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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0:24:41

위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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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초대 국왕
위그
Hugues
파일:Les Roi Hugues Capet.jpg
출생 938년 / 941년[1]
서프랑크 왕국 파리
(現 프랑스 공화국 파리)
사망 996년 10월 24일 (향년 55/58세)
프랑스 왕국 파리
(現 프랑스 공화국 파리)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987년 7월 3일 ~ 996년 10월 24일
서명 파일:위그 카페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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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파리 백작 대 위그
어머니 작센의 헤드비히
형제자매 베아트리스, 엠마, 외드, 앙리
배우자 아키텐의 아델라이드
자녀 헤드비히, 지젤, 로베르 2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혈통2.2. 대 위그의 시대2.3. 오토 1세의 그림자2.4. 영광을 되찾다2.5. 랭스 대주교의 지지와 로테르의 견제2.6. 프랑크인의 왕2.7. 카롤루스 왕족인 하로렌 공작 샤를의 반격2.8. 말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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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프랑크 카페 왕조 창건자로, 그의 치세부터 관습적으로 서프랑크가 아닌 프랑스라고 부른다.

2. 생애

2.1. 출생과 혈통

위그 카페는 프랑크 공작 대 위그(Hugues le grand)와 작센의 헤드비게(Hadwig von Sachsen)[2] 사이에서 938년과 941년 사이 어느 해에 태어났다.

모계로 위그 카페는 독일 오토 왕실의 핏줄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 그리고 서프랑크 왕 루이 4세의 왕비였던 작센의 게르베르가(Gerberga von Sachsen)의 외조카였다.

한편 부계로는 일드프랑스의 대영주 가문인 로베르 왕가의 일원으로서, 조부가 바로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한 바 있었던 로베르 1세였다. 대바이킹 전쟁의 영웅으로 로베르 왕가 최초의 국왕이었던 외드는 위그 카페의 종조부였고, 로베르 1세의 사위였던 라울 왕의 왕비 프랑스의 엠마(Emma de france)는 고모였다.

심지어 로베르 1세의 왕비, 그러니까 위그 카페의 친조모인 베르망두아의 베아트리스(Béatrice de Vermandois)는 위대한 카롤루스 대제의 부계 후손이었다.

정리하자면 위그 카페는 독일 오토 왕실의 피와 서프랑크 카롤루스 왕실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꽤 굉장한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2.2. 대 위그의 시대

로베르 왕조는 9세기 말 서프랑크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카롤루스 왕조 출신의 왕들이 연이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서프랑크의 귀족들이 점차 선거군주제를 주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비만왕 카를 3세와 단순왕 샤를 3세가 귀족들에게 폐위되자 각각 세습이 아닌 선거를 통해 로베르 가문 출신의 두 왕을 추대한 바도 있었으니, 그들이 외드 로베르 1세였다.

로베르 1세가 승하하고 그의 사위였던 라울이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했다. 이후 그가 승하했을 때 대 위그는 스스로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Herbert II de Vermandois)[3]와 부르고뉴 공작 검은 위그(Hugues le Noir)라는 두 쟁쟁한 경쟁자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잉글랜드 왕국에 망명을 가 있었던 단순왕 샤를 3세의 아들이었던 루이를 데려와[4] 왕으로 추대했다.

이 판단으로 대 위그는 마침내 서프랑크의 지존이 되었다. 전적으로 그의 도움을 통해 왕위를 얻은 루이 4세는 위그에게 프랑크 공작(Dux Francorum)이라는 작위를 내렸고[5], 동시에 '왕국에서 두 번째인 사람'으로 선언했다[6].

더군다나 943년 루이 4세가 원수인 에르베르 2세를 죽이면서 그의 영지가 네 아들들에 의해 분열된 탓에, 대 위그는 손도 대지 않고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하는 행운까지 누렸다. 이로써 서프랑크 왕국에서 대 위그를 비롯한 로베르 왕가에 대항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고[7], 그들은 오랜 옛날의 선조인 피피누스 3세가 그랬듯이 착실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걸음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2.3. 오토 1세의 그림자

954년 대 위그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던 루이 4세가 승하했다. 계승자였던 로테르는 겨우 13살에 불과했고, 독일의 오토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서프랑크를 지배하려고 했다. 그는 동생인 로렌 공작 겸 쾰른의 대주교 작센의 브룬(Brun von Sachsen)을 로테르의 보호자이자 서프랑크의 섭정으로 임명했고, 956년 대 위그가 죽자 이번엔 위그 카페의 보호자이자 로베르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즉 오토 1세의 동생 브룬이 한 번에 왕국의 섭정직은 물론, 그 왕국의 실권자가 다스리는 공국의 섭정직까지 꿰차게 된 것이었다.

오토 1세는 위그 카페와 로테르 왕을 동시에 통제하여 로베르 왕조와 카롤루스 왕조, 그리고 자신의 오토 왕조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했다. 오토 1세는 셋 중에서 가장 약한 카롤루스 왕조를 더 지지했고, 그렇기에 아버지 대에 그랬듯이 로베르 왕가와 카롤루스 왕가는 여전히 사이가 나빴지만, 960년 로테르는 위그 카페를 달래기 위해 프랑크 공작은 물론 네우스트리아 영주들의 자치와 반독립을 허용해주는 조건으로 네우스트리아 변경백 작위를 내려주기도 했다.

삼촌 때문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위그 카페는 성공적으로 아버지 대 위그의 위치를 승계했다. 그러나 로베르 가문의 권위는 점점 추락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한때 대 위그의 봉신이었던 블루아의 티보 1세(Thibaud de Blois)가 샤르트르와 샤토됭을 정복했고, 마찬가지로 봉신이었던 앙주의 풀크 2세(Foulques II d'Anjou) 또한 브르타뉴를 차지했다.

960년 대에 쓰인 외교 문서들을 보면 대 위그 때와는 달리 귀족들이 로테르에게도 충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로테르를 대신해 출병하여 노르망디 공국과 싸운 영주들도 있었고,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3세를 언급하는 헌장도 두 차례나 작성되었다.

결국 이렇게 로베르 왕조의 태양 또한 점점 저무는 듯 보였으나...

2.4. 영광을 되찾다

서프랑크를 집어삼킬 야욕을 드러내던 대제 오토 1세가 붕어했다. 로테르는 이에 로렌(로트링겐, 로타링기아)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오토 2세는 대놓고 하로렌 공작에 로테르의 동생이었던 샤를[8]을 임명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는 서프랑크의 왕권을 모욕하고, 로테르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로테르는 물론 위그 카페까지 여기에 매우 격노했고, 두 사람은 군대를 편성해 기습적으로 로렌을 침공했다.

위그 카페는 978년 8월 로테르와 함께 고도 아헨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도시를 마구 약탈한 뒤 돌아갔다. 그러나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던 오토 2세 역시 자신이 앉힌 하로렌 공작 샤를과 함께 서프랑크를 침략했다.

오토 2세는 서프랑크의 북부 일대를 파괴하며 파죽지세로 진군했고, 랭스와 수아송, 랑을 지나갔다. 이후 그는 메츠 주교 토이데리히 1세를 통해 샤를을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시키기까지 했다. 로테르는 파리로 도망쳤지만, 오토 2세와 샤를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위그 카페의 구원군이 도착했고, 그는 오토 2세에게 당장 포위를 푼 후 독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마침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 2세와 샤를은 더 이상의 공성전은 무리라고 판단한 뒤 퇴각을 개시했지만, 수아송의 엔 강을 건너면서 많은 병력을 잃어야 했다.

이 결정적인 구원으로 위그 카페는 다시 아버지 대 위그 대의 영광을 되찾았으며, 국왕 아래의 1인자 자리에 다시금 오를 수 있었다.

2.5. 랭스 대주교의 지지와 로테르의 견제

랭스 대주교는 메로베우스 왕조 클로비스 1세때부터 프랑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주교좌 중 하나였다. 랭스 대주교는 전통적으로 갈리아의 왕권을 대변한다라고 여겨졌으며, 이에 프랑스(프랑크) 왕은 랭스 대주교의 대관을 받아야만 했을 정도였다.

즉 왕관을 수여해준다는 그 특성 때문에 랭스 대주교의 지지는 왕위 경쟁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10세기 말, 당시 랭스 대주교였던 아달베롱은 969년 로테르에 의해 임명된 자였지만, 그의 가문은 독일의 오토 왕조와도 연줄을 맺고 있었다. 아달베롱은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인 석학이었던 오리야크의 제르베르[9]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옛 로마 제국이나 카롤루스 제국 시절처럼 유럽이 다시금 단일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 오토 1세가 서프랑크를 지배하던 시절 그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로테르를 열렬히 지지했었다. 오토 1세의 그늘에 눌려 살던 그가 서프랑크의 왕이 된다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다시 프랑크 왕국이 재통일될 날이 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얘기했듯 로테르는 그렇게 물렁한 인간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명예가 실추되면 단숨에 군대를 이끌고 가는 전형적인 중세의 전사였다. 이에 아달베롱과 제르베르는 오토 대제가 붕어하자마자 다시 프랑크 세계에 분란을 일으키는 로테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이 찾은 이상적인 후보자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위그 카페였다.

아달베롱과 제르베르가 그를 선정한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였다.

1. 카롤루스 왕조의 일원이 아닐 것.
2. 오토 왕조의 간섭을 깨뜨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없을 것.

1의 경우 카롤루스 왕조의 일원이 아니라면 정통성이 약할 것이고, 그에 따라 신성 로마 황제의 지배하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리란 생각에서, 2는 말 그대로 군사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독일)의 간섭을 뒤집어서는 안 되므로.

이런 점에서 카롤루스의 피가 있기는 하지만 모계로 먼 후손에 불과하고, 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토 왕조에 비견할 바는 아닌, 로베르 왕조의 위그 카페가 바로 그들이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후보자였던 것이다.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된 위그 카페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그는 랭스 대주교의 신임을 잃어버린 로테르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고, 제르베르가 아달베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테르는 이름뿐인 녀석이지만, 위그 (카페)는 행동력과 실력이 모두 있는 사내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10].

한편 979년, 로테르는 장남 루이를 왕위계승자로 선포했다. 우선 위그 카페를 비롯한 귀족들은 이에 따랐고, 콩피에뉴에 모여 루이의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듬해 로테르는 위그 카페의 세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보고 로렌을 포기하며 오토 2세와 화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위그 카페는 두 군주가 화해하기를 원치 않아서 몽트뢰이 요새를 점령하고 로마로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인 방돔의 부르샤르 1세와 오를레앙의 아르눌프와 합류한 뒤 로마에서 신성 로마 황제 오토 2세와 교황을 만났고, 이에 로테르와 위그 카페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로테르가 먼저 15살의 왕세자 루이를 40대였던(...) 앙주의 아델라이드에게 장가를 보내 선수를 쳤고, 그녀는 지참금으로 오베르뉴와 툴루즈 백작령을 가져왔으나[11] 결혼생활이 좋지 못하여 2년 뒤 이혼했다.

983년, 로테르를 홧병나게 만들었던 황제 오토 2세가 붕어했다. 그러자 로테르는 그 뒤를 이은 오토 3세의 정적들을 회유해 포기했던 로렌을 또다시 침공했는데, 위그 카페는 지난번과는 달리 이 원정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후 로테르가 베르됭을 점령하고,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의 동생인 고드프리라는 자를 포로로 잡았는데, 반로테르파였던 아달베롱과 제르베르는 즉시 위그 카페에게 도움을 구했다. 위그 카페의 도움으로 고드프리는 구출되었고, 986년 그의 경쟁자였던 로테르는 마침내 한 많은 생을 마치고 승하했다.

2.6. 프랑크인의 왕

로테르가 승하하고 루이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왕의 기조를 이어 로렌을 되찾아오려는 목표를 세웠지만, 얼마 살지 못하고 사냥 중 낙마로 승하했다.

랭스의 리슈(Richer de Reims)와 제르베르와 같은 역사가들은 이때 카롤루스 왕조가 멸문되었다고 기술했다. 그런데 사실 오토 2세가 임명했던 로테르의 동생 하로렌 공작 샤를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제르베르는 그냥 루이 5세가 자손없이 죽은 김에 이 기회를 잡기 위하여 편향적으로 기술했을 것이다.

여하간 위그 카페는 서프랑크의 민심이 자신을 따른다는 것을 알고 루이 5세가 승하하기 전부터 10년 동안이나 경쟁자 제압에 몰두했다. 반항적인 영주들을 정벌했고, 무엇보다 가장 큰 경쟁자인 하로렌 공작 샤를에 맞서야 했다. 로테르의 치세때부터 위그 카페의 입지가 점차 탄탄해지자 샤를은 앞서 말했듯이 오토 2세와 동맹을 맺었고, 형수였던 이탈리아의 엠마도 마구 헐뜯었다.

그러나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은 샤를의 비난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상리스에서 고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샤를더러 왕족으로서의 자존심도 버린채, 독일로 도망쳐 더 낮은 신분의 여자와 결혼한 놈이라며 공개적으로 욕했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위그 카페의 서프랑크 국왕 선출을 주도했다.
"공작[12]에게 왕관을! 그는 고귀함과 위업, 그리고 실력에 있어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가장 저명한 인물입니다. 왕좌에는 자고로 출생으로 세습되는 권리뿐만이 아니라, 그 영혼에 있어서도 고귀함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오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87년 6월 1일, 누아용에서 위그 카페는 대관식을 치렀고, 1개월 뒤인 7월 3일 파리에서 재차 대관식을 치르며 프랑크인의 왕으로 등극했다. 바야흐로 카페 왕조의 프랑스 왕국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위그 카페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장남 로베르를 공동왕에 앉히려고 시도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분쟁없이 자연스럽게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위그 카페를 왕위에 앉혀준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이 애당초 세습을 경계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왕이 두 명이나 있을 수는 없다면서 반대했지만, 위그 카페는 바르셀로나 백작 보렐 2세[13]를 도와 무어인을 무찌르기 위해 스페인으로 출병할 계획을 밝히면서, 혹여나 자신이 전사했을시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동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끝내 그해 말 로베르를 공동왕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2.7. 카롤루스 왕족인 하로렌 공작 샤를의 반격

그러나 자신의 정당한 계승권을 이대로 포기할 샤를이 아니었다. 그는 로베르 왕조 시절부터 전통적인 정적이었던 베르망두아 가문과 골수 카롤루스 충성파였던 플랑드르 가문의 지지를 받고, 카롤루스 왕가의 후손이 다스리던 랑을 차지했다. 위그 카페와 그의 아들 로베르는 두 번이나 출정하여 포위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이 죽자 공석이 된 대주교좌에 대해서도 결정해야 했다. 후보자로는 아달베롱과 함께 위그 카페를 서프랑크(프랑스)의 왕위에 올린 1등 공신이었던 제르베르와 로테르 왕의 사생아였던 아르눌프가 있었는데, 위그 카페는 아르눌프를 선택했다. 토사구팽당한 제르베르의 입장에서는 서운했겠지만, 아직 프랑스 왕국에 산재해 있는 카롤루스 왕조의 추종자들과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때 아르눌프는 관습에 따라 위그 카페에게 충성맹세를 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맹세를 어겼을 시 받을 저주 또한 걸었다. 그런데 아르눌프는 얼마 가지 않아 카롤루스파의 추종자들을 모아 위그 카페의 뒤통수를 때리고(...) 랭스를 그대로 삼촌인 하로렌 공작 샤를에게 바쳤다. 이때 아르눌프는 배신이 아닌 척하기 위하여 성문이 뚫려 패배해 겁 먹은 것처럼 행동했고, 샤를과 서로 약속된 욕을 주고 받다가 후에 샤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위그 카페는 곤경에 빠졌으나, 샤를이 랑을 함락할 당시 포로로 잡았던 랑 주교 아달베롱[14]이 탈출에 성공하여 위그 카페에게 보호를 요청해 왔다. 위그 카페는 그를 받아들였고, 랑 주교 아달베롱은 보답으로 샤를에게 위그 카페와 휴전할 것을 제안했다[15].

그런데 샤를쪽에 사절로 떠났던 랑 주교 아달베롱은 돌연 그날 밤 자고 있었던 샤를과 랭스 대주교 아르눌프를 기습해 붙잡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위그 카페의 앞으로 끌려왔고, 위그 카페는 샤를을 오를레앙에 가두어 죽을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16].

배신자 아르눌프의 경우, 위그 카페가 로마 교황 요한 15세에게 직접 해임을 요구했다. 그런데 요한 15세는 로마 귀족들과 분쟁 중에 있어서 이에 대해 답변을 내놓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에 위그 카페는 국내에서 따로 시노드를 소집했다. 여기서 제르베르가 아르눌프를 통렬하게 비판했고, 결국 아르눌프는 해임되었으며, 제르베르가 랭스 대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와서 요한 15세가 이 결정을 거부하고, 아헨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주교들은 도리어 993년과 994년 겨울 사이 셸에 모여 아르눌프에 대한 시노드의 결정을 확인했고, 격노한 요한 15세는 그들을 로마로 소환했지만 주교들은 로마의 상황이 개판이라며 불응했다.

교황은 이번엔 특사까지 보내 프랑스 주교와 독일 주교를 무송(Mousson)에 소집하려고 했는데, 이것마저 독일 주교만 도착했고, 프랑스 주교는 가던 중에 위그 카페와 로베르 부자에게 저지당해 가지 못했다.

한편 랭스 대주교 제르베르는 다른 주교들의 지원에 힘입어 신성 로마 황제가 통제하던 로마 일대 교회들의 독립을 지지했다. 위그 카페가 무서워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 해임을 마지못해 지지했던 주교들이 연달아 파문당하는 걸 보고, 요한 15세에게 자신이 적이 아님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간 교회의 분열과 분란을 막기 위해 제르베르 역시 위그 카페를 배신하고 주교구를 버려둔 채 이탈리아로 떠났다가, 훗날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 즉위했다.

위그 카페의 분노가 파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로마의 교황청까지 닿을리가 만무했으므로, 위그 카페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로마는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 해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덕분에 아르눌프는 위그 카페가 승하한 이후에 신분을 회복하고, 다시 고위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2.8. 말년

위그 카페가 오른 프랑스 왕국은 하나의 나라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아키텐, 가스코뉴, 브르타뉴[17], 노르망디, 부르고뉴 같은 곳들은 사실상 카페 왕실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였고, '프랑스 왕이 다스리는 프랑스'라고 할 만한 곳은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의 왕령지들, 그리고 근처의 일 드 프랑스 지역, 그것도 아주 일부에 불과했고, 그나마 카롤링거 왕실의 상리스와 푸아시, 아티니 등도 편입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후대의 카페 왕들에게 이 사분오열된 프랑스를 통합하는 것은 평생의 과제였고, 위그 카페의 등극은 곧 기나긴 투쟁의 서막이었다.

만장일치로 선출된 국왕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권위와 정통성만큼은 충분히 챙겨주었지만, 이탓에 오히려 누가 네놈을 백작으로 만들어주었느냐고 말했다가 누가 너를 왕으로 만들어주었느냐는 역공을 당하기도 했다.[18] 하지만 카페 왕조는 40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프랑스 왕국을 통치했고, 안정적으로 후계를 이어나가며 마침내 유럽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988년 위그 카페는 자신의 후계자인 로베르 2세와 플랑드르 백작 아르놀프 2세의 미망인 로잘라와의 혼인을 시키면서 지참금으로 현재의 오드 프랑스의 항구 도시인 몽트뢰유를 왕실령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이당시 카페 왕조의 왕실 직할지들은 파리를 기준으로 월경지로서 블루아 백작령, 베르망두아 백작령 내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거리 또한 상당히 멀었다. 더욱이 이렇게 월경지로 분산된 각각의 직할지중 오를레앙이 비교적 클 뿐 파리를 포함한 나머지 직할지의 규모는 작았고, 합쳐봐야 고티 후작령만한 수준이었다.

이는 블루아 백작령과 베르망두아 백작령 두 세력 중 하나가 카페 왕가와 척을 질 때 상당히 위험한 요소였고, 991년 봄, 블루아 백작은 당시 위그 왕의 친구이자 측근인 방돔의 부르샤르 1세가 소유하고 있던 멜룬을 점령하였다. 이 쿠데타 이후 왕, 앙주 백작, 노르망디 공작 사이에 연합이 형성되었다. 멜룬은 여름에 탈환되었고 외드는 퇴각했으나 외드는 다시 낭트를 점령하였으나 앙주 백작 폴크 네라에 의해 즉시 탈환되었다. 993년 블루아 백작 외드 1세는 랑의 아달베롱 주교와 결탁해 위그 카페와 로베르 2세를 파리 외곽으로 나오게끔 유인한 후 납치해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에게 넘기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무산되었지만 카페 왕조의 권력이 대귀족들에 비해 약하는지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다만 공식적인 처벌은 없다는 것이지 995년을 기점으로 블루아와 심지어 이 사건에 연관이 없었던 베르망두아 백작령의 세력권이 약화되고, 대신 카페 왕가의 세력권이 강화되면서 직할지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직활지 주변에 있던 블루아와 베르망두아의 세력 하에 있던 봉지들이 왕실령에 편입되었다. 관련 지도[주의]

그렇게 로마 제국, 카롤루스 왕조에 이어 세 번째로 유럽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대가문의 창건자 위그 카페는 996년 10월 24일, 생을 마감했다. 왕의 유해는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은 '로베르 2세'로서 부왕의 바람대로 쭉 통치를 이어나갔으니, 카페 왕조의 시작이었다.

3. 기타

위그 카페가 만든 공동왕 제도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로베르 2세 이후에는 동아시아식으로 치면 사망 직전의 왕이 양위를 하여 상왕이 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 혈통의 단절이 일어났다면 다시 선출제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왕조가 짧게 교차한 동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프랑스의 왕조가 단절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어지면서 자손인 사자왕 루이 8세의 시대(1223년 ~ 1226년)에 오면 카페 왕조의 세습은 당연시되고, 공동왕 제도도 없어졌다.[20] 루이 8세가 단명한 데다가 후임자가 성왕 루이 9세라서 명목상의 보험인 공동왕 제도도 필요없었다.

자손이 매우 번성했기 때문에 많은 유럽 왕가들이 위그 카페의 직계 후손이었으며, 모계 혈통까지 포함하면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위그 카페의 후손이었다. 당장 프랑스만 봐도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모두 위그 카페의 자손들이자 카페 왕조의 부계 측 방계 왕조였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 재판을 받았을 때 그의 공식 이름은 '루이 카페'(Louis Capet)였다. 부르봉 가문은 성왕 루이 9세의 막내 아들인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가 부르봉 지역의 상속녀이자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의 손녀였던 베아트리스와 결혼하면서 개창되었는데 베아트리스의 조부인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역시 카페 왕조의 방계 가문인 카페-부르고뉴 가문(Capetian House of Burgundy) 소속이었기 때문에 부르봉 가문의 시조인 부르봉 공작 루이 1세는 부계로도, 모계로도 모두 카페 왕조의 후예였고, 따라서 동양식으로 따지면 부르봉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의 성씨는 '카페'였다. 단, 유럽의 군주들은 성씨 대신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의 이름을 성씨로 사용했기 때문에 '드 부르봉'(de Bourbon)을 성씨로 사용했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방계 후손들까지 합치면 허다한 군주들과 왕족을 배출했다. 프랑스 카페/ 발루아/ 부르봉 왕조의 군주 36명, 나바라의 카페/ 부르봉 왕조의 군주 16명, 나폴리 국왕[21] 11명, 스페인 국왕 11명, 포르투갈 국왕[22] 29명,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국왕 페르난두 1세의 사생아가 개창한 아비스 왕조, 아비스 왕조의 창시자인 주앙 1세의 장남[23]의 후손이 개창한 브라간사 왕조, 시칠리아 국왕(카페-앙주 왕조) 4명, 폴란드 국왕 4명, 헝가리 국왕[24] 4명, 양시칠리아 국왕[25] 4명, 라틴 제국 황제 3명, 알바니아 국왕 2명, 에트루리아 국왕 2명, 브라질 황제(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 2명을 배출했다.


[1] 현재는 941년생 설이 더 유력하다. [2] 오토 왕조(작센 왕조 또는 리우돌프 왕조)의 시조였던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딸이었다. [3] 그는 랭스의 대주교 위그의 아버지였고, 무엇보다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와 동맹이었다. [4] 루이 4세의 모후였던 에아드기푸는 잉글랜드를 통일한 애설스탠의 누이였는데, 남편이었던 샤를 3세가 폐위되자 어린 아들 루이를 데리고 친정인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5]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중세 봉건제의 공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Dux란 본래 로마 제국에서 지방군사령관을 뜻하는 말이었고, 이 시기에는 그렇게 자칭한 로마 관직이 봉건영주보다는 여전히 관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즉 대 위그가 얻은 공작이라는 자리는, 동양권에서 군벌에게 수여했던 좌장군, 우장군 등 무슨무슨 장군과 비슷한 성격의 '명예직'이었다. [6] 왕국의 최고는 왕인 자신이고, 위그는 바로 그 아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실권자가 대 위그였다는 걸 미루어보아, 사실상 스스로 모든 권한이 대 위그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7] 당시 대 위그는 오를레앙에서 오세르까지 이르는 알짜배기 프랑스 중부 일대를 전부 장악하고 있었으나, 카롤루스 왕실의 왕령지는 콩피에뉴, 라옹, 수아송 일대의 파리 북동부에 그쳤다. [8] 심지어 독일로 망명한 동생이었다. [9] 훗날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되는 사람이다! [10] 피피누스 3세 문서를 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사실 피피누스 3세가 메로베우스 왕조의 킬데리크 3세를 폐위하고 프랑크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로마 교황 자카리아에게 한 말과 매우 비슷하다. [11] 서프랑크의 남쪽 지방이라, 로베르 왕조의 영토로 치고 올라가기 좋은 위치였다. [12] 프랑크 '공작'인 위그 카페를 말한다. [13] 바르셀로나 백국과 프랑스 왕국이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당시 바르셀로나 백작은 서고트계 왕들이 아니라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다. [14]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과는 다른 사람이다. 참고로 이 사람 역시 랭스 대주교 아르눌프처럼 저주와 충성맹세를 했는데, 하로렌 공작 샤를에게도 했고, 프랑스 왕 위그 카페에게도 했다. [15] "저는 제 맹세를 준수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배신자) 유다의 죽음을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했다. [16] 단 옥중에서 태어난 샤를의 아들들은 후에 풀어주었다고 한다. [17] 다만 브르타뉴는 전통적으로 이때까지 단 한번도 프랑크 또는 프랑스 왕국의 영역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8] 그 예가 오베르뉴 백작과의 말싸움이었다. 샤반의 아데마르(Adémar de Chabannes)의 기록에 등장하는 일화이다. [주의] 해당 지도에 카페 왕조의 세력권이 피카르디 지방 전체를 통제하면서 도버해협까지 닿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나 여전히 베르망두아 백작령에 속해 있어 정확히는 샹리스와 보배까지가 카페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 타당하다 [20] 물론 아버지인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닦아놓은 기반 탓이었다. [21] 카페-앙주 왕조와 발루아 왕조(샤를 8세, 루이 12세) [22] 카페-부르고뉴 왕조(Capetian House of Burgundy)의 포르투갈계 분가인 보르고냐 왕조이다. [23] 장남은 장남이되 사생아였다. [24] 카페-앙주 왕조. [25] 보르보네 왕조. 부르봉 왕가의 방계인 보르본 왕조(스페인계)의 방계로 부르봉-파르마 공가와 같이 이탈리아계 부르봉 왕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