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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1:12:00

갈레랑 4세 드 묄룬

파일:갈레랑 4세 드 묄룬.jpg
성명 갈레랑 4세 드 묄룬
Galéran IV de Meulan
생몰년도 1104년 ~ 1166년 4월 9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묄룬
사망지 노르망디 공국 프레오
아버지 로베르 드 보몽
어머니 이자벨 드 베르망두아
형제 엠마, 로베르, 위그, 아들렌, 오브리, 마틸다, 이자벨
배우자 마틸드 드 블루아, 아녜스 드 몽포르
자녀 로베르, 이자벨, 아마우리, 로제, 갈레랑, 에티엔, 위그, 마리, 아미시아, 두다
직위 묄룬 백작, 보몽 영주, 초대 우스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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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무정부시대 스티븐 왕의 편에 서서 마틸다에 대적했지만, 나중에 마틸다 편으로 돌아섰다.

2. 생애

1104년경 묄룬 백작 및 초대 레스터 백작을 역임한 로베르 드 보몽과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의 딸 이자벨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엠마[1], 로베르, 위그[2], 아들렌[3], 오브리[4], 마틸다[5], 이자벨[6]이 있었다. 이중 로베르는 그의 쌍둥이였다.

111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와 쌍둥이 동생 로베르는 성년이 될 때까지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로베르와 함께 가장 교육받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미술 철학에 전통했으며, 라틴어를 쓸 줄 알았다. 또한 문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여러 수도원을 설립하고 많은 기부를 했다. 1120년 성년이 된 뒤 상속을 받았다. 갈레랑 4세는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 일대에 걸친 가문의 영지(보몽르로제, 포르토오데마르, 브리온, 와트빌, 루무아, 묄룬 백작령)를 물려받고 묄룬 백작이 되었으며, 로베르는 잉글랜드에 남은 재산을 물려받고 레스터 백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따라서 갈레랑 4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을 겸임한 잉글랜드 국왕의 가신이자 프랑스 왕국의 가신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공국에서 가장 큰 영지를 소유한 영주 중 한 명이었다.

1122년 에브뢰 백작 아마우리 3세 드 몽포르와 가까워졌고, 그와 함께 노르망디 공작으로 기욤 클리토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헨리 1세에게 알려졌고, 헨리 1세는 몽포르쉬르리슬 성을 공격했다. 갈레랑 4세는 브리온으로 피신한 뒤 노르망디 귀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고, 헨리 1세의 군대는 1123년 10월 포트오데마르를 점령하고 와트빌을 포위했다. 이듬해 초, 갈레랑 4세는 부아시르샤텔에서 왕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생포되었다. 갈레랑 4세의 나머지 성들은 저항을 이어갔지만, 그는 1124년 4월 16일 헨리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저항을 이어가던 성들에 항복을 명령했다. 그 후 노르망디에 있던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그는 처음에는 루앙에서, 다음에는 슈롭셔의 브리지노스에서, 마지막에는 월링포드 성에 감금되었다. 그렇게 1129년까지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 헨리 1세의 총애를 다시 얻었고, 이후 형제 쌍둥이 형제 로베르와 함께 헨리 1세의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135년 12월 헨리 1세의 임종에 참석했다.

헨리 1세 사후 스티븐 왕이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을 때 즉시 충성을 맹세했다. 1136년 초 부활절에 열린 의회에서, 갈레랑 4세는 스티븐 왕의 어린 딸 마틸드와 약혼했고, 우스터 시와 우트터셔 백작령을 지참금으로 받았다. 그러나 마틸드는 1340년 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136년 중반, 갈레랑은 노르망디 왕실 보안관으로 선임되어 유럽 대륙으로 돌아왔다. 그는 노르망디 공국 방어 조직을 맡았고, 1136년 9월 아내 마틸다의 잉글랜드 여왕 및 노르망디 여공작 직위를 주장한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의 침공을 격퇴했다. 또한 그는 노르망디에서 마틸다 지지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로저 드 토스니를 체포했다. 1137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왔다가 그 해 중반에 스티븐 왕과 함께 노르망디로 돌아와서 마틸다를 옹호하는 영주들을 징벌하는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스티븐 왕의 노르망디 원정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38년, 앙주군이 배생, 캉을 공략하고 코탕탱까지 침입했다. 그는 이를 막기 위해 노르망디로 돌아왔고, 스티븐 왕으로부터 초대 우스터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추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 왕을 주군으로 받드는 멜룬 백작으로서 프랑스 왕실의 지원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1139년 초, 그는 파리를 방문해 루이 7세를 접견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지원은 미비했고, 앙주군이 다시 공세에 착수해 1140년 로어 노르망디 일대를 정복했다.

한편, 갈레랑 4세와 쌍둥이 동생 로베르는 솔즈베리 주교이자 잉글랜드 왕국 대법원장인 로저와 그의 가족의 영향력과 부가 막강한 것에 강한 질투심을 품었다. 무정부시대가 본격화되던 1139년, 두 사람은 로저의 조카인 엘리 주교 나이젤, 링컨 주교 알렉산더가 마틸다에게 귀순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여기에 옥스퍼드 거리에서 솔즈베리 주교의 부하들이 연루된 무력 충돌이 벌어지자, 스티븐 왕은 두 사람에게 로저를 체포하고 로저와 그의 가족이 통제하는 성을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공세를 개시해 디비시스 성을 공략하고 로저가 보유하던 막대한 부를 탈취했다. 로저는 스티븐 왕이 자기 형제인 윈체스터 주교 앙리의 설득을 받아들이면서 석방되었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 일은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분노를 초대했고, 상당수가 마틸다 편에 섰다.

1139년 11월 7일,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갈레랑 4세의 영지인 우스터를 공격하여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갈레랑 4세는 마틸다의 통제하에 있던 튜크스베리를 연이어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141년 2월 2일 링컨 전투에 참여했지만, 전투가 불리해지자 전장에서 도주했다. 스티븐 왕이 이 전투에서 생포되었지만, 그는 우스터를 거점으로 삼아 계속 대항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의 보몽 가문 영지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갈레랑 4세는 전투를 중단하고 마틸다에게 복종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티랃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노르망디로 돌아온 그는 조프루아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자신의 땅과 1139년에 사망한 어머니의 영지였던 엘뵈프를 돌려받았다. 1142년 아마우리 3세 몽포르의 딸인 아녜쓰 드 몽포르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에브뢰 백작령과 코 영지, 일드프랑스의 구르네쉬르마른을 접수했다.

그 후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 편에 선 그는 조프루아 5세의 루앙 공방전에 참여해 1144년 1월 루앙 공략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루앙 공방전 도중에 에만드레빌을 철저히 약탈하고 교회까지 점령한 후 불태웠다. 1146년 파리에서 열린 왕립 의회에 참석해 루이 7세의 십자군 원정에 가담하기로 마음먹고, 앵글로색슨-노르망 십자군의 선두 대열을 이끌었다. 그러나 루이 7세의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곧 프랑스로 귀환했다. 그 후 프랑스 왕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부와 영향력을 크게 늘렸지만, 프랑스 왕실과 갈등을 벌이던 헨리 2세의 통치 하에 있던 노르망디의 묄룬 백작의 지위는 위협받았다. 1151년부터 헨리 2세와 루이 7세간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1153년 조카 로베르 드 몽포르에게 생포되었고,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영지는 헨리 2세의 동지들이 차지했고 우스터 백작 칭호는 페지되었다. 이후 석방되었지만, 1160~1162년 전쟁에서 헨리 2세에 맞서는 루이 7세를 지원했기 때문에 노르망디 내 영지와 성을 몰수당했다. 1166년 4월 9일에 보몽 가문 수도원인 프레오 마을의 생피에르데프레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1102 ~ ?, 유아기에 미래의 에브뢰 백작인 아마우리 3세 드 몽포르와 약혼했지만 그전에 요절했다. [2] 1106 ~ ? 베드퍼드 백작 [3] 1107 ~ ?, 몽포르쉬르리슬 영주 위그 4세와 첫번째 결혼, 기사 리샤르 드 그랑빌과 재혼 [4] ? ~ ?, 샤토뇌프앙티메라즈의 영주 위그 2세의 부인 [5] 1114 ~ ?, 이브리 영주 기욤 드 로벨의 부인 [6] 1102 ~ 1172, 초대 펨브로크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초혼, 아일랜드 보안관 에르베 드 몽모랑시와 재혼.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