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라틴어: Gaius Calpurnius Piso Crassus Frugi Licin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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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18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
가족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할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아버지) 술피키아 프라이텍타타(어머니) 리키니아 프라이텍타타(누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형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카메리누스(형제) |
경력 | 로마 제국 집정관(보결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87년 1월 ~ 4월 |
전임 | 도미티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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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이름이 길어 보통은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혹은 크라수스 프루기라고 한다.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 인척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황후 대 파우스티나의 외종조부이다.
과거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의 기록으로 네르바 황제에게 반역 혐의를 꾸몄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크레타 섬으로 추방됐다가 죽임당한 반역자 내지 디오 카시우스의 불분명한 기록 아래 하드리아누스에게 의심받아 118년 이탈리아 해안의 섬으로 추방됐다가 처형된 위험 인물로 평가된 로마 귀족이다. 그렇지만 현재에는 두 고대 기록 모두 불분명하다는 평가와 함께, 그가 하드리아누스의 요청에도 스스로 은퇴 후 118년 사망했다고 밝혀졌다.
2. 생애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출신 가문은 각각 왕정, 공화정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과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 사이의 상호 입양과 통혼으로 완성된 명문귀족 가문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 출신이다. 당대부터 조상 전체 중 집정관 경력자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평가받았고, 할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모두 집정관을 지냈다.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는 서기 27년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의 셋째 아이이자 차남이며 법적 장남이다. 그는 서기 64년 집정관을 지냈지만, 네로때 벌어진 피소 음모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참수됐다. 술피키아 프라이텍타타와 결혼했는데, 리키니아 프라이텍타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카메리누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4남매를 얻었다.
크라수스 프루기의 형제 중 맏형 리보 프루기는 88년 집정관이었고, 두번 결혼했는데, 이중 두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아내가 살로니아 마티디아이며, 이들의 외동딸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장모, 대 파우스티나의 어머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머니, 소 파우스티나의 외할머니로 유명한 귀부인이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처제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이다.
언제부터 후일 황제가 될 트라야누스와 친구였는가는 모른다. 다만, 그는 워낙 성품이 순하고 음모를 꾸미는 재주가 형편없는 나머지 꾸밀 재주도 없어, 일찍부터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87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집정관에서 물러난 직후 보결 집정관으로 1월부터 4월까지 짧게 재임한 경력이 있었다.
그를 무언가 위험인물처럼 묘사한 디오 카시우스[1] 표현을 빌리면 정치적 음모를 꾸밀 머리도 없는 유순한 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1차 삼두정치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의 직계 후손으로 당시 몇 없는 뼈대 있는 로마 귀족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이 점이 87년 보결집정관 경력과 엮여 네르바가 즉위했을 때 반역자로 의심받고 공격받는 원인이 됐다. 일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 생전부터 네르바와 개인적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자세한 것은 모른다.
네르바가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후 즉위한 뒤, 네르바와 그 친구들에게 황제 암살과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공격받아 여러 번 법정에 섰다. 어느 정도였는지, 폴 갈리반, 브라이언 존스, 존 D. 그레인저 등이 디오 카시우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등을 통해, 네르바가 이때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집요할 만큼 공격했음을 확인하면서, 그레인저의 경우에는 크라수스 프루기가 억하심정으로 무언가 있지 않았나 의심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모든 공격은 실패했다. 이에 네르바 황제는 서기 96년 11월 4일, 로마 최대 명절 중 하나인 "플레브스의 날"에 어리숙하고 조심성 많은 크라수스에게 아내와 함께 경기장에 오라고 초대장을 보낸 뒤, 그들에게 손수 관람석 맨 앞에 앉을 것을 강요했다. 그 이후 네르바는 군중들이 모두 주목한 가운데 날카롭게 갈아 놓은 칼을 이들 부부에게 전달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흔히 그런 것 그대로) 그들이 날카로운지 검사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죽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네르바 황제는 이렇게 외치면서, 억지로 칼을 쥐라는 강요를 받은 크라수스 프루기 부부를 대중 앞에 서 있으라고 명하곤,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칼을 물증으로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민중들과 이곳에 있던 프라이토리아니, 크라수스 프루기의 친구들이 볼 때에는 그런 행동부터 말이 안 됐다. 크라수스 프루기는 난생 처음 본 날카로운 칼을 보자마자 덜덜 떨었고, 누가 보더라도 겁에 질려 있고, 이를 몰랐던 얼굴이었다. 그래서 대중들은 네르바의 지지자들이 경기장에서 처벌을 주장함에도 호응을 하지 않았고, 흐지부지 넘어가게 됐다. 다만, 디오는 네르바가 암살 당할 뻔 했기 때문에, 일부러 크라수스 프루기에게 그 행동의 허무함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이렇게 했다는 식으로 기록했다. 이 일 이후, 원로원 안의 네르바 친구들은 크라수스 프루기를 공격하면서 더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네르바는 여기에서 관용을 베푼 척 하면서 그동안 실패한 추방형을 가결시킨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네르바는 관용 있게 행동하면서, 사형에 처해야 함에도 크라수스 프루기 부부를 특별히 이탈리아의 타렌툼으로 강제 추방하겠다고 밝히고, 이들 부부의 변론을 듣지 않고 즉시 추방시켰다.
이 추방 사건은 네르바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암살한 배후라는 의심을 더욱 키웠다.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와 그 형제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는 모두 기품 있고 잘생긴 로마 귀족이었고, 악행을 벌이지 않아 의심은 커졌다. 그러다가 네르바는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에 취임한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 주도 궁중 쿠데타로 유폐되고,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하는 것을 추인한다. 이후, 트라야누스가 실권을 쥐는데, 네르바가 죽자마자 트라야누스의 명으로 크라수스 프루기 부부는 누명을 벗고 로마로 소환됐다.
하지만 그는 이때의 일로 소 플리니우스 등에게 비열하다고 의심받았고, 자신이 배신이나 음모를 꾸미지 않음을 수없이 증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 황제는 한동안 자신의 친구인 그를 잠시 추방했다. 그러다가 그는 복귀했고, 디오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주장에 따르면 모종의 일로 하드리아누스 즉위와 동시에 다시 추방됐다가, 죽었다고 한다. 디오는 이에 대해 그가 이탈리아의 한 섬으로 추방됐다가 그 무렵 처형됐다고 적었는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죽이려고 추방해 크레타 섬으로 보내는 중 처형했다고 한다. 하지만 크라수스 프루기가 살해됐다는 식의 두 내용 모두는 정확치 않다는 반론이 많다. 왜냐하면 다른 고대 기록과 교차 검증된 기록 등에 따르면,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원정을 동행했고 118년 서거 때에도 함께 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1달째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남아달라고 하소연함에도 계속된 의심 때문에 지친 그가 스스로 낙향해 118년 죽었다고 적혔기 때문이다
[1]
전체 이름 중 '코케이아누스'는 디오 카시우스의 직계조가 네르바와 친분이 두텁고, 그의 호의를 받았던 것과 연관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디오의 기록은 네르바에게 유독 미움 받고 견제받은 크라수스 프루기에 대한 기록이 악의적으로 평가받는 증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