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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68년 7월 4일 |
로마제국 이탈리아 로마 | |
사망 | 119년 12월 23일 |
로마제국 이탈리아 로마 | |
아버지 | 가이우스 살로니우스 마티디우스 파트루이누스 |
어머니 | 울피아 마르키아나 |
남편 |
민디우스 루키우스 비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1] |
자식 | 딸 민디아 마티디아, 비비아 사비나, 루필리아 파우스티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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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아우구스타.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조카이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였던 비비아 사비나의 어머니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장모이다. 둘째 딸로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가 있는데, 둘째 딸이 낳은 일가가 이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일가를 구성하게 된다.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외손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황후 대 파우스티나, 대 파우스티나의 남동생으로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외손자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3세가 낳은 아들인 외증손자가 '철인황제'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이다.
2. 생애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속주의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있지만, 본국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고, 생애 대부분을 외가인 히스파니아 속주 이탈리카가 아닌 이탈리아에서 보냈다.아버지는 법무관과 원로원 의원을 역임한 인물로 북이탈리아의 부유한 기사계급인 살로니우스 가문 출신이다. 부친 가이우스 살로니우스 마티디우스 파트루이누스는 오늘날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비첸차가 고향인 사람으로, 서기 70년과 서기 71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으로 재임했고, 78년 사망 당시에는 로마에서 사제 직책을 수행 중이었으며, 아르발 들판 형제 사제단으로 있었다. 그는 서기 63년경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의 딸로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나인 울피아 마르키아나와 결혼했다. 어머니 울피아 마르키아나는 출생지가 어느 곳인지 불분명하나, 그 부모는 히스파니아 속주의 식민도시 이탈리카이며 그 조상은 이탈리아인이다. 살로니아 마티디아는 이 부부의 딸로 서기 68년 3월 11일 혹은 7월 4일 태어났다. 살로니아 마티디아는 이름 전체에서 드러나듯이 아버지 이름을 여성형으로 그대로 이어받았다.
서기 227년 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미레네 제20보병대가 숭배해야 할 신들의 명단이 기록된 《페리알레 두라눔》(Feriale Duranum)에는 신격화된 그녀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탄신일이 7월 4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출생년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남자 형제로 파트루이누스가 있었다. 서기 78년 부친이 사망한 후, 어머니를 따라 트라야누스와 폼페이아 플로티나 부부의 집에 가서 살았는데, 이때부터 외삼촌 트라야누스에게 친딸처럼 자랐다.
마티디아는 세 번 결혼했다. 84년경에 결혼한 첫번째 남편은 루키우스 민디우스로, 딸 민디아 마티디아를 낳았다. 민디우스가 일찍 사망한 후, 그녀는 88년경 전직 집정관 루키우스 비비우스 사비누스와 혼인했다. 이 부부는 딸 비비아 사비나를 두었는데, 사비나는 서기 100년경 하드리아누스와 결혼했다. 사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와 자기 조카딸을 혼인시키는 걸 껄끄러워 했지만, 아내 폼페이아 플로티나가 강하게 밀어붙인데다 마티디아도 하드리아누스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고 한다. 마지막 결혼은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로마 귀족 가문인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 모두의 피를 이은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와 했다. 독일 태생의 프랑스인 로마사 권위자 한스 게오르그 플라움에 따르면 황실과 로마 명문가 사이의 동맹을 위한 정략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101년 이혼했다고 하는데,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가 101년 병사한 것을 볼 때에 현재는 사별로 끝났다고 많이 본다. 살로니아 마티디아는 이 결혼에서 막내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를 낳았다.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히스파니아 태생의 이탈리아 혈통 원로원 의원으로 오래된 이탈리아 평민귀족 안니우스 가문 출신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이 결혼에서 대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3세,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를 낳았다.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외손녀 대 파우스티나는 갈리아 혈통의 이탈리아 귀족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결혼했고, 후일 황후가 된다. 그리고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외손자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3세의 아들은 고모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 사위가 되는데 그가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어머니가 112년에서 114년 사이에 사망한 뒤, 마티디아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공유했다. 트라야누스는 제국 전역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많은 기념비와 비문을 세웠다.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실패에 좌절하며 킬리키아의 셀레누스 항구에서 사망한 후, 그녀는 플로티나와 함께 트라야누스의 유골을 로마로 후송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19년 11월 23일, 마티디아는 숨을 거두었다. 이 사망일은 화폐학적 기록과 고대 로마 종교의 의정서인 악타 아르발리아(Acta Arvalia)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9-20년에 신격화된 그녀를 기리는 은색 데나리우스가 발행되었으며, 악타 아르발리아에서 확인된 마르티다의 신격화 날짜는 119년 12월 23일이다.
티볼리에서 발견된 비문 하드리아니 라우다티오 마티디아(Hadriani Laudatio Matidiae)에는 하드리아누스가 그녀를 기리기 위해 행한 연설이 기록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연설에서 마티디아를 친어머니처럼 치켜세웠고, 그녀가 가족을 실로 훌륭히 보살폈다고 칭송했다.
그녀는 삼촌(트라야누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때부터 따랐고, 그가 죽을 때까지 동반자이자 딸처럼 따랐으며,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하였다.
이어서 자신은 그녀의 죽음으로 비탄에 휩싸였다고 하면서,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시어머니"라고 불렀으며, 그녀의 아름다움과 겸손함, 친절함을 찬미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로 살아갔으며, 전성기에 오랜 미망인 생활을 하면서 가장 정숙했고, 완벽한 육체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또한 어머니에게 매우 순종했으며, 자식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그녀는 내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판테온 근처에 있는 캄푸스 마르티누스 중심에 마티디아에게 바치는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이로서 마티디아는 로마 시내에 자신의 신전이 세워진 최초의 신격화된 여성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치세 이후에도, 그녀를 비롯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여인들은 여신으로서 공경받았고, 그녀들의 탄신일은 로마의 휴일로서 기념행사가 꾸준히 개최되었다.
[1]
본래는 리키니우스 씨족의 크라수스 가문 출신으로, 혈통으로는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 사람이다. 이 일가는 1차 삼두정치가 크라수스 디베스의 외손자인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가 외삼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양자로 입양된 이래,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문으로 유명했다. 이중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세번째 남편인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는 대가 끊길 뻔한 스크리보니우스 씨족의 리보 가문으로 입양된 로마 귀족이면서도, 리키니우스 가문에도 완전히 속한 이중 성향의 로마귀족이었다. 그의 조부는
네로에게 처형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종조부는
갈바의 양자로 입적됐던 피소 리키니아누스가 되며,
콤모두스 아래에서 집정관을 지낸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는 이 인물의 조카 손자가 된다.
[2]
세번째 남편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와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장모이며
대 파우스티나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머니,
콤모두스의 증조할머니로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직계 황족, 방계 황족은 거진 이 사람의 혈육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