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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14:53:50

로베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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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bert_I_de_France.jpg
이름 로베르 1세(Robert I)
생몰년도 866년 8월 15일 – 923년 6월 15일
재위기간 922년 ~ 923년
아버지 '강철공' 로베르 4세
어머니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장녀인 투르의 아델라이드
1. 개요2. 생애

1. 개요

로베르 1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제8대 왕이었다.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 백작 '강철공'(le fort, 르 포르) 로베르 4세와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황녀 아델라이드 사이의 아들로 파리의 백작이자 서프랑크의 제6대 국왕이 된 외드의 아우였다. 885년 형 외드와 함께 바이킹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파리를 지킨 것을 인정받아 후에 귀족들에 의해 서프랑크의 제8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898년 외드의 승하 이후 왕위를 주장하지 않고, 카롤루스 왕실의 샤를 3세 단순왕의 가신이 되었으나, 로베르가 바이킹을 여러 번 격퇴하게 되면서 명성을 덜치게 되자 922년 왕으로 추대되었고, 923년 수아송에서 샤를 3세 단순왕의 군대와 싸우던 중, 단순왕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후계자인 라울은 로베르 1세의 사위였다.

로베르 1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베르망두아의 베아트리스가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이었기에 그들 사이의 아들인 '대 위그'부터는 카롤루스 대제의 모계 후손이었다. 즉, 로베르 1세의 남계 후손은 모두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이었다.

2. 생애

로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느스트리)와 앙주의 백작인 로베르 4세 '강철공'의 아들이었다. 그라고 어머니는 '경건왕' 루트비히 1세, 즉 루도비쿠스 1세의 장녀였던 투르의 아델라이드였다. 또한 로베르 1세는 첫 번째 부인이었던 엘리스의 사후, 890년에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에르베르) 1세의 딸이었던 베아트릭스(Béatrice,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는데, 장인인 헤르베르트 1세 역시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으로, 대제의 차남인 롬바르디아 왕 피핀 카를로만의 손자였던 피핀의 아들이었다. 한편 로베르는 첫 번째 부인인 엘리스에게서 얻은 딸 아델라이드를 다시 후처인 베아트릭스의 남동생이었던 뫼욱스와 수아송의 백작 헤르베르트 2세에게 시집보냈다. 로베르 1세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 바로 '위그 르 그랑', 즉 대 위그로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아버지였다.

로베르는 885년 형 외드와 함께 바이킹의 침입에 대항하여 파리를 지켰고, 같은해 서프랑크의 제5대 왕인 '비만왕' 카를 3세에 의해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다. 형 외드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파리 백작 작위를 동생인 로베르가 잇게 되었는데, 파리 백작 작위는 훗날 카페 왕조와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때까지 별다른 작위가 없는 후손들에게 세습되었다.

형 외드가 대바이킹 전쟁에서의 공로로 서프랑크 왕국의 제6대 국왕으로 추대되자 로베르는 파리의 백작 등 많은 지역의 영주가 되었다. 898년 외드가 승하했을 때 로베르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지 않고, 카롤루스 왕조의 샤를 3세 '단순왕'을 제7대 왕으로 인정하며 그의 가신이 되었다.

로베르는 바이킹의 침입에 계속 맞서 서프랑크 왕국의 북부에서 싸웠으며, 911년 샤르트르 전투에서 노르웨이계 바이킹 수장인 흐롤프( 롤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샤를 3세가 생클레르쉬레프트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샤를 3세는 바이킹을 왕국의 북부 즉 노르망디에 거주하도록 하는 대신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이것이 훗날 잉글랜드와 프랑스, 이탈리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노르망디 공국의 시작이었고, 여기에 정착한 노르드 바이킹들은 프랑스화한 노르만족이 되었다.

바이킹의 격퇴로 로베르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고,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샤를 3세가 동부의 로트링겐(로렌, 로타링기아)을 복속시키고, 그 지역의 귀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자 로베르를 중심으로 한 느스트리(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922년 6월 29일 랭스에서 로베르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이미 6월 22일에 탈출한 상태였던 샤를 3세 단순왕은 당연히 반발했고, 곧 양측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1년 후 수아송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가 샤를 3세의 군대와 싸워 이겼으나 로베르 1세는 전사했다. 일설에는 샤를 3세 단순왕이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고 한다. 후에 그의 손자인 위그 카페가 오랜 기간 프랑스 왕국을 통치하게 될 카페 왕조를 개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