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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소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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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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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도밍게즈 산체스, <세네카의 죽음>, 1871년작.

1. 개요2. 배경3. 공모자들4. 적발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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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iso 陰謀

65년 로마 제국 황제 네로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로마 지배층 인사들이 네로를 축출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알려진 고대 로마 프린키파투스 시대 최악의 정치 스캔들. 음모 자체가 진실인지는 아직까지 논란이다. 발각되었다고 주장될 당시부터 논란이 컸던 만큼 공모자로 지목된 이들은 대거 숙청됐다. 이 사건 이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연루되었다고 뒤집어 씌워진 베네벤툼의 음모 등이 연달아 터져, 네로의 통치에 대한 지배층의 반감이 확산됐고, 이는 네로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54년 10월 13일 궁중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네로는 정적이 될 만한 이들을 대거 숙청해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다지려 했다. 그 과정에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 브리타니쿠스 독살을 시작으로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잇따라 죽여 외가인 카이사르 가문의 혈통을 단절시켰다. 이후 그는 본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며 친부의 동상을 원로원에 재설치하고 자신의 직계를 띄우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지하거나, 인척 관계로 맺어진 로마 귀족들은 네로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는 고종 사촌형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티베리우스의 외증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1],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등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방계 황족들을 잇따라 기소해 모조리 죽였다. 여기에는 네로에게 기용된 근위대장 티겔리누스가 행동대장으로 직접 나서, 그 행태는 세야누스, 마크로 취임 당시보다 공안통치의 모양새가 한층 악화된 모습을 띠게 된다. 따라서 티겔리누스를 필두로 한 프라이토리아니 주도 아래, 네로의 지시를 받들어 여러 유력 인사들과 그 시종들이 납치, 협박, 고문, 위증 등을 통해 큰 피해를 입는 일이 반복됐다. 이로 인해 로매 지배계급의 네로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은 갈수록 커졌다.

그러던 64년 7월 18~24/27일, 로마 대화재가 벌어졌다. 타키투스는 대화재로 인해 로마의 14개 구역 중 4개 구역만 손상을 입지 않았고, 3개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다른 7개 구역은 상당수 파괴되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루나 신전, 유피테르 신전을 포함한 일부 고대 신전과 성소들이 파괴되었으며, 누마 폼필리우스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계시록, 그리스 미술 작품과 고대 문헌 등이 소실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100만 이상의 주민 중 3분의 1만이 화재로 인한 피해를 모면했으며, 사망자 수는 수 만 명이고, 부상자와 장애를 입은 자의 수는 훨씬 많았으며, 수십 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부하 또는 노예들을 시켜 화재를 일으키고 궁전의 무대에 올라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서술했으며, 수에토니우스는 네로가 하인들을 시켜 불을 지르게 했으며, 마이케나스 탑에서 무대 의상을 입고 화재에 휩싸인 로마를 바라봤으며, 폐허에 남아있는 모든 것을 약탈하기 위해 잔해와 시체를 제거하게 했다고 기술했다. 3세기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역시 네로가 트로이가 불타 없어지는 장면을 연출할 계획을 세우고, 부하들을 시켜 술에 취한 채 도시 여러 지역에 불을 지르게 했으며, 병사들은 불을 끄기보다 퍼뜨리는 걸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또한 그는 황제가 궁전 지붕에 올라가 수금을 들고 노래를 불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실제로는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로마에서 80km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오늘날 안치오)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화재 소식을 듣자 마자 전차를 몰고 로마로 달려가서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별궁을 개방하여 집을 잃은 이들을 그곳에 임시 투숙시키고, 주변 도시로부터 보급품을 차출하여 노숙자들에게 나눠줬으며, 밀 가격도 한 부셀(bushel) 당 3세스테르티우스로 책정해 식량을 잃은 로마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 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책을 잘 세우고 재건축 계획도 착실히 수행한 것을 볼 때, 네로가 방화를 자행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네로가 불을 지르도록 지시했다는 소문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네로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다 못해 탐닉했고, 로마가 너무 지저분하고 촌스럽다며 죄다 허물고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네로는 이러한 대중의 의심을 다른 데 돌리기 위해 기독교 신자들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씌워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다음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이게 하거나,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화형시키는 등 온갖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그 후 네로는 도시 재건에 박차를 가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색이 지나치게 들어간 건물을 대량으로 제작해 많은 이의 지탄을 받았다. 더욱이 불에 타 소실된 지역 중 광대한 영역에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 궁전)를 짓도록 해,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때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도무스 아우레아 부지에 포함되었기에 더욱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네로는 대공사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속주에 거두는 세금을 대폭 늘렸으며, 신전을 대거 털어서 재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렇게 마련 재원을 도시 재건축에 그대로 쓰지 않고 개인의 사치에 상당수 써먹었다.

이러한 네로의 폭주에, 그동안 황제를 추종했던 인사들마저 동요했고, 네로 대신 새 황제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군주정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들 역시 이 때를 틈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타도하고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으로 복귀하려 했다. 이리하여 수십 명의 인사들이 연루된 대규모 음모가 시작되었다.

3. 공모자들

네로, 티겔리누스 발표에 따른 주요 공모자는 다음과 같다.
'피소 음모'의 주인공. 네로의 외조부 게르마니쿠스와 심각한 마찰을 벌이다가 그의 죽음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된 뒤, 자살한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손자. 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어머니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의 딸로, 피소는 그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잘생겼고 키가 컸으며, 성격이 무척 원만해 원로원 계급 뿐만 아니라 하층민들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막대한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또한 웅변술이 뛰어났고 비극 작품을 몇 편 집필할 정도로 예술 감각도 있었다. 자연히 그는 로마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말투가 관대하고 우아하지만 간곡함이 부족했고, 자니치게 과시적이었으며, 관능적인 사람들을 갈망했다고 한다.

40년, 칼리굴라 황제가 피소의 아내인 리비아 오레스틸라를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해 피소에게 이혼을 강요했다. 그 후 황제는 리비아 오레스틸라를 아내로 삼았다가 며칠 만에 이혼했다. 그러면서도 오레스틸라와 피소가 재결합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다 2달 또는 몇 년 후 피소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이유로 추방했다.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뒤 새 황제에 등극한 클라우디우스 1세에 의해 로마로 복귀했고,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보결 집정관이 되었다. 네로의 통치 기간 동안, 피소는 이렇다할 공직을 맡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로마에서 촉망받는 인물로 손꼽혔다. 네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은 그를 황제 적격자라고 여기고 네로를 처단한 뒤 피소를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이 그대로 인용돼 공모 주범으로 지목됐다.
36년 집정관 퀸투스 플라우티우스의 아들로, 클라우디우스 1세의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불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발각되어 48년 사형될 뻔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1세가 그의 삼촌이며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때 활약한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를 총애했기에 원로원 의원직에서 해임될 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네로 시기에 원로원에 복귀한 그는 피소 음모에 핵심 인물로 가담했다. 타키투스는 라테라누스에겐 네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지만 나라를 폭정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애국심을 품고 음모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네로 시기에 활약한 시인. 세네카의 조카이며 제자다. 그는 예술에 깊은 관심을 품은 네로의 친구가 되었고, 서사시 파르살리아를 발표하는 등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네로와 사이가 틀어졌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루카누스를 질투해 그가 시를 출판하는 것을 금지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네로는 원로원 회의를 소집해 루카누스의 대중 독회를 막게 했고, 루카누스는 이에 대응하여 네로에 대한 모욕적인 시를 썼다고 한다. 문법학자 바카는 루카누스가 <De Incendio Urbis(불타오르는 도시에 대하여)>라는 시를 썼다고 기술했으며, 후대의 시인 스타티우스는 루카누스에 대한 송가를 바치며 그가 폭군에 의해 불살라진 로마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고 기술했다. 이런 이유로 네로와 틀어진 그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발표됐다.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대대장. 처음 네로에게 사건의 음모를 전했다는 밀리쿠스 부부의 고변 당시, 티겔리누스와 함께 사건 진상을 파악하는 수사관을 맡은 인물이나, 사건 진행과정에서 피의자로 전환됐다. 타키투스는 이 인물이 음모를 처음 계획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네로가 무대에서 친히 공연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증오심을 품고 죽이려 했지만, 수많은 관객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간 도망칠 기회가 없다고 여기고 그러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또한 타키투스는 그가 네로를 살해한 뒤 피소 역시 죽일 생각이었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피소 역시 비극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네로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네로와 피소를 죽인 뒤에는 세네카에게 제국의 지배권을 넘겨주려 했다고 한다.
네로의 정치적, 학문적 스승이자 궁중 쿠데타를 통해 유언장을 통해 제위계승이 명시된 브리타니쿠스를 무시하고 네로가 제위에 오르는데 기여한 킹메이커이자 권신.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생전부터 정치적 모략, 궁중 음모 개입, 황제 암살 미수 건에 연루되어, 네로 집권 전부터 황실, 원로원 일부에게 위험인물로 분류됐던 사람이다.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안토니우스 팔라스 재판 당시부터 꾸준히 이름이 간접적으로 거론됐다가, 피소 음모 당시 조카 루카누스가 체포돼, 자신의 어머니와 숙부 이름을 불면서 공모 주범이자, 이 판을 설계한 흑막으로 분류돼 조사가 진행됐다.
55년부터 62년까지 프라이펙투스 아노네(Praefectus annonae: 로마 시의 곡물 공급을 감독하는 관리)를 역임했으며, 62년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사망한 뒤 근위대장에 발탁되었다. 그는 소 아그리피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소 아그리피나가 네로에게 피살당하자 내심 자신도 아그리피나의 파당으로 몰려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었다. 피소는 그런 그를 포섭하여 근위대 장병들을 이끌고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게 했다.
네로의 선황, 양부, 외종조부, 장인 클라우디우스시대에 근위대장을 역임했던 인물, 네로의 전처 포파이아 사비나의 첫 남편이다. 51년 소 아그리피나가 황후가 된 뒤 과거에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핍박했던 그를 해임하고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로 교체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할 정치 보복은 없었고, 본래 기사계급이었지만 나중에 재산 자격을 충족한 덕분에 원로원 계급으로 격상되어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에 활약한 시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마르티알리스는 그가 황제의 전용 의복인 보라색 망토를 몰래 입곤 했다고 밝혔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법적 장녀[2]. 네로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갈리아로 추방됐다가 암살된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아내.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마지막 직계손으로 네로의 근친상간 요구, 청혼을 거절했다가 공모자로 찍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됐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외에도 음모에 연루된 이들은 총 41명으로, 전현직 원로원 의원은 19명, 기사계급은 7명, 군인은 11명, 여성은 4명이며, 이중 황족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1명이었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당시 암살 계획을 수립, 집행한 인사가 20명인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기밀이 샐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네로는 음모의 실체를 알게 된다.

4. 적발

음모에 가담한 이들 중에는 에피카리스라는 여인이 있었다. 2세기 그리스 작가 폴리아이누스에 따르면, 그녀는 세네카의 형제들의 정부였다고 한다. 그녀가 이 관계를 통해 공모자들의 음모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타키투스는 그녀가 어떤 수단으로 음모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그녀는 공모자들이 계획을 실행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좀처럼 계획을 시행하지 않고 주저하자, 캄파니아 미셈 항구에 정박한 함대 사령관 볼루시우스 프로쿨루스를 포섭하려 했다. 마침 프로쿨루스가 자신에게 네로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자, 그녀는 이때다 싶어 그에게 피소 음모에 대해 설명하며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프로클루스는 네로에게 이 사실을 고스란히 알렸고, 네로는 즉시 에피카리스를 체포했다. 그녀는 사지가 으스러질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공모한 이들을 밝히지 않았다. 이리하여 음모의 실체가 당장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공모자들은 이 일로 모든 게 들통날 것을 우려해 거사를 서두르기로 했다. 네로가 공연하고 있을 때 습격해서 죽이자는 계획과 바이아에서 열린 대회 때 네로를 죽이자는 계획이 제안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치르켄시안 대회가 열리는 날 황제가 궁궐을 나왔을 때를 거사일로 정했다.

그들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플라우티우스 라테라누스가 네로의 발 앞에 엎드리며 재정 지원을 호소해서 네로의 방심을 유도한 뒤, 황제를 붙잡아 땅에 엎어놓고 핀으로 묶어놓는다. 그 다음에 공모자들이 달려들어 네로를 단검으로 찔러 죽인다. 이후 피소가 현장에 도착하여 대회에 참석한 군중에게 자신을 황제로 추대할 것을 청한다. 다만 일부 음모가들은 피소가 황제로 추대되어서는 안 되며 공화정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여겼고, 플라부스는 피소 역시 우연을 가장하여 죽일 생각이었다.

음모가 일어나기 전날, 음모에 가담한 인사 중 한 사람인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는 집으로 돌아와서 해방노예 밀리쿠스에게 단검을 갈고 닦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만찬을 주최했고, 가장 총애하는 노예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몇몇은 해방시켰다. 여기에 하인들에게 출혈을 멈추게 하는 지혈대와 상처를 가리는 옷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밀리쿠스는 주인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 큰 일을 꾸미려 한다고 의심했고, 그의 아내 역시 황제에게 주인의 행동을 털어놓으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결국 밀리쿠스는 궁궐로 달려가 황제의 해방노예인 에파프로디토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에파프로디토스의 안내를 받아 네로 앞에 선 밀리쿠스는 네로 앞에서 스카이비누스가 준비하게 한 단검을 보여주며 음모의 실체를 털어놨다.

태생적으로 겁이 많던 네로는 두 번째 올림픽 성과에도 불구하고, 맨앞에 앉아서 형식적으로 환호한 원로원과 상류층에게 불만은 있어도 모두가 자신을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증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네로는 암살 음모라면서 날카로운 단검을 증거로 가지고 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이때 그는 경호가 잘 되는 팔라티노 황궁이 불에 탄 까닭에 교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당시, 정국의 여론 변화도 피소 음모를 권좌 찬탈 음모로 확대시켰는데, 그 중 네로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 건 원로원과 기사계급,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전 임페라토르들보다 혐오스럽게 독재를 한다”, “지나치게 그리스, 근동 출신 인사와 피해방인들에게 권력과 영향력 있는 자리를 내리고, 본국이나 다른 속주 출신을 차별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네로는 2명의 근위대장 중 자신에게 헌신하는 악질 중의 악질 티겔리누스에게 총수사권을 부여하면서, 증거가 명백하게 되어버린 스카이비누스를 즉시 체포해 심문케했다.

티겔리누스는 지체 없이 스카비누스의 집으로 군인들을 보냈고, 군인들은 그를 황제 앞에 끌고 왔다. 스카이비누스는 단검은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구일 뿐이며, 자신은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타키투스는 스카이비누스가 밀리쿠스의 고발이 무너질 위험에 처할 정도로 혐의를 훌륭하게 부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밀리쿠스의 아내가 스카이비누스와 안토니우스 나탈리스의 긴밀한 만남이 있었다고 밝히자, 네로는 나탈리스를 소환했다. 나틸리스와 스카이비누스는 따로 심문을 받았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일치하지 않자 감옥에 갇혔다. 그 후 심각한 고문을 받은 두 사람은 결국 음모에 가담한 이들을 발설했다. 이중 나탈리스는 음모에 필수적인 정보를 공개하는 대가로 처벌을 피했다.

이리하여 로마에서 이름 있는 명사나 유력자들이 죄다 피소 음모라는 대형 국가반역죄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공모자로 의심 받은 이들은 늦은 밤, 원로원의 동의, 법정의 허락 없이 수감되어 가혹한고문을 받았다. 악랄하고 유명인사와 부자들이라면 사람을 붙여 어떤 꼬투리라도 잡던 티겔리누스가 담당한 만큼, 사건은 이전 네 명의 황제 시절이나 과거 로마의 사건들보다 잔혹할 수밖에 없었다.

티겔리누스 밑에 있던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대대장 수브리우스 플라부스가 심문 보고 및 체포를,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베테랑 백인대장 술피키우스 아페르가 황제 네로와 상관 티겔리누스, 수브리우스 플라부스에 입맛에 따라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살생부를 관리하고 증거조작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끌려온 루카누스는 고문 도구를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실토하면서 관대한 조치를 내려달라고 애걸했지만 네로에게 묵살당했다.

네로는 음모의 모든 세부 사항을 알기 위해 에피카리스를 다시 고문하게 했다. 에피카리스는 심한 매질을 받았지만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않다가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했다. 네로는 이에 분노해 그녀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유기하게 했다. 이후 여러 음모자들이 황제로 추대하려 했던 피소를 체포하게 했다. 피소는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체포된 뒤 자살을 강요받자 팔의 동맥을 끊고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라테라누스 역시 체포되어 노예를 처형하기 위해 사용되던 장소로 끌려갔다. 이때 처형을 맡은 호민관 스타티우스 프로스무스도 음모에 가담했지만, 그는 참수될 때까지 이 사실을 폭로하지 않았다.

65년 현직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도 음모에 연루되었다. 사실 어떤 공모자들도 그가 음모에 가담했다고 밝히지 않았지만, 네로는 자신의 예술 활동을 경멸하는 언행을 종종 했던 그를 미워했기에 이참에 제거해버리고 싶어 했다. 그는 황제에 대한 불경죄(Law of majestas)를 적용해 호민관 게렐라누스와 병사들을 아티쿠스의 집으로 보냈다. 그들은 아티쿠스가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을 보고 소환장을 전달했다. 아티쿠스는 소환의 목적을 이해한 뒤 즉시 침실로 들어가 팔의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 병사들은 그의 손님들을 몇 시간 동안 감금했다가 밤늦게서야 떠날 수 있게 했다.

타키투스는 세네카가 음모에 가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플라부스가 그에게 제국의 통치권을 맡기려 했다고 진술한 데다, 조카 루카누스도 음모에 깊숙이 연루된 터라 살아남을 길은 없었다. 네로의 명령을 받들어 로마에서 몇 마일 떨어진 시골에 은거하고 있던 세네카를 찾아온 가비우스 실바누스는 황제의 자살 명령을 전달했다. 세네카는 팔의 동맥을 절단했지만, 늙고 쇠약하여 피가 너무 느리게 흘러서 자살에 실패했다. 이에 욕탕에 들어간 뒤 다리와 무릎 뒤의 동맥을 절단해 죽음을 앞당겼다. 그의 아내 폼페이아 파울리나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군인들이 저지했다.

이렇듯 수많은 인사가 체포되어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고문을 받고 있을 무렵, 희생자 명부를 관리하고 증거조작을 책임진 실무자 술피키우스 아페르와 그 부하들이 느닷없이 반역죄에 엮어 제거되었다. 이는 네로와 티겔리누스가 비밀을 알고 있던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벌인 것으로 추정되며, 일각에서는 이 사실이 피소 음모가 네로의 조작극이라는 걸 입증하는 정황 증거라고 주장한다.

5. 결과

* 처형/ 강제 자살 : 피소, 플라우티우스 라테라누스, 세네카, 루카누스[3], 아프라니우스 퀸티아누스,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파이투스 트라세아, 클라우디우스 세네키오, 불카티우스 아라리쿠스, 율리우스 아우구리누스, 무나티우스 그라투스, 마르키우스 페스투스, 파이니우스 루푸스, 술피키우스 아페르[4], 막시무스 스카루스, 베네투스 파울루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 추방형/모욕형 : 노비우스 프리쿠스, 안니우스 폴리오, 푸블리우스 길리티우스 갈루스, 루프리우스 크리스푸스, 베르키니우스 플라부스, 무소니우스 루푸스, 칼비디이누스 퀴에투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블리티우스 카풀리누스, 페트로니우스 프리쿠스, 율리우스 알티네세, 막시무스, 카이디키아[5]
* 임시사면/무죄 : 안토니우스 나탈리스, 케르바리우스 프로쿨루스, 스타티우스 프로시무스[6], 갈비우스 실바누스[7], 아킬리아 루카나[8]

위에 언급된 이들은 그나마 이름 있는 41명의 희생자로 전현직 원로원 의원은 19명, 기사계급은 7명, 군인은 11명, 여성은 4명이며, 이중 황족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1명이다. 이외에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조상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발표되지 않은 피해자들이 상당히 많았고, 추방형, 모욕형, 임시사면, 무죄를 선고받은 이들은 네로와 그 추종자들의 압박, 협박으로 거진 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전까지 사면을 받지 못해 후손들이 몰락귀족이 되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네로는 피소 음모 사건을 계기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이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 이를 음모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했다. 이후 베네벤툼의 음모, 코르불로 강제 자결 사건 등이 이어지며 게속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이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네로에 대한 반기를 들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68년 3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뒤이어 빈덱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총독 갈바가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협력을 받아 히스파니아 전역을 장악하고, 원로원에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라고 요구하였으며, 근위대에 사람을 보내 뇌물을 찔러주며 네로 타도에 협력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원로원과 근위대 모두 네로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네로는 68년 6월 9일 자결했다.


[1] 티베리우스는 생전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자신의 혈육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타키투스 등의 기록에 따르면, 노황제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부모의 불륜, 결혼 과정이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등의 의문스러운 죽음, 세야누스의 만행, 리빌라의 음모 등과 깊숙이 연관되어 이를 애써 외면했고 이례적으로 어떤 표명도 하지 않았다. 이는 원로원, 로마인도 비슷해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로마 사회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로마 사회에 슬픔을 초래한 불행의 씨앗으로 평가받았다. [2] 위로는 클라우디아라는 딸이 있으나, 잉태 전부터 어머니가 불륜하고 여러 번의 관계를 맺은 것이 발각돼 클라우디우스, 소 안토니아 모두에게 인지를 받지 못했다. [3] 세네카의 제수씨가 되는 루카누스의 어머니 역시 자살 방식으로 처형됨. [4] 심문 조사 실무자였으나,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 후 죽임당함. [5]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의 부인 [6] 사면 직후 자살 [7] 사면 직후 자살 [8] 루카누스의 어머니. 아들이 처형된 뒤 임시사면됐음에도 자살 방식으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