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비리우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 (Virius Nicomachus Flavianus) |
출생 | 344년 |
사망 | 394년 |
직위 | 일리리아와 이탈리아의 근위구장, 단독 집정관 |
대표작 | 연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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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세기 로마 제국의 정치인, 역사가. 에우게니우스와 협력하여 로마 다신교의 부활을 꾀했지만 394년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에우게니우스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동방 로마군에게 패배하자 자결했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은 <연대기>의 저자이기도 하다.2. 생애
344년 로마에서 볼루시우스 베누스토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원로원 계급의 영향력이 상당한 가문이었던 나코마치 가문의 일원이었다. 10대 때 결혼하여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를 낳았다. 일찍이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쿠아이스토르(quaestor: 재무관), 프라이토르(praetor: 고급 정무관), 시칠리아 총독을 역임하였다. 376년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아프리카 속주 대리자로 임명되어 도나투스파를 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서신에서 그를 도나투스파라고 지칭한 걸 볼 때, 도나투스파를 온정적으로 대했던듯 하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377년경 공직에서 해임되었을 것이다.388년 황실의 재무관이 되었고, 390년 이탈리아, 일리아, 아프리카의 총독으로 활동했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의문사한 뒤, 서방의 마게스테르 밀리툼을 맡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암살했다고 의심받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는 그해 8월 22일 친구 에우게니우스를 서방 로마제국의 황제로 옹립했다. 에우게니우스는 일찍이 동방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임명했던 행정관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선임했다. 다른 행정관직도 원로원 계급 출신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이때 플라비아누스는 일리리아와 이탈리아 근위구장에 선임되었고, 아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도 로마 관구장을 맡았다.
그는 오랫동안 기념되지 않았던 일련의 이교 의식을 공식적으로 수행했고, 아르보가스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보제 파울리누스의 <암브로시우스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성당에서 군마를 머물게 할 것이며, 에우게니우스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 성직자들을 군대에 입대시키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394년 에우게니우스와 아르보가스트가 테오도시우스 1세와 맞서기 위해 출진했을 때, 그는 단독 집정관이 되어 로마를 지켰다. 그러나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서방 로마군이 궤멸되고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모든 게 끝났다고 여기고 자결했다.
그는 생전에 로마의 역사를 다룬 <연대기>를 집필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제노비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를 다룬 내용은 그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를 집필한 그리스 역사가 필로스트라노스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도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