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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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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몬페라토의 레니에르 (Renier of Montferrat) |
출생 | 1162년 |
사망 | 1183년 |
직위 | 카이사르, 테살로니키의 총독 |
반란 대상 | 알렉시오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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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반란자. 마누일 1세 황제 사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의 친서방 정책에 반발한 민중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고, 나중엔 안드로니코스 1세와 손을 잡고 마리아 황후의 실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1183년 안드로니코스에게 독살당했다.2. 생애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5세와 바벤베르크의 유디트의 아들이다. 1179년 가을 17살의 나이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마누일 1세 황제의 장녀이며 당시 27세였던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다. 마누일 1세는 이 결혼을 통해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결혼식은 1180년 2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룸에서 경마 경기를 동반한 호화로운 파티로 거행되었다. 그는 카이사르(부황제)라는 칭호를 받았고, 요안니스로 개명했으며, 테살로니키의 총독이 되었다.7개월 후인 1180년 9월 마누일 1세가 사망했고 황위는 어린 황자 알렉시오스 2세가 이었다. 알렉시오스의 모친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가 섭정하였지만,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와 마리아 부부는 이러한 민심을 읽고 반란을 꾀했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부부는 지지자 150명과 함께 아야 소피아로 숨었다. 토벌대는 아야 소피아 성당을 포위했지만, 총대주교 테오도시오스가 이들을 비호해서 체포하지 못했다.
그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서 민중을 선동했고, 친서방 정책에 불만이 가득했던 민중은 이에 호응했다. 그들은 동료 공모자들을 석방하고 섭정단을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마리아 황태후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레니에르와 마리아는 아야 소피아를 요새로 전환하고 외국인 용병을 고용했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이에 맞서 부활절을 기념하여 황궁에 방문했던 테오도시오스 총대주교를 전격 체포하고, 새 총대주교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 황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테오도시오스는 석방되었다. 민중은 이 사건에 분노하였고, 곧 황태후와 섭정단 지지파와 레니에르와 마리아 지지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며칠간의 시가전 끝에 양측은 화해하기로 했다. 마리아와 레니에르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고, 반란군은 사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너그러운 조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황태후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고, 민중의 서방인에 대한 적개심은 증폭되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수도의 혼란을 바로잡겠다며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흑해의 연안지대에서 거병했다. 민중은 열렬히 호응했고, 칼케돈 해협에 이르렀을 때 그의 병력은 수만에 달했다. 그를 막으려 했던 진압군은 가볍게 격파되었고, 함대 사령관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도 반란군에 가담했다. 급기야 1182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성내에 거주 중이던 서방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수도에 입성했고, 레니에르와 마리아 부부를 별궁으로 옮겼다. 1183년, 안드로니코스는 사람을 시켜 부부를 독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