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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10년경 |
사망 | 961년 9월 19일 |
아버지 | 로마노스 1세 |
어머니 | 테오도라 |
형제자매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테오필라크토스 레카피노스, 아가타 레카피니 |
남편 | 콘스탄티노스 7세 |
자녀 | 레온, 로마노스 2세, 조이, 테오도라, 아가타, 테오파노, 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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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의 황후.2. 생애
910년경 동로마 제국 해군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와 테오도라 사이의 장녀로 출생했다. 로마노스는 919년 3월 25일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한 뒤 그해 4월 딸 엘레니와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의 결혼식을 아야 소피아에서 치르고 자신은 바실레오파토르가 되었다. 이후 정적들을 모조리 몰아낸 그는 920년 9월 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되었고, 920년 12월 17일 공동황제가 되었다. 엘레니는 콘스탄티노스 7세와의 사이에서 레온, 로마노스 2세, 조이, 테오도라, 아가타, 테오파노, 안나를 낳았는데, 이중 레온은 아기일 때 사망했다. 일반적인 정략결혼과는 달리 엘레니는 콘스탄티노스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콘스탄티노스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면 친정오빠들과도 기꺼이 싸울 각오를 다졌다.[1]944년 12월 16일, 로마노스는 남은 두 아들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가 부도덕하고 방탕해 황제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사위 콘스탄티노스가 그의 아들들보다 선임 황제임을 분명히 못박는 내용의 유언장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유언장을 공개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와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944년 12월 20일, 두 형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들이닥쳐 병상에 누워있던 황제를 끌어내 부콜레온궁 옆의 작은 항구로 끌고 갔다. 로마노스는 작은 배에 태워져 프란키포 섬에서 가장 가까운 프로티의 수도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삭발을 당하고 수도 서원을 해야 했다.
이후 두 형제는 콘스탄티노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여론이 콘스탄티노스를 열렬히 지지한다는 걸 깨닫자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스를 공식적으로 선황제로 인정했다. 이때 엘레니는 남편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내의 설득에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945년 1월 27일 두 공동 황제를 체포해 머리를 삭발한 후 아버지가 있는 프로티로 추방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두 형제를 격리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각기 다른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후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 형제는 사망했고, 콘스탄티노스 7세는 25년만에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
테오도로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스는 문학 활동에 전념하면서 권력을 엘레니 황후, 관료, 장군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고 한다. 그녀는 궁정에서 가장 직급높은 여인으로서 황실의 대소사에 적극 관여했다. 그러던 959년 11월 9일 가족과 함께 남편의 임종을 지켜봤다. 뒤이어 아들 로마노스 2세가 황위에 올랐고, 그녀는 황태후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노스의 황후 테오파노는 카니클레이온 수녀원에 모친과 다섯 자매를 전부 보내라고 설득했다. 로마노스는 이에 따랐고, 엘레니는 다섯 자매와 함께 수녀원에 들어갔다. 테오파네스는 그녀가 961년 9월 19일에 사망했다고 전했는데, 이것이 역사가 테오파네스가 남긴 마지막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