했고, 잉글랜드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왕의 뒤를 따라가다가 생트 성벽 앞에서 프랑스 기병대의 추격으로 수많은 사망자와 포로를 양산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와해하여 각지로 흩어졌고, 헨리 3세는 생트마저 공격당하게 생기자, 7월 28일 밤에 생트를 떠나 블레이로 피신했다. 이후 보르도에 이른 헨리 3세는 상심에 빠진 나머지 가스코뉴를 리처드의 영지로 제공하는 증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 왕비가 가스코뉴는 헨리 3세와 자기 장남 에드워드의 영지가 되어야 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했고, 결국 헨리 3세는 계획을 취소했다. 이에 리처드는 약속했다가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처사에 화가 나 헨리 3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에 따르면, 헨리 3세는 리처드를 체포하려 했고, 리처드는 보르도의 생 크루와 수도원에 있는 교회 소속 병원으로 피신했다. 그 후 생 크루와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내던 리처드는 8월 22일 헨리 3세로부터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고 몇 주 후에 가스코뉴를 떠났고, 헨리 3세는 1년 넘게 가스코뉴에 머무르면서 루이 9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리처드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인 1242년 10월 18일 실리 제도에 도착하기 직전에 폭풍에 만나 거의 침몰할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2.8. 두 번째 결혼

1242년, 리처드는 사보이아 백작 피에르 2세와 헤리퍼드 주교 피에르 다이그블랑슈의 설득에 따라 엘레오노르 왕비의 친척이며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5세의 딸인 프로방스의 산차와 재혼하기로 했다. 아직 프랑스 남서부에서 원정을 수행하던 그는 그해 7월 대리인을 보내 산차와 약혼했다. 산차는 1243년 잉글랜드에 도착했고, 1243년 11월 23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그녀와 리처드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헨리 3세는 1243년 12월 리처드가 가스코뉴 또는 아일랜드의 소유권을 서면으로 포기하는 대가로 콘월의 소유와 월링포드와 아이의 관리권을 확인해 줬으며, 결혼식 비용으로 2,000파운드를 주었고, 매년 1,000 마크를 추가로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리처드는 산차와의 결혼을 통해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지만 프랑스 및 북부 이탈리아와 강하게 연결된 프로방스와 사보이아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245년 8월, 그의 장인인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5세가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막내딸인 베아트리스를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했다. 1246년 1월, 베아트리스는 프랑스 왕의 막냇동생인 앙주의 샤를 왕자와 결혼했다. 리처드는 헨리 3세와 함께 프로방스가 앙주의 샤를에게 넘어가는 걸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2.9. 헨리 3세의 통치 협력

리처드는 십자군에서 돌아온 후에도 교황이 구속하지 않은 십자군 서약에 대한 벌금을 징수할 수 있는 특권을 유지했다. 여기에 1247년 헨리 3세로부터 주화를 개혁하고 새 주화를 주조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는 1258년까지 10년 넘게 이 직책을 맡아 수천 파운드의 이익을 얻었다. 그 후 그는 헨리 3세의 정치를 충성스럽게 지원했으며, 헨리 3세와 귀족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244년, 헨리 3세가 뉴캐슬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와 평화 협약을 맺는 데 기여했다. 또한 생통주 전쟁 이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헨리 3세가 웨일스 원정을 다시 단행할 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태고자 1,245파운드를 빌려주는 등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246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헨리 3세에게 세금을 거둬서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구했다. 리처드는 처음엔 이를 거부하라고 촉구했지만, 교황 측이 수익성이 좋은 십자군 특권을 더욱 확대하자 마음을 바꿔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1247년, 아들 헨리와 함께 파리로 가서 루이 9세에게 1204년 필리프 2세가 존 왕에게서 빼앗은 노르망디 공국을 돌려달라고 청했지만 거부당했다. 1250년 3월, 리처드는 프랑스와의 휴전을 연장하기 위해 사보이아의 피에르와 함께 파리로 여행했다. 휴전이 성립된 뒤, 그는 리옹으로 이동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접견했다. 인노첸시오 4세는 4월 초에 리처드에게 십자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영국 성직자들의 수입에 대한 십일조를 징수하도록 명령했으며, 리처드가 시칠리아를 침공해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무너뜨린다면 시칠리아 국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교황의 메시지를 가지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웨스트민스터 수도자들과 시민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고, 1252년 1월 가스코뉴에서 일어난 폭동의 책임을 놓고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걸 애써 중재했다. 1253년, 헨리 3세가 가스코뉴의 통치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기로 하자, 그는 잉글랜드에 남아서 섭정을 맡은 엘레오노르 왕비의 조언자가 되었다. 1253년 12월 의회를 소집해 기사 300명을 소집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밝혔지만, 귀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실패했다. 1254년 1월 말, 리처드는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가스코뉴로의 여행을 준비했다. 그해 2월에 각 주의 기사 2명을 의회로 불러서 그들의 의견을 들었으며, 마그나 카르타를 재확인해 의원들의 세금 지원을 받아내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1254년 5월, 엘레오노르 왕비가 기사 40명과 함께 가스코뉴로 이동하면서, 리처드는 유일한 섭정으로서 잉글랜드에 남았다. 그는 이 해에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모독한 혐의로 기소된 버캄스테드의 유대인 아브라함을 석방하는 대가로 막대한 비용을 챙겨서 헨리 3세에게 보내줬다. 1255년, 헨리 3세가 링컨에 살던 어린이 휴를 납치해 온갖 고문을 가한 끝에 십자가에 못 박거나 우물에 던져 살해한 혐의로 고발된 유대인들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리처드는 이에 따라 링컨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유대인 90명을 무작위로 체포해 런던 탑에 가뒀다. 그들은 의식적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 중 18명은 기독교인 배심원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하며 재판에 참석하기를 기피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머지 죄수에 대한 재판은 2월 3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렸는데, 이들은 48명의 배심원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사면받은 후 풀려났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왕실이 인정한 최초의 반유대주의 고발로서 역사학자들에게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얼마 후, 헨리 3세가 둘째 아들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국왕으로 세워주겠다는 교황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칠리아 국왕 만프레디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국내 사정이 좋지 않은데 자국과 멀찍이 떨어진 시칠리아 왕과 전쟁을 벌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기고, 5,000 마크를 빌려주는 걸 거부했다. 1255년 10월 의회를 소집한 뒤, 그는 왕에게 더 이상의 신용을 부여하는 걸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으로 차남 에드먼드를 앉히려는 헨리 3세의 계획은 좌초되었다.

2.10. 로마왕

1256년 1월 말, 로마 왕을 자처하던 홀란트 백작 빌럼 2세가 전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3세는 리처드를 로마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그는 동생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 프랑스를 압박해서 잃어버린 조상의 영지를 되찾는 길이 될 거라 믿었다. 리처드 역시 형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게 황제선거를 위해 잉글랜드에 반대하지 않는 적합한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사절단을 로마에 파견했다. 이후 어떤 독일 공작도 황제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자, 리처드는 공개적으로 왕위를 신청했다. 그의 사절단은 7명의 선제후 중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바이에른 공작이자 궁정백 루트비히 2세에게 총 28,000마르크에 달하는 뇌물을 줬으며, 왕이 되면 추가로 더 많은 혜택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1256년 12월 26일, 쾰른 대주교 콘라드 폰 호흐스타덴은 런던에서 리처드에게 로마 왕위를 엄숙하게 제안했고, 리처드는 그의 형제와 잉글랜드 귀족들의 동의를 받아 황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1257년 1월 13일, 리처드는 그의 지지자 세 명인 콘라트 폰 호흐스타덴, 궁정백 루트비히 2세, 마인츠 대주교 게르하르트 1세 폰 다운에 의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몇 주 후인 4월 1일, 작센과 트리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은 모계를 통해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인연이 있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는 누구에게도 투표하지 않았기에, 선거는 무승부로 끝났다.

리처드의 상대인 알폰소 10세는 스페인에서 귀족들과의 마찰과 무슬림 세력과의 전쟁에 연루되어 있었기에, 독일에서 그의 통치를 집행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에, 리처드는 일의 통치권을 이어받기 위해 독일로 이동하기로 했다. 1257년 4월, 쾰른 대주교와 전임 로마 왕 빌럼 2세의 형제인 홀란트의 플로렌스가 새 왕이 된 리처드에게 경의를 표했다. 1257년 4월 29일, 그는 대규모 수앵원과 함께 야머스를 출발해 5월 1일 도르드레흐트에 상륙했다. 그 후 아헨으로 이동했고, 5월 17일 아헨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묘지를 참배한 뒤 아내 산차와 함께 쾰른 대주교에 의해 각각 로마 왕과 왕비로 즉위했다. 그는 성대한 축제를 개최했고, 아헨의 새로운 시청사인 그라하우스 건립을 아낌없는 기부금으로 후원했다. 1257년 9월 보름스에 도착한 뒤 귀족들의 알현을 받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라인강 하류로 물러났다가 1258년 봄에 다시 라인강을 따라 보름스로 이동해 라인란트의 여러 도시에 대한 특권을 확인하고 칙령을 발행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정식으로 취임하고 싶으니, 로마에서 대관식을 열게 해달라는 리처드의 요청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고, 알폰소 10세를 지지하는 작센과 트리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이 복종하길 거부한 데다, 이끄는 병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플란데런 백작 기, 브라반트 공작 앙리 3세, 신성 로마 제국 서부의 여러 제후도 알폰소 10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리처드는 알폰소 10세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끝내기 위해 1258년 6월 보좌관인 홀란트의 아르눌트를 프랑스로 보내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평화 협약인 파리 조약의 예비 초안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로써 리처드는 가스코뉴와 어머니의 유산인 앙굴렘에 대한 소유권을 제외하고 앙주 제국이 지배했던 영지 대부분이 프랑스에 넘어가는 걸 용인했다.

1258년 겨울, 리처드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잉글랜드에서는 귀족들이 헨리 3세의 통치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헨리 3세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의 통치를 크게 제한하는 옥스퍼드 조례에 서명했다. 리처드는 생오메르에 이르렀을 때 귀족들이 보낸 사절로부터 옥스퍼드 조례를 지지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1259년 1월28일 캔터베리에서 국왕과 캔터베리 대주교 사보이아의 보니파시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스퍼드 조례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런던으로 가서 2월 10일에 파리 조약을 공식적으로 체결했다. 1259년 7월 웨스트민스터에서 보니파시오 대주교와 로체스터 주교 로렌스 사이의 장기간 이어진 분쟁을 중재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리처드는 왕과 귀족들 간의 분쟁이 벌어질 때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리처드 드 클레어와 시몽 드 몽포르 및 에드워드 왕자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자, 당사자들을 중재해 분쟁이 수그러들도록 했다. 이렇게 국내를 안정시킨 뒤, 리처드는 1260년 6월 17일 런던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에게 리처드를 지지하도록 설득하고 리처드 본인에게도 사절을 보내 로마로 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고무된 리처드는 라인강 계곡을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은 뒤 로마로 가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캉브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플란데런 여백작 마르그리트 1세와 그녀의 아들 기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영지를 위임한 후 보름스로 이동했다. 그 후 그곳에서 한 달간 머문 그는 곧 알프스를 넘어 볼로냐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은 중단되었다. 1260년 9월 4일, 토스카나 지방의 구엘프 기벨린에게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토스카나 일대의 패권이 호엔슈타우펜 왕조 추종자들의 수중에 넘어가 버리면서, 로마로의 안전한 경로가 차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리처드는 로마로 가는 걸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라 1260년 10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 그 후 그는 가끔 형과 귀족들이 분쟁을 벌일 때 중재자로 활동한 것 외에는 자기 영지에서 조용히 지냈다. 1261년 11월 9일 두 번째 아내 산차가 사망했다. 그는 할러스 수도원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산차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1261년 1월, 리처드는 로마 시민 정당에 의해 종신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명예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칭호는 나중에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에게 돌아갔다. 1261년 5월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사망한 뒤, 그해 8월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알폰소10세와 리처드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았다. 1262년 5월, 프리드리히 2세의 어린 손자 콘라딘이 로마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소문이 잉글랜드에 퍼졌다. 이에 긴장한 리처드는 1262년 6월 20일 세 번째로 독일로 떠나 홀란트를 거쳐 아헨에 도착했다. 그해 8월 6일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를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 공작으로 선임해, 그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독일 제후들도 그에게 무심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으며,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2년 8월 7일 리처드와 알폰소 10세가 선출된 왕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발표했다. 리처드는 독일 남부로 이동해 바젤에 머물며 로마로 갈지를 고심했지만, 이탈리아의 정세가 여전히 불안정해서 함부로 갈 수 없자 별수 없이 1262년 11월 라인강을 따라 돌아갔고, 1263년 2월 10일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그 후 그는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내전에 휘말렸다.

2.11. 제2차 남작 전쟁

리처드는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왕과 귀족들 간의 분쟁을 중재하려 했지만, 상황이 심각해져서 중재가 먹히지 않자 자기 영지에 은둔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알메인의 헨리는 이미 왕당파에 가담했다. 1263년 6월, 리처드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 간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263년 7월, 리처드는 내전을 막기 위해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왕에게 권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63년 9월, 그는 교황 우르바노 4세로부터 왕에 대한 지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반란을 묵인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받았다. 1263년 10월, 헨리 3세는 리처드에게 로저 드 모브레이의 북부 잉글랜드 영지에 대한 후견권을 부여했다.

1263년 11월 말, 리처드는 귀족들이 점거한 도버를 탈환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264년 1월에 헨리 3세가 시몽 드 몽포르 등과 자신의 분쟁을 판결해 주겠다는 루이 9세의 제의를 받아들여 귀족 대표단과 함께 파리로 떠났을 때, 그는 잉글랜드에 남아서 섭정을 맡았다. 이후 웨일스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반란이 커지는 걸 저지하기 위해 글로스터의 다리를 제외한 세번강의 모든 다리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웨일스 국경지대에 군대를 이끌고 갔지만, 헨리 3세가 잉글랜드로 돌아오자 원정을 중지하고 1264년 3월 윈저에서 헨리 3세와 합류했다. 그 후 서리의 아일워스에 있는 그의 재산이 휴 르 디스펜서가 이끄는 런던 폭도들에게 약탈당했고, 뒤이어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그의 집도 약탈당했다. 이에 분개한 리처드는 헨리 3세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었고, 시몽 드 몽포르에게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1264년 5월 14일, 리처드는 루이스 전투에서 왕실군 좌익 부대를 이끌어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반란군과 대적했다. 그러나 전투는 반란군의 완승으로 끝났고, 그는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풍차에 숨었다. 반란군 병사들은 나중에 그를 발견한 뒤 "내려와, 내려와, 사악한 밀러야!"라고 조롱했고, 결국 그는 풍차에서 끌려 나와 글로스터 백작의 가신인 존 기퍼드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런던 탑으로 끌려간 뒤, 몽포르의 아내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엘레노어에게 넘겨져 월링포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몽포르의 아들 기의 관리를 받았다.
1264년 11월, 기사 로버트 웨일런이 리처드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리처드는 케닐워스 성으로 이송되었다. 처음에는 대추야자, 건포도, 생강과 같은 고급 음식과 새 옷을 위한 값비싼 재료가 그에게 자주 제공되는 등, 그곳에서 편안한 감금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65년 5월 28일 에드워드 왕자가 탈옥한 후, 그는 사슬에 묶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1265년 8월 4일,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왕실군과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반란군이 이브샴 전투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반란군은 궤멸하였고, 시몽 드 몽포르 등은 전사했다. 그 후 케닐워스 성으로 피신한 반란군은 리처드를 살해하려 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의 아들인 시몽이 이들을 제지했다.

1265년 9월 6일, 시몽은 우스터의 월터 드 칸틸루페 주교와 코번트리 주교 로저 드 뮐랑의 설득을 받아들여 리처드를 석방했다. 이때 리처드는 시몽 드 몽포르의 미망인으로서 왕당파 인사들에게 희생될 수 있는 여동생 엘레노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리처드는 월링포드로 이동한 뒤 9월 9일 가족과 합류해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265년 10월 31일, 리처드는 캔터베리에서 새로운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를 맞이했고, 나중에 엘레노어와 그녀의 아이들을 오토부오노에게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리처드는 궁정에서 물러나 내전으로 황폐해진 영지 관리에 주력했으며, 1266년 4월 18일에 버킹엄셔의 번햄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왕당파의 주요 일원으로서 반군 귀족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확보했지만, 본인은 아버지가 반란에 가담하는 바람에 영지를 상속받지 못하게 된 어린 후계자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권고했다.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1267년 봄 반란을 일으켜 런던을 점거하자, 리처드는 케임브리지에서 왕실군과 합류했다. 그해 4월, 그는 런던 외곽에 진을 치고 있는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왕에게 돈을 빌려줬다.

헨리 3세는 리처드를 글로스터 및 다른 반란 지도자들과 협상할 협상가 2명 중 한 명으로 선임했다. 그는 1267년 6월 4일과 15일 사이에 반란군과 협상한 끝에, 런던이 헨리 3세에게 돌아가는 대가로 글로스터 백작을 사면하고, 상속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영지를 되찾기 위한 조건을 완화했다. 1267년 11월 말버러에서 제2차 남작 전쟁의 종식을 알린 말버러 법령이 공포될 때 참석했다. 1268년 3월 반란을 지원한 책임을 묻는 문제를 놓고 런던 시민과의 협상에 참여했다.

2.12. 말년

1268년 8월 4일, 리처드는 4번째로 독일로 떠났다. 그는 다시 라인강으로 올라갔고, 라인란트에서 로마 왕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했다. 1269년 4월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대부분의 라인강 관세를 폐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지역 귀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국 전역에 전쟁 금지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군대가 없었기에, 이 평화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1269년 6월 16일, 그는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쾰른 대주교 엥겔베르트의 조카인 팔켄부르크의 베아트릭스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쾰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알폰소 10세와의 경쟁에서 앞서나가려 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결국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후 실질적인 권력자가 된 에드워드 왕자의 조언자가 된 리처드는 1270년 부활절 의회에서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길 꺼리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에드워드 왕자의 분쟁을 중재했다. 1270년 8월 에드워드 왕자가 예루살렘으로 떠났을 때, 리처드는 왕을 보조할 의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1271년 3월 7일 잉글랜드 왕국의 호국경이 되었다. 1271년 7월, 잉글랜드에서 유대인의 활동을 크게 제한하는 새로운 법률에 서명했다. 이후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하고 잉글랜드를 떠날 준비를 했지만, 얼마 후 장남 헨리가 이탈리아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두 아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 후 신체와 정신 모두 쇠약해진 그는 버크햄스테드 성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부분적으로 마비되어 말할 수 없는 상태로 5개월간 앓아누웠다가 1272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사후 장남 헨리와 두 번째 아내 산차가 묻힌 할러스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옥스퍼드의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1] 당대 최고의 기사로 손꼽혔고 헨리 3세의 섭정을 맡기도 했던 윌리엄 마셜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