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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20 01:39:01

바르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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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Βάρδας | 바르다스
제호 바르다스(Βάρδας)
생몰 년도 미상 - 866년 4월 21일
카이사르 재위 기간 855년 ~ 866년 4월 21일
부모 마리노스(아버지)
테옥티스테(어머니)
형제자매 테오도라(여동생)
페트로나스(형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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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테오필로스 치세 때 고위직에서 활동하다가 테오필로스 사후 미하일 3세의 모후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테오도라 섭정을 도왔다. 그러나 환관 테옥티스토스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을 소외시키자 불만을 품고 855년 미하일 3세가 테옥티스토스를 죽이고 어머니를 수도원에 유폐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카이사르 칭호를 받고 제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지만, 866년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2. 생애

드룬가리오스(δρουγγάριος: 궁정에서 근무하는 하위 군사 계급) 출신의 마리노스와 테옥티스테의 아들로, 형제로 페트로나스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테오도라가 있었다. 그의 가문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파플라고니아에 거주했다. 830년 여동생이 테오필로스 황제의 황후가 된 후 파트리키오스가 되었고, 837년 압하지야에서 테오포보스와 함께 군사 활동을 벌였지만 압바스 왕조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841년 1월 테오필로스 황제가 사망한 뒤 아들 미하일 3세가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4살밖에 안 됐기 때문에, 모후 테오도라가 섭정을 맡았고 그와 페트로나스, 그리고 환관 테옥티스토스가 그녀를 도왔다. 바르다스는 초기에는 섭정단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특히 여동생이 성상 파괴주의를 종식하는 정책을 단행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마지막 성상 파괴주의 성향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요안니스 12세 하릴라스를 압박해 퇴위시키고 메토디오스가 새 총대주교에 취임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권좌에서 밀려났다. 환관 테옥티스토스는 844년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군대를 친히 이끌었다가 압바스 왕조군에게 참패한 뒤, 바르다스가 전투 도중에 무단 이탈하는 바람에 패전했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테오도라는 테옥티스토스의 고발을 받아들여 바르다스를 해임했다. 그 후 10여 년간 권력에서 소외된 그는 테옥티스토스와 테오도라에게 반감을 품고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855년, 15살이 된 미하일 3세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는 이 시기에 스웨덴 혈통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정부로 뒀지만, 테오도라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고 아들이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와 결혼하게 했다. 그러나 미하일 3세는 아내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관계를 계속 맺었다. 이 상황을 눈여겨 본 바르다스는 황제를 음모에 가담시켰고, 855년 5월 22일 다미에타 항구 습격으로 사라센 함대 섬멸을 이끌었으나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고 있던 다미아노스도 끌어들였다.

855년 11월 20일, 테오도라의 거처에 가기 위해 황궁 안을 걷던 테옥티스도스의 앞을 미하일과 다미아노스가 가로막았다. 미하일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자신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며 처리해야 할 국정이 있으면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옥티스도스는 황제와 말다툼을 벌이다 몸을 돌이켜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때 바르다스가 돌연 장교들과 함께 들이닥쳐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테옥티스도스는 간신히 칼을 뽑아들었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황제는 경비병들에게 직접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테오도라는 즉각 달려와서 아들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어머니를 뿌리쳤고, 경비병들은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간 테옥티스도스를 끌어내 그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이렇게 해서 테옥티스도스를 제거한 미하일은 856년 3월 15일 원로원 특별 회의에서 단독 황제로 공인되었고 어머니를 수녀원에 유배보냈다.

그 후 미하일이 향략에 빠져 지내는 동안, 바르다스는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은 뒤 제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바르다스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정치적 식견과 탁월한 행정 능력을 갖췄으며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다. 856년, 당시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는 파울리키아파 난민들을 받아들여 전력을 크게 증강시킨 후, 카르베아스를 파울리키아파 리더로 삼아 원정에 대동시켰다. 그 후 흑해 남부의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거쳐 아미수스를 약탈했다. 이에 바르다스는 동생 페트로나스가 이끄는 5만여 제국군을 파견해 이들을 치게 했다.

페트로나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눠 북쪽, 남쪽, 서쪽에서 동시에 진격해 포손-할리스 강과 그 지류인 랄라카온 강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의 군대를 포위했다. 곧이어 벌어진 처절한 전투에서, 우마르와 그의 병사들은 거의 다 전사했다. 페트로나스는 뒤이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미다(지금의 디야르바키르)까지 진군하게 해 많은 포로를 확보해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3년 후에는 미하일 3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라센을 공격했다. 859년엔 제국군이 다미에타를 다시 습격하여 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863년, 루스인과 아랍인이 침공했지만 제국군은 이를 격퇴하고 아랍군 사령관들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제국군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몰아붙여 필리포폴리스, 메셈브리아 등을 수복했다.

858년, 바르다스는 자신의 며느리와 사랑에 빠져 아내 테오도라와 이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는 이를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858년 예수공헌축일에 바르다스의 성사를 거부하고 파문에 처했다. 바르다스는 이에 분개하여 그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몇달 후, 미하일 3세는 어머니 테오도라와 두 여동생을 블라케르나이 근처의 카리아노스 수녀원으로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오스는 삭발식을 맡아달라는 황제의 요구를 거부했다. 바르다스는 기회를 포착하고 황제에게 총대주교와 테오도라가 동맹을 맺었다고 모함했다. 여기에 게베온이라는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이 테오도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바르다스는 이 자의 배후에 총대주교가 있다고 모함했다.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의 설득에 넘어갔고, 858년 11월 23일 이그나티오스를 테레빈토스 섬의 수도원으로 유폐하고 포티오스를 새 총대주교로 선임했다. 이그나티오스가 이에 대응해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도움을 호소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863년에 포티오스를 파문했다. 이러한 분열의 와중에 두 교회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에 대한 사목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모라비아에 파견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키릴 문자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라비아는 서방 교회를 택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바르다스는 864년 가뭄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보리스 1세를 굴복시키고 동방 교회로 개종시켰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아랍과 불가리아를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있었지만, 미하일 3세와 바르다스 간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바르다스는 책임감 없이 향략만 추구하려 드는 황제를 여러 차례 제지했고, 미하일 3세는 황제의 권위마저 훼손시킬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바르다스를 못마땅하게 봤다. 결국 미하일 3세는 바르다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866년 봄, 바르다스는 사라센 해적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크레타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866년 4월 21일 황제를 군대가 집결한 밀레투스로 초빙하여 원정에 관해 설명하던 중 황제의 시종장 바실리오스가 숨겨뒀던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미하일 3세는 원정을 취소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바르다스의 반역을 공표하고 시종장 바실리오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바르다스는 생전에 아들 안티고노스와 로고테테 직책을 맡고 있던 심바티오스와 결혼한 딸을 두었다. 안티고노스는 궁정에서 시종으로 일했는데, 아버지가 살해된 뒤에도 여전히 그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사위 심바티오스는 바르다스의 직책을 물려받기 바라는 마음으로 장인을 암살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바실리오스가 카이사르에 선임되자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발각당하여 신체 절단형에 처해진 뒤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