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닥스 공방전 영어: Siege of Chanda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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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960년 ~ 961년 3월 6일 | |
장소 | 크레타 한닥스 | |
원인 | 동로마 제국의 크레타 탈환 계획 추진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크레타 토후국 |
지휘관 |
니키포로스 포카스 니키포로스 파스티야스† |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슈아브
◎ 아네마스 ◎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크레타 탈환. | |
영향 | 동로마 제국의 에게해 안보 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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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60~961년 3월 6일,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무슬림의 손아귀에 있던 크레타의 수도인 한닥스(오늘날 이라클리온)를 공략하고 에게해의 안보를 확보한 전쟁.
2. 배경
크레타는 기원전 60년대에 로마 공화국의 속주로 편입된 이래 수백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7세기 이슬람의 발흥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지가 무슬림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지중해 해상에서도 무슬림 함대가 활보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부 해상의 전략적 요충지인 크레타 만큼은 사력을 다해 사수했다. 그러나 821~823년 슬라브인 토마스의 대규모 반란으로 인해 제국이 혼란해지면서, 크레타의 방비는 자연스럽게 허술해졌다.그러던 826년,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추방된 뒤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점거했다가 도로 쫓겨난 아랍인들이 크레타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2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크레타 섬을 완전 장악하고 기존의 중심지였던 고르티나를 파괴한 뒤 새로운 성채를 건설했다. 그들은 이 성채에 라브드 알 한다크(ربض الخندق)[1]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성채를 한닥스(Χάνδαξ)라고 불렀다. 그 후 한닥스를 중심지로 삼은 크레타 토후국은 아바스 왕조의 비호 아래 에게해에서 해적 행위를 일삼으며 동로마 제국의 본토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해안 지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기독교도들을 대거 잡아서 노예로 팔았다.
동로마 제국은 당연히 크레타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842~843년, 미하일 3세의 섭정인 테오크리스토스가 파견한 동로마 함대가 크레타의 일부 영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테오크리스토스는 다른 전선에서 외적과 대항하느라 크레타에 지속적인 지원을 하지 못했고, 크레타 토후국은 얼마 후 이들을 축출했다. 866년 봄, 미하일 3세의 또다른 섭정 바르다스가 크레타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하려 했지만, 출항 전 날에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 1세의 음모로 인해 살해당했다.
904년, 아바스 왕조의 해군 제독이자 해적인 트리폴리의 레온[2]이 테살로니키를 습격해 20,000명이 넘는 노예를 잡아들인 뒤 크레타에 모조리 팔았다. 이에 레온 6세는 911년 이메리오스 제독 휘하 177척을 맡겨 크레타를 탈환하게 했다. 이메리오스는 91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6개월간 한닥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912년 4월, 수도로부터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가기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가 히오스 섬을 돌았을 때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사라센 함대가 습격했고, 이메리오스는 얼마 안 되는 함선만 수습하여 본국으로 도주했다.
949년, 해군 사령관 콘스탄티노스 곤길리스가 콘스탄티노스 7세의 명령을 받들어 크레타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섬에 순조롭게 상륙한 뒤 한닥스를 포위했지만, 원정군 진영을 요새화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사라센군이 야간 기습을 할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3] 결국 군대는 와해되었고, 곤길리스는 기함을 타고 간신히 탈출했다.콘스탄티노스 7세는 이를 복수하고자 더 많은 함대를 준비하고 한닥스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959년 원정을 추진하기 전에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 사후 황위에 오른 로마노스 2세는 정사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환관 요세프 브링가스가 권세를 누렸다. 그는 선제의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니키포로스는 소아시아와 에페수스 일대에서 병력을 소집해 2만 7천 명의 해군 및 선원들을 징집하고 5만 명의 육군을 태우기 위한 308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레온 부제에 따르면, 그의 함대는 그리스의 불을 갖춘 드로몬 위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크레타 탈환 작전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960년 늦봄에 출항한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함대는 7월 13일 크레타에 상륙했다. 테오파네스 콘티니아토스와 테오도시오스 부제는 동로마군이 상륙하는 동안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레온 부제는 사라센들은 해안가에 군대를 배치하고 적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레온 부제의 설명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는 적이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병력을 3개 대열로 편성한 뒤 곧바로 돌격했고, 사라센들은 적의 예상치 못한 맹공에 크게 패한 뒤 한닥스 요새로 달아났다고 한다.그 후 니키포로스는 한닥스 요새를 곧바로 공격해 단시일에 함락시키려 했지만 실패하자 장기간 포위해 굶겨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시 외곽에 긴 참호를 파고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했으며, 함대를 한닥스 항구 앞에 포진시켜서 단 한 척의 적선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니키포로스는 트라키아 테마의 장군 니키포로스 파스티야스에게 기동대를 이끌고 크레타의 여러 시골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적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게 했다.
그런데 파스티야스는 적을 우습게 여기고 시골을 약탈한 뒤 부하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에 탐닉했다. 숲에 숨은 채 적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던 사라센들은 이 광경을 보고 로마군이 술에 잔뜩 취한 야간에 습격했다. 레온 부제에 따르면, 로마군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잘 싸웠지만, 지휘관 파스티야스가 많은 화살을 맞고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나다가 소수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학살당했다고 한다.
생존자들로부터 이 사태를 보고받은 니키포로스는 본대에게 성벽의 해안 지대와 아군의 참호를 잇는 경사로를 건설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야간에 진영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후 적병 몇 명을 붙잡은 그는 4만 가량의 적병이 로마군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인근 언덕에 모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 그는 현지인의 길안내를 받으며 적이 숨어있는 언덕 주변으로 접근했다. 이윽고 적진 포위가 완료되자, 그는 전투 나팔을 분 뒤 취침 중이던 사라센들을 급습했다. 사라센들은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궤멸되었다.
니키포로스는 부하들에게 적군 시신의 수급을 모조리 베어서 진영으로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그 후 진영에 돌아온 그는 투석기에 적병 머리를 잔뜩 실은 후 한닥스 성채 안으로 날려버리라고 명령했다. 전승에 따르면, 살아있는 당나귀를 성 안에 투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센들은 동요하긴 커녕 전의를 불태웠고, 니키포로스의 이어진 공격을 격퇴했다. 니키포로스는 이후에도 궁수대와 투석기를 투입해 성벽 위의 적병을 사살하고 성벽에 사다리를 걸려 했다. 그러나 한닥스 성벽은 투석기의 맹공을 버텨냈고, 모든 사다리는 부서졌으며, 성벽으로 접근했던 병사들은 대거 사살당했다.
니키포로스는 공세를 중단한 뒤 기술자들이 더욱 강력한 공성 무기를 개발할 때까지 도시를 봉쇄하기로 했다. 한편, 크레타 에미르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슈아브는 주변의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크레타 사절은 먼저 이집트의 이흐시드 왕조에 찾아갔지만, 실권자 아부 알 미스크 카푸르는 크레타 구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크레타 사절은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무이즈에게 향했다. 수니파 칼리파 지위를 꿰차고 있던 아바스 왕조와 경쟁하고 있던 알 무이즈는 크레타를 구원한다면 이슬람 세계에 자신을 진정한 지하드 수행자로 알릴 수 있다고 여기고, 로마노스 2세에게 로마군이 크레타를 떠나지 않는다면 958년에 로마와 파티마 왕조가 체결했던 휴전 협정이 무효화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전 함대에 크레타로 출격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파티마 왕조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니키포로스는 가능한 한 빨리 한닥스를 공략해야 한다고 여겼다. 겨울 동안 심각한 추위가 몰아치면서 많은 병사가 얼어죽고 보급이 늦어지면서 상당수의 장병이 굶어죽는 상황이 전개되자 이러한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다행히 얼마 후 보급이 들어오면서 병사들의 기력이 회복되자, 그는 전면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961년 3월, 로마군은 더욱 강력한 공성 무기를 활용하여 성벽에 퍼부었지만 이번에도 파괴하지 못했다. 이에 공성추를 성벽에 접근시켜 직접 타격을 가해 파괴하려 했다. 사라센군은 공성추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였다. 니키포로스는 광부들에게 성벽 아래를 파고 들어가서 약한 부분에 폭발성 및 인화성 물질을 배치한 뒤 불태우게 했다. 그러자 성벽 한 측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수비대는 재빨리 성벽이 파괴된 지역에 전투 대열을 배치했지만, 로마군의 맹렬한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 961년 3월 6일 한닥스 요새는 함락되었고, 로마군은 오랜 고생 끝에 공략한 것에 단단히 열받아서 여자들을 모조리 윤간하고 아이들을 살해했으며, 도시를 사흘간 약탈했다.
하지만 크레타 아미르인 아브드 알 아지즈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포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간 뒤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개선식에 참여했다. 그 후 로마노스 2세로부터 정착할 수 있는 토지와 선물을 제공받았다. 로마노스 2세는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원로원 의원으로 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다만 그의 아들 알 누만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네마스로 개명한 뒤 동로마군에 편입되었고, 971년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후에 등장하는 귀족 가문인 아네마스 가문이 그의 후손이라는 설을 제기한다.
한닥스 요새 함락 후 크레타 섬의 나머지 지역은 로마군에 재빨리 항복했다. 동로마 제국은 어렵게 확보한 크레타를 기독교화하기 위해 장기간 포교 활동을 전개했고, 스트라테고스(군 사령관)를 한닥스에 배치해 섬의 전반적인 관리와 경비를 맡겼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에게해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파티마 왕조가 이를 빌미삼아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시칠리아의 남은 동로마 영역을 모조리 탈취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 후 크레타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역이 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에게해의 제해권을 확보한 것은 동로마 제국에게 크나큰 이득을 안겨다 주었다. 에게해는 리아스 식 해안지대와 다도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해적들이 정박하거나 몸을 숨기기에 유리한 지형이었으므로 에게해는 고대부터 해적들이 날뛰던 바다였다. 그 중에서도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해안지대 어느 쪽으로도 진출이 가능한 크레타는 이슬람 해적들에게는 최적의 근거지였다.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해안지대는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해적들의 발흥 때문에 안보 위험에 노출되어 도시화와 발전에 제동이 걸린 상태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테살로니키를 약탈한 사건이었다. 동로마 제국 제2의 도시조차도 해적들로부터 안전을 장담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니키포로스의 크레타 섬 정복을 계기로 에게해의 제해권이 동로마 제국에 귀속됨에 따라, 평화를 확보하게 된 아나톨리아 해안지대[5]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10세기의 이슬람 기록에서도 아나톨리아 해안지대의 경제적 부흥을 관측할 수 있다. 10~11세기의 군사적 안정을 통해 충분히 발전한 아나톨리아 해안지대는 11세기 튀르크의 침략으로 아나톨리아 내륙지대를 상실한 동로마 제국이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 중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동시에 11세기~12세기 발칸 반도에서 두드러지는 도시화와 상공업적 발달 역시 에게해의 제해권의 확보가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로마인들도 크레타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크레타를 정복하는 자가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크레타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니키포로스는 실제로 황제가 되었다.
[1]
해자가 있는 성이란 뜻이다.
[2]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물은 동로마 제국 출신의 그리스인이었다. 이슬람 해적한테 노예로 잡혔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해적이 된 것.
[3]
다만 콘스탄티노스 곤길리스는 해군 사령관으로서 원정군을 크레타까지 운송하는 역할만 담당했고, 상륙전 이후의 지휘는 마누일 쿠르티케스[6]라는 다른 장군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누일 쿠르티케스가 사고로 익사하면서 육전 경험이나 권위가 부족한 콘스탄티노스 곤길리스가 원정을 책임지게 되면서 꼬여버렸다는 의견도 있다.
[4]
이 숫자는 과장된 것이라는 지적을 받지만, 그럼에도 이슬람 세력이 크레타에서 토착세력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음을 보여준다.
[5]
특히 10세기에 들어서는 동로마 제국이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도
아랍 세력을 상대로 유리한 전황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는 해안과 내륙 양쪽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