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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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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공국
Ducatus Athena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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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파일:Greece_in_1210.svg
아테네 공국
1205년 ~ 1458년
수도 아테네, 테베
위치 그리스 아티카와 보이오티아 일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공작
언어 중세 프랑스어, 중세 그리스어, 라틴어, 카탈루냐어
종교 가톨릭 (국교), 정교회
종족 프랑크인, 로마인, 카탈루냐인
건국 이전 앙겔로스 왕조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
언어별 명칭
라틴어 Ducatus Athenarum
프랑스어 Duché d'Athènes
그리스어 Δουκᾶτον Ἀθηνῶν

1. 개요2. 역사3. 역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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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04년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킨 라틴 제국의 공국. 1224년까지 아카이아 공국과 함께 테살로니카 왕국의 속국이었으며, 테살로니카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게 정복된 뒤에는 아티카와 보이오티아 일대에서 라틴계 국가로 활동했다. 1444년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속국이 되었고, 1458년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2. 역사

1204년 5월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킨 뒤, 플랑드르의 백작 보두앵 1세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의 옛 잔재는 십자군에 참가한 세력들에 분할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피로스 일대와 두라초, 코르푸 등 에게 해의 여러 섬 지역을 가졌고, 라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의 트라키아,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을 가졌고, 몬페라토의 보니파시오 1세는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를 아우르는 테살로니카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빌라루두앵의 조프루아 1세에게 할당되어 아카이아 공국이 세워졌다. 또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카와 테베를 중심으로 하는 보이오티아 일대는 부르고뉴 기사단장 오토 드 라 로슈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분할은 어디까지나 서류상에서나 이뤄진 것이었고, 당시에는 콘스탄티노플만 함락되었다. 따라서 각 지도자들은 무너진 제국의 잔재를 스스로의 힘으로 정복해야 했다. 아티카와 보이오티아를 할당받은 오토 드 라 로슈는 그 지역의 로마인 지배자 레온 스구로스를 물리쳐야 했다. 그는 테살로니카 왕 보니파시오 1세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군대를 지원받았고, 실정을 거듭하면서 민심을 잃어버린 레온을 가볍게 물리치고 테베를 비롯한 보이오티아 일대를 공략했다. 그 후 친정에 나선 보니파시오 1세와 함께 아티카로 진격하여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온 스구로스를 격파하였고, 아테네 시 주교이자 레온의 폭정에 맞서 싸웠던 미하일 호니아티스[1]가 귀순한 덕분에 아테네에 무혈 입성했다.

오토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요새화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테베,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아, 다말라 시를 확보했다. 그는 자신을 아티카와 보이오티아의 데스포티스라 칭하며 테살로니카 왕국과 라틴 제국 양자에 충성하였고, 봉건제도를 시행했으며, 프랑스어를 행정 언어로 사용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정교회를 신봉하는 그리스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강요했고, 이로 인해 그의 통치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1224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테살로니키를 정복하면서 테살로니카 왕국이 멸망하자 아카이아 공국의 봉신이 되었으며, 1225년경 불분명한 이유로 아들들과 함께 부르고뉴로 돌아갔고, 아들[2] 기 1세 드 라 로슈가 새 공작으로 취임했다.

아테네 공국은 기 1세의 통치 동안 번영을 구가했다. 해상 해적은 아테네 공국의 부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에비아 섬에 최소 100척의 해적선이 매년 출항하여 에게 해의 여러 해안 지대를 약탈했다. 1255년 에우보에아 섬을 두고 아카이아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쟁을 벌였을 때, 기 1세는 베네치아를 지지했다. 아카이아 공작 기욤 2세는 이를 보복하고자 아테네 공국을 침공하였고, 테베에서 포위된 기 1세는 기욤 2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 후 기는 프랑스로 가서 빌럼이 자신의 군주인 걸 취소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봉신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루이 9세는 그때까지 공국 대접을 못 받던 아테네 공국을 정식으로 공국으로 인정하였다.

기가 프랑스에 가 있던 1259년, 아카이아 공국 - 시칠리아 왕국 - 테살리아 - 세르비아 -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니케아 제국 미하일 8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해 9월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연합군이 참패하였고, 아카이아 공작 기욤 2세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니케아 제국의 포로가 되어 3년간 억류되었다. 기는 그리스로 돌아온 뒤 기욤 2세를 대신하여 아카이아 공국을 다스렸다. 1263년 기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장 1세 드 라 로슈가 집권했다. 그는 북쪽의 그리스계 국가 테살리아와 가까워졌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해 테살리아인들을 돕고자 군대를 2번 파견하였다. 1275년 장 1세는 테살리아의 구원 요청을 받고 300명의 기사와 함께 출진해 테살리아를 포위한 동로마군을 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276년에도 재차 테살리아를 포위한 동로마군을 요격하였고, 테살리아 데스포티스의 딸을 자신의 아들 기욤 1세 드 라 로슈와 결혼시켰으며, 지참금으로 테살리아의 여러 도시를 받아냈다.

그러나 1278년 에우보이아 귀족들이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개입했다가 바론다 전투에서 패했고, 그는 화살을 맞고 낙마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미하일 8세는 3만 두카트의 몸값과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풀어줬고, 장 1세는 아테네로 귀환한 뒤 2년만에 사망했다. 뒤이어 공작에 취임한 기욤 1세 드 라 로슈는 유명무실해진 라틴 제국의 후손들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287년 집권한 기 2세 드 라 로슈는 어린 나이에 통치자가 된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2세 두카스의 보호자가 되어 아테네 공국의 영향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랐다. 1308년 기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그의 두 사촌인 브리엔의 고티에 5세와 이벨린의 에쉬바가 각각 공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테네 귀족들은 논의 끝에 같은 등급의 두 친척이 상속을 주장하는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며 고티에 5세의 손을 들어줬다.

고티에 5세가 공작에 취임한 뒤, 테살리아의 통치자 요안니스 2세 두카스는 아테네 공국을 더는 상국으로 모시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고티에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하여 1305년부터 테살리아를 정기적으로 습격하게 하였다. 결국 요안니스 2세는 고티에에게 굴복하여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겠으니 카탈루나 용병대를 철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고티에는 이에 따랐고 용병들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당시 용병들은 4개월 동안 군사 활동을 하였으므로 4개월치 급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카탈루냐인 중에서 기병 200명과 경무장 보병 300명에게만 임금을 주고, 나머지는 당장 공국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용병대는 새로 정복한 땅에 봉신으로 정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고티에는 그들이 자기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분노한 용병대는 반란을 일으켰고, 고티에가 막 고용한 500명의 용병마저 합류했다. 이로 인해 그는 아카이아 공국과 그리스의 다른 프랑크 계열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1311년 3월 15일 할미로스의 습지에서, 고티에는 카탈루냐 용병대와 맞붙었지만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고티에의 시체를 참수하고 아테네 공국 전역을 장악했다. 고티에 5세의 부하 로저 데스라우르가 공작에 취임하여 맞서 싸웠지만 결국 1312년 항복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시칠리아 왕국의 종주권을 재빨리 인정하였고,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아들 만프레디를 아테네 공국의 새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후 아테네 공국은 아라곤의 봉건제도를 따랐고, 카탈루냐어를 행정 언어로 제정했다. 1318년 요안니스 2세 두카스가 사망하자, 아테네 공국은 네오파트라스 등 테살리아의 남부 지역을 공략하였고, 카탈루냐인들은 그곳에 네오파트라 공국을 세웠다.[3] 1331~1332년 지난날 카탈루냐 용병대와 싸우다 전사한 고티에의 아들인 브리엔의 고티에 6세 십자군을 일으켜 아테네 공국을 침공하자 카탈루냐 용병대는 테베와 아테네에서 버텼고, 장기간의 공성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퇴각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1379년까지 시칠리아 왕국의 왕자들을 공작으로 섬기면서도 아테네 공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1379년 라틴 황제를 자칭한 레 보의 자크에게 고용된 나바라 용병대가 테베를 공략하였고, 뒤이어 네오파트라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다. 이로 인해 카탈루냐 용병대는 쇠락하였고, 시칠리아 왕이 1388년까지 아테네 등 남은 지역을 다스렸다. 1388년 피렌체의 아차이올리 가문이 아테네를 점령하였고, 1390년에는 네오파트라도 아차이올리 가문에 넘어갔다. 그러나 1394년 네리오 1세 아차이올리 공작이 사망할 무렵, 아테네 공국은 발칸 반도에 진출한 오스만 술탄국에 포위되었다. 아차이올리 가문은 어떻게든 공국을 지킬 요량으로 1395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양도했다. 그러나 네리오의 아들 안토니오 1세 아차이올리는 여전히 테베를 장악하였고, 1402년 베네치아로부터 아테네를 탈환했다.

베네치아는 아테네를 되찾고자 오스만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안토니오 역시 베네치아의 침략으로부터 오스만 술탄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스만 술탄국은 앙카라 전투 패전 이후 내전에 휘말린 터라 어느 쪽도 돕지 못했다. 1405년 안토니오와 베네체아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고, 안토니오기 공작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학문과 문화를 장려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오스만 술탄국과 동맹을 맺고 베네치아를 꾸준히 괴롭혔다. 1435년 안토니오가 사망하자, 조카인 네리오 2세 아차이올리와 안토니오 2세 아차이올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아테네 공국은 나날이 쇠락하였고, 오스만 술탄국은 이 기회를 틈타 아테네 공국의 영역을 갉아먹었다. 1441년 내전의 최후 승자가 된 네리오 2세는 1444년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아테네가 포위되자 어쩔 수 없이 테베를 넘겨주고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오스만 술탄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여 아테네 공국에 테베를 돌려주게 하였다.

그 후 오스만 술탄국의 충실한 봉신으로서 연명하던 아테네 공국은 1451년 네리오 2세 아차이올리가 사망한 뒤 또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네리오 2세의 부인 끼아라 조르지오네는 어린 아들 프란체스코 1세 아차이올리의 섭정을 맡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를 방문하여 청혼한 베네치아의 바르톨로메오 콘타리니와 사랑에 빠졌다. 바르톨로메오는 유부남이었지만, 끼아라와 결혼하려고 베네치아에 돌아가서 아내를 독살한 뒤, 1453년 아테네로 돌아와서 끼아라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했다.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싫어한 아테네 주민들이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불만을 제기하자, 술탄은 바르톨로메오와 프란체스코 1세를 아드리아노폴리스에 있는 자신의 궁정에 억류한 뒤, 프란체스코 1세의 사촌인 프란체스코 2세 아차이올리를 새 아테네 공작으로 선임했다. 프란체스코 2세는 공작이 되자마자 사람을 시켜 끼아라를 살해했다.

1456년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지휘관인 투라하노글루 베이의 침공을 받자 2년간 항전했지만 1458년 끝내 패망하였고, 최후의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아차이올리는 테베 시의 영주로 임명되었다가 1460년 아테네 공국을 부활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3. 역대 공작



[1]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형이다. [2] 조카로 알려졌지만, 1973년에 발견된 1251년 헌장에서 오토의 아들이라고 명시되었음이 확인되었다. [3] 이때부터 아라곤 왕국/시칠리아 왕국 및 그 후신인 스페인 왕국의 국왕들에게 아테네 및 네오파트라의 공작이라는 작위가 추가되었다. [4]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3세의 둘째 아들 [5]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3세의 셋째 아들 [6]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3세의 넷째 아들이자 루이지 왕의 섭정. [7] 란다초 공작 조반니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