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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01:21:11

캐서린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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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B8><colcolor=#000000> 잉글랜드 헨리 8세의 제5계비
캐서린 파
Catherine Parr
파일:1280px-Catherine_Parr_from_NPG.jpg
이름 캐서린 파
(Catherine Parr)
출생 1512년
잉글랜드 왕국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사망 1548년 9월 7일 (향년 35~36세)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수들리 성
배우자 에드워드 버그 경 (1529년 결혼 / 1533년 사망)
제3대 래티머 남작 존 네빌 (1534년 결혼 / 1543년 사망)
헨리 8세 (1543년 결혼 / 1547년 사망)
제1대 수들리의 시모어 남작 토머스 시모어
(1547년 결혼)
자녀 메리 시모어
아버지 토머스 파 경
어머니 모드 그린
형제 윌리엄, 앤
종교 가톨릭 성공회
서명 파일:캐서린 파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왕비 이전2.2. 왕비가 된 이유2.3. 3번째 재혼이자 6번째 왕비2.4. 위험이 닥치다2.5. 헨리 8세의 죽음2.6. 왕비의 비밀 재혼2.7. 불행과 죽음
3.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헨리 8세의 6번째이자 마지막 왕비.

2. 생애

2.1. 왕비 이전

캐서린 파는 한미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헨리 8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기 전에 이미 2차례 결혼해서 모두 사별한 바 있었다. 두 남편들은 모두 나이 많은 재력가였는데 캐서린의 친정 형편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아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친정을 위해 원치 않은 결혼을 한 듯하다.

첫 결혼은 17세 때 환갑이 넘은 노인과 했지만, 불과 4년 만인 1533년 사별했다. 얼마 뒤에 역시 노령의 부자 라티머 경( 1493년 ~ 1543년)과 결혼했지만 라티머가 몸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캐서린은 어렸을 때부터 늙은 남편들의 실질적인 간병인 노릇을 해야 했지만, 남편들이 결혼하고 몇 년 뒤에 죽으면서 아직 젊을 때 부유한 과부가 되어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신분이 됐다. 라티머와 사별했을 당시에 캐서린 파는 31세였는데 우연히 그녀를 알게 된 헨리 8세는 자연히 캐서린을 탐내게 된다.

2.2. 왕비가 된 이유

캐서린과의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을 무렵, 헨리 8세는 이미 5번이나 결혼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2번째 왕비 앤 불린과 5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를 참수해버린 뒤라 그들처럼 어리고 자기 주장 강한 성격의 아가씨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또한 자신도 이미 늙은 데다가 승마 사고로 다리 한 쪽을 못 쓰게 되었고 고도 비만까지 겹쳐서 몸이 불편했다. 그래서 젊고 예쁜 여자만 쫓아다니던 예전과는 달리 나이 많은 남편을 편안하게 돌보는 데 능숙한 연륜 있는 여자를 왕비감으로 물색하게 되었다. 그런 헨리 8세의 눈에 든 사람이 바로 라티머의 아내인 캐서린 파로, 남편 라티머는 어차피 조만간 사망할 게 확실할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헨리 8세는 느긋하게 캐서린이 홀로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캐서린은 당시 첫사랑인 토머스 시모어[1]를 남편감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에 헨리 8세의 5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가 목이 잘리고 궁정에 피바람이 한바탕 몰아친 직후에 이전의 다른 왕비들도 모두 좋지 못한 결말을 맞았고, 이 때 헨리는 스포츠맨으로 유명했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이미 다 늙은 데다 심한 병으로 고생하며 성질까지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그때까지 늙고 병든 남자하고만 결혼해서 아내라기보다는 간병인으로 살아야 했던 캐서린으로서는 이제라도 비슷한 나이의 남자와 결혼해서 평범하고 오붓한 생활을 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훨씬 더러워진 헨리의 성질 때문에 거부는 불가능했고, 헨리 8세는 기어이 캐서린을 왕비로 삼아 자신의 말년을 지키게 했다.

2.3. 3번째 재혼이자 6번째 왕비

이렇게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천성이 현명하고 너그러웠으며 높은 교양도 갖춘 캐서린은 나이가 들면서 병에 시달려 성격이 까탈스러워진 헨리 8세를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헨리 8세 역시 그런 헌신적인 아내인 캐서린을 아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서로 존중하며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캐서린 파는 이미 전 남편의 전처 소생 자녀들을 살뜰히 챙긴 바 있었기에 왕비가 된 후에는 헨리 8세의 자식들에게도 잘 해주었다. 일단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생모를 잃은 어린 에드워드 6세도 잘 돌봐 주었고, 헨리 8세를 설득해서 그때까지 사생아 신분이었던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공주로 복권시켜 왕위 계승권을 회복하게 해 주었다. 헨리 8세가 서거한 후에는 막장부모 슬하에서 불행하게 살던 왕의 조카손녀 제인 그레이를 맡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약 1년 정도 다정히 양육하기도 했다.[2]

또한 캐서린 파는 교육에 관심이 많은 만학도였다. 귀족 출신이라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기초적인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의붓자녀들의 교육에 열정을 쏟으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뒤늦게 라틴어 신학 등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헨리 8세와 열정적으로 신학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고, 역대 잉글랜드 왕비 중 처음으로 책을 2권이나 집필하여 출판하기도 한다. 다만 그 시대상 어쩔 수 없이, "여성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정치적인 역량 역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544년에 헨리 8세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 출전하자,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자신에게 맡긴 섭정직을 훌륭히 수행했다. 당시 섭정을 수행하던 원로들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리더십은 캐서린 파가 발휘했다고 한다. 왕족 및 대귀족 출신 여성들이야 성장하면서 어느 정도의 정치적인 교육을 받게 되지만, 캐서린 파는 그냥 그런 평범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서 기본적인 교육만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2차례의 결혼 기간에도 늙고 병든 남편들을 병간호하느라 다른 귀족 부인들처럼 사교계에 드나들며 세상 물정을 익힐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섭정으로서 국가 통치를 잘 해냈다는 것은 탁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2.4. 위험이 닥치다

하지만 평온히 왕비 역할을 수행하던 그녀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헨리 8세는 가톨릭에서 독립하여 잉글랜드 성공회의 수장임에도 교리상으론 가톨릭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캐서린 파는 대륙 신학에 영향받은 복음주의자였기 때문. 외국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국어인 영어로 된 기도문을 작성하는 등, 캐서린 파는 자신이 개신교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캐서린 파는 보수적인 헨리 8세와 달리 진보적인 편이라, 앤 불린이나 캐서린 하워드가 그랬듯이 불같은 성정의 헨리 8세의 눈밖에 나게 됐다. 헨리 8세가 부상으로 고통받으며 힘들어하자 캐서린 파는 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종종 종교 토론을 하곤 했는데, 이때 그녀는 자신의 신념대로 프로테스탄트 논리를 펼쳐 헨리 8세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던 것.

가톨릭 세력은 캐서린 파의 몰락을 획책했고, 윈체스터의 주교 스티븐 가드너와 대신 라이오슬리는 헨리 8세를 설득해서 캐서린 파의 체포영장을 발행한다. 당시 "헨리 8세는 캐서린 파와 이혼하고 서포크 공작부인과 7번째 결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는 터였다. 그런데 어떠한 연유로 캐서린 파는 이 체포 영장을 미리 읽어보게 되었고,[3] 위기를 절감한 그녀는 헨리 8세에게 가서 "나는 무지한 여성에 불과하며, 전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했을 뿐이다. 헌데 내가 주제넘게 굴어 전하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니 송구하며, 앞으로는 전하의 가르침만 받겠다"라는 요지의 말로 밤새 헨리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녀의 울고 불고 순종적인 태도에 헨리 8세는 마음이 풀어져 결국 캐서린에게 "우린 여전히 친구요."라고 화해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라이오슬리가 왕비를 체포하러 들어오자 그를 손수 두들겨 패서 쫓아냈다.

2.5. 헨리 8세의 죽음

헨리 8세가 캐서린과 결혼하고 4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캐서린은 끝까지 헨리 8세의 왕비로 남을 수 있었고[4], 덕분에 헨리 8세의 서거 이후 왕비이자 왕대비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다.

헨리 8세는 자신을 성심성의껏 돌봐준 캐서린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는지 캐서린에게 고급 식기들을 유산으로 남기고 연금을 지급하며 이후 원만히 재혼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유언장에 명시했다고 한다. 다만 의붓아들인 에드워드 6세를 보필할 섭정위원회 위원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데다가,[5] 사별한 이후 궁을 떠나야 했고, 정치적 영향력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게 됐다. 그래도 어쨌든 선왕비이자 현왕의 의붓어머니였고,(즉, 왕대비이다.) 무엇보다 태어난 지 며칠 뒤에 생모를 잃었던 에드워드 6세는 자상한 새어머니인 캐서린 파를 잘 따랐다고 한다.

한편 야심가인 토머스 시모어는 캐서린의 저러한 입지를 탐내어 무리할 정도로 서둘러 재혼을 추진했다.[6]

2.6. 왕비의 비밀 재혼

1547년에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첫사랑이던 토머스 시모어와 비밀리에 재혼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갑자기 결혼한데다가 그 결혼이 극비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완고하고 보수적인 의붓딸 메리 공주는 의붓어머니 캐서린과 그럭저럭 잘 지냈었는데 갑작스레 재혼한 그녀에게 "그새 우리 아버지를 잊은 것이냐"며 한동안 캐서린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토머스 시모어의 형인 에드워드 시모어의 부인인 앤 시모어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앤 시모어는 캐서린 파가 자신의 시동생과 재혼하자 "캐서린 파는 이제 왕비도 아니고 내 시동생의 아내이니, 이제는 내가 왕의 큰외숙모로서 궁정에서 가장 높은 여자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캐서린 파와 기싸움을 벌인 것이다. 앤은 원래 캐서린 파가 왕비였던 시절에 그녀의 시녀였는데, 헨리 8세 사후에 캐서린이 곧바로 자신의 시동생과 재혼하자 이제는 캐서린보다 자신의 신분이 더 높다면서 왕가의 보석을 두고 캐서린 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캐서린 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둘째 의붓딸인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새 가정을 꾸려서 행복한 새출발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관심을 쏟아주는 계모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재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35세의 당시로선 뒤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자신의 아이를 갖는 기쁨도 누렸다. 이 시절에 35세라 하면 21세기의 50세나 마찬가지인 나이다.

2.7. 불행과 죽음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남편 토머스 시모어가 당시 겨우 14살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를 유혹한 것이 발각됐다. 야심 많은 토머스 시모어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다가서려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직 어렸던 엘리자베스도 외모가 출중한 토머스 시모어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대로 유혹에 넘어가 부적절한 관계가 시작됐던 것이다.

적어도 육체적 관계까지는 안 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캐서린은 새 남편과 아꼈던 의붓딸과의 관계에 큰 충격을 받고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래도 캐서린은 엘리자베스와 인연을 끊지는 않았고, 의붓딸을 원망하는 대신 진심으로 그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계모의 진심어린 모습에 엘리자베스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토머스 시모어가 다시 수작을 걸어오자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캐서린은 엘리자베스를 용서했고, 캐서린의 산달이 다가왔을 무렵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캐서린의 빠른 재혼을 비난했던 첫째 의붓딸 메리 공주도 캐서린과 화해를 하고 순산을 기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결혼하고 1년쯤 뒤에 산달이 다가왔고 캐서린은 모두가 고대하던 아들 대신 딸을 낳았다. 아이 이름은 캐서린의 첫째 의붓딸 메리 공주의 이름을 따서 메리라고 지었다.[7] 그러나 캐서린은 처음으로 친자식을 낳은 기쁨을 미처 누리지 못하고 산욕열 때문에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캐서린은 고열에 시달리면서, 자신을 찾아 온 지인들을 붙잡고 토머스 시모어와 엘리자베스에 대해 원망을 퍼부었다고 한다. 앞서 남편과 의붓딸의 행동을 너그럽게 넘어가준 듯했지만 자신의 굴곡 많은 삶[8]에 처음으로 제대로 꾸린 가정다운 가정이 남편과 의붓딸의 불륜으로 파탄 위기를 맞은 일로 큰 상처를 받아서 그 사실을 무덤까지 조용히 끌고 가기 억울했던 듯하다. 지인들은 그제서야 토머스 시모어와 엘리자베스 공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한 캐서린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토머스 시모어는 당황해서 '왜 이러냐? 난 당신에게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캐서린을 달래고 입을 막으려 했지만, 캐서린은 '아니긴 뭐가 아냐?!'며 계속해서 독설을 퍼부었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가장 잘해준 계모 캐서린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캐서린은 그렇게 원망과 독설을 퍼부은 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정신을 수습하여 '남편에게 모든 재산을 남긴다.'는 유언을 남기고[9] 숨졌다. 이때 겨우 36세였는데 변덕쟁이 헨리 8세가 죽음으로써 앤 불린 캐서린 하워드처럼 수 틀리면 목 날아갈 위기에서 자유로워진 지 고작 1년 6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헨리 8세의 모든 왕비들이 그랬듯이, 그의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의 삶도 참 기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캐서린 생전에 갈등을 빚었던 손위동서 앤 시모어는 캐서린이 죽자, 시동생인 토머스 시모어에게 먼저 다가가 '우리가 사이가 나빠졌었던 건 전 왕비인 캐서린 때문이다.'라며 화해를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캐서린이 유일하게 사랑한 남편이자 마지막 남편이며, 캐서린에게 심한 마음의 상처도 입혔던 토머스 시모어도 그 대가를 치르듯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토머스는 캐서린 사후에도 외조카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실권자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계속 엘리자베스에게 추근거리는 등, 형 에드워드 시모어와 정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외조카 에드워드 6세를 자기 수중에 두려고 시도했다. 결국 이 일이 원인이 되어 '국왕을 납치하고 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캐서린이 목숨을 걸고 낳은 딸 메리 시모어는 고작 생후 7개월 만에 양친을 모두 잃고 천애고아가 되었다.

아버지 토머스 시모어가 생전에 큰어머니 앤 시모어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큰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지인인 서포크 공작부인에게 맡겨졌다. 더구나 토머스 시모어의 유산은 형 부부에게 상속됐는데도 앤 시모어가 고아가 된 시조카를 맡은 서포크 공작부인에게 양육비를 일절 지급하지 않아서, 서포크 공작부인이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전 왕비'의 딸을 키우는데 너무 돈이 든다는 푸념 섞인 편지도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의 큰외삼촌으로서 섭정을 맡으며 서머싯 공작이 된 앤의 남편 에드워드 시모어 또한 몇 년 뒤에 동생 토마스처럼 반역죄로 처형당하는데, 이후 의회에서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상속된 토마스 시모어의 재산을 적법한 상속자인 메리 시모어에게 상속하라'는 법령이 통과되어 서포크 공작부인은 숨통을 틀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메리 시모어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비록 왕녀는 아니었어도 한때 왕비였던 사람의 딸이고 새 왕 에드워드 6세의 외사촌인만큼 성인기는 커녕 약간의 사리분별이 가능한 아동기~청소년기까지만 살았어도 최소한의 기록은 남았을 텐데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영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점을 감안할 때 캐서린이 목숨을 맞바꾸면서까지 낳았던 메리 역시 요절해서 부모의 뒤를 따랐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추측. 정확히는 2살인 1550년 이후의 기록이 불명이므로 1550년경 사망했으리라 추측된다. 일부 학자는 메리가 장성해서 결혼했다고 주장하며 그 배우자의 이름을 제시하기도 하나 뒷받침해 줄 근거는 없다.

기이하게도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들에게는 "이혼 → 처형 → 사별(산모사망)"의 사이클이 2번 반복되었다. 마지막 아내였던 캐서린 파 역시 불행하게도 이 사이클에 포함됐는데, 그래서 첫 사이클의 마지막이었던 3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처럼 캐서린 파도 출산 후 얼마 못 가 산욕열로 숨졌다. 물론 헨리 8세의 아이를 낳다 죽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유일하게 낳은 아이 역시 요절했다는 점 역시 동일하다.

3. 매체에서

3.1. 튜더스

파일:external/pds20.egloos.com/b0078460_4d876754bba26.jpg
졸리 리처드슨[10]이 연기한 캐서린 파.

시즌 4 중반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고령에 지병까지 겹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라티머를 각별히 돌보는 후처로 등장하지만, 토머스 시모어와 밀회를 가지면서 라티머 사후에 그와 재혼할 것을 약속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라티머에게 씌워진 반역 혐의를 벗기고자 궁중 연회에 참석했다가 공교롭게도 헨리 8세의 눈에 띄고 만다. 이후 캐서린은 영문도 모른 채 헨리 8세의 부름을 받고 단둘이 만나게 된다. 그에게서 남편의 결백을 보장받고 안도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으로부터 라티머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전 남편들과 직접 낳은 자녀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하여 당혹스럽게 만든다. 캐서린이 머뭇거리다 아이를 낳은 적은 없다고 답변하자 이에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11]

짧은 첫만남이 끝나고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 갑자기 온갖 호화로운 선물을 가져다 주고, 캐서린은 선물의 의미를 짐작하며 크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토머스 시모어가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고 싶지 않냐"는 말을 넌지시 건네자 캐서린은 경악하며 단호히 아니라고 말했다.[12] 이전의 왕비들이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은데다 이제는 노쇠한 헨리 8세의 정신적 건강 상태마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캐서린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왕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고, 여태껏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이어왔으니 남편이 죽은 뒤 당신과 재혼하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토마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헨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이후 캐서린이 궁정에 와 있을 때 그녀가 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토머스를 네덜란드 대사로 임명해 출국시킨다.

헨리 8세의 전격적인 인사조치로 토머스 시모어와 반 강제로 헤어진 후에, 캐서린은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라티머에게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헨리가 캐서린에게 보낸 선물을 라티머마저 보게 되고, 그는 참담한 표정을 짓는다.[13] 얼마 뒤 캐서린은 라티머의 임종을 지키게 됐는데 라티머는 죽기 바로 직전에 캐서린에게 "Go to hell.(지옥에나 가시오.)"라고 독설을 한다. 그간 말은 못했어도 생전에 아내를 뺏기는 걸 보게 됐다는 자괴감이 상당했던 듯. 그 직후에 남편의 죽음으로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캐서린에게 에드워드 시모어가 헨리의 청혼을 전달하면서 한 화가 끝나는데, 이때 청혼을 받는 캐서린의 표정은 그야말로 절망스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캐서린에게 에드워드 시모어는 "당신은 이제 잉글랜드에서 가장 행복한 여성이 되셨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캐서린은 청혼을 거절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결국 다음화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왕비가 되었다.

비록 억지로 왕비가 되었다지만 의붓자식들 격인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와 모두 가깝게 지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헨리 8세의 고름이 흐르는 다리를 직접 보살피는 등 따뜻한 마음씨를 보인다. 헨리 8세조차 본인의 상처를 보여주는 걸 만류했지만, 캐서린은 "이보다 더 심한 상처들도 봤다."라며 침착하게 치료했다. 배우의 이미지 때문인지 헨리 8세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제인 시모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가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캐서린 파는 루터교회 신자인 것. 프로테스탄트 처형에 열을 올리는 가드너 주교는 그녀가 개신교 신자라는 심중을 잡고는 조사를 시작한다. 그와중에 그녀가 종교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신의 의견을 아낌없이 피력하자, 헨리는 그녀의 지성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언짢아하기까지 했다.[14]

결국 체포 명령이 떨어졌지만, 명령이 이행되기 하루 전에 그 공문이 캐서린에게 은밀히 전달된다. 캐서린은 자신이 개신교도라는 증거를 모두 없애고 무사히 위기를 넘긴 후, 헨리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위기를 넘긴다. 헨리도 캐서린을 더이상 의심치 않겠노라고 약속한다. 다만 캐서린에 대한 체포 영장을 취소해야 하냐는 질문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다음날 대법관은 병사들을 데리고 헨리와 함께 있는 캐서린을 찾아와 체포해서 런던탑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 그러자 헨리는 당장 사라지라며 역정을 퍼부은 뒤 내쫓고 캐서린에게 그들을 동정하지 말라고 한다. 이후 캐서린을 처형하려는 공작의 주동자인 가드너 주교 역시 궁정에서 쫓겨났다. 캐서린이 처신을 잘하기도 했지만, 헨리 역시 자신을 잘 돌봐주었던 그녀에게까지 굳이 벌을 내려 자신의 말년을 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애정없이 결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젠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노인이 되어버린 헨리를 보살피며 어느 정도 정이 들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헨리가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과 의붓자식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헨리로부터 직접 듣자 몹시 슬퍼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헨리는 그녀에게 울지 말라며 자신의 사후에도 그녀가 합당한 대우를 받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캐서린이 헨리 사후에 고작 2년도 못 살고 갔다는 역사를 감안하면 참으로 눈물나는 일이지만.

졸리 리처드슨과 메리 1세 역의 사라 볼저는 실제로도 엄마와 딸 정도로 나이차가 많이 나고 당연히 드라마에서도 외모상 나이차가 꽤 있어 보이는데, 실제 역사의 캐서린 파는 메리보다 겨우 4살 연상인 언니뻘의 젊은 여인이었다.

3.2. 식스 더 뮤지컬

헨리 8세의 여섯 왕비들을 다룬 식스 더 뮤지컬에도 등장한다. 테마색은 파랑색, 음악적 모티브는 앨리샤 키스에게서 받았다.
다른 왕비들 사이의 경쟁이 과열되어 유산 경쟁[15]까지 나오자 대결에 회의감을 느끼고 노래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다른 왕비들이 혼자 잘난 척 한다며 비꼬자 마음을 바꿔 새 노래를 부르기로 한다. 그렇게 부르는 노래인 I don't need your love는 헨리 8세의 눈에 드는 바람에 억지로 토마스 시모어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왕비가 되어 살아남은 이야기와 자신의 다른 모습들[16]이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라는 한 명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묻혀버린 점에 대한 파의 설움을 담고 있다.[17]

이후 다른 왕비들에게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헨리 8세의 여섯 아내였기 때문이니 경쟁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다같이 I don't need your love의 리믹스 버전을 부르며 헨리에게 '우린 너의 사랑이 필요없다'라고 선언한다.

왕비들이 역사를 다시 쓰는 넘버 SIX에선 역사를 바꾸고 자유롭게 노래하게 된 다른 왕비들의 노래를 듣고 마음에 들어하며 그들을 찾아가 그룹을 결성하고, 리믹스 앨범을 발매한다.
[1] 헨리 8세의 3번째 왕비로 에드워드 6세의 생모 제인 시모어의 셋째 오빠. 헨리 8세의 처남. [2] 마지막 남편인 토머스 시모어가 제인 그레이를 에드워드 6세의 왕비로 들이려 했기 때문에 후견인 자격으로 제인을 데려왔던 것인데, 에드워드 6세의 계모였던 캐서린이 난산으로 요절한 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토머스 시모어마저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 이 결혼은 물 건너가고 만다. [3]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중에 " 헨리 8세가 일부러 영장을 캐서린의 눈에 띄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캐서린의 종교적 입장은 못마땅했지만, 자신을 정성껏 간호하고 자식들도 잘 돌본 캐서린을 내치는 것도 원하지 않아서 일부러 영장을 미리 눈에 띄게 해서 처신할 기회를 줬다는 의견. [4] 헨리 8세의 장례식 때 왕비로 인정받은 건 제인 시모어와 캐서린 파뿐이었다. 나머지는 혼인무효화가 됐거나 처형 당했기 때문. 그래서 헨리 8세는 오래 전에 사망한 제인의 곁에 합장됐다. [5] 서양은 동양과 다르게 왕대비의 정치 참여를 철저히 막는다. [6] 아무리 실권은 없다지만 왕대비라는 입지 자체는 무시할수 없었고, 헨리 8세의 말년이 하도 막장이다보니 재혼한거 가지고 왕대비의 지위를 흔드는 사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종친들의 가장 웃어른은 엄연히 왕대비인 캐서린 파이므로 에드워드 6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후계 문제에도 관여할 수 있다. [7] 왕가의 보석을 놓고 캐서린과 기싸움을 벌였던 손윗동서 앤 시모어가 캐서린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고소해 했다는 비화가 있다. 당시의 귀족 여성에게는 남편에게 후계자가 되어줄 아들을 꼭 낳아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앤 시모어 본인은 아들을 많이 낳은 반면에 캐서린은 늦은 나이에 겨우 딸 하나만 낳았다는 점에서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다. [8] 세 전 남편 모두 엄청난 연상에 골골대는 환자였고 사랑 없이 순수한 정치적 의도의 결혼이었다. [9] 아무리 미워도 방금 낳은 자기 딸의 친부이자 위독한 자신이 회복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딸의 유일한 보호자가 될 남편이었으니 딸의 장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을 듯하다. [10] 영화감독 토니 리처드슨의 딸이다. 리암 니슨의 부인인 나타샤 리처드슨의 여동생, 즉 니슨의 처제이기도 하다. 2011년도에 나온 영화 <위대한 비밀>에서는 젊은 엘리자베스 1세로 등장한 바 있다. [11] 만약 캐서린이 전 남편들과 자녀를 낳았다면 왕비로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던 듯. 실제로 캐서린이 2번이나 결혼해 사별한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바 없는, 그래서 처녀와도 같은 몸이라는 점이 헨리 8세가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 큰 원인이 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출산 경험이 불임이 아님을 입증해주는 것이므로 헨리 8세의 눈에 든 이상 왕비가 되어야만 했다는 반박도 있다. 당시 헨리 8세는 노령에 고도 비만으로 거의 불임 상태인지라, 새 왕비 후보를 더 고를 형편도 못 되었다. [12] 이때 캐서린의 반응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정색을 하는 표정으로 나왔다. [13] 라티머는 "벌써부터 죽은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 같다." 라고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14] 드라마 내내 헨리는 자신의 아내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15] 아라곤과 불린은 서로 유산을 몇 번 했는지 이야기하며 싸운다. [16] 책을 펴낸 작가였고, 여성의 배움을 위해 싸운 점과 여자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점 등. [17] 제목인 I don't need your love는 1절에선 토마스 시모어에게, 2절부터는 헨리 8세에게 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