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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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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1. 개요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 체제가 원로원 내 공화정주의자들의 반발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실 내부의 정쟁,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중병으로 붕괴 위기에 직면한 사건.2. 배경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 연합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30년 지중해 세계의 절대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한 뒤 기원전 28년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취임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27년, 그는 프린켑스 세나투스 권한을 발동해 원로원을 소집한 뒤 "내가 현재 가진 모든 권한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반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장차 양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영구 독재관으로 군림할 거라고 예상하고 근심에 빠졌던 의원들은 환호했고, 그 해 1월 16일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업적록>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여섯 번째 집정관과 일곱 번째 집정관 재임 기간에, 나는 내전의 불길을 진압하고 만인의 동의를 얻어 절대적인 통제권을 얻은 후 공화국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의지에 맡겼다. 나는 이 봉사를 위해 원로원의 칙령으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고, 공공 법령에 의해 내 집 문설주를 월계관으로 덮었으며, 내 문 위에 시민관을 세우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나의 용맹, 관대함, 정의, 경건을 인정하여 이것을 주었다고 증언하는 쿠리아 율리아(Curia Julia)의 비문이 세워졌다. 나는 이후로 지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었지만 권력에 있어서는 동료 행정관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이후 행보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나서 공화정의 부활을 이뤄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내전 기간에 받았던 비상설 특권을 반환하면서도 기원전 31년부터 연이어 맡았던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을 여전히 맡았고 로마군 전체에 대한 임페리움(지휘권)을 유지했다. 또한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아들이며 공화정 체제 수호를 이뤄냈다는 명목을 내세워 자신의 이름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1] 아우구스투스로 바꿔 사용해, 자신을 과거 로마를 구한 영웅들과 동등한 위치에 세웠다. 그러면서도 테베에서 일어난 반란을 단숨에 진압한 뒤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필레에 기념비를 세운 이집트 행정장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를 해임한 뒤 자살을 강요하는 등, 자신의 권위에 경쟁할 만한 이들을 미연에 제거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로원 내 완고한 공화정주의자들은 그런 아우구스투스의 행보에 "그가 우리를 기만하고 로마를 왕정으로 이끌고 있다"라고 의심했다. 그 의심은 아우구스투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칸타브리아 전쟁을 지휘하고 갈리아에서 행정 조직을 개편한 뒤 기원전 24년 로마로 돌아왔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온 평민 한 사람당 400 세스테르티우스를 보너스로 주었고, 원로원을 소집한 뒤 다음 2개의 영예를 자신에게 선사하게 했다.
1.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2. 아우구스투스의 가정에 속한 젊은이들은 법적 연령 이전에 공직에 출마할 수 있다.
2. 아우구스투스의 가정에 속한 젊은이들은 법적 연령 이전에 공직에 출마할 수 있다.
이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법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고, 그가 양자로 삼은 이들은 어린 나이에 명예로운 경력( 쿠르수스 호노룸)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는 전직 법무관의 권한을 부여받고 기원전 23년 조영관에 출마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선출직 입후보 제한 연령보다 10년 앞서 집정관이 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에 원로원 내 공화주의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노골적으로 후계자를 내세워서 왕정을 이루려 한다고 여기고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무너질 위기가 연이어 닥쳤다.
3. 전개
3.1. 프리무스 재판
기원전 24년 말 또는 23년 초, 마케도니아 전임 총독 마르쿠스 프리무스가 원로원의 승인 없이 로마의 동맹국인 트라키아의 오드뤼사이 왕국과 전쟁을 벌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프리무스의 변호를 맡은 무레나는 그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오드뤼사이 왕국을 공격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프리무스는 그 명령이 아우구스투스의 명백한 후계자인 마르켈루스로부터 온 것이라고 증언했다.이 증언은 원로원 전체를 발칵 뒤집어놨다. 당시 로마의 속주는 외적의 침략에 노출되어 '프린켑스'의 특별 관리가 필요한 속주와 원로원이 자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속주로 분리되었는데, 마케도니아 속주는 원로원이 관리하는 속주에 속했다. 그 속주의 총독이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를 받들어 전쟁을 벌였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권력을 넘겨주겠다던 기원전 27년의 선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의원들이 불만을 품을 일인데, 총독에 대한 어떠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는 조영관인 마르켈루스가 총독에게 전쟁을 단행하라는 지시를 임의로 내렸다고 하니 다들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증인으로 소환되지 않았는데도 재판에 출석했다. 그는 증언석에서 선서 후 자신의 명예를 걸고 프리무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마르켈루스 역시 그런 바 없다고 주장했다. 무레나가 이에 분개해 소환되지 않은 재판에 참석한 이유를 말해달라고 다소 거친 어투로 묻자, 아우구스투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로마의 공익을 위해 여기에 왔소."
그 후 프리무스는 유죄를 선고받고 추방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룬 후대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 재판에서 무죄에 투표한 배심원들이 상당했다고 밝힘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주장을 신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후 원로원 내부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었고, 로마 시내에서도 아우구스투스의 모순적인 행보를 지적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기원전 23년 11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하면서 동료 집정관으로 과거 카이사르와 자신에게 맞서 싸우다가 사실상 은퇴해 공화정파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선임했다.
3.2. 중병에 걸린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3년 늦봄, 아우구스투스가 고열에 시달린 끝에 침상에 몸져누웠다. 본래부터 신체가 허약했던 그는 병마를 쉽게 이겨내지 못하다가 그 해 여름에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임종을 눈앞에 둘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가족과 친구, 원로원 의원 대표들, 집정관들을 불러 후일을 부탁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인장 반지를 물려주고, 모든 공식 문서, 공공 재정에 관한 권리, 각지에 배속된 군대에 대한 권한을 동료 집정관 피소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아그리파와 피소에게 공동으로 로마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했다. 반면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았던 조카 마르켈루스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던 피소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제스처를 통해 어린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는 의혹을 불식시키고 원로원을 달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 출신 주치의인 안토니우스 무사의 조언에 따라 냉찜질을 한 결과 열이 가라앉더니 며칠 만에 완쾌하면서, 이 모든 조치는 무효가 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완쾌 후 자신의 유언장을 원로원에 제출하며 이를 공개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의원들이 한사코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죽음의 문턱을 넘어갈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아우구스투스는 라틴 축제(Feriae Latinae)를 수행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가 돌연 원로원에 집정관에서 물러나겠다고 통보하고 시골 별장에서 휴양했고, 루키우스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가 보결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가 자신이 아니라 아그리파가 인장 반지를 수여받음으로써 실질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은 것에 분노해 아그리파를 비방하는 악성 소문을 퍼트리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왕실 내 분열이 가시화되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비방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해 이러한 비방을 잠재운 뒤 아그리파를 시리아 총독으로 선임해 로마에서 잠시 떠나있게 했다.
3.3. 마르켈루스의 요절
아그리파가 동방으로 떠난 직후, 마르켈루스는 로마에 창궐한 전염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렸다. 안토니우스 무사는 비슷한 증세를 보였던 아우구스투스를 냉찜질로 살렸으니 이번에도 통하리라 보고 마르켈루스에게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차도가 없었고, 결국 21세에 요절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화장돼 아우구스투스 영묘 완공 후 최초로 안치되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 " 리비아 드루실라가 자신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를 위해 마르켈루스를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당대부터 신빙성 없는 소문으로 취급되었다.후계자로 예정했던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와 결혼했던 친딸 대 율리아를 티베리우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인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가 율리아를 아그리파와 결혼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명분은 일전에 그가 아그리파에게 인장 반지를 건네줬다가 마르켈루스파 인사들이 반발하면서 황실이 분열될 위기에 놓였으니,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고 그가 아끼는 아그리파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마이케나스는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정혼 후 연인 사이인 티베리우스가 대 율리아와 결혼한다면 종국적으로 아그리파가 정적이 될 것이며, 이는 리비아의 차남이며 아우구스투스가 양자 입적을 강하게 구상해 실행 중인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골육상쟁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마이케나스가 리비아 드루실라를 견제하고, 자신과도 어느 정도 약간 대립 중인 아그리파와 손을 잡는 목적성이 있더라도, 이성적으로 볼 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소 옥타비아, 리비아 드루실라가 장차 대 드루수스를 지지하는 여건을 만듦에도 고민거리가 있었다. 아그리파는 소 옥타비아의 큰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 생활 중이고, 사이에 딸이 있어서 이 부분은 아우구스투스 누나와 아그리파의 아내가 될 율리아 사이의 필연적인 대립이 초래될 원인이 된 것이다.[2]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끝내 마이케나스의 조언이 맞다며 결정을 지었다. 어차피 누나가 자신의 양자로 정식입양될 대 드루수스를 사위로 맞이 할 것이며, 드루수스가 입양 후 후계구도에 오르면, 두 부부를 사돈으로 만들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 여러 부분에서 확인되는 만큼, 숙고 끝에 그는 집안 교통 정리를 했다.[3]
아우구스투스는 그 해 율리아를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 그 대신,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시켰고, 누나 소 옥타비아의 소원을 들어 누나가 친아들로 생각한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아그리파와 이혼한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시켰다.
3.4. 카이피오와 무레나의 음모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2년에 파니우스 카이피오와 무레나가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발당했다. 무레나의 이름은 여러 사료에서 다양하게 불렸다. 디오 카시우스는 마이케나스의 아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연인인 테렌티아와 아우구스투스 궁정의 주요 인물인 프로쿨레이우스의 형제인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밝혔다. 반면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루키우스 무레나가 음모를 주도했다고 밝혔으며, 수에토니우스는 바로 무레나가 음모를 꾸몄다고 기술했다.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무레나의 전체 이름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바로 무레나였을 것이라 추정하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기원전 25년 시리아 총독 바로, 기원전 24/23년에 프리무스를 변호했던 무레나와 동일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기원전 23년 집정관 목록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직임을 수행하지 않았거나 해임된 것으로 추정되는 집정관 '아울루스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가 적혀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아우구스투스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는 무레나와 동일인물일 것이라 추정하며 실제 음모는 기원전 23년에 벌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집정관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집정관 목록에 명시된 인물은 루키우스나 리키니우스가 아닌 '아울루스'라는 이름을 쓴 점 등을 볼 때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일각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프리무스 재판 때 자신에게 맞선 무레나를 고깝게 여겨 그의 형제 또는 친척인 아울루스를 해임했고, 무레나가 이에 반감을 품고 음모를 꾸몄으리라 추정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스트리키우스라는 인물이 무레나와 카이피오가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알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마이케나스 등 일부 측근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마이케나스는 곧바로 아내 테렌티아에게 무레나와 카이피오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알렸고, 카이피오와 무레나는 계획이 들통났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도주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기밀을 누설한 마이케나스에 대한 총애를 거둬버렸다고 한다. 이후 피고인이 부재 중인 상태에서 재판이 열렸고, 단 하루 만에 카이피오와 무레나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다만 몇몇 배심원들은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무레나와 카이피오는 도주 중에 체포되자마자 살해되었다. 카이피오는 두 명의 노예와 함께 도망쳤는데, 한 노예는 주인을 잡으려는 사람들과 싸웠고 나중에 카이피오의 아버지에 의해 해방되었다. 다른 노예는 주인을 버리고 도주했다가 카이피오의 아버지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일부 학자들은 카이피오와 무레나가 암살 음모를 실제로 꾸미지 않았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에게 불만을 드러낸 정적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루 만에 끝나버린 졸속 재판을 연 점, 반역을 꾸몄다는 자들을 체포하자마자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죽여버린 점,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인 마이케나스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그녀의 형제인 무레나가 도주하게 했던 점, 카이피오의 아버지가 아들을 지키려 한 노예를 해방시켜주고 도망쳤던 노예를 십자가형에 처한 점 등 여러 정황을 볼 때 무레나와 카이피오는 무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4.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3년에 일련의 위기를 겪은 뒤 기원전 31년부터 11년 연속 맡았던 집정관에서 물러났다. 이후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집정관을 맡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공식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지위를 맡지 않았다. 하지만 동료 의원이었던 카이피오와 무레나가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살해당한 걸 지켜본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거슬리면 자기들도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그를 권좌에서 완전히 배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기원전 22~21년, 로마시에서 식량 위기가 닥쳤다. 이때 원로원은 식량을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하지 못해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동안 한 발짝 물러나서 사태를 관망하다가 시민들과 원로원의 요청을 '마지 못해' 수락하고 자신이 보유한 임페리움과 이집트의 지배권을 통해 식량 공급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했다. 그 후 원로원은 기원전 19년 임페리음 프로콘술라리 마이우스(imperium proconsulare maius)를 수여해, 그가 직접 임명한 총독 뿐만 아니라 원로원이 지명한 총독까지 간섭 및 통제할 권리를 합법적으로 누리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전역의 제국군을 통솔하고 총독들을 통제하며 호민관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등 최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한편, 자신의 입맛에 맞는 파트리키들에게 집정관직을 선사함으로써 그들을 회유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로마 전통의 수호자임을 자처했고, 로마 공화정 체제의 틀 안에서 족벌주의와 정략결혼, 입양제도 등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리비아의 두 아들이 속한 클라우디우스 네로, 리비아의 혈통적 친정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법적 친정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옥타비아의 시가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을 자신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상호 입양, 결혼으로 하나의 가문으로 완성했다. 또한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유니우스 실라누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등 유력 가문을 자신이 구축한 카이사르 가문과 인척 관계로 연결함으로써 이들을 황실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입지는 굳건해졌고, 로마의 정치 제계는 제정으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