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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7:40:08

율리아 마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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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율리아 마이사
Julia Maesa
파일:율리아 마이사.png
출생 서기 165년(추정) 5월 7일
로마 제국 시리아 에메사
(오늘날의 시리아 홈스)
사망 서기 224년 8월(혹은 서기 225년 1월)[1] 11월 (향년 59/60세)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배우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 (?-AD 216년)
자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
아버지 율리우스 바시아누스
가문 시리아 에메사 왕가
형제자매 율리아 돔나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왕조 세베루스 왕조
(Severan dynasty)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무너진 왕조를 복구하다2.3. 막후의 실력자2.4. 사망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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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아우구스타.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으로,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다.

형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언니 율리아 돔나 생전과 조카 카라칼라 황제 시절엔, 황녀 지위를 받고 평범하고 부유한 귀부인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두 조카 카라칼라, 게타 사이에서 211년 말 혹은 212년 초 골육상쟁이 벌어져, 게타가 암살된 이후부터, 정치적 위기에 몰린 카라칼라의 조치로 두 딸과 함께 세베루스 가문에 편입되고 황실 일원으로 다시 이름을 올렸다. 그러다가 조카 카라칼라가 학정, 폭정 끝에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에게 살해된다. 따라서 무일푼으로 추방되고 둘째 사위가 추방 후 살해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기지를 발휘해, 직접 지지 세력을 재건하고 동분서주하면서 끊어진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한다. 이후 황제 부적격자인 큰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큰손자 엘라가발루스를 스스로 숙청해 죽이고, 또 다른 손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옹립하는 등 막후에서 로마 정계를 휘어잡은 당대의 여걸이다.

살아생전 국모 지위를 부여받았고, 특유의 눈치와 카리스마 아래 세베루스 왕조의 실권자 중 카라칼라 이후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를 제어하고 적절히 이들을 움직였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기록말살형에 처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형부인 세베루스 못지 않는 능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자신 및 자신의 일가에 대한 불온한 움직임을 제압하고, 아우구스타로서 사후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장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2. 생애

2.1. 초년기

시리아의 주요 도시인 에메사에서 태양신 '엘라가발'를 섬기는 대사제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딸로 태어났다. 돔나보다 언니라는 말도 있으나, 통상적으로는 차녀로 보는 경우가 많다.

생일은 5월 7일로 알려졌으나, 출생년도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첫 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180년에 태어났고, 로마 소녀들은 보통 12~15살에 결혼했기 때문에, 아마도 서기 165년 이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사(Maesa)'는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걷는 것을 의미하는 아랍어 동사 '마사(masa)'의 여성형 명칭이다. 그녀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으나, 언니 율리아 돔나가 동전, 석상 등에서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인상으로 묘사된 데에 비해, 날카롭고 다소 남성적인 이목구비로 묘사되었다. 이는 마이사가 언니 돔나와 달리 말년의 모습으로 조각상, 동전을 남겼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일각에선 마이사가 자신의 권위와 사회적 위신을 위해 일부러 남성적이고 중후한 모습을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남겼다고 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이사의 조각들은 20대 시절의 아리따운 모습으로 제작된 조각상 한 점 외에는, 말년의 그녀를 묘사한 조각상, 동전이 대부분이며 모두 강인하게 묘사되어 있어 중성적 느낌이 많다.

그녀의 출신 가문인, 에메사 왕가는 삼프시게라미드(Sampsigeramid) 또는 삼프시게라미(Sampsigeramid) 또는 삼프시게라무스 가문(آل شمسيغرام (아랍어)/ʾĀl Šamsīġirām(라틴어))으로도 불린 자들로, 로마 속국 왕조였고, 로마시민권자로 사용한 대외적 성씨는 카이사르에게 하사받은 율리우스였다. 하지만 이들의 계급은 파트리키, 노빌레스가 아닌 에퀴테스(기사계급)에 준했다. 따라서 이 가문 출신의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 및 마이사의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와 친구, 협력자였던 디오 카시우스는 "아라비아 부족의 왕"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귀족이 아님을 전했다. 그들의 혈통은 동시대 헤로디아누스가 적은 글을 보면 혈통이나 습속은 페니키아인이기도 했다. 이는 이 가문 출신인 헬리오도루스 에메세누스 또는 에메사의 헬리오도루스도 같았는데, 그는 자신 일가가 "태양계의 페니키아인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대체로 고대 기록, 오늘날 연구 등을 종합하면, 에메사 왕가 또는 삼프시게라무스 가문은 바알을 태양신으로 숭배하고, 페니키아 풍습에 동화된 아랍인으로 평한다. 이런 평가처럼 마이사의 고향 에메사는 전통적으로 아랍어를 우선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리스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했는데, 그리스어는 아랍 사투리가 심해, 그리스어 화자들조차 알아 먹는데 애를 먹었다. 또한 에메사는 로마 통치 아래에서 라틴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장려됐다. 이런 배경으로 율리아 마이사는 자매 율리아 돔나와 함께 라틴어, 그리스어, 현지 토착언어 모두 사용이 능했는데, 그녀는 언니 돔나, 차녀 마마이아처럼 라틴어와 그리스어 발음이 표준화되고 정갈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마이사는 아랍어 사투리가 아주 강했던 외손자 엘라가발루스 황제와 달리 이국적 색채가 억양상 덜했다.

마이사의 아버지는 동시대부터 이런 평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태양의 사제였으며, 페니키아인들은 그를 엘라가발루스라고 불렀다."

즉, 마이사의 아버지는 현지 시리아 지방 주민들 사이에서도 아랍인들이 그들 언어로 "산의 신"이자 태양을 모신 바알을 뜻한 엘라가발 숭배 색채가 매우 강했다. 그렇지만 마이사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언니 율리아 돔나, 외사촌 파피니아누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로마, 이집트식의 고등 교육을 배워야 얻을 지식에 두루 능통한 점을 떠올려보면, 어릴 때부터 에메사 왕조의 종교 교육 외에도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사는 대부분의 로마 시대 아랍인처럼 남편으로 같은 시리아 속주 태생의 아랍 혈통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를 맞이 했다. 남편 율리우스 아비투스는 기사계급 출신이며, 마이사의 형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집권하기 전까지는 원로원 의석을 가지지 못한 시리아 일대의 지역유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결혼에서 마이사는 장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를 낳았다. 그녀의 집안은 에메사 및 시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193년 언니 율리아 돔나가 원로원 의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하였고, 세베루스가 내전을 치른 끝에 유일무이한 황제가 되면서, 그녀의 신분 또한 급격하게 상승했다.

언니가 남편과 함께 로마로 가서 아우구스타로 활동하는 동안, 마이사 역시 가족과 함께 로마로 갔다. 남편 율리우스 알렉시아누스는 제국 각지에서 총독으로 활동했지만, 그녀와 두 딸은 황실에서 살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또한 그녀는 세베루스가 원정을 떠나느라 로마를 비우는 사이 국정을 대신 돌보는 언니를 도우며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베루스가 사망한 뒤 조카 카라칼라 게타가 공동 황제가 되었다. 두 형제는 심각하게 반목하였고, 끝내 카라칼라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게타를 검으로 찔러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마이사는 카라칼라를 적극 지지해, 그가 황권을 다지는 데 한 몫했다. 따라서 조카 카라칼라는 이모 마이사가 정치에 자주 개입할 수 있도록 도왔고, 자신의 외사촌인 마이사의 두 딸에게 기사계급에 준하는 권한과 원로원 의원이 누릴 지위, 특권을 하사했다. 이는 마이사의 두 딸 소아이마이스, 마마이아의 남편들도 비슷해 그들 역시 카라칼라로부터 기사계급 지위와 원로원 의석을 하사받았다. 이 결과, 마이사 일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아래에서 세베루스 왕조의 황족들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해, 권세를 휘두르게 됐다고 한다.

2.2. 무너진 왕조를 복구하다

217년,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카라칼라 황제가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 마크리누스는 황제가 된 뒤 아들 카라칼라와 함께 원정을 동행하다 안티오키아에 머물던 율리아 돔나를 연금하고, 그녀가 합법적, 편법적으로 누린 모든 특권과 영예를 박탈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는 유방암을 앓아 건강이 나빠진 율리아 돔나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래서 돔나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함을 슬퍼하다, 절망에 빠진 끝에 스스로 굶어 죽는 방식으로 자결을 택했다.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율리아 마이사와 두 딸과 외손주들은 세베루스 왕조의 비호 아래 온갖 합법, 편법,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로마에서 권세를 누린 터라 그들 역시 카라칼라 암살 직후 몰락하게 된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언니를 따라 시리아에 가 있던 마이사를 붙잡아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고, 로마에 있던 모든 재산을 사실상 빼앗은 뒤, 그들이 누린 특권과 영예를 모두 박탈했다. 이때의 이야기에 관해 디오 카시우스는, 마이사의 차녀 마마이아 남편으로 시리아 총독을 지낸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아버지)와 그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 내외가 마크리누스의 명령으로 에메사로 추방됐다가 모조리 살해됐다고 증언한다.

허나 마크리누스는 모든 조치를 절차대로 하면서도, 마이사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기보다는 일시동결하는 방식으로 압류해 협상의 여지를 뒀다. 이는 율리아 마이사가 재기할 기반이 될 남편 율리우스 아비투스가 217년 직전인 216년경 키프로스에서 병사하고, 두 사위 역시 이전에 죽었거나 마크리누스 즉위 직후 모두 죽어 없다는 점을 의식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 마크리누스는 이런 점을 이용해 마이사와 두 딸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조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217년 봄(혹은 218년 봄), 마이사는 두 딸과 함께 강제로 고향 에메사로 돌아오게 됐다. 이 시기 마이사는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기로 마음먹고, 손자를 황위에 세우기 위한 청사진을 기획했다. 에메사는 시리아 속주 도시들 중 로마 군단 기지와 거리가 가까웠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군사기지들은 여전히 세베루스 왕조와 카라칼라에 대한 향수가 대단했다. 그러나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마이사의 고민은 깊어졌는데, 이때 간니스가 그녀에게 도움을 줬다. 간니스는 마이사의 장녀 소아이마이스와 오랜 연인으로 머리가 비상했는데, 그는 마이사에게 소아이마이스의 외아들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를 카드로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 달리 마땅한 수가 없던 마이사, 소아이마이스는 간니스의 꾀를 옳게 여겨, 장녀 소아이미아스가 낳은 아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가 실은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게 당대 로마 세계를 뒤흔든 '가짜 안토니누스 스캔들'인데, 당시 마크리누스가 니시비스 전투에서 벌인 실책으로 이 소문은 순식간에 모든 로마 장병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왜냐하면 로마 장병들은 자신들의 급료를 대폭 올려준 카라칼라와 세베루스 왕조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카라칼라가 잔혹함과 별개로 상당히 뛰어난 군사령관으로 인정받아서, 연이은 마크리누스의 실책에 화가 난 장병들에게는 혹한 소문이 아닌 희망으로 들렸다.

이렇게 소문이 진실과 믿음으로 바뀌자, 마이사는 고향 에메사에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치워 이를 몽땅 시리아 주둔 군단병들에게 기부한다. 이후 20년 세월동안 친분을 쌓은 지중해 동부의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태생 원로원 인사, 장교들과 함께 미리 연락을 주고 받고 소문의 주인공을 데리고 깜짝 방문한다. 이때 장병들 앞에 등장한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친구들은 마이사의 외손자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카라칼라의 친아들이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손자라고 재차 주장했다. 눈 앞에 나타난 바리우스 아비투스는 카라칼라의 오촌조카이고 외모도 많이 닮은 터라, 이를 눈 앞에서 본 3군단 갈리카는 마이사의 요청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자 마이사는 다시 한번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카라칼라의 친아들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손자이니, 황위를 정당하게 계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에메사 인근에 주둔 중인 3군단 갈리카는 그녀의 말을 믿기로 마음먹고, 서기 218년 5월 16일 바시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시아누스는 즉위 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했다.

마크리누스는 반란 소식을 듣고 근위대장 울피우스 율리아누스를 파르티카 제2군단 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보냈지만, 율리아누스는 린치를 당해 쫓겨났고 파르티카 제2군단 군인들 역시 새 황제의 편을 들었다. 이에 마크리누스는 9살짜리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 직위에 올리고, 병사들에게 하사금을 나눠주며 그들의 신임을 다시 얻어보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좀처럼 따르지 않자, 안티오키아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새 병력을 규합해 반란군과 대적하려 했다.

218년 6월 8일,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마크리누스의 군대와 새 황제의 군대가 맞붙었다. 이때 마이사는 전차를 탄 채 전투를 살펴보고, 도중에 도망치는 병사들을 제지했다고 한다. 마크리누스는 전투에서 완패한 뒤 로마로 가서 지원군을 규합하려고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칼케돈에서 체포되었고, 카파도키아의 아르켈라이스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새 황제는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고,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겠다는 마이사의 계획은 성공했다.

2.3. 막후의 실력자

엘라가발루스가 로마의 유일무이한 황제가 된 뒤, 마이사는 '아우구스타, 군단과 원로원의 어머니', '아비아 아우구스티(황제의 할머니)'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당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 엘라가발루스 황제 시기 로마의 진정한 통치자는 바로 마이사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초상화를 담은 동전이 정식으로 주조될 정도로, 당시 그녀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했다. 그녀는 엘라가발루스를 통해 '세나쿨룸'이라는 특별기구를 원로원에 설치한 뒤,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여 국정에 직접 참여했다. 로마 제국이 세워진 이래 여성이 정치에 이 정도로 깊숙이 관여한 건 전무후무했다.

마이사는 정사를 내팽개치고 태양신 숭배와 향락 추구에만 열을 올리는 외손자를 대신해 국정을 직접 돌봤다. 그녀의 통치력은 상당해서, 황제가 국정에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국이 그럭저럭 운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급기야 엘레가발루스가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의 아내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이혼하고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인 아퀼리아 세베라와 결혼하자,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베스타 여사제는 은퇴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로마인들은 이 결혼을 최악의 스캔들로 간주했다.

마이사는 이대로 가다가는 민중이 봉기하거나 야심가가 반란을 일으켜 겨우 복구한 왕조가 또다시 무너지고, 자신과 가문의 입지마저 위태로워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구제불능이 된 외손자를 대체할 새 인물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221년 여름,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구슬렸다.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로마 최고의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황제 책무보다 대사제 일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폐하를 대신하여 책무를 맡을 이를 세우시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또다른 외손자이자 엘리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양자로 삼으라고 설득했다. 엘라가발루스는 할머니의 속셈을 미처 간파하지 못한 채 이를 받아들이고, 알렉산데르를 카이사르로 삼았다. 또한 그는 마이사의 설득에 따라 아퀼리아 세베라와 이혼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피를 물려받은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약혼했다.

그러나 민심이 알렉산데르에게 급격하게 쏠리자, 엘라가발루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221년 12월, 엘라가발루스는 아퀼리아 세베라와 재혼한 뒤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려 했다. 222년 초 부터는 아예 알렉산드르와 함께 대중 앞에 함께 서지 않았다. 마이사는 이에 맞서 원로원과 함께 알렉산데르를 지지했다.

222년 3월 11일 또는 12일, 엘라가발루스는 근위대장에게 알렉산데르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근위대는 알렉산데르 지지를 천명하고, 엘라가발루스와 어머니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를 살해했다. 세 명의 시신은 온 로마 시내에 질질 끌려나다니다가 난도질당한 뒤, 머리는 사라지고 몸통은 티베리스 강 하수구에 버려졌다.

로마 원로원은 알렉산데르를 새 황제로 추인했지만, 세나쿨룸을 폐지하여 황실 여인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의 실정으로 인해 민심이 무척 안 좋아서 원로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세나쿨룸 폐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새 황제 알렉산드르 세베루스의 초상화를 새긴 동전에는 다음 글귀가 적혀 있었다.
Juliae Mamaeae Aug(ustae) filio Juliae Maesae Aug(ustae) nepote
율리아 마마이아 아우구스타의 아들이자 율리아 마이사 아우구스타의 손자

이후 그녀는 엘라가발루스 때처럼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황제에게 조언하고 행정부의 업무를 통제하기 위해 선택된 16명의 평의회에 영향력을 일정부분 행사했다. 그녀의 묵인 속 동의 아래, 원로원과 울피아누스는 엘라가발루스의 정책을 뒤집는 새로운 조치를 연달아 도입했다. 전임 황제가 도입한 에메사 일대 아랍인들의 풍습, 종교 관행은 로마에서 근절됐고, 엘라가발루스가 내린 모든 종교 칙령과 선포는 무효가 됐다. 당대 관료였던 헤로디아누스,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가 전하듯이, 엘라가발을 상징한 검은 돌은 에메사로 반환 형태라는 명령 아래 사라졌고,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내세운 종교 칙령 아래 바쳐진 거대한 신전은 복수자 유피테르를 모시는 신전으로 새롭게 바쳐졌다.

하지만 율리아 마이사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에도 여러 숙청, 비리의 중심이 되어 여러 사건을 낳았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딸 율리아 마마이아와 함께 아우구스타 칭호를 제위처럼 세습하는 구도를 만들고, 어린 알렉산데르가 자신과 마마이아에게 존경심을 확인하고 그녀의 조언을 경청하도록 훈련시켰다. 이 조치는 알렉산데르를 순종적인 손자, 아들로 만들고, 효과적으로 내치의 안정을 마련함에도, 종국적으로 세간에게 마마보이 황제라는 인식을 단단히 심어줬다. 다음으로 마이사는 본인의 정치적 책임을 모두 자신의 동맹자들에게 덮어 씌우는 식으로 행동해, 정적에게는 경고와 공포감을 내보이고, 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모두 비열했다. 222년 3월 13일, 마이사는 딸 마마이아와 함께 울피아누스를 알렉산데르 제위 승인과 동시에 근위대장이자 섭정으로 내세우기 앞서,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를 그 첫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사건에 관해, 마이사와 마마이아의 협력자이자 동맹자 디오 카시우스는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가 함께 살해됐다고 짧게 언급했다. 그렇지만 위서로 유명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중 222년 정규 집정관이 되어 율리아 마이사를 제어하면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첫 재위년도를 도와준 마리우스 막시무스 기록을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안티오키아누스는 엘라가발루스를 죽이려는 프라이토라이니 병사들에게 엘라가발루스를 변호했고, 스페스 베투스 정원에서 수색하던 병사들에게 등장해 황제에 대한 맹세를 상기시키면서 그를 죽이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익명의 고발자들의 주장으로 고발당해, 그가 엘라가발루스 몰락 직후 어이없게 살해됐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어 언급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일은 마이사의 행동이 매우 비열했기 때문이었다. 안티오키아누스는 211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에서 대대장, 군단장을 지냈고, 그후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에서 장군으로 명성을 쌓은 자로, 계속된 기행과 실정 속에서 엘라가발루스가 위기를 겪고 율리아 마이사 역시 실각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마이사의 잔꾀로 이용당해 로마로 소환된 뒤, 집정관에 추천받아 취임 후 소방수 개념으로 근위대장이 된 자였다. 따라서 그를 헌신짝처럼 마이사가 버리고, 그에게 자신의 실책까지 뒤집어 씌운 것은 당연히 뒷말이 나왔다.

마이사가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이용했다가, 폼포니우스 바수스가 엘라가발루스에게 살해당한 일을 방조한 것도 있어 놀랍지 않지만, 그녀는 이 장군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녀는 엘라가발루스 시대 내내 벌인 여러 악행을 전직 집정관 출신 장군으로 본인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자 임명했던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덮어 씌웠고, 프라이토리아니 일부를 조종해 안티오키아누스가 정당하게 엘라가발루스 모자를 붙잡아 재판 후 처리하자고 한 일을 면죄부를 주고자 한 일로 꾸며, 엘라가발루스 모자 제거 후 자리에서 물러난 안티오키아누스를 죽였다. 율리아 마이사의 이 조치는 당시 엘라가발루스 시대에 대한 불만이 극도에 다다른 점에서 후폭풍이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티오키아누스가 팔라티노 황궁과 황실 소유 정원 수색 당시 황제를 붙잡자마자 죽이지 말자고 명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 아래에서 악행은커녕 라인강, 다뉴브강, 마우레타니아의 사막 국경에서 군인으로 병사들에게 존경받고, 인품이 훌륭하고, 엘라가발루스 실정을 막고자 노력한 인사가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처형된 점은 곧 이성을 되찾은 병사와 관료들이 세베루스 왕조를 신임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과정 역시 마이사는 영악하게도 안티오키아누스가 처형된 일을 히에로클레스 등이 참수될 때, 교묘한 시점에 집행하게 했다. 그 결과, 마이사는 본인이 엘라가발루스 아래에서 벌인 악행을 쉽게 피하고, 본인은 세나쿨룸 폐지 후 사과 연설로 면피한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

그렇지만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 몰락을 기획해 성공한 권신으로, 또 다른 근위대장이자 마이사의 친구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에게는 되치기를 당했다. 코마존은 엘라가발루스가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를 강제로 범하고 결혼 선포할 당시부터 이중적 행보로 마이사를 압박해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제거를 기획한 사람답게[2] 마이사에게 당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군권을 쥔 상태에서 엘라가발루스 모자를 죽여 그들 시신을 티베리스 강에 던진 직후, 원로원과 로마시민에게 이 사실을 직접 발표했다. 디오에 따르면, 코마존은 연기 배우처럼 단상에 올라 이를 발표하면서, 엘라가발루스 몰락 속에서 국고 관리인으로 엘라가발루스, 히에로클레스와 함께 온갖 사치와 음란한 행동을 해온 아우렐리우스 에우불루스를 붙잡아 참수 후, 그 시신이 갈기갈기 찢기자, 이를 수습하게 명하면서, 자신이 엘라가발루스 아래에서 했던 악행을 가릴 만한 좋은 일을 언급해, 큰 지지를 모았다. 그래서 코마존은 자신이 악당이라는 비방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찬사받은 그 순간, 본인과 일가 안전보장을 확실히 해놓고, 원로원 동료와 로마군의 비호 아래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런 그의 영리한 판단과 행동은 마이사가 자신에게 벌일 보복이나 처벌을 하지 못하게 했고, 마이사는 결과적으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단지 엘라가발루스의 대체자이자 마이사의 꼭두각시라는 평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됐다.

이 사건 외에도 율리아 마이사는 조시무스에 따르면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으로 곡물 안정과 국고 재건에 기여한, 장군 출신 근위대장 게미나투스를 울피아누스 동료로 삼았다가 기습적으로 그를 체포해 재판없이 죽였다. 이 사건 역시 율리아 마이사 개인 입장에서는 막후의 실력자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고, 정적들이 그녀를 두려워한 일로 기억됐다. 하지만 마이사가 본인이 명을 내리면서도 울피아누스가 마치 본인을 설득한 것처럼 포장해, 죄없는 게미나투스를 반역 혐의로 죽였다고 공표한 점에서 로마군과 프라이토리아니 전체의 불만을 야기했다. 마이사는 정치력이 대단해, 이 일을 벌이면서, 본인이 황제의 할머니로 조용히 있는 가운데, 군 경험이 전무한 울피아누스 측이 한 것처럼 행동했다. 허니 모든 책임과 원한은 온전히 울피아누스에게 돌아갔다. 이 일은 율리아 마이사가 본인 이름으로 내걸어 처리했음에도 울피아누스가 시기심으로 벌인 듯 꾸며 세베루스 왕조의 군대 신뢰를 추락시켰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227년 초여름 로마 폭동 당시, 이 시절 사망한 마이사 대신 권력을 쥔 마마이아가 사건 전말 파악 중 실책을 벌이고, 울피아누스 역시 유연하게 대처해 실패해, 228년 울피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암살당한 배경 중 하나가 됐다.

2.4. 사망

파일:율리아 마이사2.jpg

마이사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224년 8월과 225년 1월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사후에 언니 율리아 돔나처럼 신격화되었다. 서기 227년경으로 추정되는 팔미레네 제20보병대가 숭배해야 할 신들의 명단이 기록된 페리알레 두라눔(Feriale Duranum)에는 그녀의 이름이 기재되었으며, 그녀의 생일인 5월 7일을 탄원일로 삼고 있다. 또한 그녀의 신격화를 기념하는 기념주화에는 공작새 위에 그녀의 초상화가 표현되어 있다.

영향력은 죽기 직전까지 상당했고, 정치력과 판단력 역시 기민해 과거의 리비아 드루실라처럼 능숙히 자신의 지위만으로 미숙한 손자의 치세를 지원했다. 그래서 그녀가 서거한 이후, 그 이전까지 그럭저럭 통치를 하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마이사의 죽음 이후 삽질이 늘었고, 실권자로 행세하던 딸 마마이아, 섭정 울피아누스는 아예 대놓고 나라를 말아먹거나, 무리하게 프라이토리아니를 적으로 돌려 혼란이 시작된다. 결국 228년 울피아누스 암살, 디오 카시우스 강제 은퇴 속에서 율리아 마이사가 재건한 왕조의 모든 틀은 망가졌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우유부단함과 군대 장악 실패, 마마이아의 전횡으로 세베루스 왕조는 8년 만에 멸망의 길을 걸었다.

그래도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 시절 국가를 그나마 잘 이끌어간 공이 있었고, 정치력과 카리스마가 대단해 카라칼라 이후 왕조 안에서 최후까지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 원인이 마이사의 노력을 모조리 허사로 만들 정도로 무능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갑질을 일삼았던 두 딸 소아이이아스와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있었던 점에서, 235년 왕조 멸망 뒤에도 험한 일을 겪지 않았다. 하여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본격적으로 몰락한 시점 이후, 최후의 평화는 마이사가 죽은 뒤라는 점이 인정되어 손자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함께 재차 신격화되고 모든 기록이 유지되었다.

3. 평가

언니 율리아 돔나와 함께 아우구스타 중 세베루스 왕조를 지탱한 여자 황제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두 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와 달리, 부정적 평이 적다.

다만, 그녀가 벌인 권력 유지 과정 속에서 벌인 숙청이나,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게미나투스로 대표된 인사들에게 본인의 정치적 책임을 덮어 씌워 비열하게 처형한 조치, 세나쿨룸 운영, 각종 비리 등은 그녀 사후 본인의 기록말살형은 피했지만, 종국적으로 세베루스 왕조와 그녀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딸 마마이아, 외손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근위대장 겸 섭정 울피아누스 모두에게 감당하지 못할 피해를 입혔다. 다만 손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도, 딸인 율리아 마마이아도 애초부터 이러한 피해를 수습할 역량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은 참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후 제작된 동전 도안이 227년 주조된 것을 추정할 경우, 227년 11월 전에 죽은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2] 베스타 여사제를 능욕하고 결혼한 엘라가발루스에게 원로원 전체가 분노했을 때, 코마존 역시 분노해, 그는 엘라가발루스를 더 이상 감싼다면 어떻게 될건지 마이사에게 철저히 보여줬다. 이때 엘라가발루스가 아퀼리아 세베라 아버지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와 남자형제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비난을 퍼부었다고, 코마존에게 이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애초 엘라가발루스와 마이사, 소아이미아스의 부하가 아닌 협력자로 이들이 제위를 되찾는데 도움을 준 코마존은 이를 비웃으며 부하들에게 "황제가 그리스어를 아랍인 사투리로 구사하니까 못 알아듣는 척해라."라고 명했다. 이어 그는 퀸투스 아퀼리우스 사비누스 등을 추방 형태로 이탈리아 밖으로 정중히 모셔 보호해줬다. 동시에 그는 항의한 엘라가발루스에게 노골적으로 "추방으로 알아들었다."고 둘러댔는데, 군권을 꽉 쥐고 있고 마이사도 처음부터 꼼짝 못할 정도로 강력한 사람이었던 코마존이었던 만큼, 엘라가발루스와 소아이미아스는 항의조차 못했다. 이후, 이 모든 것을 본 마이사에게 코마존은 엘라가발루스와 본인 안위 중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무언으로 압박했다. 따라서 마이사는 이 사건 뒤, 코마존의 뜻대로 자신의 큰딸과 엘라가발루스를 포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