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24대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Severus Alexand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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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 (MARCVS IVLIVS GESIVS BASSIANVS ALEXSIANVS) |
출생 | 208년 10월 1일 |
로마 제국 페니키아 아르카 카이사리아 | |
사망 | 235년 3월 21/22일 (향년 26세) |
로마 제국 게르마니아 모군티아쿰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22년 3월 13일 ~ 235년 3월 22일 (13년) | |
전임자 | 엘라가발루스 |
후임자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
부모 |
아버지 :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 어머니 :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
형제자매 |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남자형제)[1] 테오클리아(여자형제)[2] |
배우자 |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 술피키아 멤미아 |
종교 | 로마 다신교 |
영묘 | 마우솔레오 디 몬테 델 그라노[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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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마 제국의 제24대 황제로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명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Bassianus Alexianus)이며, 양자 입적 후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Caesar Marcus Aurelius Alexander).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로 약칭되며, 이것이 로마식 정식 통칭이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도 틀린 표기까진 아니다.전임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으로 외할머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제이자 카라칼라, 게타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 어머니는 율리아 마마이아. 엘라가발루스가 상상 이상의 기괴한 행동과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제국 운영으로 문제가 많자 외할머니 마이사가 13살에 불과했던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점찍고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해 그의 후계자 겸 양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즉위 이후, 존칭과 제호 안에 " 신격화된 신성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손자"로 명시해, 이전의 엘라가발루스와 분명히 차별점을 뒀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내치에 있어서는 확실히 안정적으로 운영했던 황제였지만 재위 기간 내내 군권을 장악하지 못 했고, 어머니에게 휘둘렸다. 또 지나치게 어머니의 의견만 따른 마마보이 황제였다. 그 결과, 재위 후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불안감을 노출하더니, 라인 방어선 일대를 침범한 게르만족과의 전쟁 중 초기에 승기를 잡았음에도 어머니의 조언대로 보조금을 지불하고 평화 교섭을 맺으려 했다. 결국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와 함께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병영에서 암살됐다. 두 모자[5]가 암살된 이후, 세베루스 왕조는 끝이 났고, 이후 로마 제국은 50년에 가까운, 악명 높은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 황제 시대가 개막했다.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208년 오늘날의 레바논에 해당하는 시리아 속주 페니키아 아르카 카이사리아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의 이름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 아버지는 이 지역 태생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 어머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제로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로 삼남매 (혹은 4남매) 중 첫째[6] 또는 막내로 태어났다.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친부는 마마이아의 두번째 남편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라고 한다. 그런데 이 디오의 주장에, 반론도 있다. 그 증거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친부로 주장된 이 원로원 의원이 율리아 마마이아의 두 번째 남편이라고 해도 첫남편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주장과, 훗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난 메텔루스 가의 오래된 후손이다."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반론 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며, 로버트 리 클리브와 같은 현대 학자들의 주장 역시 제각각이라서 아직까지는 디오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중 가장 확실한 증거로 평가받는 것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태어날 당시 이름을 들 수 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같은 이름을 공유했고, 모두 부모 양쪽에게 받은 시리아 혈통, 특히 외할머니 집안[7]과 시리아 일대의 오래된 기사 계급인 친가에서 내려온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실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출생 당시 이름을 살펴보면 외조모 쪽 집안 코그노멘에 많이 사용된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를 사용했고, 이름 중 일부는 부모가 거의 모국어로 이용한 그리스어에서 차용되어 사용된 라틴식 이름도 보인다.[8] 때문에 어머니 마마이아의 첫번째 남편이 친부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에도, 동시대 사람으로 마이사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최측근이며 실세인 디오의 주장이 오늘날까지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친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는 오늘날의 레바논 태생의 기사계급 로마인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조카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의 두번째 남편이 된 사람이다. 그는 시리아 코엘레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중, 일찍이 홀로 된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 당시, 그는 원로원 안에서 이미 지위가 확고했고, 이전 결혼에서 장성한 딸을 뒀으며, 218년에 첫 결혼에서 얻은 딸을 시집보내 사위를 뒀다고 한다. 이는 세베루스 왕조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고,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와는 친구이며 조력자 사이인 디오가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부모의 나이 차이는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정략혼으로 추정된다.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는 두번째 결혼에서 자녀를 여럿 뒀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아버지는 최소 두 번의 결혼으로 3 ~ 5명의 아이를 얻었는데, 율리아 마마이아는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최소 3명의 아들을 낳았다. 현재까지 밝혀진 알렉산데르의 형제자매로는 확정적으로 형으로 보는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이복누나 테오클리아, 일찍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친동생 바시아누스가 있다.
이중 형으로 추정되는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는 오늘날 레바논 티레 일대에서 신관으로 살았고, 여자형제 테오클리아는 알렉산데르와 함께 로마로 건너가 전형적인 로마 귀족으로 살면서 로마-그리스식의 고전 수업과 교양을 배웠다고 한다. 고대기록의 주장 중 일부는 알렉산데르의 형제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가 에메사에서 토착 신관으로 가업을 잇던 외가처럼 교육받은 신관인양 묘사한다. 하지만 그는 엘라가발를 숭배한 에메사 사제가 아닌 고대 로마 토착 다신교 사제였다고 한다. 이는 정신이 멀쩡함에도 미치광이에 가까운 성도착증 환자 엘라가발루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프라도가 주장한 뒤, 다른 학자들도 직간접적으로 연구해 밝힌 것이다. 프라도로 대표된 이들에 따르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친형제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는 카라칼라 시절부터 고대 로마의 사제회 중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아르발레스 형제단)에 소속되어 로마식 신관 수업을 받았고, 일찌감치 오늘날 레바논 일대로 건너가서 에메사 왕가와 로마의 세베루스 가문의 가교 역할을 하며 동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디오의 침묵 아래 그동안 의문부호가 붙었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형제 중 외할머니 마이사에게 간택된 이유 역시 여러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라고 유추가 가능해진다.
이는 여자형제 테오클리아 역시 상황이 비슷한데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데르의 아버지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사위와 함께 마크리누스 명령으로 에메사로 추방됐다가 피살됐다고 적혀 있다. 또 그의 기록 외의 4세기, 5세기 기록 등에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게 여자 형제가 있었고 여동생이 알렉산데르 재위 연간에 결혼적령기였다고 직간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처럼 당대부터 그리스 문학 이해와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했다고 알려진 테오클리아 역시 여러 학자들에게 혼동을 주고 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테오클리아는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은 여동생으로 추정 중이다.
서기 218년, 10살의 나이에 세베루스 왕조가 잠시 무너지면서 이 시기에 꽤 고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에 따르면, 이때 알렉산데르의 아버지, (이복)누나 부부가 엘라가발루스 옹립 움직임을 막기 위해 움직인 마크리누스 명령으로 살해됐다고 한다. 따라서 알렉산데르는 아버지를 여읜 이후,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어머니를 따라 로마 황궁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시대 사람 디오,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의 야망 아래 일찍부터 로마식 교육을 받았고 황제가 될 경우 필요한 예법도 숙지했다고 한다. 이는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가 자신의 친조카 엘라가발루스가 황제가 되자, 이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내린 결정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재위 1년도 되지 않아 이종사촌형 엘라가발루스가 계속되는 상식 밖의 행동으로 세베루스 왕조를 파멸로 몰고가자, 알렉산데르 모자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세베루스 왕조 재건을 지원한 동방 군단 여럿을 시작으로 산발적으로 반역과 명령불복종이 터지고, 그 여세가 판노니아, 이집트 등으로 확산되자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는 자신의 조력자들과 논의 후 후속대책에 골몰한다. 이때 알렉산데르는 외할머니에게 일찍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여러 정황상 추측된다.
위기에 몰린 마이사는 기지를 발휘해, 외손자 엘라가발루스에게 이모 마마이아의 두 아들 중 엘라가발루스보다 어린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를 양자로 입양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형(또는 남동생)이 엘라가발루스처럼 사제 수업을 받고 있고, 양자 선정 원칙상 연장자를 양자로 지명하지 못 하는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9] 더욱이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는 로마 사제회 소속이라고 해도, 당시 시리아에서 머물고 있어 대중들에게 자칫 엘라가발루스 시즌2로 비칠 위험도 있었다. 하여 듣는 엘라가발루스가 판단해도 지극히 상식적인 결정으로 비춰졌다. 이런 숨겨진 뜻이 보이는 권고에도 이종사촌형 엘라가발루스는 아무 의심도 없이 무턱대로 받아들인 다음 외할머니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이는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를 크게 믿어, 엘라가발루스 정부를 지킬 꼼수로 판단내린 것도 컸다. 이런 이유로 14살에 불과했던 알렉시아누스는 세베루스 가에 입양돼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사실상 공동황제가 되었다.
마이사는 장녀 소아이미아스와 외손자 엘라가발루스의 종교 정책을 여전히 따르는 척 하면서, 비밀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돕는다. 이는 알렉산데르의 어머니 마마이아가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하여 마이사, 마마이아는 알렉산데르 이름으로 여러 번에 걸쳐 금을 근위대 병사들에게 하사하고, 추가로 보너스도 두둑히 내린다. 이때 마이사와 친분 있는 원로원 중진들의 후원도 이어져, 인망까지 쌓인다. 이렇게 되니 무책임한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반동으로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의 인망이 멀쩡하고 차분한 양자 알렉산데르에게 쏠리게 됐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엘라가발루스와 그 모후 소아이미아스는 자신들의 결정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뒤늦게 파악한 후 맞대응에 나선다. 그 첫 조치는 로마 여신과 엘라가발 신의 육체적, 정신적 결합의 상징인 아퀼리아 세베라와 다시 재결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에도 여론은 변하지 않았고, 엘라가발루스의 이 조치는 더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켜 궁중 암투는 심화된다. 그래서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온갖 이상한 행동들로 인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근위대는 도리어 어린 알렉산데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뒤, 알렉산데르 제거 명령을 내린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모친을 죽였다. 이후 근위대와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알렉산데르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2.2. 훌륭했던 내치
전임자 엘라가발루스가 워낙 일반인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황제였기 때문에, 어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즉위는 환호를 받으며 시작됐다. 그가 즉위했을 때는 나이가 14살에 불과했다. 하여 실질적인 통치자는 여전히 율리아 마이사였지만, 율리아 마이사는 꽤나 통치에 능했고, 권모술수가 대단해 엘라가발루스 시대의 난잡한 상황을 금방 안정시켰다.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대단히 차분하고 얌전하며 예의바른, 말하자면 상식적인 성격이었다. 할머니 마이사, 어머니 마마이아에게 순종적이었고, 그들의 조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성실히 실천에 옮겼다. 어린 황제는 외조모가 추천한 인사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그들을 존중하고 극진히 모셨다. 로마인이라는 자긍심도 강하고, 라틴어, 정통 헬라어 공부에 힘쓰고, 통치 공부와 실무 참여 훈련에도 늘 적극적인 모범생이었다. 이렇게 어린 황제가 부지런한 성격을 지닌 재목임이 드러나자, 엘라가발루스 시대동안 시큰둥했던 마리우스 막시무스, 디오 카시우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같은 중진들도 기대가 대단했다.
어린 황제는 늘 명령을 내린 뒤, 사소한 대화를 나눈 뒤에도 이렇게 발언해 원로원 의원,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들에게 예의 바른 귀족이라고 불렸다.
"공화국[10]은 그대에게 늘 감사하노라.(gratis tibi agit res publica.)"
이렇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감사함을 표했는데, 평소에도 본인보다 윗연배 귀족들에게는 "치하한다"는 말보다는 "고맙다"고 말했고, 고지식할 정도로 직무 완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는 좋은 황제로 불렸는데, 그럼에도 몇 가지에서는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처럼 권위적이라고 불렸고,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받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항소권, 상급 재판 폐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 책임이 카라칼라가 일방적으로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서 이렇게 됐다며, 카라칼라가 생각 없이 시민권을 뿌린 결과 때문에 항소권 남용으로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카라칼라가 이 칙령을 발표했다고 하더라도, 이후에도 이 문제로 황제가 과중한 업무로 모든 직무를 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되레 황제가 담당하던 로마 시민 상고심이 사라진 것이 설령 카라칼라의 로마 시민권 확대 탓에 로마 시민이 너무 많아진 데 있었다고 하더라도, 카라칼라 전부터 그 수가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었고, 제국의 행정이 복잡해지는 가운데에서 어차피 없어질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늘 공직자 명단을 항상 끼고 다니며 거기에 나와있는 수천 명의 공직자와 장군의 이름을 일일이 다 외웠고, 역사를 익히는 것도 열심이었다.이 외에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호민관직, 아이달리스직의 임명을 중단하고, 집정관이 은퇴를 선언하면 그 혈족을 추천하는 것을 받아주면서 사실상 세습을 용인하는 조치를 황제가 관습처럼 허락했다. 그래서 당대부터 매우 귀족적이라고 불렸고, 일각에서는 전형적인 시리아인의 행태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이에 관해 알렉산데르는 정색을 하면서, 자신을 시리아인이라고 부름을 경멸하고 스스로를 메텔루스 가문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일은 로마시민으로서 맡은 것임을 설파했다.
이런 상황에서 섭정을 맡은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엘라가발루스 몰락 직후 공개 경고를 받아 세나클룸이 폐지돼 대놓고 정사에 끼어들 수 없었다. 따라서 율리아 마이사는 이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유명 법학자로 그 능력이 뛰어난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와 파울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힌다. 이때 그녀는 알렉산데르의 모후인 차녀 마마이아와 뒷선에서 권력을 행사하고자, 명목상 섭정 역할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16인의 원로원 위원회를 설치했다. 그 수석 고문은 임페리움을 보장받은 울피아누스와 파울루스가 맡았다. 마이사는 여기에 더해 외손자 재위 2년에 맞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로마진군부터 세베루스 왕조 내 최고 실력자였던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두번째 정규집정관 직을 내주며 도움을 청했다. 따라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부는 원로원과도 원활히 소통하여 문치를 펼쳐진 환경을 조성하고, 제국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늘날에도 로마 시대 법학자로 널리 알려진 울피아누스, 파울루스가 근위대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순수한 문관이며, 검사이면서도 치안판사였다. 이는 즉 근위대장직이 당초의 무관적 성격에서 탈피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점차 문민화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1] 또한 원로원 의원들까지 황실 위원회에 포함시켰으며, 새로 임명된 근위대장 두 명은 이 위원회의 의장이자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격상됐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두 섭정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는 두 근위대장 중 같은 시리아 속주 출신이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처럼 레바논의 페니키아 도시 출신인 울피아누스를 우선시하고, 그를 사실상 실권자로 내세워 원로원과의 공존을 모색했다. 이때 울피아누스는 자신을 진심으로 신뢰한 마이사, 마마이아에게 법률 분야 전문가, 반역죄 및 치안 안정에 필요한 내정 정비 보강을 요청했고, 16인의 콘실리움과의 상호 유대를 강화할 방안도 요청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즉위 이후, 로마 내정은 원로원 의원 중 황제, 마이사, 마마이아 및 울피아누스를 따르는 집단과 16명의 콘실리움 소속 원로원 의원들의 통치로 굴러간다.
그는 정직했고 워낙 성실히 내치에 전념했다. 재위 초 여걸이었던 외할머니의 섭정 아래, 울피아누스를 비롯한 훌륭한 자문단들의 보필을 받았다. 이때 알렉산데르 정부는 로마 시민들에게 효율적인 행정과 복지를 제공했다. 어린 황제는 세금을 인하하고 민생 안정책들을 시행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알렉산데르는 새로운 목욕탕, 수로, 도서관, 가도 건설을 승인해 사회인프라를 강화했다. 이때 알렉산데르는 교묘한 방법으로 네로가 만든 목욕탕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건축물로 바꿔 네로 시대처럼 호화롭게 재건하기도 했는데, 야간에도 목욕탕을 운영하기 위해 등에 사용하는 기름을 기부하는 동시에 전역에 목욕탕 운영 유지비를 특별세로 만들어 인프라 유지 비용을 마련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이전 황제들이 세운 공공 건축물들의 복구 외에도 217년 번개를 맞고 크게 손상된 콜로세움 복구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교사, 학자들에게 장려금을 지급했고, 각 속주까지 초등교육을 보급시켰다. 아울러 로마 시민들에게 제공된 식료품 배급 서비스를 확대하고, 가난한 제국 내 농민들에게 무이자로 농지 구입자금을 빌려줬다. 동시에 각종 산업들에서의 길드를 활성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포도주, 올리브유, 제빵, 제화 산업에는 국가 공인 아래 길드가 만들어졌고, 알렉산데르 정부는 면세 효과 및 법률 자문 등을 이들 길드와 사업가들에게 제공해 이들이 손쉽게 혜택받게끔 해줬다.
2.3. 마마보이 군주의 결혼과 이혼
224년 말 혹은 225년경 여걸이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사망한다. 225년 6월 혹은 8월, 할머니가 꾸려준 원로원 중진 중 한명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주요 협력자인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가 자신의 외손자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루킬루스 마케르 루피누스에게 집정관 경력을 보결 집정관이라는 방법 아래 사실상 세습 형태로 물려 주고 은퇴해버린다. 이렇게 되자 자연스레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친정 분위기 속에서 울피아누스의 힘이 강화된다.황궁 안팎에서는 마이사 사후, 그 실권이 모후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몫이 됐다. 마마이아는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달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황족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정치적 약점이 있었다. 더해 그녀는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달리 아우구스타 칭호를 본인이 단독 황제처럼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편집적으로 강했다. 따라서 황제의 어머니 마마이아는 마이사 사망 직후, 유일한 아우구스타 직위를 갖자마자 이를 개인 사유화했다.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는 그 능력이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보다 부족함에도, 자신의 이모, 어머니처럼 권력욕이 지나치게 강했다. 이보다 심각한 결점은 그녀가 그 스스로 본인의 능력을 과신했다는 점이다. 더해 그녀는 날 때부터 가계 전체가 황녀였던 이전 세습 황가 공주들인 리빌라, 대 아그리피나, 소 아그리피나, 루킬라 등과 배경이 다름에도, 이들과 자신을 동일한 위치 혹은 그 이상으로 보면서, 위엄과 명예를 드높이려고 했다. 즉, 율리아 마마이아는 권력욕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자신의 어머니, 이모와 달리 허세가 심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이런 딸의 단점을 알고 있던 율리아 마이사는 살아생전 자신의 영향력을 축소하면서도, 마마이아에게 언니 율리아 돔나의 전례에 따라 지식인, 학자 등을 후원하고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뒤에서 조용히 보필하는 방법을 숙달하게 하도록 하고, 그녀를 제어했다. 그러나 마이사 사후, 마마이아는 이런 역할을 여전히 수행하면서도, 갓 친정을 시작한 아들 알렉산데르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본인과 아들을 동일시하고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경향을 보였다.
여기에 힘을 보탠 이는 울피아누스였다. 이는 마마이아 아래에서 친정을 갓 시작할 황제에게 안정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판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성년식을 치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만큼, 이런 결정과 협력은 황제의 역할과 행동이 중요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마마보이였고, 지나칠 만큼 우유부단한 나머지 불만이 있어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단점이 뚜렷하게 있었다. 알렉산데르는 어릴 때부터 마마보이였고, 훌륭한 성품과 뛰어난 머리, 타고난 성실성으로 칭찬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성년식 직전 무렵이 되면, 부모에게 복종하면서도 반항하던 또래 로마 귀족들과 달리, 예의 바르고 차분하더라도, 황제가 갖춰야 될 결단력이 전혀 없었다. 그는 어머니 마마이아, 근위대장 울피아누스 및 이들의 측근들에게 의존했다. 더욱이 그는 어머니가 황궁과 원로원, 황제 자문회의에서 월권을 대놓고 행사하는 상황에서, 결단력이 부족한 모습을 매일 보여줬고, 어머니를 돕는 울피아누스, 디오 등 권세가들의 눈치를 봤으며, 기껏해야 할 줄 알던 반항도 불만을 터뜨리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전형적인 마마보이 성향은 당연히 이를 눈앞에서 지켜본 근위대 병사, 경호대가 황제를 얕잡아보는 이유가 됐고, 율리아 마마이아가 더 설치고 아들을 옥죄는 이유가 됐다고 헤로디아누스는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율리아 마마이아는 자신과 아들의 부족한 혈통적 권위를 위해, 야심 많은 로마 귀족 중 황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12]와 손을 잡고 이 사람의 딸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와 알렉산데르를 225년 8월 결혼시킨다. 이때 마마이아와 알렉산데르는 자신들의 보호막이 될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고 그를 황제의 장인이 아닌, 황족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애당초 정략혼이면서도, 황제와 모후의 약점 보완 목적이 뚜렷해, 갈등 이유가 됐다. 마마이아는 어머니 마이사 사후, 아우구스타라는 직위를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했던 터라 이는 불행이 되고 만다.
상술했듯 율리아 마마이아는 생전의 율리아 마이사와는 달리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에게 적정선에서 정치에 개입하도록 한 마이사가 죽자마자 아들 알렉산데르 위에 군림한 여제가 됐다. 이때 그녀는 아들에게서 이전까지 수많은 황후들이 누린 각종 명예를 넘어선 칭호들을 받아냈고, 결국 “전 인류의 어머니”라는 칭호까지 선사받았다.
알렉산데르는 엄청난 미인인데다 훌륭한 명문가 규수인 오르비아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마마이아 역시 맨처음 며느리를 맞이 했을 당시에는 이 결혼을 무척 만족스러워 했다. 하지만 오르비아나는 16살의 나이에도 당돌하고 한성격 했던 터라, 마마이아의 전횡을 참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당돌함 이상으로 야심이 많았다. 그녀는 남편 알렉산데르가 마마이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독자적으로 울피아누스 등을 제어하게 하는 등 마마이아나 울피아누스가 싫어할 행동을 했다. 마마이아는 며느리가 알렉산데르를 조종한다며 분노했다. 이런 가운데, 알렉산데르는 아내와 장인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행동은 마마이아와 오르비아나 사이의 고부갈등, 황제 주변의 알력 다툼으로 연결된다. 하여 결혼 2주년을 앞둔 시기부터 궁중암투가 벌어진다. 이때 마마이아는 성인이 된 아들 알렉산데르의 사생활 전반을 대놓고 통제했고, 온갖 트집을 잡으며 며느리를 핍박했다. 이는 226년 알렉산데르가 아내 오르비아나에게 정식으로 아우구스타 직위를 내리면서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익히 알려졌듯, 동양의 황후 직위와 달리 로마의 아우구스타 직위는 황제의 아내, 어머니, 딸, 여자 형제에게 상황에 따라 부여되는 자리였고 이는 그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헌데 마마이아는 기껏 들인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 오르비아나가 본인만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타(황후) 칭호를 받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불만을 대놓고 표출했다. 그래서 마마이아는 그녀의 출신 가문과 오르비아나의 아버지가 가진 명예와 권력에 대해서도 극도의 질투심을 드러냈고, 며느리를 핍박하다 못해 정적처럼 대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당연히 오르비아나와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살기 위해 대항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항보다는 살고자 보호를 간청한 것이다.
이때 오르비아나 부녀가 한 조치는 갈수록 히스테리를 부리는 마마이아에게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근위대와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한 일이었다.
근위대는 엘라가발루스를 없앨 때부터 세베루스 가문에게 말 그대로 기회를 한번 주고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울피아누스의 개혁 대상이 되어, 충성 상여금 등의 문제로 황제 모자와 울피아누스에 대한 불만 등이 있었으며, 엘라가발루스가 암살된 222년 3월 직후 자신들이 존경했던 근위대장 안티오키아누스가 일부 근위대 병사와 그 배후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처형된 일 등으로 알렉산데르 정부를 이중적이라고 생각해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 생전 율리아 마이사가 그들의 불만을 달래고, 울피아누스가 군 경력이 없는 등의 단점을 보완코자 따로 저명한 장군이나 근위대 장교 출신 지휘관을 공동 지휘관으로 붙여 문제는 터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울피아누스는 마마이아의 후원과 믿음 아래 마이사 살아생전보다 근위대 장악을 높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근위대에게 오르비아나 부녀가 신변 보호를 요구하는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던 까닭에 근위대는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를 보호해주기로 한다. 알렉산데르가 아내 오르비아나를 사랑하고 장인을 존경하고 있고, 마마이아의 전횡에 불만을 터뜨리는 것을 감안하면, 근위대 입장에서는 상식적으로 황제를 위해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데르는 여기에서 어머니, 울피아누스 모두에게 꼼짝 못하는 터라,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관심한 사람처럼 아내, 장인과 근위대 모두를 방치해버린다. 따라서 226년 8월 말, 율리아 마마이아는 뜬금없이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이용해 변란을 일으키고 자신과 아들을 해하려고 한다"는 누명을 씌워 죽여버린다. 마마이아는 이때 이들을 보호해준 근위대 일부까지 반역을 모의했다고 누명을 씌우면서 처형해버린다. 이에 대해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살기 위해 딸을 근위대 병영에 숨겨 꼬투리 잡혔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유가 어떻게 되었던 간에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는 율리아 마마이아였고, 반역죄를 뒤집어 쓴 건 장인과 처가 그리고 근위대였다.
이렇게 피바람이 분 뒤, 율리아 마마이아는 며느리 오르비아나가 반역을 일으켰다면서 이혼을 명령하고, 227년경에는 아프리카 속주 중 동쪽 끝인 오늘날 리비아 북부 해안으로 추방해버린다.
2.4. 울피아누스 암살 사건
울피아누스는 본래 법학자, 변호사로, 군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상술한 그대로 행정가, 관료로는 매우 뛰어났다. 동시에 정치적 감각이 떨어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율리아 마이사는 생전 원로원 안의 여러 권세가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울피아누스 외의 두 명의 장군 출신 인사들이 프라이토리아니 전체의 군대 지휘권을 늘 대리하면서, 이들의 협력 아래 울피아누스는 근위대 전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그러나 율리아 마이사는 225년경 사망했고, 226년과 227년의 일로 인해 마마이아가 사실상 여제가 된 상황 아래에서 협력자들이 은퇴하거나 등을 돌리면서, 상황은 변했다.오르비이나 부녀가 마마이아에게 죽임 당할 위기 끝에 근위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반역 혐의에 몰려 숙청된 뒤, 그 피해를 온전히 뒤집어 쓴 이들은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였다. 이들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한 직후부터 상관으로 함께 한 울피아누스에게 불만이 많았다. 울피아누스가 엄격하게 법이라는 잣대만 동원해 장교, 병사들을 통제하고, 취임 직후부터 각종 상여금을 삭감하면서 불만을 산 일 등 때문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오르비아나 부녀가 숙청된 이후부터는 마마이아가 여제가 되어 "전 인류의 어머니이자 전 세계의 어머니"라는 칭호까지 얻고 기세등등해지면서, 울피아누스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만 계속 터지게 된다. 이런 현실은 울피아누스로서는 답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는데, 마마이아는 울피아누스가 은퇴하거나 그만 둘 수 없게 붙잡아 두면서, 아들과 울피아누스를 꼭 붙어 있게 했다. 물론, 율리아 마마이아가 울피아누스에게 아들과 본인을 호위하는 게르만 경비대를 곁에 24시간 붙여주게 한 것은 본인이 벌인 일 등으로 인해 위험이 감지된 것도 컸다.
율리아 마마이아가 울피아누스가 암살될 것을 예상한 것에는 울피아누스가 단독 근위대장으로 우뚝 올라설 때까지 보인 과정도 큰몫을 차지했다. 울피아누스는 율리아 마이사 생전에 안티오키아누스, 플라비아누스, 게미니우스 크레스투스를 연달아 살해했다. 이중 플라비아누스, 게미니우스 크레스투스를 죽인 일은 조시무스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이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을 선동했다는 보고에 마이사가 일방적으로 이들을 체포해 반역 혐의로 죽였다고 하여,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게미니우스 크레스투스가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을 맡을 때부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를 돕고자 곡물 확보 및 물가조절 등에 공로를 세웠고, 222년 6월 취임하여 동료 근위대장으로 울피아누스를 보필하며 도운 인물이라는 점 등을 놓고 보면, 조시무스의 주장은 의심을 많이 사고 있다. 조시무스가 기록한 주장이 울피아누스가 내세운 핑계일 확률이 높다고 평가받는데, 동시대 원로원 의원으로 황제 자문회의 고문, 총독, 집정관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동안 맡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은 많은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디오는 자신의 책에 게미니우스 크레스투스, 플라비아누스가 반란이 아니라 울피아누스 손에 살해됐다고 했다. 또 울피아누스가 이런 식으로 단독 근위대장이 되어 권력을 완전히 손에 쥐었다가, 간접적으로 이런 배경으로 원한을 사면서 몰락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울피아누스는 사르다나팔루스[13]가 도입한 많은 불규칙성을 수정했다. 그러나 그는 플라비아누스와 크레스투스를 죽인 뒤, (자신이)그 뒤를 이을 수 있도록 했으나 그 자신도 머지 않아 밤에[14] 그를 공격한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가 궁전으로 달려가서 황제와 황제의 어머니에게 피신한 것은 아무 수용이 없었다.
오늘날에는 평가가 순교자처럼 인식되지만,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울피아누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행동 외에도 울피아누스는
독불장군이었고, 부하들에게 어떤 면에서 지나치게 가혹했다.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군대의 반(反) 울피아누스 움직임에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이를 판노니아 출신 군인들도 많았던 프라이토라이니 일부에게도 책임을 물어,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이런 일보다큰 문제가 된 것은 그가 단독 근위대장으로 우뚝 선 222년 6월을 기점으로 하여,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근위대장이 되었음에도 이를 프라이토리아니의 문제로 돌린 태도였다. 울피아누스가 엄격하게 법이라는 잣대만 동원해 장교, 병사들을 통제했다. 취임 직후부터 각종 상여금을 삭감하면서 불만을 산 일은 그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더해 울피아누스는 과거 파피니아누스와 달리 정치적 감각이 떨어진 인물이면서도 유연하지 못한 단점으로, 병사들의 불만을 통제하지 못했다.
228년 초여름, 로마에서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 몇명과 일반인 사이의 사소한 충돌이 4일간의 유혈사태로 번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울피아누스는 근위대 병사들과 일반 시민 간의 4일 간의 유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법대로’로 처리한다며, 유혈 사태 진압에 성공한 대대장 두 명을 체포해 일방적으로 방조죄와 과격한 진압을 이유로 징계했다가 한명은 그 자리에서 처형해버리고, 다른 한명은 전출조치로 이집트로 보냈다가 중간 기착지인 크레타 섬에서 물에 빠뜨려 사고사 형태로 죽이게 한다. 이 사건은 울피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프라이토리아니 전체와 황실 관료 일부를 자극했다. 이중 프라이토리아니의 군대 지휘권을 대리 행사 형태로 돕고 있던 지휘관 게미나투스가 울피아누스의 명으로 이 책임을 지고, 징계성 인사 조치 이동 중 중간 기착지인 크레타 섬에서 사고사 형태로 죽임을 당한다. 게미나투스는 과거 안티오키아누스처럼 근위대 전체를 넘어 수도 경비대, 소방대에게도 신망을 받는 장군이었고, 그가 항명을 벌인 일도 없어, 울피아누스와 마마이아는 병사들에게 원한을 사게 된다.
울피아누스와 세베루스 왕조에서 책임회피성으로 덮어 씌웠다는 여론은 프라이토리아니 전체에 퍼졌다.[15] 이들은 하나가 되어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시대부터 쌓인 불만을 토로했고, 폭발했다. 울피아누스는 근위대장 취임 후, 세베루스 왕조를 안정화하고자 기소, 치안유지, 정적 제거에 근위대를 활용하면서 특권이 과하게 많다는 이유로 개혁 대상으로 매도하고 있었던 터라 마이사 생전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런데 228년 여름의 일은 울피아누스가 미움을 받는 것을 넘어 반드시 죽어야 될 이유가 됐다. 병사들에게 그가 암살 대상이 된 것은 황제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를 도왔기 때문이다. 마마이아는 질투심 때문에 며느리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 황후에게 누명을 씌워 강제 이혼을 명하고, 사돈인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반란을 일으킨다며 그를 잡아 죽인다. 이 과정에서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시어머니에게 살해될 위기에 처한 딸을 데리고 함께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도망쳤다가, 마마이아에게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가 살해되고,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는 연고도 없는 리비아 북부 해안으로 추방된다. 이 사건 당시 프라이토리아니는 사정을 알고 있어 이들을 보호해줬다가, 이 일로 마마이아, 울피아누스 손에 큰 피해를 입어, 장교와 병사들이 누명을 쓰고 살해되거나 중징계를 받았다.
이 결과, 228년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은 울피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황궁 관료 일부 등의 도움 아래 대낮에 전체가 황궁을 쳐들어간다. 팔라티노 황궁 황제 집무실에 있던 울피아누스는 황제 모자 앞에서 살해당했다. 경호대 병사들은 무슨 일인지 무기를 들고 군사 작전처럼 난입한 병사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사실상 이들의 편을 든다.
황제와 아우구스타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자제력을 잃고 폭발한 프라이토리아니를 두려워 했고, 16인의 콘실리움 위원 중 울피아누스를 잃은 15명의 위원들은 벌벌 떨었다. 이들이 이렇게 겁먹은 이유는 특정 병사, 장교의 일탈이 아닌 프라이토리아니 전체가 내보이는 분노를 봤기 때문인데, 로마군 역시 엘라가발루스를 '가짜 안토니누스', '사르다나팔루스', '티베리누스'로 부르며 조롱하고 있었고, 시리아 코엘레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는 세베루스 왕조의 인기가 형편없는 터라, 이후 대처는 코미디로 흘러갔다.
율리아 마마이아가 근위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 별도의 조치까지 취하며 그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했다는 점에서, 울피아누스 암살은 황제와 모후 위신까지 실추시켰다. 이 사건은 근위대장 울피아누스가 근위대 병사들과 일반 시민 간의 4일 간의 유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법대로’로 처리한다며, 이 사건을 방치 내지 참여한 근위대 지휘관 두 명을 처형한 이유가 표면적 원인이었다. 허나 이 상식적인 조치 뒤에는 울피아누스가 과격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도, 법에 따라 조치를 취한 근위대에게만 "과격하게 대응해 인명피해를 유발했다"며 책임자를 처형시킨 것에 대한 불만, 울피아누스가 기소, 치안유지, 정적 견제에서는 근위대를 활용하면서도 그들의 특권이 지나치다며 개혁 대상으로 매도한 이중적 태도에 따른 병사들과 장교들의 종합적 불만이 복합적으로 깔려 있었다. 따라서 울피아누스가 직속 부하인 근위대 병사들 손에 암살된 사건은 놀라운 일 같음에도 어느 정도 예견된 비극이었다.
헌데 이 사건 직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모후 마마이아는 현직 근위대장을 암살한 병사들을 붙잡아 처형하지 못했다. 근위대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원로원 안에서 울피아누스를 중심으로 한 16인의 콘실리움 인사들의 실력행사는 원로원을 거수기로 만들고 이를 이용하는 모양새라서 호불호가 분명했다.[16] 황제와 모후는 엘라가발루스의 실정이라는 짐을 지고 있어,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결국 암살범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지도, 처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황제와 율리아 마마이아가 내린 조치는 고작 그들에게 불명예 차원의 조치를 취한다며 황제령 아이깁투스(이집트), 그리스 등지로 인사이동시키는 조치 정도였다. 그런데 이 조치 역시 근위대 병사들의 반발로 잠잠해지자마자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니, 당연히 후속 조치를 주목하던 디오 카시우스 같은 인사들은 상식 밖의 여러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하여 디오의 경우, 이 사건 이후 근위대와 각 군대, 황제 경호대까지 군율이 서지 않고 세상에서 황제를 우습게 본다고 이를 기술하거나, 군율이 형편없고 병사들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터트렸다고 이를 평했다.
2.5. 디오 카시우스 은퇴
울피아누스가 마마이아에게 쏟아질 원망까지 뒤집어 쓴 채 암살된 뒤, 마마이아는 자신과 아들 알렉산데르가 살기 위해서는 울피아누스가 사라진 가운데에서 그 방패막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마마이아는 자신의 떨어진 위상 아래에서도 여전히 여제임을 강조했고, 더 오만하게 행동한다. 이때 그녀는 부자, 원로원 귀족들에게 누명을 씌워 살해하고 재산을 강탈했고, 아들의 이름에 자신의 직위를 더해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니 원로원 역시 서서히 이를 경계하게 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어머니의 전횡에 비공식적으로 극소수 측근에게 불만을 쏟아내면서, 어머니의 탐욕과 권력욕에 슬픔과 분노를 토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명에 절대 복종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취했다.228년 울피아누스 사후, 로마 시와 이탈리아 일대는 황제조차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묘한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프라이토리아니와 수도 경비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군부처럼 움직였고, 황제 모자가 울피아누스 암살세력에게 사실상 면죄부 주듯이 벌인 일은 황실의 체통을 떨어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마마이아는 다음 해의 정규 집정관 중 한 자리를 황제가 직접 취임하기로 한다. 즉, 황제의 동료 집정관을 세워, 이 인물을 중심으로 울피아누스 사후 정국을 수습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때 선정된 인사가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디오 카시우스였다. 알렉산데르는 디오에게 생애 두번째 집정관 직을 선사하면서 자신의 동료 집정관으로 임명한다. 헌데 이는 "두고 보자"는 기류가 강한 근위대를 제대로 자극시킨다. 근위대는 본래부터 디오 카시우스를 냉소적이고 비열한 귀족으로 여기고 있어, 이 소식이 나오자 "저 비열하고 냉소적인 디오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기류가 강했다. 따라서 디오는 나폴리 근교의 개인 호화 별장으로 들어가 통풍 치료를 이유로 몸을 피한다. 이에 알렉산데르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그렇지만 황제 모자는 디오가 이렇게 어물쩍 치료를 이유로 넘어가면 닥칠 후폭풍을 감내할 생각이 없어, 디오를 229년 1월 1일 취임식에 오게 하여 취임 연설을 함께 한다. 그러자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는 폭발했고, 디오가 암살될 것은 공공연한 사실처럼 떠들썩해진다.
결국 황제가 이를 해결하겠다면서, 자신의 스승이며 조력자인 디오를 부른다. 여기에서 알렉산데르는 마치 디오가 두 번째 집정관 자리를 얻겠다고 나서면서 자리에 올랐다는 태도를 은연히 내보이며, 그에게 은퇴를 권유한다. 이때 알렉산데르는 이렇게 디오에게 말했다.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으니, 이만 로마를 떠나 집정관직을 수행하라"[17]
이 말을 들은 뒤, 디오는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집정관에서 사퇴함과 동시에 은퇴를 선언해버린다. 본인 입장에서 볼 때, 황제와 그 어머니가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막겠다고 원치 않던 집정관이 되었다가 그 책임을 진 상황이니, 속 시원하게 은퇴해버린 것이다. 디오는 이 선언 후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나와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 고향 니카이아로 낙향해버린다. 이후 그는 모든 사람과 거의 인연을 끊고 은둔해버린다. 이때 디오는 진짜 실망한 나머지 몇 년 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페르시아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니카이아 근처를 방문할 때에도 거론되지 않을 정도로 황제에게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디오 카시우스가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면 직속 상관인 근위대장 울피아누스도 죽여버릴 정도로 군벌화가 촉진된 근위대에 의해 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추측 그대로 근위대는 디오를 죽이겠다고 떠들다가, 이때부터는 디오의 남은 가족들에게 협박을 하는 등의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디오가 사퇴를 함과 동시에 은퇴를 하면서 본인 목숨과 가족들의 신변까지 구하고, 알렉산데르 모자가 군대 장악을 완전히 실패했다고 한방 먹인 것이다.이런 촌극은 모두에게 황제는 마마보이이고, 황제의 어머니는 여제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 됐다.
2.6.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내치에서는 훌륭했음에도 어머니 문제와 근위대 문제로 불만이 쌓여가는 이중적인 상황은 젊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통치 특징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알렉산데르는 재혼을 했는데, 사이에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당시 제국 동방에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인기는 이곳 관료, 군대를 중심으로 높지 않았다.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의 영향이 이 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보다 알렉산데르의 인기를 깎아 먹은 것은 그가 울피아누스 암살 뒤에 방탕한 자유민으로 황궁 관료인 에파가투스를 희생양 삼아 울피아누스 암살 배후로 몰고, 비겁하게 죽인 일 때문이었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에파가투스가 암살 배후로 자꾸 의심을 받자 그를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으로 임명해, 이집트로 보냈다. 그런데 알렉산데르가 에파가투스를 크레타 섬으로 끌고 가게 한 뒤, 그를 처형하고 울피아누스 암살 배후로 확정지었다. 이 사건은 관료, 군대 모두에게 알렉산데르가 비겁하고 이중적인 사람으로 각인됐다. 그런데 이런 동방에서 알렉산데르는 ‘로마군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황제’라는 부분에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바로 파르티아를 누르고 새로운 동방의 적으로 급부상한 강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세와 맞붙게 된 일이었다.
알렉산데르 입장에선 여기에서 성과를 낸다면 로마 황제로서 군사적인 재능을 인정받고,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민심까지 회복할 최고의 기회였다. 반대로 고전할 경우 또는 매끄럽지 못한 문제들에 터질 경우, 군대와 주민 모두에게 더 큰 비판을 받게 될 상황에 놓였다.[18]
하지만 이 문제가 아니어도 이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시작부터 제대로 꼬이는 행보로 동방 군단병들에게 또 다른 이유로 이미지가 나빴다. 왜냐하면 니시비스 전투 이후 세베루스 왕조는 여러 부분에서 동방 병사들에게 낙제점을 받았고, 해결은 10년 넘게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와 로마를 공격하기 전부터, 동방 군대 배치 문제와 그 대응문제는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 심각했다. 카라칼라 암살과 마크리누스 이후 동방 군단들은 주둔지를 잃고 방치됐고 군기 역시 222년 부임해 거의 8년 가까이 시리아 코일레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아라디우스 루피누스 옵타투스 아일리아누스 아래에서 해이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알렉산데르가 친정을 결정 내리고 로마를 떠나 도나우 강을 지나 안티오키아에 당도했을 때, 안티오키아에서 벌어진 군대 사열 풍경은 개판이었다. 설상가상 페르시아가 로마의 속주였던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해 나시비스, 카르하이를 점령하고 난장판을 만드는 상황에서, 황제와 로마는 최대한 군사충돌을 피하기 위해 외교에 집중해 모양새도 우습게 흘러갔다. 허니 알렉산데르가 먼저 친정에 나서겠다고 말한 뒤, 지체없이 동방원정길에 올랐음에도 동방 병사와 주민들 입장에서 황제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동방원정을 온 모양새로 비춰졌다.
알렉산데르는 231년 봄에 로마를 떠나 도나우 방어선 일대의 최정예군을 규합해 늦여름이 돼서야 동방의 안티오키아에 도달했다. 이때 풍경에 관해, 헤로디아누스 등은 로마와 다누비우스에서 온 증원군의 군기가 잡혀있고 정돈되었다고 기술했다. 허나 안티오키아에 입성한 직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로마와 다누비우스 전선에서 건너온 장군들 앞에 비친 병사들의 모습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안티오키아에 입성하기 전에 미리 소집 명령이 하달했지만, 주둔지가 일정치 않고 행정착오 문제 등이 발생해 대개의 병사들은 시내 목욕탕, 극장, 유흥가에서 놀고 있거나 집에서 쉬고 있었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쪽 책임자들이 자기 잘못을 쉬쉬해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한 병사들만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군대사열식은 개판이 됐고, 그나마 모인 장병들은 뒤늦게 사실을 알고 반항적으로 행동한데다 급히 준비된 탓에 복장 역시 불량해 출정식과 사열식이 동시에 진행된 행사는 완전히 망해버렸다.
사건의 내막을 모르고 있던 알렉산데르는 머리 끝까지 열 받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병사들은 이런 황제를 보며 더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러자 알렉산데르는 페르시아한테 동방 군단들의 주둔지를 넘겨준 탓에 주둔지도 없던 2개 군단의 병사들이 황제의 소집에도 늦장을 부리는 태업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군율을 잡겠다고 이를 엄하게 처벌했다. 헌데 병사들이 애당초 이렇게 된 원인은 주둔지도 없고 관리도 되지 않는데다 제대로 소집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이유가 커서, 영창에 가둬진 병사와 이를 지켜보는 장병들의 불만은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주지 않으면서 처벌만 한다는 구호 아래 파업으로 번지는 결과를 낳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에 주둔 중인 2군단이 알렉산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알렉산데르는 여기에서 또 한 번 실수를 한다. 애당초 문제 원인이 시리아 총독의 무능함과 자신의 실책임에도, 여기에서 수습한답시고 병사들을 시민(퀴리테스)이라 부르면서 "군단병 노릇을 하기 싫으면 그만둬라"라고 실언까지 해버린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는 그렇지 않아도 불만투성이였던 병사들을 빡치게 만든다. 그래서 병사들이 자진 해산하는 초유의 사태로 확산된다. 하여 2개 군단이 흩어지고 깨어지는 촌극이 벌어지는데, 뒤늦게야 사태 파악을 하게 된 알렉산데르는 이를 뒤늦게 달래서 가까스로 복구시킨다.[19]
한편 232년 메소포타미아 지방 수비대가 지휘관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오를 살해하고 타우리니우스(또는 타우리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타우리니우스는 진압군을 피해 사산 왕조로 달아나다 유프라테스 강에 빠져 익사했다.
다행이라면 당시 로마군의 물량은 이렇게 동방 군단 2개가 잠시 해체되었다고 해서 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로마군은 페르시아로 진격했고, 본군을 이끈 알렉산데르 아래에서 로마는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타격해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다. 이때 로마는 겉보기에는 한 덩어리로 진군하는 모양새로 움직이면서도, 3로로 진격해 나눠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본대가 유프라테스 강을 도하할 때 남, 북 분견대는 각기 다른 경로로 흩어져 페르시아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중 전과가 확실한 쪽은 아르메니아의 도움을 받아 메디아 일대의 험준한 고지대를 요격한 북쪽 분견대였다. 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아르메니아에서 메디아에 이르는 지역이 험준한 고지대라 페르시아 기병들이 불리했고, 로마가 이를 잘 활용해 아르다시르 1세가 직접 출정했음에도 모두 승리를 거두고 이 일대를 초토화하며 약탈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아르다시르 1세는 만만치 않은 인물답게 곧 로마군이 3개의 분견대로 나뉘어 있다는 정보를 접한다. 하여 아르다시르는 지형지물을 활용해 진군해 들어오는 북쪽 분견대를 막을 메디아 방어병력을 최소한의 전력으로 맡게 하고, 기병대가 활약하기 쉬운 전선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본군과 남쪽 분견대를 막기로 한다.
로마의 전략이 페르시아가 보기에 동시 공격 같아도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진격해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시 공격을 하기로 한 것인지 모르나 아르다시르의 빠른 대처는 군대 경험도 없고 전술적으로도 무능한 알렉산데르를 위험에 빠뜨린다. 빠른 기병을 활용한 페르시아는 남쪽 분견대 병력이 적음을 알고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반격하고 빠지며 로마군의 진격을 막았다. 여기에서 알렉산데르와 동방군을 지휘하는 시리아 총독 등은 큰 실수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알렉산데르는 남쪽 분견대의 도움 요청에도 본대를 빨리 진군하도록 명령하지 않고 제일 늦게 움직이게 했다. 그러니 로마군은 아르메니아 방면 북쪽 분견대 외에는 모두 페르시아에게 피해를 입고 격파당한 꼴이 됐다. 따라서 패배 소식에 상심한 알렉산데르는 232년 늦여름, 군대를 모두 안티오키아로 철수시키기로 한다. 이는 그나마 이기고 돌아오던 아르메니아 방면 분견대에게도 소식이 전해져 사기가 저하되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이 시기에 혹독한 겨울 날씨가 이 일대를 강타해 회군 도중 북쪽 분견대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를 경험한 동방군대와 도나우 강 일대 증원군들은 이 전투 직후 알렉산데르가 결단력도 없고, 전투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겁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고 동방 관리와 주민들 역시 알렉산데르를 똑같이 비난했다.
최종적으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로마군은 나름 이기고 오긴 했지만 전선에 따라서는 대대 1, 2개가 한꺼번에 전멸했다는 기록도 나올 만큼 피해가 컸다. 반면 유리한 상황이 되어서도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생각보다 그렇게 잘 싸운 건 아니었고, 여러모로 로마 못지 않은 쪽팔린 모습을 보여주었다.[20] 다만 북쪽 분견대의 활약으로 페르시아의 북쪽 고원 일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또한 로마군에게 준 피해 이상으로 10만이 넘는 병력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등 손실이 컸다. 물론 이건 대부분 잡병들이라 그렇다 쳐도 결정적으로 주전력인 중기병 카타프락토이만 1만 명 이상을 손실하였다.[21] 중기병 1만의 손실은 그 어느 국가라도 당장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뒤 아르디사르는 당분간 동부 지방 안정에만 집중하게 된다. 때문에 사산조는 그 후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보지 못했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국경은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안정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명분이 있던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는 서로의 승리를 선전/주장했다. 로마 측은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국경을 안정화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했고, 페르시아 또한 침공해 들어온 로마 측을 어떻게든 격퇴해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는 명분이었다.
2.7. 몰락
2.7.1. 개선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정부는 세베루스 왕조 성립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가장 강조한 부분, 즉 군대를 장악하지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동시대 사람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 등의 증언처럼 알렉산데르는 근위대장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면전에서 피살됨에도 병사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주동자들을 질책성으로 아이깁투스로 보직전환시키는 조치만 취할 정도로 무능함을 노출했다. 이는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도 상황이 비슷해, 이들은 시리아 여제라는 평과 달리 주변을 이용해 군율조차 제대로 확립시키지 못했다. 하여 마마이아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디오 카시우스는 군율이 형편없고 병사들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터트렸다고 매우 비판적으로 이 모습을 개탄했다. 더욱이 세베루스 왕조는 엘라가발루스의 4년 치세를 거치면서, 로마인들에게 괴이하고 음란한 주술행위에 심취한 시리아인으로 인식이 박혀 이를 타개할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따라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군사적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이미지 개선과 군율 확립 측면을 대대적으로 강조했다.이런 사정으로 알렉산데르는 로마에 도착한 직후, 원로원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이끄는 로마군이 페르시아를 이겼고 동방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승전을 보고했다. 모든 상황을 다 알지 못한 원로원은 당연히 이에 환호했고, 그에게 정식 개선식을 거행토록 만장일치 의결로 답했다. 그래서 알렉산데르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개선식을 거행했다.
허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과정, 결과 모두에서 알렉산데르의 공은 전무한 군사적 업적이었고, 이는 그가 몰락한 원인이 됐다. 왜냐하면 알렉산데르가 면이 선 이유는 로마군 중 남, 북으로 향한 분견대가 본대와 달리 확실한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알렉산데르의 실수로 본대도 피해를 입고, 선전하는 남쪽 분견대마저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입은 탓에 도리어 군사적 무능함을 부각시키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그러니 헤로디아누스가 기술했듯, 알렉산데르의 이런 행동은 실상을 알고 있는 동방 군대와 도나우강 일대 장병들, 동방의 관리와 지식인들에게 위선적으로 비춰져 승리라고 하기 애매하다는 조롱으로 이어졌다. 무능함을 드러낸 시리아 총독은 이번 사태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교체하면 황제의 승리가 퇴색된다는 정치적 부담 때문인지 몰라도 유임됐고[22], 동방 병사들이 시급히 해결해주길 원한 주요사안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동방에서 이를 모두 지켜본 헤로디아누스는 이런 작태를 대놓고 씹었고, 동방 군단을 비롯한 로마 군단병들은 젊은 알렉산데르를 가리켜 “결단력도 없는 겁쟁이”, “전투도 제대로 수행할 줄 모르는 애송이”라고 비난했다.
2.7.2. 게르마니아 전쟁과 암살
개선식 거행 이후, 알렉산데르는 페르시아 전쟁 중 어렵게 모셔온 동방 일대의 지식인들을 로마로 불려들어 그들의 고견을 듣고, 이를 배경으로 로마 내정에 힘을 쏟았다. 이중 한 사람이 페르시아 전쟁 중 인연을 맺어 그의 스승이 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기독교 학자 오리게네스였다. 이에 대해 후기 로마의 기독교 사가였던 에우세비우스는"오리게네스가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어머니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의 명령으로, 카이사레아에서 안티오키아로 소환되어, 황제 및 모후와 기독교 철학과 교리를 논의하고 황제에게 이를 가르쳤다."
라고 증언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알렉산데르는 기독교와 유대교 신전을 로마에 세울지에 대해 고민했고, 로마의 여러 종교 문제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으로 대처했다[23]하지만 이런 내부 안정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때 닥칠 뻔한 진짜 문제가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으러 갔을 때 크게 터지고 말았다.
서방 전선은 카라칼라 시절, 예방전쟁 차원에서 이 일대의 적들을 박살낸 덕분에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무렵, 라인강 일대의 게르만 부족들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라인강 국경을 돌파해 요새들을 파괴하고, 이 일대의 로마 영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다시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는 얼마 전의 전쟁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해진 제국 동부 일대의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라인란트 일대의 군단병들을 모아 부교를 만든 뒤 라인강을 도하해 게르마니아에 산재한 침략자들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그런데 문제는 모후 마마이아가 갑자기 개입하면서 발생했다. 이 전쟁에서 교본대로 전술을 만들어 초기에 승기를 잡은 알렉산데르는 로마군 내 장군들과 장교들의 반대에도 블구하고, '마마보이 황제'라는 별명처럼 모후 마마이아의 의견대로 게르만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평화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군사적인 역량이나 경험이 없다시피한 알렉산데르의 입장에선 시간벌기의 요량으로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지만, 피를 흘려가면서 싸웠고 개전부터 승리를 거두웠던 군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제가 무작정 싸울 생각도 안 하고, 이기고 있는데 어머니 말만 듣고 그 게르만족들에게 돈을 주면서 회유하려 든다”라고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반발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알렉산데르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전투 중인 군단병들의 급료와 상여금 및 군사지원비 등을 제한하는 조치들을 계획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 조치는 평소에도 스스로의 의사보다는 어머니 말만 따르는 다 큰 황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주둔 병사들에게 오해를 사고 말았는데, 병사들은 “우리에게 가야할 하사금까지 왜 적들에게 줘야 되는거냐”라고 생각하면서 황제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결국 게르마니아 군단병들과 근위대는 반란을 일으켜 게르마니아 내 모군티아쿰(오늘날의 독일 마인츠) 병영에서 235년 3월 19일,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 옹립된 막시미누스는
"나는 나약한 겁쟁이와 다르다"
라고 선언하며, 병사들을 이끌고 황제 막사로 쳐들어갔다. 이후 그들은 자신들을 도운 기지 내 게르만족 출신 노예들의 신호에 맞춰, 황제 막사를 급습했다. 그리고 당시 고트족과의 전쟁에 대한 전략을 토의 중이었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었던 장군, 원로원 의원, 황제 자문위원들까지 모조리 살해했다. 이때 황제의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 역시 살해되었는데, 막시미누스와 그 병사들의 만행에 대항하여 세베루스 왕조의 노예들이 어떻게든 젊은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저항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때를 기록한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처형집행인들에게 죽기 직전 알렉산데르는 자신의 막사 안에서 온갖 일에 개입해 논란을 일으킨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죽기 전까지 그녀에게 모든 불만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데르의 몰락은 아들의 즉위 이후 율리아 마이사의 사후부터 실권을 쥐고 간섭한 황제의 어머니 마마이아의 잘못만은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순종적이었던 잘못과 평소 근위대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황제의 연이은 군사적 실수와 행동들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알렉산데르가 완전히 복권되고, 병사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은 3년이 지난 238년부터였다. 왜냐하면 후임자인 막시미누스가 늘 그를 비난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막시미누스가 몰락하기 전까지 알렉산데르의 이름이나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언급은 자제되었고, 그 이름은 비문에서 강제로 기록말살형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238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미움의 대상이 되고, 병사들 역시 서서히 그에게 등을 돌리면서 알렉산데르와 세베루스 왕조의 이름은 복권되었다. 이때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갈리아 지방에 알렉산데르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죽음을 후회했으며, 원로원 역시 238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암살되자마자 알렉산데르를 신격화하여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따라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다시금 로마인들로부터 민중과 원로원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마지막 문민황제로 칭송받았다.
다만 어머니 마마이아는 언니(엘라가발루스의 모친)와 마찬가지로 온갖 전횡을 저질렀고, 결정적으로 통치에 대놓고 개입하여 아들의 치세를 망친 죄가 있다고 하여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하드리아누스 영묘가 아닌, '마우솔레오 디 몬테 델 그라노'라고 불리는 별도의 영묘에 매장되어 있다. 이 영묘는 아우구스투스 영묘, 하드리아누스 영묘 다음으로 큰 건축물인데 현재 로마에 그대로 남아 있고 그 형태는 에트루리아와 앞서 만들어진 두 황제들의 무덤을 참고해 건축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의 유골항아리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매장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의 유골항아리와 달리 남아있는데 유리로 제작되어 있고, 대영박물관에 그 일부가 있다고 한다.
3. 평가
그의 치세는 13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모든 측면에서 국가의 힘을 키웠다.
로물루스에서
셉티미우스에 이르기까지 로마는 꾸준히 부강해졌지만, 절정에 이른 것은
카라칼라의 치세 때였다. 이후 (로마가)곧바로
하락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알렉산데르 덕분이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관하여》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관하여》
그(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완전히 어머니의 지배를 받아 그녀가 하라는 대로만 했다. 지나치게 온순하고 정도 이상으로 어머니를 존중해, 자신이 찬성하지 않는 문제들도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그가 비난받을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헤로디아누스
헤로디아누스
실제 평가가 어땠는지에 관해 논쟁이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3세기의 위기'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일 이전까지의 무정부 상태를 경험한 로마인들에게 명군으로 불렸다. 실제 당대 로마인인 헤로디아누스를 비롯하여 4세기의 행정가이며 정치인이자 역사가였던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평가 등을 보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금기로 불렸고, 학자들 역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치세를 마지막 팍스 로마나로 호평하고 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있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고대 로마의 원수정 황제의 교과서 중 한 명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그 평가가 매우 훌륭했다. 물론 동시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가 직접 지적했듯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실용적이었지만 매우 고압적이기도 했던 기존의 세베루스 황제들에 비해 2세기경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원로원 귀족주의적인 황제로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도 그 속을 파해쳐보면, 헤로디아누스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이 비꼰 것처럼 알렉산데르는 마마보이, 군대를 통제하지 못한 쫄보, 유약하고 아내와 장인이 핍박받는 것을 책임회피하는 겁쟁이라는 비판처럼 결점이 분명했고, 이런 단점은 그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의 치세기였다고 해도 과연 모든 점에서 뛰어난 황제였는가에 대해 의문부호를 받는다고 평가받았다.[24]
세베루스 왕조의 네 명의 황제들 중 그는 창건자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후 최고의 현군이라고 불릴 만큼, 일반 병사를 제외한 대다수의 로마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이는 그 비교 대상이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로 당대에 공인된 엘라가발루스였던 까닭에, 온건하고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알렉산데르에 대한 평가는 등장 당시부터 나쁠 수가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당대와 후대의 로마인이나 중세 이후의 유럽인들에게 로마 최후의 명군, 관용과 언행일치가 몸에 배인 황제 등으로 찬사받은 것은 그가 오늘날 기준으로도 매우 존경받을 만큼 그 인격이 훌륭했던 것이 컸다.[25]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어릴 때부터 진중하고 사색적인 성격을 가졌고, 사생활 역시 상당히 조용했으며 13년 동안의 치세 내내 매우 성실했다. 그는 등장 당시부터 끝없이 비교대상이 된 외사촌형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스스로를 로마 시민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지극히 로마인이었고[26], 삼촌뻘 친척인 카라칼라, 게타 형제처럼 성격적 결함이나 비열함도 없어 정적도 거의 없었다. 여기에 더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과거의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연상되듯, 노예나 하층민에게도 친절하고 매우 도덕적인 언행을 하여 극찬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인격적으로 보면, 귀족적인 기품과 예의를 갖춘데다가 로마인들이 성별에 상관없이 매우 중요하게 여긴 품성이 많아 앞 세대인 2세기의 황제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따라서 암살 직후 반란군은 그 시신을 정중히 수습하여 화장하고, 황제로 대우해 장례를 치러줬다.
내정적인 측면의 평가를 보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업무 스타일과 국정 정책 모두 매우 상식적이며 건실했다. 즉위 이후 폐제 엘라가발루스를 상징하는 검은 돌을 시리아로 돌려 보내는 등의 상식적인 행동을 했고, 친정 이후에도 매우 꼼꼼하며 상식적이고 현명한 결정을 많이 내렸다. 업무 스타일 역시 왕조의 개창자와 달리 민중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주었고, 원로원과 협력하는 고전적인 원수정 스타일로 국정을 운영했다. 국고 관리 경영과 제국 각 속주에서 집행된 조세 정책 역시 건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렉산데르는 친정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처럼 중앙정부에서 통행세와 취득세 등을 엄격히 관리해 계산된 세금을 거두고, 이를 꼼꼼히 관리해 국고 역시 적정 수준 이상을 유지시켰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당대와 후대 로마인들로부터 “자칫 하락의 길에 접어들 나라를 곧바로 하락의 길로 가지 않게끔 해준 황제”로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재위기간 내내 스스로를 “전 인류의 어머니”가 되어 여제가 된 어머니 마마이아에게 휘둘렸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래로 군대의 힘이 강력해졌음에도 군인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 정직하고, 예의바른 황제는 맞았지만, 동시에 우유부단하고, 사생활적으로는 줏대가 없었으며, 타의존적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로디아누스는 뛰어난 내치와 잘 통제하지 못한 군무 능력이 결합된 그를 일종의 이중적인 시각을 가진 군주로 묘사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이런 성향으로 인해 집정관 자리에 강제로 취임했다가 곧바로 희생양처럼 해임된 뒤 사실상 고향으로 쫓기듯 가버린 디오 카시우스 역시 악담만 퍼붓지 않았을 뿐, 무미건조하게 알렉산데르를 기술했다. 이외의 다른 사료들 역시 훌륭한 황제 임에도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눌려 지낸 나약한 인물로 그를 표현하고 있다. 사실 알렉산데르 모자의 회유책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 부분 현실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알렉산데르 사후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로마 제국은 고트족에게 상납금을 제공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문제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신하들과의 상의도 없이 어머니의 말만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예의 고질적인 마마보이 근성을 또다시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결국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함께 50년 가까이 지속된 '3세기의 위기'를 개막시키고 말았다.
즉,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이 기록했듯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군무 능력과 군대 장악 능력만 문제일 뿐, 당대부터 아주 훌륭한 명군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만약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에 황제였다면 그는 역대 로마 황제들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명군이었을 지도 모른다.[27] 하지만 그가 제위에 오른 시점은 불행하게도 이런 스타일의 황제보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나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문무를 겸비한 카리스마형 황제를 요구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가진 유약한 이미지와 군대 장악 실패는 당시부터 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의 탄핵권을 행사한 병사들의 눈에는 낙제점으로 비춰졌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군대에 의해 옹립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자체가 황제로서도 정치가로서도 완전히 부적격자인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데다가 그가 암살당하고도 거의 100년 뒤에야 시대가 원한 스타일의 황제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사후 3년도 안 된 시점에 당대의 로마인들에 의해 황제로서 완전히 복권되었고, 그가 피살된 지 1년도 안 되어 그를 살해한 병사들마저도 그가 가진 인격적인 대단함을 그리워했다. 이런 이유로 원로원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신격화시켰고, 로마군과 정부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까지 건립했다. 아예 황제였다는 것 자체를 부정당하고 일종의 참칭자로 단죄받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나,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군인 출신 황제들에 비하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당대의 로마인들과 후대의 로마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황제였던 것이다.
3.1.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실패 = 원로원의 실패?
2세기와 3세기 동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은 이전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보다 강압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이는 그들이 비난받고 있는 이유인데, 창건자의 법적 후계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역시 2세기의 안토니누스 가 황제들보다는 확실히 권위적이었다. 따라서 당대, 후대 로마인들이 말하는 알렉산데르 정부의 치명적인 약점, 즉 군대 장악 실패와 유약한 카리스마적 통치 부분에 관해 단편적으로 "이 황제가 지극히 귀족적이고 문약해 벌어진 일이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전부 맞는 이야기까진 아니다. 그렇지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세베루스 왕조의 세 황제(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와 달리 친(親) 원로원적인 귀족스러운 황제였다. 따라서 그는 세베루스 가의 세 황제를 경험한 원로원 입장에서 분명, 과거의 귀족적인 문치 황제들( 클라우디우스 1세, 네르바,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과 비슷한 부류로 해석됐다. 그래서 알렉산데르의 실패에 대해 오늘날 로마사 학자들은 그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점을 거론하면서, 원로원의 한계와 실패를 언급한다.세나투스 로마누스, 즉 로마 원로원은 로마 황제들에게 자신의 성공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정치 파트너이자 인재를 제공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로마 황제는 원로원에게 인정받고 그들의 지지와 협력을 바탕으로 취임을 공인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여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그를 섭정한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 카시우스 디오, 울피아누스, 율리우스 파울루스 등은 지극히 상식적인 결정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그들의 권위를 통해 권좌와 제국을 지키는 통치술을 사용했다.
헌데 이런 결정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이후부터 속된 말로 '못해도 평균은 보장받는다'는 공식과 멀어진 조치였다. 왜냐하면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 전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층인 원로원과 이를 장악해 부와 권세를 누린 엘리트들은 과거 로마 공화정,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와 달리 이미 그 권위가 추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원로원은 군인황제시대 기간동안 갈리에누스 개혁 전부터 황제에게 유용한 집단으로 활용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아우구스투스가 종신집권체제를 완성하고 시작한 기원전 27년부터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로마 원로원은 분명 트라야누스 시대까진 적어도 인재풀로서 훌륭한 집단이 맞았다. 따라서 원로원이 프린키파투스 아래에서 황제의 인재풀 기능을 상실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드리아누스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드리아누스의 개혁 중 "군미필자도 공직 기회를 부여하고, 원로원 의석을 세습받을 수 있다"고 조치를 취한 직후부터 시작됐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듯, 로마 제국의 선출직 정무관과 관료제 아래의 중앙, 속주 관리들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건국부터 군대 조직과 민간 조직이 하나로 결합되거나, 함께 처리해야 방식이었다. 따라서 로마 엘리트들은 원로원이나 관료가 되기 전, 군에 들어가 군역의무를 맡으면서 자연스레 군공을 쌓고 여러 행정실무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것을 과감히 폐기했다.[28] 왜냐하면 이런 전통적인 방법으로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은 갈수록 방대해지고 전문화되는 로마 제국의 정무직, 관리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원상복귀시킨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이런 이유로 타협적으로 과거처럼 무조건 군복무를 해야 의석을 준다는 식으로 되돌리진 않는다.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하드리아누스 이래 이 혜택을 받으면서 원로원 의석을 차지하고 이탈리아에서 부와 권력을 누린 푸닉, 그리스, 시리아, 아나톨리아 출신들을 굳이 쫓아내는데 집중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내전 당시부터 이 지역 출신들과 척을 진 까닭에 아예 발상의 전환을 해버린다. 그 조치는 먼저 원로원 신분과 이탈리아인의 특권적 지위를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해, 본국 이탈리아 혈통 귀족과 소외된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들을 황제가 밀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고, 어쨌든 원로원과 제국 안에서 부와 권력을 쥔 이들은 그리스와 푸닉 그리고 지중해 동부 출신들이었다. 당장 세베루스 왕조도 이쪽에서 발흥했고, 처가도 시리아였으니 세베루스의 조치는 황제가 완전히 원로원 900명을 뜯어버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이 방법을 쓰면서도 다른 방법을 활용한다. 원로원의 권위를 얻었음에도 제국 각지의 군대와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과 지지를 받은 조치였다. 여기에는 인재풀 해결을 위해 과거 전통적인 방법으로 군행정을 익히고 있던, 또 고도의 훈련을 받고 있는 직업군인 출신 장교들과 하층민 출신 하급 장교계급들을 끌어쓴다는 발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이 문제 해결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의 관리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황제의 중앙명령을 하달할 관료들의 숫자도 부족한 상황에서, 시간은 없고 원로원이 온전히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이 편이 나았던 것이다. 일단 직업군인 출신 장교들과 병졸 출신의 정규군 베테랑들은 기본적으로 입대 전부터 간단한 셈법과 모국어인 라틴어 읽고 쓰기를 기본 바탕에 깔고 있었던 행정가들이었다. 즉, 로마군 병사들은 그리스어 실력이 부족하거나 서툴 뿐, 이 자리를 당장 맡아도 될 인재풀로 무척 유용했다. 더욱이 속주 주둔병사 중 백인대장 이상급들은 군행정과 민정에 당장 투입할 법지식과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어, 무척 유용한 원로원 대체자원인데다 의석까지 주면 군단장 지휘관으로 활용하기도 편했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이렇게 원로원 의석을 받고 원로원에 편입된 이들이 늘어가게 되는데, 그들은 대개 도나우 강 이남을 지키는 달마티아와 판노니아 출신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분명 원로원 입장에선 불쾌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대 원로원을 대변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정부의 실세인 디오 카시우스는 "그래봤자 그리스어도 못하고 귀족예절도 모르는 천박한 자들이 아니냐"고 이를 대차게 깠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원로원 협치 통치는, 그가 내치에서 훌륭하다고 평가받고 원로원과 사이가 좋더라도 사실 절반의 성공만 보장하는 통치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데르와 외조모 마이사, 어머니 마마이아는 이런 현실을 몰랐는지, 아니면 현실적인 이유로 하지 못했는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방식을 활용하지 않았다. 이는 친정 이후에도 비슷했기에, 병사들의 권리를 향상해주고 노력을 했음에도 알렉산데르는 군대의 지지를 온전히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 알렉산데르는 옛 공화정의 정치 문화를 공유한 이탈리아와 로마, 늘 이리저리 치이면서 소외받고 있다고 느끼는 서방의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부와 권력을 쥐고 있지만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그리스와 동부 및 푸닉 사이에서 제국의 통일을 유지할 역량도 다른 선대 황제들보다 확실히 부족했다. 하여 원로원의 협력 속에서 그가 성공하기 위해선, 원로원의 질적 향상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때 원로원은 보수화되고 귀족적일 뿐 질적으로 훌륭한 인재도 부족하고 이를 대체적인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다. 도리어 원로원은 문무를 겸비한 이들이 줄어들고 있고, 꾸준히 정원을 유지하며 충원을 반복함에도 세베루스 왕조 초창기처럼 황제의 단점인 군대 지지 부족을 회복시킬 인재 충원이 부족했다. 당연한 말인데, 세습 원로원 인사들은 황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만한 이들이 부족했다. 이는 황제 곁도 상황이 비슷했다. 섭정 마이사와 어머니 마마이아 곁엔 디오 카시우스, 울피아누스, 파울루스 등으로 대표되는 원로원 인사 내지 법률가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중 문무를 겸비한 전통적인 엘리트인 디오는 마마이아의 견제와 울피아누스 실각 이후 반강제로 은퇴한데다 나이도 고령이라서 알렉산데르를 온전히 지켜줄 수 없었다. 이는 원로원 상황도 비슷해, 말빨 좋고 군사령관, 총독, 정무관으로 모두 능력이 출중했던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비리우스 에그나티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발비누스 같은 이들은 애시당초 원로원 중심적인 입장이며 협력자일 뿐, 온전히 세베루스 왕조를 지지하면서 목숨을 다할 존재가 아니었다.[29] 즉, 노른자 인재로 쓸만한 세습 고위귀족들은 여러 속사정으로 조상들이 그랬듯 합종연횡으로 자신과 가문만을 생각해 움직였다. 이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원로원에 입성한 신흥귀족들[30]도 비슷했다. 즉, 알렉산데르의 협력자들인 원로원 중진들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평소처럼(더 정확히 설명하면 공화정, 원수정 초 귀족들처럼) 합종연횡으로 제 이익에 따라 움직였던 집단이었고, 그들의 협력도 제한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알렉산데르 정부는 원로원과 사실상 운명공동체 전략으로 권위를 지켰음에도, 황제 쪽과 원로원 내부는 여러 이유로 따로 노는 상황이 펼쳐졌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점 쇄신에서 한계가 되고, 도돌이표처럼 알렉산데르의 취약성을 부각시키면서 다시 군대의 지지가 하락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더 큰 불행은 군대와 민간 정부 모두 속주민들의 중요성과 경제발전이 중요해지고, 국경 수비대와 각지의 군대와의 연합 속주 통치가 필요해진 상황이 이 무렵부터 펼쳐진 것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원로원과 관계만 좋으면 좋은 황제 소리를 듣던 과거와 달리, 로마 황제는 반드시 국경 수비에서 그 능력을 보여주고 군대를 활용해 속주통치에서도 지역 재건과 발전에서 그 능력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런데 알렉산데르는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을 뿐 그 이상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군대와 속주민들에게 그는 본래부터 유약한 이미지였던 상황에서, 원로원 귀족적이라고 비난 받았다. 그리고 이런 한계와 실패는 시리아와 카파도키아에서 벌어진 페르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게르마니아 일대에서의 고트족 방어 실패로 세베루스 왕조와 알렉산데르의 몰락으로 끝나고 만다.
4. 여담
- 젊은 시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연상될 정도로, 본인의 절제된 생활 속의 언행일치를 모토로 삼고 이를 실천한 황제였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근거리에서 그를 교육한 스승들과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따라서 알렉산데르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검소된 생활 습관을 유지하면서 불필요한 지출을 하지 않았고, 국가의 공공도덕을 중요시하면서도 이를 황제부터 실천하는 자세로 모범을 보였다. 또한 그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베풀라"라는 문구를, 이를 모든 공공 건물에 새겨넣고 황궁 곳곳에도 이 문구를 새기게 한 뒤 이를 성실히 실천했다. 따라서 여타 로마 황제들과 달리, 매우 관용적이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한 언행으로 로마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 알렉산데르는 매일 아침마다 본인의 조상, 수호신 유피테르, 여신 로마에게 개인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임자 엘라가발루스와 같은 종교적 광기를 무척 경계했고, 로마 제국의 모든 종교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위한 회랑 건립도 고려했고,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을 무작정 탄압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재위기간 내내 그들이 로마시민으로서의 책임만 다해주면 도리어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했다. 즉, 그는 여타 다른 로마황제들과 비교해 다민족 국가인 로마 제국의 다양성을 폭넓게 허용해준 황제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다신교 사제들은 물론,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에게도 관대하고 포용적이라고 칭찬을 받았고, 이 문제로 잡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 로마 병사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줬고, 재위 기간 내내 병사들의 복지 및 처후 개선에도 많이 신경써준 황제였다. 그가 해준 병사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나 권리 신장 등을 보면, 그가 암살된 이후 막시미누스를 경험한 병사들이 왜 그를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알렉산데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 로마사병의 자녀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 조치를 보다 전문적으로 강화해, 혼외자들의 재산상속도 인정했다. 또 병사들이 상관에게 재산이 부당하거나 징계를 이유로 강탈당하는 것도 보호해주고 이를 법적 권리로 부여했다. 이외에도 그는 일반 병사와 가족들이 노예를 소유해 거느리고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처우 개선은 "곱상하고 온화한 귀족" 이미지와 "나약한 겁쟁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켜, 병사들이 황제를 얕잡아보고 황제의 권위가 살지 않은 이유가 됐다. (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좋아하는 부류는 상남자 스타일의 카라칼라 같은 황제였다.)
- 후임자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시해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는 꽤 악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여자형제 테오클리아의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고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주장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이고 이 고대 기록이 허구의 위서 수준이라서 의문이지만 일단 이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장남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와 테오클리아가 약혼 후 결혼식을 올리려고 할 당시, "시아버지가 될 막시미누스가 멍청해서 절대 안된다. 우리와 격이 다른데, 왜 멍청한 인간의 아들에게 보내느냐"고 크게 반대하면서,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를 설득해 그 결혼을 취소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테오클리아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의 결혼은 최종무산됐는데, 이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테오클리아의 혼처를 다시 구해 오래된 로마 귀족의 자제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에 능통한 메살라[31]와 결혼시켰다고 한다. 실제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테오클리아는 218년 황제의 명으로 남편, 시아버지와 함께 시리아 에메사에서 살해됐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따르면 218년 마크리누스의 명으로 살해됐다고 주장되고 있어 진짜인지 야사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며, 테오클리아와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막시미누스의 장남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의 출생일도 218~220년 사이라서 진짜인지는 아직까지 의문부호가 붙는다. 하지만 테오클리아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누나로 나이가 많고, 카라칼라 생전부터 여러 명사들과 어울려 두각을 나타낸 것이 사실이라면 또 이 당시 이들 남매가 세베루스 왕조가 일시 단절되면서 에메사로 사실상 귀양된 점을 생각해보면, 막시미누스 아들과의 파혼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마크리누스의 명에 따라 살해됐다는 주장만은 진실일 수 있다고 한다.[32] 물론 전임 황제이자 세베루스 왕조 최악의 암군인 엘라가발루스와는 더한 악연이었는데, 엘라가발루스는 "넌(막시미누스) 장사로 소문이 났던데 그럼 얼마나 많은 여자랑 밤을 지새울 수 있냐?"는 성희롱성 질문을 던져, 그 말에 환멸을 느낀 막시미누스가 잠시 전역을 하고 트라키아에 낙향할 정도였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알렉산데르의 취미는 매우 건전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스트레스를 푼 수단은 강아지들이 어린 돼지들과 어울려 놀게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 로마인들에게 마마보이로 불려, 어머니 마마이아와 함께 "알렉산데르 마마이아"라는 이름의 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여기에는 그가 본인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조용히 침묵하며 지켜봤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무언가 무책임하고 이런 상황을 외할머니, 어머니에게 떠넘긴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 공부에 힘썼고, 신사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온화한 로마 귀족 청년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는 어릴 때부터 매일 맨손 격투 훈련과 레슬링 훈련을 받고, 성실하게 훈련해, 그 실력이 전문 선수 수준으로 매우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이는 그가 사후 병사들에게 재평가된 이유가 됐다.
- 형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가 있었다. 그는 이복남매로 추정된 테오클리아와 달리, 친형제였는데, 알렉산데르보다 연장자임에도 외할머니, 어머니에게 엘라가발루스 대체자로 낙점되지 못했다. 그 역시 동생과 마찬가지로 외할머니 집안에서 대대로 신봉한 엘라가발 숭배엔 관심이 없었다. 알렉산데르의 형은 어린 나이부터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 사제이기도 했는데, 어머니 마마이아가 카라칼라에게 황녀 직위를 받은 211~212년 사이에 이 직에 임명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동생과 달리 어머니에게 통제받지 않았고, 어머니가 아우구스타가 되고 동생이 황제가 됐음에도 직위를 남용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어머니, 동생이 암살될 때까지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 사제임에도 이탈리아나 로마로 오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을 제국 동부에서 살았다고 한다.
[1]
과거에는 남동생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다수에게 알렉산데르의 형으로 평가받는다.
[2]
과거에는 여동생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보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이 신빙성 있어, 현재는 알렉산데르의 이복누이이자
율리아 마마이아의 수양딸로 보는 경우가 많다.
[3]
로마에 위치해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 황족들의 무덤 중 아우구스투스 영묘, 하드리아누스 영묘 다음으로 크기가 크다.
에트루리아식 굴식 돌방무덤 형태를 빌려 건설된 까닭에
반지의 제왕의
호빗
골목쟁이네 빌보의 집처럼 생겼다. 다른 영묘와 달리 그 모양이 가장 원형에 근접하게 남아 있다.
[4]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좌우명이자 국정 목표다. 알렉산데르는 재위 기간 동안 건설하거나 보수한 모든 공공건축물과 황궁 안에 이 문구를 새기게 했다.
[5]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율리아 마마이아
[6]
추정이다. 여동생으로 주장된 여자형제 테오클리아가 누나, 혹은 남동생으로 알려진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가 형이라면 둘째 혹은 셋째가 되기 때문이다.
[7]
시리아의
에메사 왕가
[8]
부친의 이름 대부분을 그대로 이어받은 남동생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의 경우에도 형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처럼 외가와 친가의 이름에서 각각 이름을 따왔다.
[9]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고대기록과 달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남자형제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는 로마 사제회인 아르발레스 형제단 사제였다고 한다.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법 개정 후에도 엘라가발루스보다 나이가 많아 현실적으로 양자가 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고, 어릴 적부터 사제 수업을 받으며 신관으로 살고 있는 터라 대외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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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필사를 통해 남겨진 고대 기록에서는 종종 제국이라고 한 것처럼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황제, 황족, 원로원은 그들을 제국이라고 하지 않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처럼 그들 국호에 따라 대개 공화국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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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흐름은 후대에까지 계속되어, 실질적 근위대의 역할은 엑스쿠비토레스나 스콜라이 팔라티나이로 넘어가고, 라틴어 원어로는 같지만 최상위 지방장관 정도로 의미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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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갑내기 소꿉친구로
명상록 보급에 기여한, 로마의 오래된 귀족가문 태생의 원로원 의원 세이우스라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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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가발루스황제를 지칭한 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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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 카시우스가 자신의 책에서 밝히듯이, 그는 분명하게 울피아누스가 살해된 시점에 대해 총독으로 있을 때에 들어 확실치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울피아누스가 암살된 시각은 실제로 밤이 아닌 정오의 한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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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분노를 키운 것에는 4일의 유혈 사태 당시에 건물에 불이 난 일이 벌어진 뒤, 병사들과 항의하던 민중들이 결국 화해한 일까지도 울피아누스가 확대 해석하면서, 병사들에게만 과도하게 책임을 물린 일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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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면, 울피아누스의 조치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는 사탕발림이었다. 황제 자문 회의로 번안되는 콘실리움이 하드리아누스 이래 양지화되었다고 해도, 이 기구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원로원을 거수기로 만들어 원로원에게는 밀실정치의 상징과 같았다. 그러니 원로원은 전통적으로 이 기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욱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 원로원 의원들의 콘실리움 전원 합류 조치는, 모양새는 괜찮아도 실상은 원로원 회의 및 의결 내내 콘실리움에서 내린 결정을 통보하면서 공개찬반투표하는데다 책임은 원로원에서 지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각자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원로원에서 호불호는 자신과 가문의 위치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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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그 누구도 지금 당신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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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는 로마 원수정 체제의 고질적 문제점이었고, 황제가 나름 정상적인 성장을 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꾸준히 경력을 쌓았다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알렉산데르가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휘둘려온 유약한 황제이다보니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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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프닝은 공화정 말기의 내전 때 카이사르의 심복 군단이 10 군단병들이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파업을 일으켰을 때 카이사르가 그들에게 대답할 때 평소대로 "콤밀리테스(전우)" 라고 부르지 않고 "시민(퀴리테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그렇게 원하면 제대시켜 주겠다"라고 한방 먹여서 알아서 기어들어온 에피소드를 멋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피 본 케이스다. 카이사르야 뛰어난 장군이며 전장에서 군인들과 10여 년 동안 같이 구르면서 끈끈해질 때로 끈끈해진 사이이고, 10군단은 평소 카이사르의 최정예 군단으로 알려진 터라 그들을 잘 알기에 "시민 여러분(퀴리테스)" 라고 불러서 멘붕시킨 것이므로, 똑같은 행동을 했어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하긴 지 엄마 컨트롤도 못하는 놈이 무슨... 한마디로 카이사르는 모든 면에서 만렙을 찍은 인물이고 장군으로서 카리스마는 세베루스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고 또 당시 상황은 민중파(포퓰라테스)인 카이사르가 원로원파(옵티마테스)인 폼페이우스 및 원로원 의원들과 한참 전투 중이었는데 거기서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탈했다고 한다면 전리품이 물건너가는 건 당연하고 로마에 돌아가면 욕을 바가지로 쳐먹고 당연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다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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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국력이 로마보다 열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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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수스를 때려잡은 카르헤 전투에서 수레나스가 이끈 카타프락토이가 고작 1천 명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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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독이 교체된 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집권한 235년, 새황제의 인사조치를 원로원과 새 집정관이 지지한 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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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자, 후임 황제였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세베루스 왕조와 관련된 이들이 기득권을 내세워 로마를 망쳤다. 모두 죽여라"라고 명령하면서 자경단 비슷한 조직까지 만들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명령을 내렸다. 하여 로마에 있었던 오리게네스와 기독교 학자 외의 이교도 학자, 지식인 등은 피바람이 몰아친 로마를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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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디아누스는 젊은 시절과 중장년기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말년은 고향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보냈던 사람으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페르시아 전쟁이 승리가 아닌, 졸전임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체험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 대해 내정적인 부분에서는 높게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은 매우 이중적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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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재위기간 내내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을 탄압하거나 불이익을 주기보다는, 로마인으로서 누릴 권리를 지켜주고, 그들의 종교적 자유와 생각을 폭넓게 인정해준 것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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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는 자신을 ‘시리아인’, ‘레반트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최대의 수치로 여기며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계를 강조하고, 자신이 메텔루스 씨족의 후손이자 태생부터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가문의 족보까지 만들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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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자신에게 군사적인 능력이 없자 바로 아그리파에게 군대를 맡기고 나서지 않았으며, 클라우디우스 1세는 브리타니아 원정시 후방에서 2주일 깔짝 구경하고 돌아가 버렸다. 네로 황제 역시 직접 출정을 안하고, 장군들에게 맡겼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황제가 직접 나가지 않고 총독들에게 맡겨도 군인들이나 시민들에게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물리적인 내전 이후에 등장한 플라비우스 왕조부터는 황제들이 직접 전선에 나가 싸우는 일이 황제의 중요한 업무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군사적 능력이 부족한 것이 결국 파멸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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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폐기했다는 것보다는, "군 복무를 한 사람에게 해당 관직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을 그리스어 교육자, 문예 사업 후원자, 기부액이 많은 부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여한다는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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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후일 황제가 되는 발비누스는 카라칼라의 은덕을 입어 승승장구한 귀족인 터라, 적어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생전까진 세베루스 왕조에 적극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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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고르디아누스 가문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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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로마 귀족들 중 일부는 먼 조상의 이름이나 오래된 귀족들의 코그노멘도 사용했다. 따라서 풀네임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이 메살라라는 귀족 자제가 발레리우스 가문 내의 메살라 가 태생이 맞느냐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추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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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클리아가 이복누나가 아니라는 반론도 많아, 테오클리아가 누나일 것이라는 주장 역시 신빙성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