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눌리누스 라틴어: Gaius Anull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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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이름 |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 Gaius Annius Anullinus |
생몰년도 | ? ~ ? |
지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국가 | 로마 제국 |
종교 | 로마 다신교 |
아버지 | 아눌리누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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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황제시대~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 어린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일가를 후원한 아눌리누스의 아들이다.
선대부터 클리엔텔라 사이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뒤, 그의 정책을 돕고 아프리카 총독으로 파견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탄압 칙령을 맡았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직책을 보장받고 대제를 도왔다.
2. 생애
로마인들이 푸닉이라고 부른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해안에 근거지를 둔, 이탈리아 이주민 출신의 로마 귀족이다. 아버지는 미래의 황제가 될,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낳은 부모를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이들에게 생활 기반까지 마련해준, 부유하고 유덕한 원로원 의원 아눌리누스다. 3세기의 전형적인 로마 귀족 이교도였다고 한다.아버지가 해방노예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부모를 후원했고, 젊을 적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에 입대한 뒤 프로부스, 카루스, 누메리아누스 아래에서 고속승진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 역시 디오클레스 시절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일찍부터 클리엔텔라 관계로 많은 도움을 서로 주고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배경에도 초기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본격적으로 기록상 등장한 것은, 선대부터 클리엔텔라 관계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재위에 있던 서기 295년 눔미우스 투스쿠스와 집정관에 이름을 올렸을 때다. 이후, 그는 302년 7월 1일부터 305년 7월 1일까지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총독으로 파견됐다.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된 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도 처벌 칙령을 시행하고, 속주 전역을 순회하면서 사법 청문회를 열고 법전을 집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티비우카의 주교 펠릭스를 처형하도록 명했는데, 그 이유는 펠릭스가 기독교 성경의 사본을 당국에 넘기는 것을 거부해 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펠릭스 주교가 순교한 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아비티나로 이동. 이곳의 기독교도들이 제대로 처형되는지 감독하고, 타가라의 크리스피나가 로마 전통 신들과 조상들의 제사를 거부한 것이 기소되자 그 재판을 주재한 다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처형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이후 투부가에서 기독교 처녀를 처형시키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학자들은 이 처녀가 이곳에서 순교한 성녀 페르페투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렇게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강경한 기독교 탄압을 수행했는데, 그럼에도 법령을 집행하는데 있어,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임하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서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그 칙령을 따랐고, 당시 로마 제국에서 많은 이들이 믿고 있던 기독교도들과 속주민들을 배려해 그들을 설득하고 서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즉, 평화적으로 아프리카 속주와 푸닉 일대를 관할하면서 열성적으로 기독교 탄압에 동참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도들을 처벌해 후일 그가 세운 기념물, 개보수한 공공 건축물, 비문은 강경 기독교도들의 표적이 돼 의도적으로 훼손됐다.
아프리카 속주 총독 임기를 마친 뒤, 이탈리아 로마로 귀환해 원로원 의원으로 복귀. 다음 해인 서기 306년 3월 19일부터 307년 8월 27일까지, 오늘날의 로마 시장에 해당되는 도시 장관에 임명됐다.
이때 그는 찬탈 형식으로 황제를 자처한 막센티우스가 낫다고 판단해, 세베루스를 버리고 막센티우스 정권 아래에서 로마와 이탈리아 행정과 사법, 치안을 도왔다. 그러다가 막센티우스에게 밀비우스 다리 전투 패배 하루 전, 총독으로 임명됐는데 둘째 날 콘스탄티누스 1세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콘스탄티누스를 도와 로마와 이탈리아의 혼란을 잠재웠다고 한다. 이 공로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의 직책을 거두거나, 숙청하지 않고 계속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이는 그가 젊을 적부터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의 공공 건축물 개보수를 위해 많은 기부를 했고, 막센티우스 통치 시기동안에는 디오 카시우스의 손자 혹은 증손자인 카시우스 디오를 포함한 12명의 동료 의원들과 함께 각각 40,0000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을 기부해 로마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이 로마 제국 재건에 힘쓴 대제에게도 큰 도움이 됐던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기독교 교회의 재산을 복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 박해를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카르타고의 주교인 카이실리아누스는 이를 공의회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를 사퇴시키거나 숙청하지 않고 그 자리를 보전시켜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