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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41대 황제
카루스 CAR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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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누메리아누스 카루스 (Marcus Numerius Carus) |
출생 | 222년 |
로마 제국 갈리아 나르보 | |
사망 | 283년 7월 (향년 61세) |
사산 제국 티그리스 강 너머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82년 9월 ~ 283년 7월 (10개월) | |
전임자 | 프로부스 |
후임자 | 누메리아누스 |
자녀 | 카리누스, 누메리아누스, 아우렐리아 폴리나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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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41대 황제. 즉위 전 본명은 마르쿠스 누메리아누스 카루스(Marcus Numerius Carus), 황제 즉위 후 취한 풀네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루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Carus Augustus)이다.원로원 의원으로 프로부스 황제의 근위대장을 맡던 중, 페르시아 원정 중인 병사 중 일부가 프로부스 황제를 282년 8월에 시해하자 변란을 수습하고 황제로 옹립됐다. 즉위 직후, 전임자 프로부스가 추진 중인 페르시아 정벌에 착수해 승승장구했으나 283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카루스는 222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카루스와 그 일가를 폄하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동료들의 정통성을 높이려고 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카리누스의 아버지인 카루스가 어쩌면 로마인이 아닐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믿을 수 없는 기록에 따르면, 카루스는 일리리쿰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일리리아인으로 로마에서 일찍이 이주했다는 말도 있고, 판노니아인 부모를 뒀거나 아예 옛 카르타고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돈다고 한다. 아울러 카루스의 고향이 밀라노라는 이야기도 도는데, 당사자가 워낙 고향을 중구난방으로 소개해 어디에서 굴러 먹다가 왔는지 혈통도 알기 어렵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이 믿을 수 없는 사서에 따르면, 카루스는 로마인이 아니지만 로마인인 척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이 워낙 뒤죽박죽이고, 이 책 안에 실린 카루스가 킬리키아 총독 시절 보낸 서한은 조작된 흔적이 가득하다. 가령, 카루스의 풀네임부터 제호에서 임페라토르 카아사르를 빼놓고 총독 시절 쓴 양 편집해놓고 자기 혼자 떠드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카루스가 보낸 서한에 따르면, 그는 옛 유니우스 가문의 후예이며 부모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오래된 로마인이라고 고백한 내용도 적혀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현대 학계에서는 같은 시기에 저술된 믿을 수 없는 또 다른 사서《황제의 전형(에피토메 데 카이사리부스)》속의 카루스 기록을 주목 중이다. 이 저서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찬양하기 위해 조작한 위서로 유명한데, 일부 주장은 사실이라서 거를 수는 없는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카루스는 나르보에서 태어난 로마귀족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은 카루스가 갈리아의 도시 중 하나인 나르보[1]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있고, 그가 훌륭한 원로원 귀족 가문 출신이 분명하다고 추정 중이다.
애당초 '카루스=일리리쿰 출신'이라는 가설은 조제프 쥐스트 스칼리제르[2], 에드워드 기번이 고대 기록 문구를 그대로 수용해 확정한 주장인데다, 이들이 만든 소위 일리리아 황제 이론[3] 자체는 2000년대 이르러 이탈리아 로마와 티볼리,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터키, 그리스 일대에서 수많은 로마 시대 비문 발굴과 금석문 해석으로 반박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4] 따라서 최근에는 확정적으로 카루스가 나르보 태생의 갈리아 출신 로마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공적을 쌓았으며 출세 과정은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그가 즉위 전까지 일반병졸로 입대해 군경력을 쌓고 즉위한 케이스가 아닌, 상류층 자제 내지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의 출세가도를 밞았고, 대부분의 삶은 로마에서 보냈다는 기록이다. 카루스는 일찍이 가족들과 함께 로마로 이주해, 아주 어릴 적부터 로마에서 고대 상류층들이 받은 문학, 법률, 철학, 예술 등을 배웠고, 당시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역사가에게도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그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던 원로원 세습의원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렇지만 장남 카리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때, 카루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유실돼 알기는 어렵다.
즉위 전까지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민간과 군대 모두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다양한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서방의 게르만족들을 상대로 전투도 치른 듯 하다. 허나 카루스가 어떤 공을 세웠는지는 기록이 미미해 알 수 없다. 다만, 카루스가 40여 년 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내면서 민간과 군대를 포함한 여러 직책을 수행해,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그는 원로원 의원으로 오래 활동하면서도 순수군인 출신 황제들과 관계가 원만했고, 그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두루 민간,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이를 증명하듯, 프로부스 피살 소식과 카루스 옹립 소식이 원로원에 전달될 당시 그는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에게 엄격하고 공정하며 절제력이 있다고 평가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 일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도 비슷하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1세때 참여해 보완한 저자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때 지어내거나 폄하한 내용을 수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따르면 프로부스 황제는 원로원에게 이렇게 서한을 보내 카루스를 극찬했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헌신적인 원로원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카루스처럼 공공사업에 힘쓴 이가 더 많았더라면 우리 공화국은 참으로 행복할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기쁜 마음으로 이 고풍스러운 인물에게 투표를 하여, 공적 비용으로 기마 동상과 그를 위한 집을 대리석으로 지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282년 프로부스 황제에게 신임을 받아 원로원 의원임에도 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카루스는 여러 외적과 전투를 치르면서 내치에도 최선을 다한 황제를 보필하며, 로마 제국 재건과 각종 원정에서 두루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에도 참전해 시르미움으로 동행했다.
2.2. 황제 즉위
282년 8월, 프로부스가 시르미움 근교에서 진행된 토목 공사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폭동에 휘말려 참혹하게 살해됐다. 이후 근위대와 원정군은 시르미움에 머물던 근위대장 카루스를 추대해 황제로 선포했다.새 황제 카루스는 즉위하자 마자 프로부스를 살해한 병사들을 처형하고 프로부스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그의 즉위는 본인이 제위를 노리고 음모를 꾸며 벌어진 일도 아니고, 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진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즉위 당시 카루스는 전임자보다 6살 많았는데, 순수 군인 출신 황제들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와 달리 무려 40여 년간 원로원 의원 생활을 했고 근위대장에 올라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카루스는 즉위 후 자신이 황위에 오른 사실을 원로원에 통보하면서도 로마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프로부스가 미처 추진하지 못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 먹었다.[5]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기 전 두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줬다. 그리고 카리누스에게 갈리아 지방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내정을 정비하게 했다. 반면에 작은 아들 누메리아누스는 원정에 동참시켰다. 이후 카루스는 사르마티아족을 정벌해 일리리아의 안전을 확보했다. 약 1만 6천 명의 사르마티아족이 죽었고 2만 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283년 페르시아와 로마 간의 변경 지대에 도착한 카루스는 페르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 이에 페르시아의 왕중왕 바흐람 2세는 평화 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왕중왕이 보낸 사절단이 로마군 진영에 도착하여 황제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자, 병사들은 풀밭 위에 앉아 있던 한 군인에게 안내했다. 그 군인은 말라 비틀어진 베이컨과 딱딱한 콩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남루한 보라색 외투만이 그가 황제라는 걸 알려줬다.
카루스는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면서 페르시아 왕이 로마 제국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페르시아는 이 대머리처럼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거라고 말했다. 사절단은 공포로 몸을 떨며 물러갔고, 카루스는 곧바로 자신의 위협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이끄는 로마군은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하고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카루스는 여세를 몰아 티그리스 강까지 진군했고 곧 강을 건너 페르시아를 정복하기로 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졌고 군대의 대부분은 인도 접경 지대에 붙들려 있어서 로마군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카루스는 뜻밖의 최후를 맞이한다.
2.3. 갑작스러운 사망
283년 중순, 카루스는 티그리스 강을 도하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완전 정복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돌연 병에 걸린 그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병영에 심한 폭풍우가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가 쉴 새 없이 쳐서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 갑자기 엄청나게 큰 천둥소리가 들려오더니 황제의 천막이 번개에 직격되어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는 곧 진압되었으나 황제의 천막은 이미 불태워졌고 카루스는 사망한 뒤였다. 그의 사인은 낙뢰사로 기록되었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모가들이 폭풍우가 심한 틈을 타서 황제를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평가
짧은 재위 기간동안 대단한 군사적 능력을 보여줬고, 인품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아들 카리누스로 인해 평가가 박한 황제다. 카루스는 일생동안 엄격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예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프로부스 사후 즉위하는 과정에서 원로원에게 로마 귀환 대신 원정을 계속하겠다는 것을 드러낸 부분, 아들 카리누스 부부가 워낙 평이 안 좋은 까닭에 원로원에게 즉위 직후 오만하고 탄압적 행동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타키투스와 프로부스 시대 동안 두 황제가 취한 원로원에 대한 호의적 태도, 원로원 권위 보호조치와 반대로 반대파에 대한 강경한 행동 탓에 프로부스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오해도 샀다고 한다. 물론 이 오해 중 일부는 장남이 디오클레티아누스와의 내전 중 암살되고 몰락한 이유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평이다. 어쨌든 아들 카리누스가 폭군인데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까닭에, 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측근들의 정치적 명분 때문에 사후 후대 로마인들에게는 폭군이라는 오명까지 들었다.
[1]
오늘날의
프랑스 나르본
[2]
유실 직전인
에우세비우스 연대기를 번역하고 로마, 페르시아 시대의 고서 번역과 연구에도 큰 업적을 세웠다.
[3]
군인황제시대 황제들 대부분은 일리리아 출신이나 하층민이라는 주장으로,《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기록이 100% 맞다는 전제 아래 펼쳐진 주장이다. 일리리아의 모든 황제들은 하층민이나 훈련을 받고 유능한 군인들이었으며, 갈리아와 동부 속주 일대가 이들 손에 안정을 찾아 4,5세기까지 발칸 출신들이 황제가 되고
테오도시우스 왕조 이래 제국이 유지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4]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속에서 그동안 발칸 반도 출신으로만 알려진 데키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의 경우, 이들이 일리리아와 연관있어도 실은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주장이 점점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데키우스, 프로부스의 경우, 데키우스는 원로원 의원이며 프로부스는 순수 군인임에도 여러 정황과 증거상 최소 기사계급 이상의 상류층 자제일 확률이 높아 일리리아 황제 이론의 주요 주장 중 몇가지는 유적 발굴 전부터 의문을 낳았다. 더욱이 푸피에누스로 유명한 막시무스나 믿을 수 없는 고대기록 덕분에 오현제 후손으로 알려진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 가계 역시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발굴된 이들의 묘비, 개인비석으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5]
카루스의 결정은 황제 본인의 뜻도 있었고, 그를 옹립한 원정군 수뇌부들의 요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로원 입장에선 옛 동료였던 카루스가 일방적으로 “지금부터 내가 황제가 됐고, 원정은 계속 할 테니까 서방을 담당할 장남에게 협력이나 잘해라” 식으로 통보한 태도에 화를 냈고, 이는 전임자 프로부스가 항상 원로원을 배려한 행동과 달라서 카루스의 평가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