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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여왕(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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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튜어트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본명이 메리 스튜어트로 동일한 17세기의 여왕에 대한 내용은 메리 2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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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5bd><colcolor=#ffffff>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8대 국왕
프랑스 왕국 프랑수아 2세의 왕비
메리
Mary
파일:1280px-François_Clouet_-_Mary,_Queen_of_Scots_(1542-87)_-_Google_Art_Project.jpg
이름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
출생 1542년 12월 8일
스코틀랜드 왕국 린리스고 린리스고 궁전
사망 1587년 2월 8일 (향년 44세)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파서링게이 성
신체 키 180cm[1]
재위 스코틀랜드 왕국의 여왕
1542년 12월 14일 ~ 1567년 7월 24일
배우자 프랑수아 2세 (1558년 결혼 / 1560년 사망)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1565년 결혼 / 1567년 사망)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
(1567년 결혼 / 1578년 사망)
자녀 제임스 6세 & 1세
아버지 제임스 5세
어머니 기즈의 마리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메리 여왕(스코틀랜드)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프랑스 왕국 왕비2.3. 스코틀랜드 여왕2.4. 불운했던 결혼생활2.5. 여왕의 연인 보스웰 백작2.6. 잉글랜드로의 도피2.7.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노리다2.8. 결국 참수당하다
3. 메리의 사후4. 평가
4.1. 당대4.2. 현대
5. 가족관계
5.1. 조상5.2. 자녀
6. 기타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8대 여왕[2]이며 한때 프랑스 왕국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왕비이기도 했다.

보통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메리 1세와 구별하기 위해 본명인 '메리 스튜어트'라고 불리지만[3]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으니 공식적으로는 성이 붙지 않는[4] '메리 여왕'이라고 불러야 한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메리 2세와 구별하기 위해 '메리 1세'로 칭할 수도 있다.[5]

2. 생애

2.1. 유년기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유력 귀족으로 성장했던 로렌 가문[6]의 분가인 기즈 가문[7] 출신인 마리 드 기즈[8]의 2남 1녀 중 막내이자 고명딸로 1542년 12월 8일에 린리스고 궁에서 태어났다.

사실 마리는 1542년 말에 메리를 낳기 전, 1540년 5월에 장남 제임스 왕세자, 1541년 4월에 차남 로버트 왕자를 낳았었다. 그러나 로버트 왕자는 생후 이틀 만에 숨졌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막 돌이 지난 제임스 왕세자 역시 요절했다. 이렇게 적법한 왕위 계승권자가 갑자기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제임스 5세와 마리는 상심할 틈도 없이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슬러 후사를 갖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 결실이 메리였다.

메리가 태어나던 당시에 제임스 5세는 친잉글랜드파( 개신교)와 친프랑스파( 가톨릭)로 나뉜 귀족들이 끊임없이 벌이고 있는 내전과 잉글랜드와의 잦은 전쟁으로 몹시 지쳐 있었다. 게다가 솔웨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지휘관을 잃고 오합지졸로 흩어지며 완패를 당하자, 이에 대한 충격으로 신경쇠약이 도져 병상에 눕고 말았다. 제임스 5세는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아들이 아닌 딸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을 금치 못하며
" 우리 왕조는 여아(女兒)[9]와 함께 시작해서 여아로 인하여 끝나는구나."
라고 한탄했다.[10]

그해 12월 14일, 즉 생후 6일 만에 부왕인 제임스 5세[11]가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으로 승하하자, 메리가 그의 유일한 적자녀로서 왕위에 올랐다.[12] 제임스 5세가 승하하자 화약의 조건으로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를 결혼시켜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을 통합시키려고 했다. 실제로 1543년에 혼인 협정인 그리니치 조약이 성사되었는데 헨리 8세는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메리를 잉글랜드에서 양육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섭정이 된 마리 드 기즈는 뼛속까지 친 프랑스파였으므로, 강압으로 맺은 잉글랜드와 맺은 혼인 조약 따위는 지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1547년 9월 10일,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과 싸웠으나 대패했으며, 이 전투가 브리튼 제도 최초의 근대적 전투라 불리는 핑키 클로 전투였다. 1547년에 마리는 스코틀랜드 내의 가톨릭 세력과 논의한 끝에 프랑스 왕세자인 프랑수아와 메리의 혼인 협정을 맺었다. 이듬해인 1548년에 마리 드 기즈는 여섯 살인 메리를 자신의 고국인 프랑스로 보내 발루아-앙굴렘 왕실에서 양육하게 했고, 자신은 스코틀랜드에 남아 섭정으로써 통치했다.

2.2. 프랑스 왕국 왕비

스코틀랜드와 어머니를 떠나 프랑스에 당도한 메리는 외할머니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13][14]에게 의지하여 프랑스의 발루아-앙굴렘 궁정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우아한 매력을 지닌 그녀를 왕세자인 약혼자 프랑수아 2세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족 대부분과 궁정에 출입하는 예술가들 모두 사랑하여 찬미했다고 한다. 메리는 16세 때 프랑수아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었고, 시아버지인 앙리 2세 1559년에 사고로 승하하여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자 마침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시어머니인 왕대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처음에는 똑똑하고 예쁜 맏며느리를 매우 총애해서 자신이 시집올 때 예물로 가져왔던 당대에 가장 비싼 진주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메리는 벼락출세한 메디치 가문 출신인 왕대비 카트린을 시종일관 무시했으며, 급기야 여러 사람 앞에서 카트린을
" 피렌체 출신의 장사꾼"[15]
이라고 지칭하고 말아 결국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이 고부갈등 때문에 메리는 나중에 반란군에게 패배해 망명해야만 했을 때 어머니의 고국이었던 프랑스로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 역시 메리 스튜어트의 자제력이 부족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16]

한편 메리가 장신에 건강한 미인인 반면, 그녀의 첫 남편인 프랑수아 2세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왜소하고 매우 병약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사실상 소꿉친구나 다름 없었던 프랑수아 2세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이들 부부는 금실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이는 메리의 외가였던 기즈 가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기즈 가문의 세력이 카트린을 능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역시 카트린이 메리를 곱게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즉위 1년 6개월 만에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한데다가, 그가 워낙 허약한 탓에 16세에 죽어 후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17] 메리는 사별하면서 프랑스 왕실과의 연고가 끊어지게 되었다. 프랑수아 2세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시동생 샤를 9세가 즉위하여 시어머니인 카트린이 섭정하게 되었다. 카트린은 그동안 아니꼬워하던 맏며느리 메리를 스코틀랜드로 쫓아내듯이 보내버렸다. 외가인 기즈 가문의 친척들이 몇몇 새 남편 후보를 추천했지만, 메리가 프랑스에 남을 것을 우려한 카트린이 나서서 전부 무산시켰다. 한편 메리를 대신해 섭정하던 마리 드 기즈도 1560년에 숨졌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모든 신료들은 메리의 귀환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였다.

2.3.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프랑스 궁정에서 투닥거리고 있을 동안 메리가 명목상 여왕이었던 본국 스코틀랜드는 종교 내전에 휩싸이고 있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루터회, 성공회 등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생겨나고 있었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윽고 스코틀랜드에도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1559년 존 녹스 스위스에서 귀국하여 유럽 대륙의 개혁 신학을 전파했는데, 이 신학은 잉글랜드의 위에서의 종교개혁[18]과는 다른 형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를 통치한 것은 메리의 모후이자 섭정 대비였던 마리 드 기즈였는데 기즈 가문은 프랑스 왕실에서도 경악할 정도로 골수 가톨릭이었고 그 영향을 받은 섭정 대비 마리 드 기즈 역시 가톨릭 신자였다. 마침 존 녹스가 스위스에서 돌아와 잉글랜드와 가까운 로우랜드에서 개혁신학을 가르치며 나섰고 이에 찬성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사제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에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려는 마리 드 기즈와 비튼 추기경, 제임스 해밀턴[19][20]이 개신교 박해에 나서자 거의 내전 상태나 다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초기에는 권력을 쥔 마리 드 기즈가 여러 번 존 녹스를 위시한 개신교 세력을 털었다. 그러나 중도에 비튼 추기경이 암살을 당하고 마리 드 기즈 또한 외국인인지라 기반이 부족한데다가 선량한 성격이라 개신교도들을 가혹하게 숙청하지 못해서[21] 점점 가톨릭 세력은 밀려나게 되었고, 녹스와 그를 후원하는 개신교 시민계급 및 신학자들의 세력이 더 커져가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도 갈등이 있었지만 정치적인 갈등도 있었다. 이미 헨리 8세 시기와 에드워드 6세 시기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에서 두 번이나 처참하게 박살나서 주력 병력이 전멸당했고, 수도인 에든버러까지 약탈당했다. 때문에 스코틀랜드 내에서 국력의 격차를 절감한 세력들, 특히 잉글랜드와 접경지대인 로우랜드를 기반으로 한 세력은 프랑스에 의존하고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기존의 외교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세력들은 가톨릭 세력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가톨릭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를 채택한 잉글랜드에 SOS를 보냈다. 당시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신하들이 합법적인 왕에게 반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개혁세력이 친잉글랜드 성향이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들을 도와주었다.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종교 내전에 불을 더 붙였다.

이 스코틀랜드 종교 내전에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자, 결국 메리의 외가이자 마리 드 기즈의 친정이었던 프랑스에서도 개입하게 되었다. 1560년 1월 에든버러 앞바다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면서 잉글랜드가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에든버러 해전) 때마침 메리의 모후였던 마리 드 기즈도 죽었기에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강화를 선택했으며, 에든버러 조약을 맺어 과부가 된 (프랑스 전 왕비) 메리가 귀국하여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도록 하고, 양국의 병력은 스코틀랜드에서 전부 철수하기로 했다. 말이 강화지 결국 종교개혁 세력이 이긴 것이었다.

1561년에 돌아온 메리는 실질적인 개신교 국가에서 가톨릭 군주로 즉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된 처지였다. 더군다나 메리는 말이 좋아 스코틀랜드 여왕이지, 6세 때부터 13년 동안이나 프랑스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를 몰랐고 사실상 프랑스인이었다. 그런 탓에 프랑스어 라틴어는 구사했으나 정작 스코틀랜드의 언어였던 스코트어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아예 못했다. 그리고 풍요롭고 우아한 르네상스식 고급 문화가 발달했던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실에서 자랐던 메리는 척박하고 음침한 날씨에 문화적으로도 엄숙주의가 대세였던 스코틀랜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이 시절의 스코틀랜드는 금욕적인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회화, 조각, 거대 건축물 등 눈에 보이는 형상을 아예 우상이라며 배척하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이질감이 심했다. 게다가 당시 스코틀랜드는 실세였던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22]을 비롯한 귀족들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인 메리 여왕과 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사이였고,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기 전 해에 그녀의 생모이자 섭정이었던 마리 드 기즈마저 병사했기 때문에, 외톨이 신세가 된 메리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스코틀랜드는 15세기부터 지속적으로 국왕이나 왕위계승자가 요절했기 때문에 왕권이 약했다. 그래서 유력 클랜의 당주인 대귀족, 왕실 직할지로 실질적으로는 자치권을 누리던 에딘버러, 퍼스, 애버딘 등의 도시 시의회,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에는 고위 추기경, 개혁 이후에는 장로회 국민교회의 최고회의인 장로총회 등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지에 아무 기반이 없는 메리가 프랑스 세력을 끌고 들어와 갑작스럽게 군주 행세를 하려고 했으니, 기존의 세력자들은 당연히 메리를 경계했다.

한편 헨리 8세는 메리 스튜어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그는 메리가 외국의 왕족인 것과 자신의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6세와의 약혼이 깨진 것을 구실로 들었다. 하지만 메리는 헨리 8세의 누나였던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왕비의 손녀이자 헨리 7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잔존한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1558년 11월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기 이전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메리와 수 차례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서신으로 교류한 바 있었다. 한동안 엘리자베스 1세에게 우호적이었던 메리의 태도는 헨리 8세가 박탈한 왕위 계승권을 다시 인정받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오직 서신으로만 교류했을 뿐 두 사람이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일각에서는
"예의상 좋은 말로 교류한 것일 뿐이지, 사실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 문제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사이였다."
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메리는 에든버러 조약을 비준하지 않는 등, 엘리자베스 1세에게 여러모로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앞서의 에든버러 조약으로, 메리와 프랑수아 2세 부부는 적법한 잉글랜드 군주라는 칭호를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메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란 탓에 반잉글랜드&반 개신교 성향이 강했다.[23] 때문에 메리는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 후에도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계속 자신이 적법한 잉글랜드 여왕이라고 주장했으며, 결국 이로 인해 잉글랜드가 반발하여 양국의 관계가 험악해졌다.

2.4. 불운했던 결혼생활

1561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부터 메리는 결혼 압박에 시달렸다. 엘리자베스 1세가 더들리 경[24]을 추천했는데, 진지한 제안은 아니었다.

그래서 메리가 선택한 사람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 Lord Darnley)였다. 단리 경은 헨리 7세의 증손자라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으며, 메리 스튜어트와는 같은 할머니를 둔 사촌 관계였다.[25]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두 남녀의 결혼은 당연히 정략적으로 추진된 것이었는데, 메리의 이복오빠였던 모레이 백작은 이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모레이 백작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지지자였는데, 공식적으로는
"단리 경은 어리고 어리석다."
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실제로는 종교개혁 세력이 기를 펼 수 있도록 개신교 신자인 외국 왕족을 이복 여동생인 메리의 남편으로 들였으면 하는 속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결혼은 성사되었고,(1565. 7. 29) 그 직후 모레이 백작은 여동생 메리에 의해 유폐되었다. 그러자 모레이 백작은 탈출하여 지지하는 귀족들과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1565. 8) 하지만 메리는 군대를 소집하여 모레이의 반군을 격파했고 모레이 백작은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모레이의 반란을 진압한 메리는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단리 경은 King Consort[26]와 올버니 공작(Duke of Albany)이라는 직위를 하사받았으며[27] 정략결혼이었던 탓에 부부 간의 애정은 없었지만, 결혼 이듬해인 1566년 6월 제임스 6세를 낳았다.

한편 스튜어트 집안끼리의 결혼이었지만, 결혼 후 왕조의 이름을 살짝 바꿨다. 단리 경 가문의 조상이 한때 프랑스 궁정에 머물 때 가문명을 프랑스 식인 Stuart으로 고쳐 써서 기존 스코틀랜드 왕실의 이름인 Stewart와는 철자가 달라졌는데, 아들인 제임스 6세[28]는 단리 경의 성을 받아서 Stewart 대신 Stuart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제임스 6세의 탄생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스 1세는 신하를 보내어 왕자의 유아세례일에 황금 세례반을 전해주며 축하의 뜻을 전했고, 비록 세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메리의 요청대로 제임스 왕자의 대모가 되어 주었다.[29]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의 사이는 매우 좋지 못했다. 연하의 젊은 단리 경은 오만한 데다가 철이 없는 주정뱅이였고, 메리는 메리대로 따로 이탈리아인 시종이자 음악가인 다비드 리치오[30]를 가까이 하면서, 부부는 서로 멀어졌다. 사실 애초부터 이 결혼은 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단리 경이 속했던 레녹스 백작 가문은 당대에 스코틀랜드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아란, 모튼 공작가와는 원수 관계였다. 안 그래도 권력을 잡기 위해 이전투구하던 대귀족 가문들 사이의 경쟁구도에 갑자기, 그것도 몹시 사이가 안 좋았던 신예 귀족 가문이 여왕의 부군을 배출하면서 지위가 급상승했으니 순탄하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31]

여하튼 메리 여왕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천박하고 술만 퍼마시는 남편에게 질려버렸다. 급기야 남편인 단리 경이 자신을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으로 삼아달라고 요구하자 메리가 이를 거부함에 따라 부부관계가 더 나빠졌고 리치오와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메리 여왕은 존 녹스의 배려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스코틀랜드에서 유일하게 가톨릭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리치오가 하루 서너 번씩 여왕의 시중을 들며 같이 다니자 영락없이 애인처럼 보였다.

리치오가 진짜 애인이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으나 단리 경은 소문을 듣고는
"하인에게 마누라를 뺏긴 호구"
라는 불명예를 참지 못했고, 결국 메리 여왕과 리치오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짜고서 리치오를 죽여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여왕의 저녁 식사 중에 단리와 음모를 꾸민 귀족들이 난입해서는 식사하던 여왕에게
"리치오를 내보내 달라"
고 요구했다. 여왕은 그들이 무장했음을 눈치채고는 리치오의 목숨이 위태로운 걸 알고는 거부했고, 단리와 루스벤 경이 이끄는 귀족들이 여왕과 말다툼을 벌이며 실랑이까지 벌였지만 여왕은 끝까지 거부했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단리와 귀족들은 여왕을 억지로 막아서고[32]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다비드 리치오를 끌어내서는 칼을 빼들어 그녀의 면전에서 무려 57차례나 찔러 죽이고 말았다.(리치오 암살 사건, 1566. 3) 이로 인해 메리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33]

리치오를 참혹하게 죽인 단리 경은 이 살해 음모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면서,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던 메리 여왕을 보호하며 안심시키는 척 했고, 불안에 떨고 있었던 메리와 함께 던바로 도망쳤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을 만나게 되며, 보스웰 백작의 도움으로 병력을 모아 다시 왕궁으로 귀환하자 반역자들은 잉글랜드로 도주해버렸다.

2.5. 여왕의 연인 보스웰 백작

이 리치오 암살 사건으로 인해 메리 여왕과 단리 경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며, 이 시점부터 보스웰 백작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메리는 남편을 증오하여 이미 이 시기에 단리 경 처단 음모를 꾸몄고, 보스웰 백작의 조언에 따라 단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리치오 살인범들을 사면해주기까지 했다.

이후 임신 중이던 메리는 1566년 6월, 아들 제임스를 낳았다. 출산 직후 산실에 찾아와 아들을 보러온 단리 경에게 메리는 갓 태어난 아들 제임스를 보여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선물해 주셨다."
라고 선언하고, 그 곁에 있는 다른 귀족들에게
"나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심정으로 고백한다. 나는 ( 간통 혐의에 대해) 결백하니, 이 아이가 왕위 계승권자라는 사실의 증인이 되어 달라."
는 말까지 했다. 그래서 귀족들은 메리의 결백을 믿어주며 그녀의 아들인 제임스가 왕위 계승자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메리가 자신에게 여전히 리치오를 죽인 것에 대한 앙금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34] 당황한 단리 경은 냉담해진 아내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스웰은 거의 메리 여왕의 남편 급으로 행세하며 제임스 왕자의 유아세례식 준비까지 맡았고, 아무런 혈연도 없는 주제에 귀빈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제임스 왕자의 세례식 이후 메리와 단리 경은 한동안 별거했다. 단리 경은 계속 부친인 레녹스 백작의 영지였던 글래스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1567년 봄에 메리는 매독을 앓고 있는 단리 경에게 갑자기 화해하자며 설득해 그를 '커크 오 필드'로 데려왔다. 둘이 단란한 시간을 며칠 보내는 척하다가 메리 여왕은 외출을 나갔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 단리 경이 머무르고 있었던 저택에 큰 폭발이 일어났다. 집에 있었던 단리 경의 측근들은 모두 끔찍하게 폭사했고, 단리 경 역시 그 인근에서 교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단리 경 암살 사건, 1567. 2) 이 참사는 당연히 정황상 메리 여왕과 여왕의 새 남편이 되고 싶어한 보스웰 백작의 합작이었고[35] 이 소문이 스코틀랜드 내부는 물론 국외에까지 돌았다. 자연히 메리는 대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런 메리에게
"부군 살해사건을 공정히 처리하라."
며 스스로 혐의를 벗으라고 조언했다.

메리는 남편에 대한 애도 기간을 가졌고, 1567년 4월에 아들 제임스가 자라고 있는 스털링 궁으로 찾아가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홀리루드 궁으로 돌아오려다가, 무장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보스웰 백작에게 납치당했다.

하지만 이것을 납치라고 보기는 좀 애매한 것이 보스웰 백작과 메리는 이미 죽이 맞아 간통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아귀가 맞기 때문이다. 단리 경이 죽기 전에도 보스웰 백작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메리가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는 등,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는 루머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게다가 후술하다시피 두 사람은 단리가 죽고 나서 결국 결혼까지 해버렸다. 단리 경이 살해당하기 전에 메리와 보스웰 백작은 모두 유부녀, 유부남이었다. 그런데 단리 경이 살해당하고 나서 보스웰 백작은 자신의 아내를 협박하여 메리와 결혼하기 20여일 전에 강제 이혼했다.[36][37]

어쨌거나 메리는 일단 공식적으로는 납치당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스코틀랜드가 아무리 왕권이 약하고 가톨릭 신자인 여왕이 인기가 없었다지만, 일국의 왕이 납치되어서 강간당하는 것을 신하들이 방관하고 내버려둘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는 여왕을 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메리 여왕은 자신의 납치범이자 남편 살해 용의자인 보스웰을 처단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와의 결혼을 발표했다.(1567. 5) 남편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하필 남편의 암살 용의자와 결혼해 버렸으니, 당연히 스코틀랜드의 여론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38] 얼마 가지 않아 단리 경의 암살 의혹, 부도덕한 결혼, 메리의 종교 문제까지 더해져 여론이 크게 나빠졌고, 결국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1567. 6) 메리는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반란군에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미 단리 경이 살해되기 이전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개신교 신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는데, 이제는 메리에게 호의적이었던 가톨릭 계열의 신하들까지 단리 경의 죽음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메리로부터 등을 돌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거의 모든 귀족들이 그녀의 폐위에 찬성했으며, 스코틀랜드 왕위를 아들 제임스 왕세자에게 양위하라고 강요했다. 강요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녀가 보스웰과 주고 받은 편지들[39]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2.6. 잉글랜드로의 도피

결국 메리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위에 동의하는 서류에 서명하여 아들 제임스에게 양위했으며, 갓 돌이 지난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오르고[40] 잉글랜드에 망명해 있었던 메리의 이복오빠인 모레이 경이 돌아와서 시아버지인 레녹스 백작과 함께 섭정을 하게 되었다.[41] 이때 모레이와 귀족들은 메리와 한 약속을 깨고 보스웰과 메리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의회에서 공개한 것은 물론, 이 편지들의 사본을 외국의 궁정에까지 보내 메리가 다시 왕권을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메리는 보스웰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호수 속에 있는 섬에 세워진 로클레벤 성에 감금되었는데, 치욕스런 감금 생활의 충격으로 결국 쌍둥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메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한 뒤 측근인 조지 더글라스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며(1568. 5. 2)[42] 자신에게 협조하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병사들을 모집하고,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다. 메리는 에든버러에 통첩을 보내는 한편 6,000명의 병력을 모아 재기하나 싶었지만, 에든버러의 섭정이었던 모레이 백작은 이를 눈치채고는 협상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병력이 반쯤 모이자 급습했다. 하지만 급히 모집하여 오합지졸이었던 메리의 병력들은 모레이의 진압군한테 일격에 참패했고,(랭사이드 전투, 1568. 5. 13) 메리는 진압군에게 쫓기다가 잉글랜드로 부랴부랴 도망쳤다.

하지만 메리는 가톨릭 교도인데다가 오래 전부터 자신이 잉글랜드의 적법한 여왕임을 주장하며 분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메리를 받아들이는 걸 영 내켜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처우를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매정하게 쫓아낼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엘리자베스 1세는 일단 메리의 망명을 받아주었지만, 그녀를 매의 눈으로 주시했다. 미혼이라서 자신에게 자식이 전혀 없었으므로 사실상 메리가 잉글랜드의 제1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가톨릭 국가에선 개신교( 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를 인정하지 않고, 가톨릭 신자인 메리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일단 엘리자베스 1세도 군주였으므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메리를 스코틀랜드로 송환해 버린다면 그대로 감금되거나 처형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메리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당시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권을 초월해서 왕권신수설이 절대적인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당연히 왕위는 하느님께서 내려주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다보니 스코틀랜드에서 '신하에 불과한 반역자들이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여왕인 메리를 내쫓은 상황'은 불경 그 자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잉글랜드 자체야 이 시점에서는 이미 범유럽 개신교권의 주축 중 하나로 자리잡았지만, 애초에 엘리자베스 1세 본인의 성향도 전임자인 이복언니 메리 1세, 전전임자인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와는 달리 오히려 아버지 헨리 8세처럼 종교를 정치의 목적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왕권의 강화와 정치의 수단으로 인식한 비교권주의자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 1세의 본인 성향부터가 이런데, 애초에 잉글랜드 바로 앞마당인 네덜란드에서는 바로 그 칼뱅주의자 혁명가들이 같은 적법한 봉건 군주이자 한땐 사돈이기도 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실의 펠리페 2세에 맞서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프랑스에선 똑같은 칼뱅주의 위그노 반란군이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내전( 위그노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형식적으로 같은 개신교편이던 말던간에 잉글랜드가 아예 신학적으로 일치하는 국제 칼뱅주의 세력의 일원인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건수만 보이면 세속적인 왕실 정부를 적그리스도다 뭐다 하면서 뒤엎으려고 드는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 반란군을 엘리자베스 1세는 결코 신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메리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리가 없고 엘리자베스 1세도 그런 메리를 곱게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폐위와 관련된 상황 자체가 종파를 넘어 전제군주라면 달갑게 여길래야 여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메리를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보낼 경우 그녀의 복위를 명분으로 잉글랜드와 관계가 좋지 못한 가톨릭 국가들인 스페인과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할 가능성이 높았고, 여기에 국내 가톨릭 세력이 연합하면 왕권에 지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43]

메리는 망명할 때 땡전 한 푼 없는 신세였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거처를 마련해주며 생활비를 지급했고, 비슷한 이유로 잉글랜드에 망명한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세력과 잉글랜드 내 가톨릭 세력이 지지를 보내며 메리를 지원하면서 어느 정도 형편이 나아졌다. 상황이 호전되자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섭정들에게 공개 질의서를 보내
"강요에 의한 서명은 인정할 수 없고, 섭정들은 여왕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라면서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에서 협의회를 열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메리에게 학을 뗀 스코틀랜드에서는 전 남편 단리 경의 아버지인 레녹스 백작을 중심으로 메리를 간통과 남편 살해 혐의로 조사위원회에 역고발했다. 특히 법정에서 레녹스 백작이 메리가 보스웰 백작과 나눈 편지와 애정시들을 공개할 예정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메리는 망신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재판을 포기해버렸다.

한편 보스웰 백작은 단리 경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당할 위험에 처하자 1567년에 스코틀랜드를 탈출해 노르웨이로 갔으나, 거기서 체포되어 덴마크로 보내졌다. 메리를 몰아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잉글랜드에 있는 ( 엘리자베스 1세의 묵인 하에) 메리의 살인 공모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보스웰 백작을 스코틀랜드로 송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메리의 외가인 프랑스의 기즈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보스웰이 송환당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보스웰은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어디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여기저기 감옥을 전전하다가 결국 덴마크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10여년 동안 비참한 감금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 보스웰은 광증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며, 결국 1578년 감옥에서 41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메리는 세 번째 남편이었던 보스웰의 행적을 수소문하거나 그를 구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메리의 비정함을 비난하고 있지만, 메리에게 호의적인 몇몇 사람들은
"메리가 마지 못해 보스웰과 결혼했다가 왕권을 잃었다는 증거"
라면서 동정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

2.7.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노리다

스코틀랜드 복귀가 좌절된 이후 메리는 잉글랜드로 관심을 돌려서 잉글랜드의 왕위를 노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어느 순간부터 엘리자베스 1세를 배신하고 여러 차례 모반을 꾸몄다가 발각되었다. 이미 메리는 스코틀랜드 여왕 시절부터 자신을 적법한 잉글랜드 여왕으로 자처하고 있었으며, 성공회(영국국교회) 성향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반기를 든 잉글랜드 내의 가톨릭 세력들이 공공연히 메리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다.

메리가 망명한 지 겨우 1년여 만인 1569년 가톨릭 세력들이 잉글랜드의 노퍽 공작과[44] 메리를 결혼시키고, 두 사람을 잉글랜드의 군주로 추대한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노퍽 공작 역모 사건) 원래 노퍽 공작과의 결혼은 엘리자베스 1세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찬성했기 때문에 순탄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노퍽 공작은 엘리자베스 1세가 주의하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꾀하던 가톨릭 세력과 손을 잡았다.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자 노퍽 공작은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힌 뒤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이 사건에 가담한 연루자들도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메리는 혈연상 왕의 친척인데다가 그녀를 섣불리 처벌할 경우, 주변의 가톨릭 국가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덮어두었다.

메리가 스스로 모반의 주체였는지 아니면 단지 모반을 꾀한 세력들이 그녀를 명분으로 삼았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이든 엘리자베스 1세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었다. 당시 메리는 스코틀랜드에서 폐위당하고 외가인 프랑스에게도 외면당할 정도로 고립되어 있었는데,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메리를 구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 1세였기 때문이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를 정적으로 여겼지만 같은 일국의 군주이자 자신의 친척이란 이유만으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채, 모두가 꺼리는 그녀의 망명을 받아주며 연금까지 지급해주고 잘 대우해주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을 배신하고, 반역까지 도모했으니 가만히 둘래야 둘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메리가 왕위의 찬탈을 노리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
라는 여론이 점차 힘을 얻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를 유폐시키고, 슈루즈버리 백작 등, 관리인을 붙여서 감시하도록 했다. 메리가 역심을 품었든 그렇지 않았든, 가톨릭 신자인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잉글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성공회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어차피 메리는 어떻게든 제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후 메리는 셰필드 성에 감금되어 약 18년 동안 유폐 상태로 지냈다. 더군다나 메리를 경계하는 잉글랜드의 대신들이 엘리자베스 1세의 의심을 수시로 부추겨, 메리는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감시가 심해지게 되었고 대우가 열악해지는 걸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비록 자유는 없었으나 메리는 잉글랜드 왕실에서 정기적으로 나오는 연금 덕분에 많은 시녀와 하인들을 거느렸고, 밸더킨[45] 아래에서 정찬을 즐길 수도 있었다. 감시병이 늘 따라다녔지만 산책과 사냥 같은 제한된 야외활동도 종종 허용되었다.

물론 메리는 야외활동은 자주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날을 정교한 수를 놓거나, 시녀들과 소일하고 외국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새와 개를 키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부터 메리는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옆구리에 간헐적인 통증이 일어난 것을 보면 신경성 질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 치료를 받았고 치료 목적으로 벅스턴 온천 여행이 몇 차례 허용되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형당하기 얼마 전에는 발이 심각하게 붓고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등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져 운동을 거의 못했다. 실제로 사형당할 당시의 메리는 몸이 비대해져 있었던 데다가 탈모까지 심해져 거의 대머리 수준이라, 가발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메리는 자유를 얻으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외부와 비밀리에 서신 왕래를 계속했으며, 간간이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아들 제임스에 대한 그리움과 제임스를 잉글랜드로 데려와 직접 기르고 싶은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한 이런 어려운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기를 회상하는 것으로 견뎌냈다고 한다.

2.8. 결국 참수당하다

1586년 8월 11일, 메리 스튜어트가 모반을 꾸민 편지가 발각되었다. 프랑스인 사제에게 넘어간 신학생 발라드와 스페인 군인에게 포섭된 앤서니 배빙턴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배빙턴은 한동안 메리의 첩자 노릇을 했다. 총 6명의 연루된 조직원들이 붙잡혔고, 이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한 후 메리를 여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계획을 자백했다.

하지만 저 모반을 꾸민 내용이 담겨있는 편지가 위조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는데, 아직도 저 편지가 위조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메리가 직접 쓴 편지이기는 하나 엘리자베스 1세의 심복들이 메리를 제거하기 위해 판 일종의 함정에 낚여서 썼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메리는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당연히 잉글랜드에서는 그녀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청원이 빗발쳤다. 그러나 메리의 처우를 두고 엘리자베스 1세는 이전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메리를 처형할 경우, 비록 폐위되었다곤 하나 자신의 혈육을 처형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되고, 그렇다고 처형하지 않자니 몇 번이나 그랬듯 국내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으로서 끝없이 반란의 불씨가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메리를 처형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엘리자베스 1세도 견딜수 없어 메리를 재판에 회부했다. 메리는 변호인도 허락되지 않은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렇게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메리의 죄는 무겁지만 목숨만은 부지해 달라."
고 정중하게 요청했으며, 메리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도 사형만은 면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결국 1587년 2월 8일에 메리는 노스햄프턴셔에서 귀족들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메리는 처형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조건을 걸었는데, 첫 번째로 자신을 프랑스 땅에 묻어줄 것, 두 번째로 그동안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준 시종들과 시녀들에게 자신의 유산과 연금을 줄 것, 세 번째로 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할 것 등을 내걸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가톨릭식 기도를 하고,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리의 아들이었던 제임스 6세는 메리가 사형을 당한 후에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작 생후 10개월 때 어머니인 메리와 헤어지고 그녀에게 적대적인 귀족들에게 양육되면서, 그들로부터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
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자랐던 터라 모친에 대한 정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코틀랜드는 이미 잉글랜드와는 국력에서부터 열세였던 데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맞설 경우 사실상 예약된 거나 다름없는[46]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득이 될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메리를 선처해달라고 한 요청한 것은 형식에 불과했다.[47]

게다가 메리도 자신의 아들에게 애정을 나타냈는지는 불분명하다. 메리는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은 제임스가 개신교 신자로 자라자 유언으로
"나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펠리페 2세에게 양도하겠다."
고 한 적도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모자 모두 서로에 대한 정이 그다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는 해석도 있다. 무엇보다 제임스 탄생 당시에 아이의 생부이자 남편인 단리 경과 사이가 심각하게 나쁜 관계였던지라, 제임스에게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에든버러 요새에서 태어난 제임스도 메리가 곁에서 키우지 않고 거의 곧바로 스털링 성으로 보내버려, 거기서 대대로 어린 왕족들을 돌봤던 귀족들 밑에서 자랐다. 설령 메리가 자신의 곁에서 아이를 직접 기르지 않은 것은 스코틀랜드 왕실의 관례라고 볼 수 있어도, 출산 후 불과 4주 만에 뱃놀이를 간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논란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사형 집행장에 서명하여 메리를 처형하기는 했지만, 메리 사후
"나의 잘못이 아니다."
라며 사형 서류를 가져온 데이비슨에게 화풀이를 했고, 몇몇 신하들은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런데 2일 뒤엔 사형을 농담거리로 삼고, 며칠 뒤엔 침울해져서 후회하며 종잡을 수 없이 변덕을 부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을 곧 복권시킨 것을 보면, 우환거리가 사라진 것에 대한 후련한 마음이 더 앞섰을 듯 하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의 '격노'는 스페인과 프랑스와 같은 가톨릭 국가의 군주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연기일 가능성이 높다. 엘리자베스 1세를 떠받들었던 대신들조차 연기를 그만두길 은근히 종용할 정도였다고.

어린 시절을 프랑스 궁정에서 보내 화려함과 우아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던 메리는 항상 옷을 화려하게 입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패션에 신경을 썼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그 위를 검은색 망토로 덮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톨릭에서 순교를 상징하는 색이었다.[48] 즉, 옷차림을 통해 자신은 결백하며 가톨릭 순교자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단두대의 받침대에 목을 올려두고는 쉼 없이 라틴어
"인 마누스 투아스, 도미네, 콘피데 스피리툼 메움."
("In manus tuas, Domine, confide spiritum meum.")
("주여, 당신께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49]
이라고 되뇌었다.

참수될 때 도끼로 참수되어 고통스럽고 끔찍하게 죽었는데, 첫 번째 일격은 뒤통수에 빗맞아 두개골을 반쯤 부수어 놓았으며, 이때 메리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일격으로 인해 과다출혈로 숨을 거뒀으며, 세 번째 일격에 목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처형집행인이 메리의 잘린 머리를 집어들고
"신이시여. 여왕(메리)을 구하소서."
라고 말했지만 가발 쪽을 잡는 바람에, 메리의 잘린 머리가 굴러떨어져서 공개 처형을 지켜보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목이 완전히 잘린 뒤에도 입술은 15분 동안이나 계속 움직였다고 한다. 메리의 드레스 속에 있었던 작은 반려견은 메리가 사망하자 그 속에서 나와 메리의 핏물 위에 누워 애통해 했고, 거기서 끌려나온 뒤에도 계속 먹이를 거부하더니 이내 죽었다고 한다.

이후 관계자들은 메리의 시신을 발가벗겨 사망 당시에 입고 있었던 옷가지를 전부 태우고, 메리의 피가 튄 모든 곳을 깨끗이 닦았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이 유품으로 삼을 만한 물건이나 순례할 만한 곳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에 메리의 시신은 새 옷으로 갈아 입혀진 후 알코올로 방부 처리된 뒤 납관에 안치되어 피터버러 성당에 매장되었다.

훗날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자신의 모친인 메리의 시신을 발굴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안장되어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다시 매장했는데, 이로써 평생 직접 만난 적이 없이 대립했던 두 여왕이 드디어 사후에 나란히 누워 있게 되었다.

3. 메리의 사후

메리가 참수당한 후 1년 뒤에 스페인 펠리페 2세가 메리의 처형을 침략의 명분 중 하나로 삼아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결과는 칼레 해전 참조.

잉글랜드에서는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승하하자 잉글랜드 내의 튜더 혈통이 단절되었고, 이에 튜더 왕조의 유일한 후손이자 스코틀랜드 왕으로 있었던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헨리 7세의 유일하게 남은 후손이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의 즉위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일인을 국왕으로 모시게 되면서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4. 평가

4.1. 당대

당대에도 아름답고 우아하며 지적이고 교양이 풍부했던 매력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교양에 비해 감정 기복이 심하고[50] 자제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친척인 엘리자베스 1세와 아들 제임스 1세와는 달리 통치력과 정치력 모두 무능했던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일생일대의 라이벌로 평가받는 엘리자베스 1세와 비교해보면 메리의 실책과 성격적인 결함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머니 앤 불린이 아버지 헨리 8세에 의해 참수당하고 자신도 사생아로 격하당하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겪은데다가, 심지어 이복언니인 메리 1세의 지나친 경계로 4년 동안 감옥 생활까지 하면서 피 말리는 권력 투쟁을 겪은 끝에 힘겹게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불우한 시절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여러 나라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지성미를 갖춘 건 물론, 뛰어난 통치력과 정치적 능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당대에는 물론 후대에도 잉글랜드의 명군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반면에 메리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왕위에 오르고 프랑스의 왕비로 낙점되는 온갖 행운을 쉽게 얻었으며, 철들기 전부터 프랑스에서 편안하고 곱게만 자라왔기 때문에 어려운 것을 참고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간 경험이 없었다.

더군다나 엘리자베스 1세는 인생의 대부분을 치열한 정쟁을 겪으며 살아온 탓에 가능한 밝고 싹싹한 모습으로 지내려 노력했으며, 이복남동생인 에드워드 6세와 자신을 돌봐준 새어머니 캐서린 파는 물론 이복언니인 메리 1세[51] 등, 왕실 가족들은 물론 신하들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메리는 자신을 예뻐해준 시어머니인 카트린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사꾼이라고 폄하한 것은 물론[52],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서도 무능한 통치만을 일삼다가 보스웰 백작과의 부도덕한 재혼으로 결정타를 날려 신하들에 의해 폐위당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잉글랜드로 망명했을 때도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여왕 자리에 집착하는 바람에, 자신을 도와준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반역을 도모하는 배은망덕한 행동을 저질렀다.[53] 메리는 죽기 직전까지도 여왕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을 만큼 지나친 왕족 의식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고, 이런 눈치 없고 무능한 언행을 일삼은 끝에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자신을 받아준 엘리자베스 1세의 은혜를 저버린 메리는 잉글랜드, 특히 성공회 교도들 사이에서 평가가 안 좋다 못해 "술수에 능한 요녀이자 악녀"로 볼 정도로 그녀를 경멸했다. 본토인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리 평가가 좋지 않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화려한 성상이나 성화 등을 배격하고 경건함을 지향했으며, 소박하고 근엄한 문화가 대세였다. 그러나 메리는 현지의 민심에 어긋나게 휘황찬란하고 우아한 프랑스 궁정 문화를 고집하여 사치스럽게 살았으며, 스코틀랜드에 연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어설프게 국왕 행세하려고 했다가, 신하들과 국민들의 반발과 불만을 사며 나라를 열강 사이의 국제전에 휘둘리게 한 뒤 신하들에게 쫒겨났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에다가 왕권이 약했던 스코틀랜드의 실세들[54]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때문에 존 녹스, 조지 뷰캐넌, 앤드류 멜빌 등 당대의 개혁가 및 문필가들이 두고 두고 메리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4.2. 현대

현대에 와서는 메리 스튜어트를 종교 분쟁과 왕위 갈등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도 생겨났다.

오늘날에는 '비운의 미녀 군주'로 재조명되면서 각종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다루어졌는데, 이런 시각은 역사학계에서는 큰 지지를 얻지 못하지만 대중적으로는 널리 퍼진 시각이다.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가 평전을 쓰면서 메리를 호의적으로 비평한 것이 유명한데, 츠바이크는 소설가이지 역사학자는 아니었다. 실증적인 관점에서 보면 츠바이크는 개인으로서 메리의 비극적인 인생만 부각했지, 군주로서의 입장을 고려한 역사학적인 판단을 한 것이 아니므로, 이에 기반하여 메리에 대한 재평가를 비판하는 의견도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많다.

스코틀랜드 역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 왜곡이 대중 문화를 통한 어설픈 우상화로 인해 훨씬 더 많이 퍼진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외국인이었던 데다가 군주로서 갖춰야 할 분별력도 없어서 왕위에서 쫒겨난 사람을 관광용으로 미화하고 있다."라며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고유의 개신교 교파인 장로회의 큰 기틀이 마련되고 중세 후기부터 지속된 귀족, 도시민, 성직자의 삼각 과두정 체제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박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로서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메리 스튜어트의 극적인 개인사와 여성성만 자꾸 부각시켜서 정작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이 묻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이 널리 퍼진 이유는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시시콜콜한 신학적, 정치적, 이념적 문제보다 미녀 여왕의 사랑 이야기와 비극적인 삶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또한 녹스, 뷰캐넌, 멜빌 같은 동시대 스코틀랜드 역사를 주름잡은 종교개혁의 거두들이 하나같이 다혈질에 꽉 막힌 꼰대들인데다가 심지어 뷰캐넌 같은 경우, 알코올 의존증에 폭력쟁이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중요성과 별도로 인간적인 매력이 별로 없다.[55] 당대 최고의 라틴어 문장가이자 존 녹스를 이어 장로교회의 신학적 토대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종교개혁 이후 근세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민족주의 이념마저 창시한 것으로 평가되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최고의 학자인 조지 뷰캐넌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좀 비싼 감옥의 죄수나 마찬가지였던 어린 제임스 6세의 개인 교사를 했다. 하지만 뷰캐넌은 어린 왕이 학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면 때리기까지 했는데 이 밑에서 배운 제임스 6세, 훗날 잉글랜드의 왕이 된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이 죽은 지 한참이 지나고 자신 역시 노년이 된 뒤에도 라틴어 문장을 똑바로 못 외웠다고 만취한 뷰캐넌에게 흠씬 두드려 맞는 악몽을 꾼다고 호소했다. 왕실 자문회의 기록에 따르자면 이때 뷰캐넌이 제임스 6세를 두들겨 패는 꼴을 보다 못한 그의 시녀 중 하나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국왕을 이렇게 두들겨 패선 안된다고 항의하자 술냄새 풀풀 풍기던 뷰캐넌이 침 뱉듯 던진 말은 아래와 같다.
"시녀장은 시녀장 일이나 열심히 하시오, 난 내 책무를 다 할 뿐이니."[56][57]

그리고 젠더 담론이 역사적인 평가와 기억에도 큰 평가를 미치게 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혁자가 지지한 존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은 현대의 성평등적인 가치관과 노골적으로 충돌하는 탓에 대중적인 인기가 떨어진다. 《여군주 폭군론》의 원제를 직역하자면 《여자들의 극악무도한 정권에 맞선 첫 번째 나팔 소리》이다. 당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망명 및 유학 중이던 존 녹스가 1558년에 쓴 저서인데 이 책에서 존 녹스는 《성경》을 들어서,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천륜을 뒤집는 행위이니 여왕을 갈아 엎고 남자만 왕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이 출간된 1558년 당시에는 아주 공교롭게도 왕호까지 똑같은 잉글랜드 왕국 메리 1세 스코틀랜드 왕국의 메리 여왕이라는[58] 독실한 가톨릭 교도 여왕 2명이 각각 이웃 나라에서 재위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명의 메리 여왕들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과 동시에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한창 신나게 조지고 있다 보니, 당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개신교 종교개혁가였던 존 녹스가 보기에는
"이 두 메리라는 이단 가톨릭 광신도 미친 여왕년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을 봐라! 역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책이 출간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교도 여왕인 메리 1세가 승하하고, 같은 개신교도에 명군인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존 녹스는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존 녹스는 자신의 책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같은 나쁜 가톨릭 여왕들만 상대로 한 것이지, 엘리자베스 1세 같은 참된 개신교 여왕을 향한 게 아니라고 땀 한 바가지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을 했다. 당연히 엘리자베스 1세는 '여군주'로써 개신교 이전에 왕권을 능멸한 존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에 대해 노발대발했고, 존 녹스를 잉글랜드에서 영구 추방하면서 그의 저서인 《여군주 폭군론》을 금서로 지정했다. 이걸로도 모자라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내의 존 녹스를 추종하던 청교도들과 그의 제자들을 숙청하고, 심지어는 당시 장 칼뱅 신권 정치로 통치하고 있었던 제네바가 녹스의 《여군주 폭군론》의 출간을 허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교를 단절하고, 칼뱅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잉글랜드의 성공회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는 일단 같은 개신교로서 가톨릭 교도들에게 대항하여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논리로 전략적으로 협조했으나, 종교적 순수성보다 실리적인 왕실의 권위 확립이 더 큰 우선 순위였던 성공회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는 왕도 멋대로 갈아 치우고, 가치관도 반세속주의적이며, 왕권과 세속 정부에 대한 교권의 우월함을 주장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매파들을 상당히 고깝게 보았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장로교회와 영국식 칼뱅주의의 아버지인 존 녹스는 심각한 여성 혐오자였고, 장로교 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끌어올린 조지 뷰캐넌은 알코올 중독 폭력 교사였다. 녹스와 뷰캐넌의 학풍을 이어받아 '언약도 혁명'까지 1~2세대 장로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던 앤드류 멜빌도 광신적인 반세속정부주의자였다. 거기다가 2세대 교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아치볼드 존스턴, 알렉산더 핸더슨같은 언약도 혁명의 지도자들은 신의 왕국을 현세에 구현하겠답시고, 자식은 많이 낳아놓은채 양육은 한 번도 책임지지 않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가장들이였다. 심지어 존스턴과 핸더슨은 자신들이 에딘버러 성에서 혁명 정부를 이끌 동안, 버림받은 처자식들은 빚쟁이들에게 구걸하게 만들었던 막장 인성의 소유자들이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평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 기준으론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 특유의 도덕관념 때문에 상술한 16세기 후반~17세기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은 일기나 자서전도 많이 썼고, 내용도 신 앞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라도 지키는 양 성생활이나 가정 생활 같은 상당히 은밀한 개인적 내용들도 많이 적어 놓았기 때문에 깔 거리 발굴도 쉬운 편이다. 예로 들면 《언약도 혁명 선언문》의 저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아치볼드 존스턴만 하더라도 자기 일기에서 20살 때 14살짜리 곰보 자국이 흉했던 여아와 결혼하여, 처음엔 곰보 흉터를 흉해했으나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이 너무 아름다워 거기 반해 결혼 생활 내내 기도와 섹스만 반복하다가(...) 겨우 1년 뒤 자기 생각엔 섹스를 너무 많이 해(...) 어린 처를 병 걸려 죽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성욕을 주체 못 해 겨우 1년 뒤 중매로 다시 결혼했다는 내용을 대놓고 써 놓았으니(...) 현대인들은 메리 스튜어트 여왕에 대한 비판의 주 출처인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종교개혁가들이 긍정적으로 보일 리가 없고 그 반대 급부로 메리 여왕은 오히려 더욱 긍정적으로, 낭만적으로 부각된 것이다.

정치역사적 관점에서도 현대 스코틀랜드 국민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가 다시 부흥하고 있긴 하지만, 막상 유럽 전역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알파 버전이라 할만한 16~17세기의 민족 관념 형성을 주도한 로우랜드 개신교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정치 계파상으로 보면 대부분 17세기 후반, 18세기에 친영 통합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로 반잉글랜드 감정을 자양분으로 삼는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달리, 이 당시 16~17세기 로우랜드 스코틀랜드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은 잉글랜드가 아니라 자국 내 하이랜드, 서부 제도 가톨릭 게일어권 클랜들을 가장 큰 주적으로 보고 적대했다. 이들을 근현대적인 관점에서 '친잉글랜드 매국노'로 비하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문화적인 성향이 외부적으로 더 잘 알려지고 더 확실하며, 독특한 나머지 잉글랜드와 차별화되는 게일어 하이랜드 문화를 강조하는 성향이 더 강하고,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이념은 사회민주주의적인 성향에 20세기 중후반의 반제국주의적인 제3세계 민족주의 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59] 따라서 이 시기 로우랜드 개신교 지식인들의 핵심적인 사상적 요소였던 칼뱅주의 자체가 범세계적으론 주로 영미 경제문화적 엘리트 기득권과 관련된 인상이 강한지라 막상 역사적인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발흥은 언약파 칼뱅주의 민족주의자들을 떼어놓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종교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성향이 강하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현대 스코틀랜드 독립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의 역사 인식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메리 스튜어트에 반대한 로우랜드 스코틀랜드 엘리트들은 현대 사회정치적인 문맥에 따른 재평가나 재발굴이 하나도 없었다.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메리 여왕
(Mary, Queen of Scots)
<colbgcolor=#fff3e4,#331c00> 제임스 5세
(James V)
<colbgcolor=#ffffe4,#323300> 제임스 4세
(James IV)
제임스 3세
(James III)
덴마크의 마르그레테[60]
(Margaret of Denmark)
잉글랜드의 마거릿
(Margaret of England)
헨리 7세
(Henry VII)
요크의 엘리자베스[61]
(Elizabeth of York)
기즈의 마리
(Marie de Guise)
기즈 공작 클로드
(Claude, duc de Guise)
로렌 공작 르네 2세
(René II, duc de Lorraine)
필리프 드 구엘드레
(Philippe de Gueldres)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
(Antointte de Bourbon)
방돔 백작 프랑수아
(François, Comté de Vendôme)
룩셈부르크의 마리
(Marie de Luxembourg)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1남 제임스 6세 & 1세
(James VI & I)
1566년 6월 19일 1625년 3월 27일 덴마크의 아나
슬하 3남 4녀[62]

6. 기타

당대의 미인들 중 한 명이었다고 전해지며 특징으로 모후인 마리 드 기즈의 장신을 물려받아[63] 키가 180cm가 넘었다고 한다. 현대 기준으로도 180cm 이상의 여성은 모델 급의 엄청난 장신으로 취급받는데, 평균 신장이 훨씬 낮은 시기였으니 메리는 당대의 남자들보다도 훨씬 더 큰 거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일생의 라이벌이였던 잉글랜드 왕국 엘리자베스 1세도 175cm에 달하는 남자보다 큰 장신이었고, 본인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64] 당연히 메리가 더 컸다. 야사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1세는 어느 날 스코틀랜드 대사 앞에서 잉글랜드의 위엄을 한껏 뽐냈고, 이에 스코틀랜드 대사도 관례대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줬다. 그러던 중 양국 여왕들의 키 이야기가 나오자 대사는 이번엔 단호히
"저희 여왕께서 더 크십니다."
라고 얘기했고,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나보다 더 크다니 대체 얼마나 큰 키냐며 놀랐다고.

옥중에서 주로 암호문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해독되지 않은 편지가 2023년에 해독되어 공개되었다. #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당시 잉글랜드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의 평균 키조차도 크게 앞선 굉장한 장신이었다.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키. 모후인 기즈의 마리도 딸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매우 컸다고 한다. [2] 스코틀랜드 왕국에서는 두 번째 여왕이다. 스코틀랜드의 첫 번째 여왕은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였다. [3] 그러나 본명으로 불러도, 똑같이 본명이 '메리 스튜어트'인 후손 메리 2세와 헷갈리게 된다. [4] 유럽 문화권에서 왕실 인사를 부를 때 일부러 성씨를 붙이는 것은 왕실이나 왕족의 정통성이나 적법성을 부정하겠다는 의미다. [5] 다만 영국 왕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명칭에다가 따로 '1세'를 표기하지 않았다. # [6]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의 가문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합쳐져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7] 기즈 가문은 프랑스 왕국의 궁정에서 특수한 위치였다. 기즈 가문, 기즈 가문의 본가인 로렌 가문, 사보이아 공국 사보이아 가문과 그 분가인 사부아느무르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였기에 유럽의 통치 가문으로서의 대우를 받아서 왕족과 동일한 혼인이 가능했다. 또한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 가문처럼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의 대우를 받았다. [8] Marie de Guise, 1515년 11월 22일 ~ 1560년 6월 11일. 기즈 공작 클로드와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의 장녀다. 제임스 5세 이전에 롱그빌 공작 루이 2세와 결혼하여 아들 프랑수아(훗날 롱그빌 공작 프랑수아 3세)를 낳았지만 사별했고 이후 제임스 5세와 재혼하여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되었다. [9] 로버트 1세의 외동딸로 월터 스튜어트와 결혼한 마조리 브루스(Majorie Bruce). [10] 원문은 "It came with a lass; and it'll go with a lass." Lass 스코트어여자 아이를 뜻하는 말로, 출처는 존 녹스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였다. 그리고 거의 150년 뒤의 일이지만 스튜어트 왕조 최후의 군주가 앤 여왕이었으니 현실이 된 건 맞다. 비록 제임스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11] 별칭이 투명인데, 존재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선량하여 투명하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행적을 보면 개인으로선 몰라도, 전쟁도 잘 하고 신하들도 잘 조지는 등 별로 선량해 보이지는 않다. [12] 제임스 5세 제임스 4세 헨리 7세의 딸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왕비의 아들이었는데, 그가 헨리 7세의 후손이라는 점이 훗날 잉글랜드의 튜더 왕조가 단절되자 그의 손자이자 메리의 아들이었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큰 이유가 되었다. [13] 루이 9세의 먼 후손인 프랑스의 왕족으로 혈통친왕이기도 했던 방돔 백작 프랑수아 드 부르봉의 딸이다. 외손녀 메리 스튜어트의 멘토이기도 했다. [14] 혈통친왕(프랑스어: prince du sang)은 세습 군주제하에서 현 국왕의 직계로부터 갈라져 나간 정통성이 있는 방계 왕족을 말한다. [15]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메디치 가문이 막대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할 경제력이 있다는 점, 교황과 연줄이 있다는 점, 프랑스 왕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선호했다는 점 때문에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의 왕족과 결혼할 수 있었다. [16] 반대로 아들 제임스 1세는 꽤 자제력이 있는 왕이었기에 자신에게 원한을 심어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잘못도 덮어주어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17] 훗날 메리의 두 번째 남편이 된 헨리 스튜어트(단리 경)가 메리와 처음으로 동침한 후에 "여왕은 숫처녀였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는 야사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프랑수아 2세가 메리와 합궁 자체를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일부 전기 작가는 "메리와 프랑수아 2세가 당시에 모두 어렸던 데다가, 메리에게 있어 프랑수아 2세는 남편보다는 돌봐줘야 할 병약한 친구라는 인식이 커서, 성적으로 끌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18] 국왕 헨리 8세에 의해 영국국교회가 만들어짐. [19] 이 사람의 후손이었던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에 종군하며 신교도 장군으로 싸운 공을 인정받아 해밀턴 공작으로 격상되었다. 참고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영국군 기병대장이자 최초의 원수였던 오크니 백작 조지 해밀턴이 이 사람의 현손이었다. [20] 참고로 해밀턴 공작가와 그 분파들은 여성 승계를 인정하여 제2분파인 오크니 가문은 현재 백작이 해밀턴 공작가와는 거의 남남이다. 비슷한 계승법을 가진 가문으로는 말버러 공작가와 파이프 공작가가 있다. 참고로 말버러 공작가는 존 처칠이 남긴 딸의 모든 후손이 계승 가능하고, 파이프 공작가는 1대 공작의 딸들의 남계 후손(그래서 사우스테스크 백작가로 작위가 넘어감)이 계승 가능하며, 해밀턴 공작가는 1대 공작의 모든 후손이다. [21] 무력이 아니라 대화로 통치한 점 때문에 정적인 존 녹스를 제외하면 의외로 개신교 계열의 인물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적어도 딸 메리보다 훌륭한 통치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22] 메리의 부왕인 제임스 5세가 정부인 레이디 마거릿 얼스킨에게서 낳은 아들로, 메리 여왕에게는 이복오빠가 되었다. [23]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적대관계였고, 왕실에서는 개신교(위그노)를 이단으로 간주하며 탄압했다. [24] 본명은 로버트 더들리(1532/1533~1588). 엘리자베스 1세의 친우이자, 에드워드 6세의 치세 말년에 권력을 잡았던 노섬블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차남으로 바로 밑 남동생이 제인 그레이의 남편으로 그녀와 같이 처형당했던 길포드 더들리였다. 더들리 경은 훗날 레스터 백작이 되었으며, 양아들이 여왕 말년에 총애를 받다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을 당한 에식스 백작이었다. [25] 엘리자베스 1세가 승하할 경우, 튜더 왕가의 혈족은 명맥이 끊기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실은 헨리 7세의 혈통에서 계승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단리 경은 메리 여왕과 더불어 잉글랜드 왕위의 유력 계승자였다. 단리 경의 가문은 비록 스튜어트 혈족이었지만 스튜어트 가문이 스코틀랜드 왕가가 되기 이전에 분가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단리 경의 증조모인 엘리자베스 해밀턴이 제임스 2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부계로도 어느 정도 가까운 혈족이었다. [26] 격이 높은 국서에 대한 칭호이다. 격이 낮은 국서의 칭호는 'Prince consort'이다. [27] King Consort 직위는 물론 Duke of Albany 작위 또한 범상치 않은데, 어릴 때 죽은 메리 여왕의 오빠, 즉 제임스 5세의 차남에게 준 작위였다. [28] 훗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함. [29] 스코틀랜드의 외교관이자 메리와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던 제임스 멜빌 경의 《비망록》에 의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사자로 온 그로부터 제임스 왕자의 탄생 소식을 듣자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스코틀랜드 여왕은 아들을 낳았다!"라며 상심하면서 분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엘리자베스 1세가 제임스 왕자의 탄생에 대해 "감사한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멜빌 경의 기록은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30]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의 가수로, 메리 여왕의 비서 역할을 했으며 한 때는 단리 경과도 친구였다. 그러나 메리가 리치오를 가까이하고, 리치오도 메리와 가까워지면서 단리 경은 리치오를 질투하고 미워하여 서로 사이가 멀어졌다. [31] 여성 군주가 신하들 중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면 상황이 복잡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봉건주의 체제에 부딪치면서, 여왕으로서 지지를 못받고 있었던 메리는 더 그랬다.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사태를 본 엘리자베스 1세는 레스터 공작 로버트 더들리와 평생 친구이자 연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결혼은 절대 하지 않았다. [32] 이때 메리 여왕의 증언에 따르면 임신한 여왕에게 루스벤 경과 같이 온 귀족들이 총구를 들이대거나 칼로 찌르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당연히 루스벤 경은 이 사실을 부인했다. [33] 훗날 제임스 6세(1세)가 실제로는 리치오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제임스 6세는 리치오의 아이라고 하면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34] 사실 단리가 저지른 행위 자체가 반역이나 다름없는 중죄였다. [35] 메리가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던 와중에 보스웰 백작이 단독으로 암살했다는 견해도 있다. [36] 여기에 대해서는 보스웰이 중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37] 이때 보스웰 백작이 왕세자 제임스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는데, 마(Mar) 백작이 제임스를 숨기며 결사적으로 방어해서 보스웰이 제임스를 찾는데 실패했고, 제임스는 유폐 또는 살해를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38] 아무리 단리 경이 메리 여왕의 애인인 리치오를 잔혹하게 죽인 사건의 주범이며, 메리 여왕과 사이가 나빴다고는 하나 엄연히 여왕의 남편이였으니, 하다못해 용의자인 보스웰 백작을 구금하고 진상조사를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어쨌든 패착 중의 패착인 셈으로 결혼 발표도 차라리 보스웰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면 다들 "저 역적놈 새퀴가 여왕 폐하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강제 결혼을?" 하면서 여왕에 대해서 동정론이라도 생겼을 것이다. [39] 일명 보석함 편지로 불린다. 단리 경의 살인을 모의하거나, 보스웰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다. 메리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메리의 반대 세력들이 편지를 위조할 틈조차 없었다."며 진짜라고 주장했으나, 다른 학자들은 "위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40] 참고로 이로써 스튜어트 왕조는 내리 3대가 아주 어린 시절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메리의 아버지인 제임스 5세는 부왕 제임스 4세가 전사하는 바람에 만으로 두 살이 되기 전에 즉위했고, 메리는 생후 6일 만에 제임스 5세가 승하해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6세는 한 살 무렵에 어머니가 폐위당하자 즉위했다. [41] 나중에 메리의 이복오빠인 모레이와 시아버지인 레녹스 백작은 귀족들 사이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반대파 귀족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42] 첫 번째 탈출에선 세탁부로 위장하여 배를 타다가 드러난 팔이 너무 하얘서 신분이 탄로나는 바람에 경비병들한테 들통이 나 무산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에는 성 문지기 아들을 유혹(?)하여 밤중에 열쇠를 훔쳐 탈출에 성공했다. [43] 이런 상황에 대해 파커 대주교는 "우리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께서는 늑대 귀를 잡고 계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44] 토머스 하워드의 손자이자 제4대 노퍽 공작. [45] 군주의 위엄을 나타내는 천개 모양의 상징물. [46] 메리가 사망하면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였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역사대로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가 되어 두 나라의 국왕을 겸하게 된다. [47]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잉글랜드의 왕위가 탐나서 자신의 어머니 메리의 죽음을 못 본 체하고 그녀를 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 [48] 가톨릭 계열 미션스쿨 중에는 붉은색 교복을 입는 학교도 있는데, 이 역시 순교자의 피를 상징한다. 또한 추기경이 입는 빨간 수단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순교 성인의 축일에는, 사제가 붉은색 제의를 입고 미사 시간 전례 등의 전례를 집전한다. [49]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남긴 말이었다. [50]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인 존 녹스와의 대담에서 분을 참지 못한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51] 메리 1세가 엘리자베스 1세를 반역 혐의로 감옥에 가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전까지 하나뿐인 자매로서 잘 대해줬고, 결국 사망하는 순간에 다른 가톨릭 교도 왕족이 아닌 튜더 왕조의 마지막 남은 생존자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52] 결국 메리는 이런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해 카트린의 미움을 사게 되어, 첫 번째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승하하자 쫒겨나다시피 프랑스를 떠나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에서 폐위당해 갈 곳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땐, 전 시가이자 외가이기도 한 프랑스로 망명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53] 이것이 메리가 처형당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가톨릭 측이 엘리자베스 1세는 사생아에 불과하고 메리야말로 적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주장했음에도, 스코틀랜드에서 폐위되었다가 겨우 망명한 메리를 받아주고 지원해준 사람은 오직 엘리자베스 1세뿐이었다. 사실상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수없이 분란을 일으키니, 여왕의 친척이고 뭐고 간에 엘리자베스 1세의 신하들이 메리의 처형을 주장한 것도 당연했다. [54] 유력 귀족, 도시민,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매파에 속했던 장로회 등. [55] 특히 뷰캐넌은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이었다. [56]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을 매우 싫어했고, 뷰캐넌은 이 일로 직위 해제되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뷰캐넌의 능력은 높이사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뷰캐넌은 장관이 되었을 때도 제임스 1세와의 관계가 좋지 못해 얼마 못 가 해임되었다. 그래도 제임스 1세가 다른 관직을 주는 배려는 해주었다. [57] 제임스 1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뷰캐넌에게 배운 것이 엄청나게 많다고 인정은 했다. 성년이 될수록 왕권을 명백하게 종교적 권위 아래에 두는 장로회의 과격성을 배격하고, 영국 국교회 고교회파의 국왕 중심적이며 신학적인 온건성을 추구했던 건,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장로회 지도부에 대한 염증도 상당히 컸으리라고 추측된다. [58] 심지어 가톨릭에서 '메리'라는 이름은 개신교도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성모 신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59] 당시 로우랜드 언약파 스코틀랜드 지도부의 방침은 이제 같은 개신교를 믿게 되었으니 스코틀랜드를 단순히 잉글랜드에게 여 드십쇼 하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잉글랜드의 개신교는 짭개신교 국교회니깐 진짜 칼뱅주의적 종교개혁을 겪은 스코틀랜드가 주도하는 형태의 영국 통합을 추구했고, 훗날 1707년 양국 통합 때도 독립된 사법권을 강하게 주장하며 결국 관철해냈듯이 스코틀랜드 민족의식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근세적인 관점에서 국가 자체는 잉글랜드와 공유해도 여전히 그 안에서 독립적인 스코틀랜드적 정체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연히 이런 섬세한 역사적 평가는 대중 담론의 차원에선 순식간에 지워지고 무시되기 일수이다. [60] 크리스티안 1세의 고명딸이다. [61]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이다. [62] 보헤미아의 왕비 알주베타, 찰스 1세 등. [63] 마리는 5피트 11인치(180cm)가 넘는 장신의 여성이었다. [64] 현대에도 키가 큰 것이 작은 것보다는 낫다는 인식이 강한데 당시에도 관념상 큰 키는 곧 그 사람의 위엄과 직결되었다. 군주가 키가 크다는 건 그만큼 위풍당당하다는 뜻이었으므로. [65]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는 메리 스튜어트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다. [66] 앤 불린의 이야기를 그린 < 안나 볼레나>, 메리 스튜어트의 마지막을 그린 < 마리아 스투아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내연남 에식스 백작이 처형되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 로베르토 데브뢰>를 통틀어서 여왕 3부작이라고 부른다. 앤 불린 여왕이 아니지만, 영어로 왕비와 여왕은 "Queen"이라 쓰는 것이 맞으니까. [67] 주세페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돈 카를로>가 바로 쉴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 [68] 많은 매개체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이는 가상이다. 둘은 생애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의 사형집행서에 사인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69] 이 장면은 원작자 쉴러의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70] 사실 이 사건은 펠리페 2세가 유도하지 않았는가 하는 해석이 있다. 펠리페가 잉글랜드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가톨릭 여왕 메리를 처형한다'는 상황을 만들려 했고, 그러려면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죽일 상황도 만들어야 하니까 '메리의 파벌이 엘리자베스를 암살하려 시도하고 실패'하도록 유도했다는 해석이다. [71] 자객을 맡은 배우가 이때는 별 인지도는 없었으나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지도도 있고 품절남인 에디 레드메인이다. [72] 이 중 메리 스튜어트가 입었던 드레스 중에는 아예 패션쇼 컬렉션이 출품되었던 드레스까지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