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알리아 전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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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90년 7월 18일, 브렌누스가 지휘하는 갈리아인( 켈트족) 연합군이 알리아 강변에서 로마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로마 공화국은 이 패배로 인해 로마 시가 약탈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2. 배경
기원전 7세기, 현재의 프랑스 일대에 거주하던 갈리아 부족들이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기름진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평원으로 대거 이주했다. 그들은 에트루리아계 도시들을 하나씩 공략하고 메디올라눔(오늘날 밀라노) 등 여러 정착지를 건설하면서 이탈리아 북부에 정착했다. 이중 세노네스족은 기원전 4세기 초 리미니의 주변 해안 지대에 정착했다. 그러던 기원전 391년, 아룬스라는 인물이 세노네스 왕 브렌누스를 찾아가 클루시움[1]을 공격해달라고 청했다.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클루시움의 왕 루쿠모는 아들의 후견인을 아룬스에게 맡겼는데, 그 아들이 아룬스의 아내를 유혹해 남편을 저버리도록 했다. 이에 격분한 아룬스는 음모를 꾸미고 포도주, 올리브, 무화과를 세노네스족에게 판매했다. 갈리아인들이 이를 보고 어디서 이런 좋은 제품이 나왔냐고 묻자, 아룬스는 클루시움의 땅이 매우 비옥하고 평탄하며, 그곳 백성들 중에는 투사가 별로 없으니 그 땅을 취하라고 꼬드겼다. 이에 혹한 브렌누스가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을 꼬드겨서 군대를 일으켜 클루시움을 포위했다고 한다.
클루시움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갈리아인들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동맹을 맺고 있었던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는 3명의 사절을 파견해 브렌누스를 접견하여 클루시움을 공격한 이유를 캐묻도록 했다. 이에 브렌누스는
"로마가 이웃 도시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이유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클루시움이 땅을 나눠준다면 전쟁을 멈출 의향이 있다고 덧붙였지만, 클루시움 측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로마 사절들은 브렌누스가 고압적으로 나오는 것에 분노하여 클루시움 편을 들었고, 이로 인해 회담장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때 사절 중 한 사람이었던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가 갈리아 귀족 한 명을 살해했다.사절들은 곧장 로마로 돌아가버렸고, 브렌누스는 일단 회의를 열어 어찌 해야 할지 논의했다. 젊은 귀족들은 당장 로마와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원로들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자고 권했다. 브렌누스는 원로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로마에 사람을 보내 살인을 한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를 비롯한 세 명의 사절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누메리우스 파비우스가 속한 파비이 부족을 집정 부족으로 선출해 군대 지휘권을 부여했다. 이에 분노한 갈리아 사절단은 전쟁을 선포하고 떠났다.
3. 경과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가 이끄는 갈리아군이 클루시움 포위를 풀고 로마로 진군했다. 그들은 이웃 도시와 시골을 지나며"우리는 로마를 징벌하기 위해 진군할 뿐이지 다른 도시는 건드리지 않는다."
고 고래고래 소리질러 진군로에 위치한 도시들이 자신들을 치지 않도록 했다. 이에 로마는 군대를 출격시켜 이들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해 7월 18일, 양군은 로마에서 11마일 떨어진 알리아 강 인근에서 마주쳤다. 갈리아인들은 알리아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가까운 테베레 강의 왼쪽 제방에 주둔했다. 그들 뒤에 알리아 강이 흘렀고, 좌측에는 언덕이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테베레 강이 흘러갔다. 로마군은 테베레 강 건너편에 포진했다.양군의 병력 규모는 기록마다 다르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인들이 40,000명으로 수적으로 열세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훈련을 받지 않았고, 무기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마군이 4개의 잘 훈련된 군단과 그보다 많은 훈련되지 않은 시민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고 기술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로마군이 24,000명이었다고 기술했다. 반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군대 규모를 언급하지 않았다. 갈리아인들의 규모는 30,000명에서 70,000명 사이였다고 하는데, 역사학계는 30,000명이 사실에 근접할 것이라 추정한다.
로마군의 중추는 6,000명의 호플리테스였다. 호플리테스들은 중갑보병이었고, 투구와 가슴판, 무릎 보호개와 청동으로 된 둥근 방패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찌르는 창과 검이었다. 반면에 갈리아인들은 1야드 길이의 직사각형 방패와 헬멧으로만 보호되는 경보병이었고, 오직 귀족들만이 둥근 가슴 갑옷이나 사슬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 직사각형 방패는 뿔, 동물 모양의 문양 또는 켈트족의 전쟁의 상징인 수레바퀴로 장식되었다. 갈리아인들은 검, 창, 도끼, 또는 슬링을 휘둘렀다. 말의 갈기처럼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축 처진 콧수염을 길렀으며 상반신을 드러내 벌거벗은 채, 소리를 지르며 무기를 이리저리 흔드는 갈리아인 전사들은 무시무시한 구경거리였다.
로마군은 갈리아군이 긴 대형을 형성한 걸 보고 이에 맞추고자 전선을 확장했고, 이를 위해 중앙에 배치되어 있던 부대를 측면으로 뺐다. 이로 인해 중앙의 대형은 위험할 정도로 얇아졌다. 또한 로마군은 전투 경험이 부족한 예비군을 오른쪽 측면에 있는 작은 언덕에 배치했다. 브렌누스는 이 예비대가 아군 좌익을 앞질러서 후방에서 자기 부대를 공격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그는 기병들을 시켜 예비대를 공격하게 했다. 로마군의 예비대는 고지에서 버티며 항전했지만, 갈리아인들의 강력한 전투력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다. 언덕에 포진하고 있었던 아군이 공황 상태에 빠지자, 로마군의 전의가 꺾였다.
이때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며 갈리아인들이 돌격했다. 그들이 무시무시한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돌진하자, 많은 로마군 병사가 겁에 질려 적과 맞붙기도 전에 도주했다. 갈리아군의 중앙 대열은 로마군의 얇은 중앙 부대를 가볍게 뚫고, 좌익과 우익에 포진한 로마군을 몰아붙였다. 로마군의 좌익과 중앙 대부분은 티베레 강 쪽으로 몰렸고, 다수가 칼을 맞고 죽거나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기원전 396년에 공략한 뒤 로마의 직할지로 삼았던 베이 시로 도주했다. 우익 부대 역시 곧 무너져 로마 시로 도주했다. 6,000명 가량의 정예 중갑보병대는 끝까지 전장에 남아 항전했으나 결국 갈리아군에게 몰살당했다.
4. 이후
브렌누스는 로마군이 너무 쉽게 무너지자 혹여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3일 동안 알리아 전투의 전장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별거 없다는 게 밝혀지자, 그는 로마로 곧장 진군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갈리아인들은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지 않은 걸 보고 더 크게 놀랐다. 패주한 로마군 장병들이 로마의 성벽을 지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갈리아군은 곧바로 성안에 들어가 수많은 로마 시민을 학살했다. 이때 일부 로마 시민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올라가 저항했고, 켈트족은 여러차례 언덕으로 올라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이에 켈트족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포위하고, 인근의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면서 재물을 약탈했다.이후 식량을 구하고자 각지에 식량 수집부대를 보냈는데, 아르다로 향했던 켈트족 일부는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던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기습으로 격파되었다. 베이에 있었던 로마군은 아르다 전투의 승리 소식을 접하자 카밀루스를 지휘관으로 추대했지만, 카밀루스는 원로원의 허락이 없이는 응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어느 용감한 청년이 비탈길을 통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몰래 들어가서 원로원에 이 사실을 알렸다. 원로원 의원들은 카밀루스를 독재관에 앉히고 1년 동안 켈트족과 대적하는 임무를 맡겼다. 카밀루스는 12,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끌어 모았고, 이후 더 많은 병사들이 각지에서 합류했다.
얼마 후, 갈리아인들은 청년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탈킬을 확인했다. 그들은 새벽녘에 이 길을 따라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잠입했다. 리비우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이 성벽 앞까지 접근했을 때 보초병들은 졸고 있었고, 개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거위들이 시끄럽게 짖어대자 잠에서 깬 로마 병사들이 긴급 상황이 벌어진 걸 깨닫고 서둘러 달려가서 갈리아인들을 격파했다고 한다. 그 후 로마인들은 거위를 신성시했고, 그때 울지 않은 책임을 물어 그 날을 개를 때리는 날로 정했다고 한다.
이후 로마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많은 켈트족과 로마인이 죽어나가자, 양측은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다. 브렌누스는 1,000파운드 중량의 황금을 배상금으로 받고 물러가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렌누스는 자신이 가지고 온 엉터리 천칭으로 로마인에게 황금의 중량을 산정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이에 로마의 호민관이 항의하자, 그는 천칭 그릇에 자신의 칼을 올려놓으면서 무게를 줄이는 놈을 죽일 것이라고 협박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
Vae victis."
"패자에겐 비애뿐이다."
"패자에겐 비애뿐이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밀루스는 바로 이 시점에서 로마군과 함께 도착해 검을 저울질 한 뒤 황금이 아닌 철로 조국을 되찾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켈트족을 공격했다고 한다. 로마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좁은 길과 골목 길에서는 어느 군대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어 다음날 도시를 떠나 평원 일대에서 제대로 맞붙었다고 한다. 카밀루스는 이 전투에서 켈트족을 크게 격파했고, 살아남은 켈트족 병사들은 도주했다. 이에 로마인들은 카밀루스를 로마의 두 번째 창립자라는 의미로 제2의 로물루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카밀루스가 로마를 구출했다는 기록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또 다른 고대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역사서에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리비우스가 지어낸 것으로 보고 있다. 디오도로스는 갈리아인들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돌아오는 길에 에트루리아 군대에 의해 트로이아 평원에서 패배했다고 설명했다. 스트라본은 베스타 여사제들의 망명을 받아준 에트루리아 도시 카에레가 갈리아인들을 물리쳤고, 카에레인들이 로마에게 갈리아인들이 가지고 가던 몸값을 돌려줬다고 기술했다. 이는 카밀루스가 세노네스족에게 몸값을 지불하는 걸 막았다는 리비우스의 기록과 어긋나는 대목이다. 역사가들은 갈리아인들이 로마가 지불한 배상금을 받고 돌아간 게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본다.
알리아 전투와 로마 약탈 이후, 주변의 라틴계 도시국가들은 로마가 쇠락했다고 본 후 로마 동맹을 파기했다. 이에 카밀루스는 20년간 독재관을 5번이나 역임하며 주변 국가들과 맞서 싸워 로마가 예전의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의 로마군은 일련의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의 전술이었던 팔랑크스는 갈리아인처럼 기동력이 탁월하고 험준한 지형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적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보고, 60~120명의 소대 단위로 구성된 분대끼리 모여서 부대를 형성하는 마니풀 체제로 대체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앞뒤로 움직일 수 있었기에, 적이 뜻밖의 방향에서 쳐들어오면 즉시 커버할 수 있었다. 이 개혁은 큰 힘을 발휘해, 로마가 아에키족, 볼스키족, 에트루리아족 등을 꺾고 세력을 복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삼니움 전쟁을 치르면서 좀더 체계적인 개혁이 실시되면서, 일명 마니풀라(manipular)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1]
오늘날의 토스카나주 키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