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황제 참칭자
프로코피우스 PROCOPI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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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프로코피우스 Procopius |
출생 | 326년 |
로마 제국 킬리키아 | |
사망 | 366년 5월 27일 (향년 40세) |
로마 제국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65년 9월 26일 ~ 366년 5월 27일 (8개월) | |
전임자 | 발렌스 |
후임자 | 발렌스 |
배우자 |
아르테미시아 파우스티나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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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반란자,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황족. 발렌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당했다.2. 생애
326년경 킬리키아의 대표적인 상업, 항구도시 코리쿠스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름은 모른다. 다만, 모계는 아나톨리아 태생의 그리스인이 확실하며, 프로코피우스의 이름을 보건대 부계 역시 그리스 혈통으로 추정된다.외할아버지 율리우스 율리아누스는 딸 바실리나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동생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에게 시집보냈던, 저명한 그리스인 원로원 의원이자 근위대장이다. 그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외할아버지로, 고트족 출신 해방노예이자 수사학자 마르도니우스를 해방시켜준 사람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프로코피우스는 이모 바실리나의 아들 율리아누스와 이종사촌이 되는데, 외조부가 프로코피우스의 고향이 근거지인 것을 생각해보면 어릴 적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고 그리스-로마 신화를 신봉했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358년경 콘스탄티우스 2세의 지시에 따라 루킬리아누스와 함께 사산 왕조에 사절단으로서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361년 11월 3일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망한 후, 새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자신의 친척인 프로코피우스를 중용했다. 363년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를 정벌할 때 1개 군단을 맡아 북쪽 진로로 진격하여 티그리스 강을 건너 아르메니아 왕국의 아르사케스 왕과 합류한 뒤,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에서 황제와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니시비스와 상가라 사이의 틸사파타에서 본대와 합류했을 때, 율리아누스는 이미 전사했고 본대는 패주하는 중이었고, 요비아누스가 새 황제로 추대되어 있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죽기 전에 프로코피우스에게 황제의 의복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그에게만 설명했다고 한다. 이후 요비아누스가 즉위하자, 프로코피우스는 재빨리 새 황제에게 의복을 넘겨주고 군사령관 직을 사임한 후, 가족과 함께 영지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청했다. 요비아누스는 기꺼이 허락했고, 프로코피우스는 카이사레아의 사유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반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율리아누스가 프로코피우스에게 황제의 의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퍼지자, 요비아누스가 율리아누스의 프리무스 노타리움을 처형했다는 걸 알고 있던 프로코피우스는 공포에 사로잡혀 휘하 부대를 요비아누스에게 인계한 뒤 카이사레아로 도주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요비아누스가 그의 군 사령관직을 박탈한 것 외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요비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던 중 8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공동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는 프로코피우스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프로코피우스는 가족과 함께 흑해로 도망쳐 케르소네소스 타우리카에 숨었다. 그러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지자들이 찾아와 발렌티니아누스가 서방으로 가고 발렌스가 사산 왕조와 맞서기 위해 출정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비어있으니, 어서 와서 황제가 되라고 꼬드기자, 그는 즉시 상선을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여, 스트라테기우스라는 인물의 집에 은신했다. 이후 민심을 가만히 살피던 그는 사람들이 발렌스의 장인이자 알비아 돔니카 황후의 부친인 페트로니우스의 과도한 탐욕에 반감을 품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요비아누스의 궁중 환관이었다가 해고된 에우제니우스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한 2개 군단을 매수하고 노예와 의용병을 무장시켰다.
365년 9월 27일, 그는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감금하며 아나스타시아 목욕장에서 황제를 칭했다. 그는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기 위해 발렌스의 탐욕스런 장인 페트로니우스를 들먹이며 시민들의 분노를 부추겼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미망인 파우스티나와 어린 딸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를 이용하여 정권의 쇼케이스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막대한 재물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프로코피우스는 전 트라키아 지방을 장악하고 많은 유력 인사들을 가담시켰다. 이보다 전 황제로 등극한 발렌스에 의해 축출된 요비아누스 휘하 가신들은 발렌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프로코피우스에게 가담했다.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반란 소식에 경악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렌스는 프로코피우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고려했고 심지어 자살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하들의 간청으로 반역자와 맞서 싸울 용기를 얻은 그는 요비아와 빅토르스 군단을 파견해 프로코피우스를 토벌하게 했지만 오히려 그들 마저 프로코피우스의 회유에 넘어갔다. 프로코피우스는 뒤이어 루미탈카 장군을 파견해 니케아를 장악하게 했으며 비티니아 역시 수중에 넣었다. 프로코피우스의 친척인 마르켈루스는 키지코스를 함락하고 헬레스폰토스까지 지배했다. 또한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트족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반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발렌스가 경험이 많고 충성심이 뛰어난 장군들이 이끄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자 반란군 내부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반란에 가담했던 장수들은 발렌스에게 투항하거나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프로코피우스 역시 티아티라 전투와 나콜리아 전투에서 부하들의 배신으로 패배한 뒤 생포되어 366년 5월 27일에 나무를 구부린 사이에 묶은 다음 그 나무를 다시 피면서 찢겨 죽었다. 그의 머리는 검사를 위해 트리어에 있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그를 배신한 장군들 역시 톱에 썰리는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의 아내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아들로는 같은 이름의 프로코피우스가 있었다. 다행히 아들은 아버지가 반역죄로 처형된 이후에도 연좌제가 보편적이지 않은 로마 제국의 관습 그대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아들 프로코피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계속 살았고 가문은 흥성했다. 프로코피우스의 손자 중 한명이 5세기에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케 밀리툼을 역임한 프로코피우스인데, 손자 프로코피우스는 플라비우스 안테미우스의 딸과 결혼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 안테미우스를 낳았다. 그리고 안테미우스는 마르키아 에우페미아와의 사이에서 딸 알라피아, 아들 안테미올루스,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로물루스를 뒀다. 이중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 마르키아누스, 로물루스는 479년 제노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들은 조상 프로코피우스와 달리 이사우리아로 일시 추방되거나 로마로 도피했다. 후일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비호 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 후 515년 집정관 자리에 올라 권세를 유지했다.[1]
[1]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그에게 본래 근위대장 자리를 주려고 했는데, 정중히 거절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집정관 자리를 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