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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Roger de Flor | 루지에로 데 플로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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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지에로 데 플로르(Roger de Flor) |
생몰 년도 | 1267년 - 1305년 4월 30일 |
카이사르 재위 기간 | 1304년 12월 - 1305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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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탈루냐 용병 지휘관이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카이사르. 1304년 안드로니코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를 수여받았으나 1305년 4월 30일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2. 행적
1267년경 남이탈리아의 브린디시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매잡이 장교였던 루트거 폰 데어 블룸과 브린디시의 귀족 여성 사이에서 출생했다. 1268년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이 맞붙은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전사한 뒤, 본래 부귀했던 집안이 급격하게 쇠락했고,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매춘업에 종사하다가 아들을 돌볼 여력이 없자 성전 기사단에 맡겼다. 그는 성장한 뒤 "형제 하사" 계급에 올랐고, "이렉스(Ierax)"라는 이름을 가진 배의 선장이 되었다.1291년 아크레의 성 요한 공성전에 참가해 용맹을 떨쳤지만, 기사들은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발생한 혼란 때 그가 기사단의 보물을 유용했다고 비난했다. 결국 성전 기사단에서 쫓겨난 그는 한동안 해적질을 하다가 프리드리히 3세를 섬기는 용병이 되었다. 1302년, 아라곤 왕국은 1281년부터 북아프리카를 원정하기 위해 모집한 카탈루냐 용병들과의 계약을 취소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3세는 이들을 고용해 시칠리아에 눈독을 들이는 나폴리 왕국에 맞서기로 하고, 그를 카탈루냐 용병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루지에로는 1302년 메시나 공방전에서 용병대를 지휘해 나폴리군을 격파했다. 이후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간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무렵, 튀르크인들의 아나톨리아 진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고용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일전에 십자군으로서 활약했던 추억이 있었기에 기꺼이 수락하고 39척의 배에 4.000명의 알모가바르(Almogavars: 경무장 보병), 1,500명의 기병을 태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그해 9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그는 마침 도시를 봉쇄하고 있던 제노바인들을 격파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병력이 일천한 상황에서 먼 길을 마다않고 와준 용병대를 환영했고, 루지에로에게 자신의 조카딸이자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아센 3세의 딸 마리아 아세니나와 결혼시켜주고 메가스 둑스(Megas Doux)에 임명했다. 아울러 이미 동로마 제국에 복무하고 있던 다른 용병들보다 카탈루냐 용병들에게 2배에 달하는 봉급을 주었다. 그 후 루지에로는 아나톨리아로 건너가서 필라델피아, 마그네시아, 에페소스를 탈환하고 킬리키아와 타우루스까지 진격해 매복하고 있던 튀르크인들과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카탈루냐 용병대는 전장에서는 용맹했지만 주민들에게 폭압적으로 대했다. 그들은 도시를 탈환할 때마다 약탈을 자행했고, 주민들을 고문해 돈을 숨겨놓은 장소를 알아내려 했으며, 각지의 여인들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강간하고 아내나 애인으로 삼았다. 주민들은 그런 그들의 폭압적인 행태에 질려 "카탈루냐인들의 친구가 되느니 튀르크인들의 노예가 되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러던 중 루지에로가 그동안 약탈한 보물들을 마그네시아로 보냈다가 마그네시아 주민들이 카탈루냐인들을 살해하고 보물들을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루지에로는 즉시 용병대를 이끌고 마그네시아를 포위 공격했지만, 주민들의 결사 항전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불가리아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공세로 인해 제국이 위태로워지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발칸 반도로 소환했다. 루지에로는 용병대를 갈리폴리와 다른 도시들에 주둔시켰지만, 급료를 지급받지 못한 상황에서 불가리아군과 싸울 수 없다고 통보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재정이 매우 열악해져서 용병대에게 지급해야 할 급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루지에로를 불러 달래려 하자, 루지에로는 대놓고 협박했다.
"나는 40걸음 앞에서는 당신에게 엎드려 절하겠소. 그러나 일어선 후에는 내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소!"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모든 관리에게 주는 월급의 3분의 1을 줄이고 농민들에게 특별 세금을 물렸다. 그렇게 해서 모은 100만 개의 금화를 용병대에게 지급했지만, 루지에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심지어 카탈루냐 용병들이 자기들보다 봉급을 2배나 받는 것에 화가 나서 따져묻는 알란 용병대장 기르콘의 아들을 포함한 300명의 알란인들을 살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루지에로의 권세가 두려워서 아무도 책임을 묻지 못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어떻게든 루지에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1304년 12월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루지에로의 요구는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거하고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며 제국을 압박했다. 1305년 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장남인 미하일 9세가 루지에로와 협상을 벌였다. 루지에로는 병사들에게 10만 골드의 봉급을 급료로 지불하고 30만 골드를 추가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아나톨리아 일대를 영지로 나눠달라고 덧붙였다.
미하일 9세는 루지에로의 요구사항을 아버지에게 알렸고, 카탈루냐 용병대가 난동을 부릴 것을 염려한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1305년 4월 30일, 루지에로는 미하일 9세가 초대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피살당했다. 미하일이 루지에로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기록과 술에 취한 로마인과 카탈루냐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 와중에 죽어버렸다는 기록이 동시에 전해지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자신들의 지도자가 살해당하자 분노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전쟁을 원치 않았기에, 루지에로가 자신의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고 호소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용병대는 이를 무시하고 500명의 투르크 분견대와 연합하여 갈리폴리에서 요새를 세우고 트라키아를 습격해 밤낮으로 약탈하고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았다.
미하일 9세는 이에 분노해 카탈루냐 용병대를 토벌하려 했으나, 1305년 7월 아프로스 전투에서 알란 용병대가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참패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에는 병력이 적었기에 그곳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 대신 서쪽으로 군대를 돌려 트라키아 일대에서 2년간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그 후 진로를 남쪽으로 돌려 아테네로 진군해 아테네 공국을 탈취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