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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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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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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8B0F3><colcolor=#000000> 프랑스 왕국 루이 14세의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María Teresa de España
파일:Marie-Thérèse d_Autriche, reine de France.jpg
이름 스페인어 마리아 테레사 데 아우스트리아 이 보르본
(María Teresa de Austria y Borbón)
프랑스어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Marie-Thérèse d'Autriche)
출생 1638년 9월 10일
스페인 왕국 엘 에스코리알
사망 1683년 7월 30일 (향년 44세)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배우자 루이 14세 (1660년 결혼)
자녀 루이, 마리 테레즈, 필리프 샤를
아버지 펠리페 4세
어머니 프랑스의 엘리자베트[1]
형제 발타사르 카를로스
종교 가톨릭
1. 소개2. 작위3. 생애
3.1. 초기3.2. 결혼 생활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4.3. 사생아(?)

[clearfix]

1. 소개

펠리페 4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의 2남 6녀 중 막내딸.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의 왕비이자 프티 도팽 루이, 펠리페 5세의 할머니다.

2. 작위

파일:CoA of Marie Thérèse of Austria.png
문장

3. 생애

3.1. 초기

펠리페 4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제법 미인인데 마리아 테레사는 스페인 왕실 일원들의 외모가 근친혼으로 인해 하도 농축되어 모계 유전자는 기를 못 펴고 발현이 안 된 듯 미모가 떨어진다. 실제로 마리아 테레사는 근친혼의 영향인지 아닌지 몰라도 약간 둔했다고 하며, 이복 형제 중 하나인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 결과물의 끝판왕이기도 하다.

동복형제 중 살아남은 것은 오빠 발타사르 카를로스 하나뿐이었다. 그러던 중 1644년 10월 6일 겨우 6살 때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사망했다. 이후 동복오빠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발타사르도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여대공[2]과 결혼을 앞두고 10대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펠리페 4세는 남성 후계자 없이 마리아 테레사만 남게 되자 재혼을 서두르는데, 상대는 아들 발타사르의 약혼녀였고 자기 조카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스페인식 이름은 마리아나)였다! 마리아 테레사는 자신의 새어머니가 된 사촌 언니와의 나이 차이가 겨우 4살밖에 나지 않았고, 마리아나 또한 어렸기 때문에 의붓딸인 마리아 테레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랐다고 한다.[3] 여기다 펠리페도 마리아나를 아내보다는 어린 조카, 딸 마리아 테레사와 놀아줄 친구 정도로 생각해서 한동안 다소 총체적 난국이었다.

스페인 왕실은 살리카 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사는 친오빠가 죽고 이후 새어머니가 이복 남동생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를 낳기 전까지 11년 간 스페인의 추정 왕위 계승자의 지위를 가졌다. 이후 마리아 테레사는 자신에게 이중으로 사촌이 되는[4] 루이 14세(외삼촌 루이 13세와 고모 안나의 아들)와 1660년 결혼했다.[5]

그러나 스페인은 비리비리한 남성 후계자들 때문에 혹여나 프랑스로 시집간 마리아 테레사에게 스페인 왕위 계승권이 넘어가고 프랑스가 스페인을 차지할 것을 우려해, 마리아 테레사가 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엄청난 금액의 지참금을 책정했지만 이미 스페인의 재정 상태를 꿰고 있던 프랑스는 이 지참금을 다 못 줄 거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결국 마리아 테레사의 이복 남동생이자 스페인-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죽자 이 지참금을 못 받았다는 구실로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6]들을 통해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명분이 되었다. 물론 지참금을 다 줬어도 루이 14세의 야심을 고려했을 시 똑같이 계승권을 주장했을 것이다. 단지 프랑스에게 훌륭한 명분을 제공했을 뿐.

새어머니이자 사촌 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마리아 테레사가 13살 때 마르가리타 테레사라는 첫 딸을 낳았는데, 마리아 테레사에게 이복 여동생이 되는 마르가리타는 펠리페 4세가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진 딸이다. 그리고 유명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 라스 메니나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모델로 연이어 등장해 유명해진 마르가리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으나 2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파일:La infanta María Teresa de España.jpg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리 테레즈의 초상화. 초상화 속 저 패션은 이미 당대 유럽에서 구닥다리 패션으로 악명 높았다. 안 그래도 어설프고 모자란 구석이 있었던 마리아 테레사는 처음 시집갔을 때 프랑스 궁정에서 꽤나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7]

3.2. 결혼 생활

1661년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를 낳고 그 밖에 2남 3녀를 더 낳았으나,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5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남편인 루이 14세 몽테스팡 후작부인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등 수많은 애첩들을 거느리며 마리 테레즈는 그저 후계자를 낳아준 왕비로서만 대했을 뿐 거의 애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스페인 궁정의 풍습은 점잖고 엄숙한 편이었는데 프랑스 왕정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라 여기에 적응하기도 힘들어했다고. 그래도 루이 14세가 염치는 있었는지 왕비로서의 위엄은 살려주기 위해 마리 테레즈의 방을 자주 찾았고, 모든 정부들에게 왕비의 방에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 기본적인 부부 관계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서 사이가 그 이상 벌어지지는 않았다. 마리 테레즈의 시어머니이자 고모인 안 도트리슈도 그녀를 감싸주었다.

스페인 태생이라 그런지 평생 스페인어밖에 할 줄 몰랐고, 프랑스어를 배우지도 않았다.[8]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가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시고조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사가 한 말이라는 설이 있다. 그것도 실제로는 흔히 생각하는 의미가 아니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안타까워서 "저 사람들에게 브리오슈라도 주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한 것이 악의적으로 와전되었다고. 일견 모자란 발언 같아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녀는 고아원을 종종 방문하고 자선활동에 힘쓰는 등 동정심이 많고 선량한 왕비였기에 그런 것이었다.

궁정에서는 귀족들에게 호구 잡힌 신세나 다름 없었다. 귀족들이 도박에서 왕비가 잃은 돈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할만큼 이겨본 적이 전혀 없었다고. 그리고 왕의 바람기에 항상 슬퍼하기만 했고 애첩들에게 무시당해도 대꾸도 못 했다니 어찌 보면 당연.

결혼 후 23년 간 줄곧 외로운 프랑스 궁정에서 평생을 보냈으나 죽을 때만큼은 루이 14세가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는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voilà le premier chagrin qu'elle me cause).”라고 말했지만, 역시나 그 슬픔을 초스피드로 잊어버린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Maria Theresa of Spain)
펠리페 4세
(Felipe IV)
펠리페 3세
(Felipe III)
펠리페 2세
(Felipe II)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of Austria)[9]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Margaret of Austria)
내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Archduke of Inner Austria)[10]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Maria Anna of Bavaria)[11]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of France)
앙리 4세
(Henri IV)
안토니오 1세
(Antonio of Navarre)
호아나 3세
(Joana III)
마리 드 메디시스
(Maria de' Medici)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Francesc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Joanna of Austria)[12]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루이 왕세자
(Louis, Grand Dauphin)
1661년 11월 1일 1711년 4월 14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슬하 3남[13]
마리 에밀리 드 졸리 드 슈엥
1녀 마담 루아얄 마리 테레즈
(Marie Thérèse, Madame Royal)
1667년 1월 2일 1672년 3월 1일
2남 앙주 공작 필리프 샤를
(Philippe Charles, Duke of Anjou)
1668년 8월 5일 1671년 7월 10일

4.3. 사생아(?)

흑인 노예와의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는 설이 있다. 루이즈 마리 테레즈(Louise Marie-Thérèse)라는 이름의 이 흑인 여성은 베네딕토회 수녀였으며, 생전에 마리아 테레사의 사생아라는 의심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평범한 수녀로 살다 세상을 떠났겠지만, 그녀를 둘러싼 소문 때문에 그녀는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다.

루이즈 마리 테레즈가 왕비의 사생아로 의심받은 것은 왕비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부터였다. 루이 14세는 마리 테레즈 왕비가 사망한 1683년으로부터 2년 후인 1685년 6월 경 루이즈 마리 테레즈에게 300 파운드의 금과 '그녀가 평생 동안 기거해온 수도원 또는 앞으로 기거할 곳에 이 금을 지불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루이 14세의 이와 같은 행동에 수상함을 느낀 프랑스 궁정에서는 이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루이즈 마리 테레즈가 왕비의 사생아라는 것이다. 상당히 유명한 소문이었는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회고록에 언급되었다.

물론 이 여성이 왕비의 사생아라는 명확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애초에 루이 14세가 그녀에게 특별한 대접을 해 주기 전까지는 등장하지도 않은 설이었고, 루이 14세가 그녀에게 잘해준 이유가 마리 테레즈의 사생아라서 그런 거라고 볼 근거도 없다.[14]

당시에도 이 소문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다. 류인 공 샤를 달브레(Charles d'Albert, duc de Luynes)는 이 소문을 반박하면서 그녀가 흑인 정원사 부부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가난했던 부부는 자녀를 키울 형편이 안 되어 딸을 맹트농 부인[15]에게 맡겼는데, 국왕 부부가 가엾게 여겨 경제적 지원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학계에서도 이 사생아 설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진 않고, 그냥 당대의 흥미로운 이야기 정도로 여기고 있다. 다만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스토리다 보니 루이 14세와 마리아 테레사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단골 소재로 써먹곤 한다. 막장스토리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잘 통한다.

프랑스 작가 쥘리에트 벤조니의 소설 <왕비의 침실>[16]에서 이 흑인 사생아 설이 각색되어 나온다. 이 소설에서 마리 테레즈 왕비는 프랑수아 방돔이 선물한 미모의 흑인 소년에게 호의와 동정심을 품어 시종으로 삼는다. 그런데 소년이 왕비를 짝사랑하게 되어 왕비가 기절한 틈에 강간한다. 왕비는 기절했던 탓에 자기가 강간당했다는 사실도 몰랐고, 임신을 하자 당연히 남편인 루이 14세의 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태어난 딸의 피부가 검은 탓에, 궁중 사람들은 그 갓난아이가 왕의 딸이 아니라 흑인 소년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7] 루이 14세는 국왕으로서의 자존심과 권위 때문에 일단은 갓난아이가 병에 걸려 피부색이 특이하다고 공표하며 자기 딸로 인정하고 세례식도 베풀어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아기를 죽은 것으로 위장해 수녀원에 넣고, 왕비는 죄가 없으니 아이가 병으로 흑인처럼 보여 그런 것이라고 속여 몰래 아이를 만날 수도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흑인 시종은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암살된다.

프랑스 드라마 베르사유에서도 이 을 다뤘다. 여기에서는 아이의 친부가 왕비가 자기 방에서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있는 왜소증에 걸린 흑인[18]으로 추정되어 역시나 살해된다. 아이는 공식적으로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걸로 처리되고 실제로는 왕의 명령으로 살해될 뻔했으나, 왕의 측근이 아이에게 동정심을 느껴 왕을 설득하여 수녀원으로 보내 수녀들 손에서 자라도록 처리된다.[19] 그러데 나중에 아프리카 부족의 왕자가 파리를 방문하는 장면과 이 왕자가 왕비와 서로 아는 사이임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와, 어쩌면 아이의 친부가 아프리카 왕자일 수 있다는 암시를 강하게 남긴다. 위에 언급한 소설 <왕비의 침실>과는 다르게 이 드라마에서는 사생아를 임신하게 된 경위가 확실히 나오지 않아서, 강간때문인지 간통때문인지 알 수 없다.[20]


[1] 앙리 4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장녀 [2] 이후 스페인식으로 마리아나로 불린다. [3] 여담으로 두 사람의 초상화는 거의 한 사람 같이 흡사하게 닮았다. [4] 외사촌인 동시에 고종사촌이다. [5] 원래 마리아 테레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페르디난트 3세의 계승자로 내정되었던 페르디난트 4세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페르디난트 4세가 일찍 죽으면서 파기되고 루이 14세와 결혼했다. [6]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되는 앙주 공작 필리프와 베리 공작 샤를. [7]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초상화를 보면 드레스며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다. 적어도 한 세대 전 유행이었다는 소리. 다만 마르가리타의 어렸을 때 초상화에서도 비슷한 패션이 나오는 걸로 보아 본인의 문제라기보단 그냥 스페인 왕실이 유행에 뒤쳐졌던 모양이다. 애초에 마리아 테레사와 마리아나는 사촌지간으로 겨우 4살 차이다. 한 세대를 운운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 [8] 당시 프랑스어는 오늘날의 영어와 같은 국제어였다. 한 마디로 지금의 재벌 2세가 한국어만 사용하고 영어는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 그래도 루이 14세가 스페인어를 잘했기 때문에 부부 간의 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가 스페인 공주로, 펠리페 3세의 딸이자 펠리페 4세의 누나였고 마리아 테레사에게는 고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 덕분에 스페인 국왕이 되는 둘째 손자 펠리페 5세는 카를로스 2세가 서거하여 스페인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스페인어를 배우지도 않았다. [9] 막시밀리안 2세의 장녀이자 카를 5세의 외손녀다. [10] 페르디난트 1세의 3남이다. [11]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다. [12] 페르디난트 1세의 10녀다. [13] 부르고뉴 공작 루이, 펠리페 5세 [14] 생각해보면 아내의 사생아(...)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결과물인데, 보살이 아닌 이상 이 사생아를 진심으로 잘 대해주고 싶어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자기 사생아면 또 모를까. [15] 나중에 루이 14세의 정부. [16] 루이 13세 루이 14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루이 13세의 조카인 프랑수아 드 방돔( 앙리 4세의 서자인 방돔 공작 세자르 드 부르봉의 아들. 즉, 루이 13세의 이복형제의 아들.)인데, 프랑수아 드 방돔이 루이 13세의 왕비(즉 자기의 숙모)와 불륜하고 주변에서는 후계자를 얻자고 이를 방조해 루이 14가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 루이 14세는 성인이 된 후에 프랑수아 드 방돔이 자기의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비밀이 누설되면 국왕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프랑수아 드 방돔을 감옥에 가두고 누구도 얼굴을 못 보게 철가면을 씌우게 한다. 즉, 이 소설에서는 역사 속 수수께끼인 철가면이 루이 14세의 친부라는 가설을 채택했다. [17] 왕비 주위에 흑인이라고는 시종 소년 밖에 없으니, 궁중 사람이라면 누구나 갓난아이의 친부가 흑인 소년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 [18] 잠시만 등장하지만, 기묘하고 어색한 행동이나 제대로 말을 하지 못 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지적장애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비의 친정인 스페인 왕실은 희귀동물을 수집하듯 왜소증 환자들을 광대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오랜 전통(?)문화로 회화 등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19] 그 측근은 그 무렵 어린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일을 겪었기 때문에, 죄없는 갓난아기가 살해당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 [20] 다만 왕비가 출산하고 몸져누운 동안 자기를 지극히 간호하던 남편의 정부(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에게 독설을 내뱉으며 적대감을 드러낸 것을 보면, 왕비가 바람둥이 남편에 대한 복수심으로 맞바람을 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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