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Faustus Cornelius Sulla Felix) |
출생 | 22년, 로마 제국 로마 |
사망 | 62년, 로마 제국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마살리아(오늘날의 프랑스 마르세유)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부모 |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아버지)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어머니) |
배우자 |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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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원로원 의원, 집정관. 로마 공화국 최초의 종신독재관 술라의 직계후손으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장녀[1]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의 두번째 남편이다.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방계 황족 중 제위에 가장 가까운 비(非)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었다. 그는 장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생전에 조카이자 처남 브리타니쿠스의 징검다리 후계자에 오르기 직전이었고, 훌륭한 인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이런 까닭에 장인이 급사하고, 브리타니쿠스, 소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모두 네로, 세네카,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의 간계로 살해된 직후부터 숙청대상이 됐다.
고종사촌동생 네로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두 번의 강압적인 재판과 증거조작에 따른 불법판결로 갈리아로 추방됐다가, 네로의 사주를 받은 근위대장 티겔리누스에게 암살됐다.
2. 생애
이름에서 드러나듯, 공화정 후기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를 풍미한 종신독재관 술라의 직계 후손이다. 아버지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직계손이자 기원전 54년 재무관을 지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장남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 어머니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 안토니아의 막내딸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이다. 외할머니 대 안토니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옥타비아의 딸이기 때문에 외가를 통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어받았다.아버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는 종신독재관 술라의 차남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아들로 어머니는 섹티아다. 그는 서기 31년 집정관을 지냈는데,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결혼한 것 외의 삶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생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인데,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숙부인 그는 서기 33년 집정관을 지낸 원로원 의원으로, 21살이던 무렵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중재로 같은 소장파에 속한 코르불로와 언쟁이 붙었다가 화해한 이력이 있고,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비문에 따르면 "게르마니쿠스의 처남"이라고 적혀 있는 인물이다.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삼남 칼리굴라 모두 코그노멘이 게르마니쿠스였고,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종종 드루수스 율리우스 게르마니쿠스로 공적 이름도 병행 사용했기에 로버트 사임을 비롯한 학자들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숙부인 그가 소 아그리피나의 두번째 남편이었던 이름 미상의 귀족이라고 추정한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면, 네로의 어머니로 외숙모였던 소 아그리피나와는 잠시나마 숙모와 조카 사이가 되게 된다.
어머니 소 도미티아 레피다는 네로의 막내고모로, 총 세번 결혼했고 파우스투스 술라 루쿨루스와 재혼 전에 사별한 남편 발레리우스 메살라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다. 이중 딸이 파우스투스의 이부누나인 메살리나다. 따라서 메살리나의 두 아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는 그에게 조카가 된다. 그녀는 외할머니 옥타비아를 닮아 상당한 미녀였다고 하며, 남이탈리아에 엄청난 규모의 개인영지를 보유한 귀부인으로 유명했다.
이런 배경을 둔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서기 20년경 그녀가 두번째 남편으로 맞이한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와의 사이에서 소 도미티아 레피다의 세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경우, 초혼인지 재혼인지 불분명한데 40세의 한창 나이에 원인불명의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두 번의 결혼에서 남편을 모두 떠나보낸 어머니는 후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중매로 세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차분하고 교양이 풍부하며, 귀족적이면서도 인품이 대단히 올곧았고, 이부누이 메살리나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서기 47년 이부누나 메살리나의 직접 추천과 주선으로 첫 결혼에서 남편과 사별 후 홀로 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와 결혼했다. 서기 2세기 디오 카시우스가 적은 기록에 따르면 메살리나가 자신의 남동생 파우스투스를 의붓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결혼시키기 위해 의붓딸의 첫남편 폼페이우스를 처형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에서는 양성애 내지 동성애 성향이 있는 폼페이우스가 남자애인과 함께 동반자살한 채 발견됐다고 말도 있어 디오의 주장이 맞다고 확언하기 어렵다는 평.
메살리나의 중매로 약혼 후 8살 어린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결혼했는데, 파우스투스는 신부와 달리 초혼이었다고 한다. 안토니아는 대단한 미녀였는데, 첫남편과는 상당히 냉랭했음에도 파우스투스와는 죽이 잘 맞고 부부사이가 애뜻할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후일 남편이 네로 손에 살해된 이후에도 남편을 사랑해 잊지 못했다. 이 결혼에서 두 사람은 아들을 낳았는데 펠릭스로 불린 아들은 두 돌이 되기 직전 요절했다. 허나 펠릭스가 태어난 이후, 첫 생일날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비공개로 열린 외손자의 생일을 축복했고 파우스투스, 안토니아 부부의 첫 출산을 기리며 축전을 보냈다.
상술했듯이 워낙 인품이 바르고 성실하고 정직해, 장인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일찌감치 어린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도울 남자친족으로 지명해 황족 특권을 하사했고, 서기 52년 집정관에 추천해 집정관에 올랐다. 그러나 이런 총애는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칼리굴라 황제 생전에 칼리굴라에게 "내 조카는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다"고 통보받아 사실상 피만 물려받은 귀족 취급을 받은 고종사촌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후일의 네로)가 파우스투스를 증오하고 미워한 이유가 됐다.
이런 까닭에 네로는 서기 55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저녁 식사 직후 급사한 직후 벌어진 궁중쿠데타로 제위에 오르자마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제거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네로는 스승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와 함께 소 아그리피나와 대립각을 키울수록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보호를 받게 된 브리타니쿠스의 오른팔로 의심해 부단히 파우스투스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후일 소 아그리피나 일파 숙청 재판에서 드러나듯, 파우스투스는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꾀주머니 팔라스 등과 교류한 적도 없고 정치적 음모나 권력을 얻기 위한 궁중 알력 다툼에 약간의 움직임도 가지지 않을 정도로 무관했다. 더욱이 그는 늘 말과 행동을 조심히 하여 엮으려고 해도 모두 실패했다.
고대기록상 네로는 확실히 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두려워했고, 다른 이들과 달리 그가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그의 직계조상 술라처럼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네로의 증오심과 질투처럼 비열한 악인이 아니었고 인품이 대단히 훌륭해, 네로의 이런 태도는 주변에게 열폭으로 인식됐다. 더군다나 네로는 정치적 이유 외에도 자신이 어릴 적부터 연정을 품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이 고종사촌형 파우스투스라는 이유로 더 미워했다.
그래서 네로는 팔라티노 황궁, 원로원, 공공장소에서 매일 같이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도발해 반역죄, 불경죄 등으로 엮어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네로는 파우스투스가 나이에 비해 회백색 머리이고 새치머리가 많은 것을 비난하면서, 그가 대머리가 아님에도 "숱이 없는 대머리"라고 지속적으로 놀렸고, 일찍부터 사람을 붙여 뒤를 캤다. 하지만 펠릭스는 본래부터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고, 인내심이 대단해 네로의 모든 조롱을 예의있게 대처했다. 따라서 더 큰 존경을 받게 됐는데, 네로는 이런 평판을 보고 사촌형을 두려워하고 반드시 죽여야 겠다고 결심해 새 근위대장 티겔리누스에게 "그가 분명히 음모를 꾸몄을 것"이며 조작된 증거로 제거할 것을 주문했다.
이 결과, 서기 55년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갑작스레 "자유민 팔라스와 전직 근위대장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공모해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제위에 앉히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기소됐다. 이때 네로는 재판장에서 사촌형이 황제의 양자가 된 둘째 사위인 자신을 몰아내려고 했다며 거짓말을 하면서 이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고, 파우스투스는 애당초 팔라스, 죽은 부루스 같은 인사들과 거리도 멀어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설상가상 네로는 두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클라우디우스 시절 고위관료를 지냈고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최측근이기도 한 팔라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 힘을 쏟았던 터라 재판 방향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하여 55년 첫 재판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네로와 타겔리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3년 뒤 다른 자유민을 반란 혐의로 기소하면서 파우스투스 술라를 58년 의도적인 조작을 통해 어거지로 재기소했다. 그러나 이때도 파우스투스를 바로 죽이기 못했다. 왜냐하면 자유민의 입을 통해 "펠릭스가 네로를 공격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했어도, 타키투스가 지적했듯 이 사건은 실체도 없었고 그 자유민은 증거 없는 거짓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재판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무죄가 증명될 정도로 실체가 명확했다고 한다. 따라서 59년 네로는 펠릭스를 갈리아의 마실리아(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의 감옥에 보내는 것에서 끝내야 했다.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가 억울하게 유배된 이유는, 네로가 재판에서 "펠릭스가 그랬을 것"라는 자의적 해석과 어거지로 유죄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로는 이정도 선에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3여년 뒤인 62년, 아주 비열하고 은밀한 명령을 내려, 감옥에 있는 사촌형을 암살하고 그 증거로 그의 머리를 로마로 가져오라고 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티겔리누스는 명을 받은 뒤 불과 5일 만에 갈리아의 감옥으로 갔고, 저녁식사 자리에 있던 파우스투스 술라를 죽였다.
후일 아내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네로의 청혼과 근친상간을 거절한 것을 이유로 반역죄로 모함받아 피소 사건 연장선에서 서기 66년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