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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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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44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 Κωνσταντῖνος ὁ Μέγα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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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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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272년 2월 27일 | |||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나이수스[1] | ||||
사망 | 337년 5월 22일 (향년 65세) | |||
로마 제국 비티니아 니코메디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306년 7월 25일[2][3] ~ 337년 5월 22일 (3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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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제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Flavius Constantinus Pius Felix Invictus Augustus)[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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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피우스 펠릭스 빅토르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Flavius Constantinus Pius Felix Victor Augustus)[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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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통칭}}} |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 Constantinus I Magnus[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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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존호}}} | 로마 제국 초대 대제(大帝) | |||
{{{#FCE774 휘}}}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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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개선 칭호}}} |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307, 308, 314, 328) 사르마티쿠스 막시무스(323, 334) 고티쿠스 막시무스(328, 332) 다키쿠스 막시무스(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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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왕조}}} | 콘스탄티누스 왕조 | |||
{{{#FCE774 부황}}} |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 | |||
{{{#FCE774 모친}}} | 성녀 헬레나 | |||
{{{#FCE774 배우자}}} |
미네르비나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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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자녀}}} | 크리스푸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 | |||
{{{#FCE774 공치제}}} |
막시미아누스 리키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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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종교}}} | 로마 다신교 → 기독교 ( 로마 가톨릭) | |||
{{{#FCE774 참전}}} | 사두정의 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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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44대 황제이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함으로서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남긴 인물이다.사두정의 혼란을 종식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체제를 재정비하여 제국의 수명을 천년 이상 연장한 업적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서방과 동방의 통일된 형태로서 장기간 존속하지 못한 것은 내외부적 문제가 겹친 결과일 뿐이고, 당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 이후 1, 2세대 정도는 세계가 온전히 재건된 것으로 여겼다.[7]
로마에서 처음으로 대제(大帝) 칭호를 얻은 황제[8]이며, 동방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9] 및 경교에서 성인으로 시성[10]하기도 한 황제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누스 1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체제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정책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개혁정책을 지속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기조를 이어갔다고 평가된다.3.1. 행정 체계 개혁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아직 지역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민간행정과 군사행정 간의 분리를 확실히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문관인 프라이팩투스나 프로콘술이 군대를 이끄는 경우가 많았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더 철저히 분리하였다. 또한 이전까지는 불분명했던 각 관료들의 위계질서도 정리하였다.즉, 민정 관료 체제는 황제 ←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 ← 비카리우스 ← 프라이토르[11]란 형태로 일종의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중 로마의 프라이펙투스는 다른 지역의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보다 좀 더 높은 위상을 지녔다.
이러한 일은 군정 장교단에도 일어나는데, 황제 ← 둑스(임시직) ← 프로콘술 혹은 레가투스 ← 프라이펙투스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던 원수정시기 군정 체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프로콘술이 민정 관료쪽으로 넘어가고 둑스가 지휘하던 각 레기오들의 예하 부대들이 벡실라티오라는 파견 부대들 밑에 헤쳐모이게 된 사실이 정식으로 공인되자 크게 바뀐다. 둑스는 임시직이 아니라 그전보다 규모가 거의 1/4~1/5로 줄어든 변경 부대 레기오 및 필요에 따라 배속되는 정예 대대 및 기병 대대 등을 통할해서 특별 군관구들을 지휘하게 된다. 한편 프라이펙투스는 상황에 따라 규모 500명인 부대, 1000명인 부대 등을 지휘하게 되는데 일단 이건 원수정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12]
한편 야전군 편제에서는 프라이펙투스 위에 코메스가 나타나게 되는데, 콘스탄티누스 시기에 드디어 로마 제국 말기의 주인공들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관직인 마기스테르(군사령관)란 관직이 야전군 편제에서 프라이펙투스 위에 나타나게 된다. 즉,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의 군정 체계는 황제 ← 마기스테르 혹은 코메스 ← 둑스 ← 프라이펙투스 체제가 된다. 이시기에는 마기스테르가 보병부대 담당(Peditum) 및 기병부대(Equitum) 담당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것이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일원화되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시기에 들어서였다.
또한 옛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던 가부장 처벌권을 크게 제한[13]하였고, 노예에 대한 십자가형을 전면 금지하였다. 십자가형은 그전부터 유명무실화되고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가 된 건 이 조치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예한테도 못하는 걸 자유민이나 상류층한테 맘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321년에는 3월 7일이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그 날부터 모든 일요일을 '경건한 태양의 날'이라는 휴일로 법제화했다. 기독교 얘기는 안 꺼냈지만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고 하며, 기독교의 국교화와 맞물려 서양 기독교권에서는 일요일이 휴일이 되었고,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서양 문화가 전세계로 파급되면서 세계에서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휴일이 되었다.[14]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층 의원에 대한 공직 임명 제한을 완전 철폐했으며, 이에 따라 계급 고려 없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게 되어 행정 체계에 큰 진보가 왔다. 또한 원로원 의원 수를 대폭 늘려 이 시기에 원로원 의원의 수효는 2,500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그전까지 주욱 하강세였던 원로원의 권위와 명망은 실권은 다 잃었어도 간신히 반등세에 돌아서게 되었다.
3.2. 군제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제 개혁 이후에도 로마 제국에는 아직 과거의 군단체제 수준에 달하는 규모를 지닌 군단이 지역에 따라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이 4두정의 혼란을 증폭시킨 원인 중 하나다.콘스탄티누스는 카라칼라 개혁으로 공식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었던 레기온을 나누어 중앙 상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국경 주둔병인 리미타네이(limitanei)를 창설하는데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이어졌던 군제 상황을 공식화한 동시에 보다 짜임새 있게 개편한 것이었다. 또한 과거의 군단 체제를 유지하던 나머지 군대 또한 죄다 코미타텐세스/리미타네이 체제로 바꾼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전통이 내려오는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는 폐지했다. 로마 레기오가 후기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사라졌거나 혹은 리미타네이만 로마 레기오의 후예라는 잘못된 편견은 그냥 틀린 소리지만[15], 이렇게 해산된 사실이 명확하기 때문에 적어도 근위대에 한해서는 그 말이 맞다.
이렇게 확립된 군제는, 나중 서로마 제국 멸망 때까지 그리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적어도 마우리키우스가 훗날 테마제의 선구가 되는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체제를 선보일 때까지는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
즉 이후의 로마 제국 군제는 팔라티나이/코미타텐세스/리미타네이의 형태가 된다. 여기에 야만족 부족 전사집단을 한꺼번에 그대로 로마군으로 기용하는 포이데라티가 이 시기에 나타나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단, 콘스탄티누스가 창설했던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들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때 발렌스 황제와 함께 궤멸되면서 사실상 붕괴했다.
포이데라티의 등장과 이러한 군제개혁의 결과, 이 시기 로마는 기록에 따라서는 60만 이상 되는 거대한 상비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제국에게 지나친 부담이였기에 이후 군 규모는 차츰 축소되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애초에 처음부터 이런 대규모 상비군은 실제보다 과장된 장부상의 것이였고, 실 규모는 이의 2/3 수준이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3.3.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회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공인과 니케아 공의회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기존 사회체제와 이념을 신봉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는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그것으로는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없다 생각했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 질서, 즉 기독교를 택해 이를 공인하고 기독교의 분열을 정리하는 공의회를 열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국교화, 혹은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 및 다른 종교를 차별, 탄압,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고, 기독교식 세례도 일부러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받았으며, 종교에 관련된 공식적인 표현을 상당히 정제해서 씀으로써 사회 통합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노력했다.[16]3.4. 전반적인 법률
리키니우스와의 강화 조약 후 일련의 제국 법령집을 정기적으로 발간했다. 공법 체계보다는 사법 체계에 관한 것이 많았고, 개괄적인 것을 떠나 그중 두 가지 큰 법령을 소개하자면,첫 번째는 당시 가혹한 세금 부담으로 지급 능력이 없는 빈곤계층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살해했는데[17] 사례를 자주 접한 콘스탄티누스는 칙령을 내려 빈곤 때문에 교육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을 행정관에게 데려와 입증해주면 즉각적으로 구제 기금을 지급하도록 했다고 한다. 다만 즉흥적인 구제 방법이었기에 결과적으론 실패에 가까웠다.
두 번째로 강간법에 관한 것이었다. 강간에 대해서 특이할 정도로 가혹한 법령을 내세운 황제였는데, 단순히 강간죄를 저지른 것뿐만 아니라 25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가출 설득 유괴 하는 경우까지도 그 공범, 종범에게도 모두 같은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해 사형했다.
사형 방법은 내용 여하에 따라 다른데, 단순강간이면 그나마 참수형으로 끝났으나 죄질이 나쁜 강간범. 소위 유아강간범이나 친족강간범. 강도강간 같은 악질이면 단순 사형을 시키지 않고 산 채로 태우는 화형이나 원형경기장의 맹수에게 먹이로 던져줬다고 한다. 설사 합의에 따른 유괴였다고 해도[18] 당사자는 당연히 사형이고, 애인을 보호하려고 했다면 대상자였던 여성도 사형에 처했다. 또한, 고발에 대한 의무가 강제되었기 때문에 만약 아버지가 딸이 가여워 가해자와 결혼을 시켰다 할지라도, 이 둘의 사형은 피할 수 없었고, 추가로 부모에겐 재산몰수형이 더해졌다. 그 종범이 노예일 경우는 더욱 심한 사형방법이 선고됐는데, 죄질에 따라서는 끓는 납을 천천히 목에 부어 고문시키고 최종적으로 사형시키기까지 할 수 있었다. 혼란기 제국내 강간범죄가 워낙 심각해서 사회 문제가 될 지경이 되자 내린 조치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의 독창적인 법은 아니고 원래는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법률을 변형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 내의 모든 창녀를 공창으로 등록 시킨 뒤, '혼인관계나 창녀와의 관계 이외의 모든 성관계는 합의를 했던 말던 모두 강간이다! ' 라고 규정한 법을 선포했다. 물론 강간으로 유죄가 내려지면 당연히 사형. 다만 현실에 적용하면 사형당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다 당장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부터 워낙 문란하게 놀다가 간통죄로 잡혀갔기 때문에 법률은 발효가 됐지만 조사결과 진짜 강간으로 확인됐을 때가 아니면 법을 집행하지 않았다.[19]
3.5.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
또한 이미 쇠락해 가는 도시로 수도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로마[20]를 버리고 새로운 수도로 비잔티움을 택해 개발, 노바 로마를 창건하게 된다. 다만 이 도시는 당대부터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더욱 자주 불렸으며, 도시 구조는 로마 시를 복제해서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7개의 언덕이 있다.한편 또다른 얘기를 하자면, 동서로 긴 지중해 특성상 동서 분할통치는 충분히 자연스럽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했지만, 그저 사두정치 시기의 실험적인 시도로 끝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도 그의 자의로 동방을 동생 발렌스에게 맡겼고, 발렌스가 전사한 이후에도 서방의 그라티아누스는 동방을 자신이 차지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테오도시우스에게 맡겼다. 동로마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니코메디아나 세르디카, 시르미움, 트로이, 테살로니카 등의 후보 도시로 천도했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목록에 나오는 것처럼 엄청난 존속기간과 화려한 전적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단,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이 치러야 했던 고역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4. 잔혹한 가족사
가족관계는 매우 좋지 못한 것을 넘어서 잔혹했으며 막장이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로 출세하기 위해 307년 조강지처인 미네르비나[21]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와 재혼했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도 똑같은 행동을 했었는데, 역시 조강지처이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친모인 헬레나와 이혼하고 292년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장녀 테오도라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어머니 핼레나와 함께 쫓겨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로마 제국의 지배자기 되기 위한 냉혹한 경쟁 과정에서 장인인 막시미아누스와 처남인 막센티우스를 죽였다. 여동생이 여러 차례 화해를 시도했지만 매제인 리키니우스를 끝내 반역죄로 살해했다.
또한 유능한 장남이었던 크리스푸스를, 황후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씌어 모진 고문을 가한 후 죽였다. 장남 플라비우스 크리스푸스(Flavius Crispus)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에게서 난 아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와 재혼하기 위해 미네르비나를 버렸다. 크리스푸스는 317년 부제에 임명되어 갈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교양과 덕성을 겸비하여 신민들로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318년, 320년, 323년의 게르만족 토벌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324년 부황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기 위해 내전을 벌이게 되자 아버지를 도와 합류하면서 해군의 지휘를 맡아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에서 거의 2배가 넘는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어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최고 통치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승리를 통해 젊은 황태자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고, 로마 시민들의 존경과 애정이 쏟아졌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 20주년 경축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는 와중에 크리스푸스는 황제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었다. 그는 로마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리에 이스트리아의 폴라 요새로 압송되었다. 크리스푸스는 정당한 재판 절차없이 계모인 황후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패륜 혐의를 받고, 가혹한 고문을 밤낮으로 받았다. 크리스푸스는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으나 끝내 29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황후가 목욕하던 중 급사했다."
고 발표했으며, 두 사람은 모두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의 연이은 죽음에 대해, 그들이 실제로 간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간통설 외에도 파우스타의 간계에 속아 아들을 잃은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복수했다는 가설[22],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 헬레나가 파우스타를 모함했다는 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치 숙청에 두 사람이 제물이 되었다는 가설 등도 나온다. 이 외에도 파우스타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아버지가 내린 기록말살형 철회를 언급하거나 재검토하지 않았던 이유 등도 궁금증을 더하는 터라 아직까지 여러 가설들이 나돌고 있는 중이다.
5. 평가
포로 로마노의 입구에 남아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후일 파리 에투알 개선문의 모델로 차용된다.
서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또 학계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황제다. 최초로 대제( 라틴어: 마그(막)누스, Magnus/ 그리스어: 메가스, Μέγας) 칭호를 받은 황제기도 하며, 이는 기독교를 양지로 이끈 것도 이유지만 그 전에 확립한 이런저런 획기적인 업적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제시한 기독교 제국으로의 길이 이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원수정기의 황제들을 능가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체제 개편 작업을 완성했고, 사회 다방면에서 개혁을 주도했으며, 비잔티움으로의 행정수도 이전을 단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제국의 역사를 천 년이나 연장시켰다. 종교 관용정책을 등에 업고 대제가 된 것만은 아니며, 설령 그렇지 않았어도 그가 제국에 끼친 거대한 영향을 고려하면 대제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어 위키백과에도 리다이렉트가 아니라 표제어 자체에 'the Great'가 붙은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부터 콘스탄티누스 11세까지의 제국사 1480년을 통틀어 그뿐이다.
일단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후대 동로마 제국의 기틀[23]을 다진 황제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막장으로 치닫던 사두정치를 끝낸 것은 물론이고, 로마를 다시 내부적으로 안정을 꾀해서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내정이 혼란스러울 때면 안정시키고 다시 재기할 가능성만으로 갖춘 것만으로도 대단한 평가를 받는다.[24] 로마 제국에서 점점 중요성이 떨어져가던 이탈리아 반도를 제껴버리고 동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의 도시 비잔티움을 새로 수도로 정하고 발전시킨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 도서관 중에서 장서수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다음의 3위고, 학술 서양서에 한정해서는 앞의 두 곳을 앞선다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제목에 'Constantine'을 두고 찾은 결과가 단행본으로만 55개다. 콘스탄티누(노)스는 11명이지만, 책 제목에 쓸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은 이 1세와 콘스탄티노스 7세, 콘스탄티노스 11세 뿐인데, 7세는 로마노스 1세에게 오랫동안 눌려 지내서 황제로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제국 (중앙)행정론', '테마(지방행정)론', 제국 주변의 이민족에 대한 논의 등 저술로서 유명한 것이고, 11세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라 유명한 것이라서 절대다수는 1세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로서 여러 장점이 있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로마사 연구자 크리스 스카레의 말처럼 재능 있는 군사령관이면서도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될 유능한 선동가적 능력, 그리고 때론 비양심적이면서도 단호한 결단력을 갖추고 있으며, 행정가로도 적극적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결단을 내리던 황제였다. 즉, 상황에 따른 뛰어난 정치적 능력과 적극적이면서 현재와 미래를 두루 판단해 내린 행정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군사적 능력이 두루 있던 황제였다. 물론 콘스탄티누스는 고대 서양의 뛰어난 전술-전략가들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로스 3세, 한니발이나 스키피오처럼 천재적인 군사적 기질이나 후대인의 귀감이 될 만한 전략 전술을 쌓아 올리진 못했다. 그보다는 본인의 초인적인 개인 무력과 천재적인 지휘술, 최정예 병사들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파고들어 승부를 보는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게르만족을 처리할 때도 필요 이상으로 잔혹한 조치를 취했는데, 예컨데 부족장들을 잡아다 맹수들조차 살육에 지칠 정도로 격투장에 내던졌다거나, 강가에 산더미처럼 쌓인 적의 시신을 그대로 놔둬서 주변 게르만 부족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의 여러 부족장한테 미스테리적으로 큰 경외를 받은 바 있다.
또, 군사적인 스타일 자체가 지휘술과 본인 일신의 무력으로 전장의 승패를 결정짓는 타입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특별한 전술 없이 말도 안 되는 열세를 역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카이사르가 전술적인 부분에서 파르살루스 전투 하나로 불후의 명성을 쌓았듯이 콘스탄티누스도 이런 전투가 하나 정도는 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콘스탄티누스가 단순무식한 맹장이었으면 나올 수 없는 뛰어난 전술적 감각이 담겨 있었다. 이런 종류의 맹장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동시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불가사의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사를 보면 유명한 장군들이 일기토 등으로 일신의 무용을 뽐내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 제일 지명도가 높은 카이사르를 예로 들면, 그에 대한 여러 저술에서 전쟁/전투에 관한 것은 병참, 보급, 공성, 전투대형, 전술 등이 대부분이다. 그 다음 지명도 되는 스키피오, 폼페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콘스탄티누스 같은 맹장형 명장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공화정 시대 명장 마르켈루스, 공화정 말부터 제정 초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 제정 시대의 대 드루수스, 아그리콜라 등도 콘스탄티누스와 비슷한, 일신의 능력으로 흐름을 바꾸고 심리전 속에서 전황을 뒤집는 부분에서 상당히 뛰어난 명장이었다. 그리고 후대까지 포함하면 동로마 시기 이라클리오스가 비슷한 능력자라고 여겨진다. 이쪽은 아예 직접 일기토까지 한 기록이 있으며 아다나에서 적의 포위에 걸리자 직접 돌격하여 무쌍을 펼쳐 안전하게 군대를 퇴각시킨 기록까지 있다. 또한 지휘 스타일이 의외로 대 드루수스가 콘스탄티누스와 비슷했다. 그는 게르마니아 전쟁 중 적의 허를 찌르며 북해를 항해해 독일 북부로 상륙해 그대로 마그나 게르마니아 심장부까지 돌파했고, 콘스탄티누스처럼 말도 안 되는 열세 속에서도 포위를 일신의 무용과 용기 아래 뚫어내거나 심리전을 걸면서 상대를 제압하고 일순간 승기를 뒤집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대 드루수스는 사후에도 게르마니아 일대의 로마군 장병과 퇴역병 전우회에게 아이돌이자 군신 가까운 존재로 존경을 받았다.[25] 콘스탄티누스 또한 공교롭게도 부제 시절 활약한 갈리아와 레누스 일대에서 명성을 드날린 바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같은 맹장형 명장들은 아무래도 로마사에서 그렇게 흔치는 않고 유명도도 떨어지기에, 없는 일화도 만들어서 콘스탄티누스를 찬양하기 바빴던 기독교인들마저 콘스탄티누스의 맹장 기질에 대해선 별로 찬양하지 않았고 다른 로마인들도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놀랍게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물론 콘스탄티누스가 아깝게 젊은 나이에 죽은 대 드루수스보다 군공과 극적인 일화가 앞서는 건 사실이다.[26][27]
결론적으로 이 황제의 진가는 쉽사리 따라할 수 없는 굳건한 조직력, 제국의 복잡한 행정을 여간하면 혼자서 감당한 책임감,[28] 한 번 마음먹은 건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뚝심, 당장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면 그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 그럼에도 전장에서는 몸을 내던져 적을 직접 격살하며 주변 장병들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능력 등에 있다. 이런 건 통치자로서 기본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기본이 다 되어 있는 통치자가 드문 것 또한 인류 역사의 현실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제국 개편을 끝까지 뚝심 있고 일관되게 밀어붙여 끝장을 보는 것도 콘스탄티누스가 아닌 다른 누구든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설령 군사와 정치, 종교 분야에서 콘스탄티누스보다 뛰어난 인물이 적지 않더라도, 저 분야들을 그럭저럭 문제없이 다 커버할 수 있었던 인물은 분명히 드물었다.
현재 그의 고향인 세르비아 니슈 (니시)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엄청 밀어주고 있으며 니시의 공항 이름도 니시 콘스탄티누스 대제 공항(Аеродром Константин Велики Ниш)이다. 또한 2013년에는 밀라노 칙령 1700주년 행사도 열었다.[29]
6. 콘스탄티누스 거상
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관의 외부에 전시되어 있는 콘스탄티누스 거상 (Colossus of Constantine) 잔존부. 서기 315년 경에 조성되어 한때 막센티우스 회당에 있었고, 아래의 복원도에서 보이듯 좌상[30] 형태였다. 5세기경 청동 겉옷의 약탈을 목표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얼굴 조각상은 포로 로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내진에 놓여 있던 거상의 파편으로 현재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 콘세르바토리 궁전 뜰에 놓여 있다. 인간적인 개성보다 황제로서의 권위를 강조해 조각했다. 현존한 파편을 토대로 원래의 크기를 추정한 결과, 12m 높이의 좌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의 흉상은 공화정이나 오현제 시절의 흉상에 비해서는 조잡하고 기괴해 보이지만, 동방의 전제군주제(도미나투스)를 받아들인 영향으로, 보통 사람들을 초월한 모습을 담고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매우 크기가 크다 보니, 얼굴을 강조하려고 비율보다 크게 제작한 것이다. 눈도 아래서 올려봤을 경우를 생각해 보다 크게 제작했기에, 얼굴상만 남아 있는 저 석상이 섬뜩해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미술학계의 추정에 따르면 저 조각은 원래는 정면으로, 그것도 12m 높이의 거대한 상을 올려다 보는 것만을 고려하고, 조각의 뒷부분이 소실되었기에 비례적으로 안 맞아 보이는 것뿐이라고 한다. 결국 머리가 조금 크고 과장된 것 외엔 그냥 정상적인 조각상이라는 것이다.
2007년 기념 행사를 위해 콘스탄티누스 거상이 그래픽으로 복원된 적이 있다.[32]
밀라노의 프라다 파운데이션(Fondazione Prada)에서 13m의 높이로 복원된 조각상이 2023년 2월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석상의 남아있는 조각들을 레이저로 스캔한 뒤 복제되어 복원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7.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위서. 위서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실제로는 콘스탄티누스와 아무 관계가 없지만, 그 이름을 팔아 만든 가짜 문서고, 그 이름값 덕분에 700년이나 진상을 숨기는 데에 성공했다.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8.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아메리카 정교회(O.C.A)의 Mark Meholick 신부가 제작했으며 현재 그가 개인 소장중이다.[33] 얼굴 밑에 써 있는 글씨는 그리스어로 ὁ Αγίος Κωνσταντίνος로, 영어로 옮기면 'The Saint Constantine'(성 콘스탄티누스)이다. |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신앙심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어느 정도 호의는 있었으되 기성 종교와 관습을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냉혹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 개인의 신앙심 때문이 아니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시절 주화에 사용된 sol invictus(무적의 태양)[34] 표상도 그러한 의견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에 보여준 황제의 태도는 그리스도론 논쟁 자체를 혐오하고 종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에서는 개종의 계기, 과정, 원인에서는 다소간 이견이 있어도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 자체에 대해서는 꽤 긍정적으로 본다.
주화는 특별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시대의 주화는, 선전 효과가 매우 크고 백성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주화는 통치자의 교체를 비롯한 정치적 변화를 알리는 뛰어난 수단이었다. 따라서 고대 후기의 주화 주조는 특별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개종의 신뢰성에 관해 제기된 질문과 관련하여, 막센티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곧바로 주화에 그리스도 결합 문자가 나타나는 반면, 콘스탄티누스가 신봉한 명백한 표지인, 4분령의 제신이 사라졌는지는, 주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방에서 주조된 주화에 이따금 이교의 상징이 나타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황제가 발행한 주화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그런 이유에서 '무적의 태양'sol invictus과 같은 표상은 주화에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무적의 태양은 로마 제신이라는 고유성이 없었다. 무적의 태양은 모든 이가 자신이 바라는 종교적 내용으로 채울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천상 존재의 대명사였다. 이교의 주화 주조소들은 이러한 주제를 기꺼이 사용했다. 태양sol의 광휘는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황제에게 태양의 광휘가 소중하다면, 황제는 그것을 정의의 태양인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었다. 태양의 광휘는 이교인 특사들에 의해서도 해명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진정 그리스도를 신봉할지라도 '정의의 태양'sol iustitiae에 대한 신봉이 이교를 단연코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교인은 태양의 상징을 자신들만의 고유한 내용으로 채울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광휘를 덧붙였다면 태양신을 탈그리스도교화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35]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36],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42쪽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36],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42쪽
우선 주화의 경우, '무적의 태양' 표상이 나타나지만 이건 로마 제신이라는 고유성이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개종은 늦어도 312년이나 바로 그 전날에 일어났다. 황제는 314년에 열린 아를 교회회의에 모인 주교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하느님의 영원하고 상상할 수 없는 거룩한 경건은 인류를 결코 더 이상 암흑 속에 있지 않게 하고 많은 사람의 추악한 악의가 이와 같이 만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경건은 반짝이는 빛으로 구원의 길을 다시 새롭게 비추고 정의의 규범으로 개종하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허용합니다. 저는 많은 본보기에서 이를 알았으며, 스스로 체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제 안에는 정의가 없는 사물들이 있었고, 저는 은밀하게 숙고하는 것을 지극히 높은 권능께서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어떻게 끝내겠습니까? 악이 넘친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꼐서 제가 얻지 못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천상의 은총으로 당신의 종인 저에게 주신 것은 확실히 표현할 수도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37]
이는 개종 고백처럼 생각되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황제가 이 글을 썼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가 아니면 누가 자신의 과거를 이처럼 예리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만, 편지만으로는 개종이 얼마나 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황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상像이 교회의 교의적·윤리적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다. 글귀를 보면 고백은 철학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개종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더 고상한 행실에 관한 체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에 대한 자의식, 백성의 운명을 보상과 벌로 해석하는 것을 담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일부를 이룬다고 느낀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으로 이해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종교적 태도에 관한 평가는, 개별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고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연구에서는 놀랍게도 긍정적이다. 즉, 콘스탄티누스를 그리스도인으로 본다. 그는 정치적 합목적성에 바탕을 둔 고려뿐 아니라 내적 확신에서도 자신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국가로 실현되는 발전을 원했고 촉진시켰다.[38]
그런 이유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종의 진정성을 의심할 까닭이 없다면, 콘스탄티누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중요한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개종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39] 콘스탄티누스가 개인적 확신에서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 같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늘 생각해오던 '최고의 신'summus deus, 참된 무적의 태양, 밝게 빛나는 신성을 이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입법과, 특히 312년 이후 곧바로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교회 건축물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 황제의 종교정책에서 제의가 강조된 것은[40] 개종의 종교적 특성을 드러낸다. 한편 콘스탄티누스가 죽기 직전까지 세례지원자였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그는 평생 한 번도 어떤 성찬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 곧 그가 자신의 신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으로 바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그를 내적으로 사로잡은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회개라는 성경의 의미에서 개종했느냐는 의문은 로마 종교성의 견지에서는 제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에 대한 평가에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비판 없이 황제의 정책에 얽매였다는 비난은 그의 개종 문제와 얽혀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보인 호의의 표시, 영향력과 권력의 제의提議를 교회가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정치가인 동시에 교회를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했다면, 이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새로운 전제에서 발전해 나가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올바르게 평가하자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같은 책, 44-46쪽
우리 하느님의 영원하고 상상할 수 없는 거룩한 경건은 인류를 결코 더 이상 암흑 속에 있지 않게 하고 많은 사람의 추악한 악의가 이와 같이 만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경건은 반짝이는 빛으로 구원의 길을 다시 새롭게 비추고 정의의 규범으로 개종하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허용합니다. 저는 많은 본보기에서 이를 알았으며, 스스로 체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제 안에는 정의가 없는 사물들이 있었고, 저는 은밀하게 숙고하는 것을 지극히 높은 권능께서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어떻게 끝내겠습니까? 악이 넘친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꼐서 제가 얻지 못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천상의 은총으로 당신의 종인 저에게 주신 것은 확실히 표현할 수도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37]
이는 개종 고백처럼 생각되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황제가 이 글을 썼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가 아니면 누가 자신의 과거를 이처럼 예리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만, 편지만으로는 개종이 얼마나 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황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상像이 교회의 교의적·윤리적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다. 글귀를 보면 고백은 철학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개종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더 고상한 행실에 관한 체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에 대한 자의식, 백성의 운명을 보상과 벌로 해석하는 것을 담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일부를 이룬다고 느낀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으로 이해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종교적 태도에 관한 평가는, 개별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고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연구에서는 놀랍게도 긍정적이다. 즉, 콘스탄티누스를 그리스도인으로 본다. 그는 정치적 합목적성에 바탕을 둔 고려뿐 아니라 내적 확신에서도 자신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국가로 실현되는 발전을 원했고 촉진시켰다.[38]
그런 이유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종의 진정성을 의심할 까닭이 없다면, 콘스탄티누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중요한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개종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39] 콘스탄티누스가 개인적 확신에서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 같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늘 생각해오던 '최고의 신'summus deus, 참된 무적의 태양, 밝게 빛나는 신성을 이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입법과, 특히 312년 이후 곧바로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교회 건축물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 황제의 종교정책에서 제의가 강조된 것은[40] 개종의 종교적 특성을 드러낸다. 한편 콘스탄티누스가 죽기 직전까지 세례지원자였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그는 평생 한 번도 어떤 성찬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 곧 그가 자신의 신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으로 바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그를 내적으로 사로잡은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회개라는 성경의 의미에서 개종했느냐는 의문은 로마 종교성의 견지에서는 제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에 대한 평가에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비판 없이 황제의 정책에 얽매였다는 비난은 그의 개종 문제와 얽혀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보인 호의의 표시, 영향력과 권력의 제의提議를 교회가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정치가인 동시에 교회를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했다면, 이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새로운 전제에서 발전해 나가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올바르게 평가하자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같은 책, 44-46쪽
전근대 정치인들이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만 했을 뿐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현대인들의 편견과 달리, 콘스탄티누스 개인의 신앙심을 의심할 이유는 딱히 없다.
324년, 곧바로 황제는 논쟁을 시작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와 사제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에 관여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절친한 친구 코르도바의 주교 오시우스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보낸 편지가 남아있으며, 친저임이 확실하다.[41]
승리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에게. 이 일에 관한 본인의 의도는 두 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본인은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를 위해 본인은 제 행위의 협력자이며 만물의 하느님이신 구원자를 증인으로 모십니다. 첫째로 본인은 모든 백성의 종교적 지향이 일치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느 정도 심한 상처를 입은 모두에게 공동인 지구의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결합하기 바랍니다. 본인은 이를 주시했고 한편으로 인식의 비밀스런 빛에서 저울질해 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무장한 팔의 힘으로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우 본인은, 하느님의 모든 종 가운데 제 기도에 따라 공동의 단결을 이룰 수 있다면, 국가 제도도 모든 이의 경건한 신념을 통해 적절하게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군사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교육을 통해 장려되어야 하는 것을 정확히 구분했다. 제국의 일치에 관한 정치적 측면은 신앙에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중략)
전능하신 하느님, 제 귀가, 더 심하게는 제 마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까! 본인이 아프리카에 남긴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논쟁이 여러분 사이에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지역이 다른 지역들을 치유해 주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여러분의 지역에 더 큰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논쟁의 발단과 대상을 살핀즉, 구실은 시시하고 그리 엄청난 불화를 일으킬 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점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잘못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아들 예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문제였다. 황제는 일치를 위해 논쟁을 의식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왜곡하고자 했나? 일치만 된다면 교의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나? 이로써 사람들은 이미 인용된 비난을 계속한다: "진리 대신에 정치". 하지만 그리스도교적으로 돌려 말해 단결이 문제라면, 사랑의 계명이 계속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일치concordia는 로마의 사상에 근거를 둔 목표였으니, 다른 모든 것은 이 목표에 굴복해야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 논쟁의 발생과 배경에 관해 무엇을 알았으며, 적어도 무엇을 안다고 둘러대었는가?
본인이 들어 알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대 알렉산더는, 그들 가운데 각자가 [구약성경] 율법서에 쓰인 구절에 관해, 오히려 쓸데없는 질문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대의 사제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그대 아리우스는, 그대가 처음부터 알 수 없거나 침묵으로 무시해야 하는 것을 경솔하게 답변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 가운데 불화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부인되며, 거룩한 백성이 둘로 분열되고 한 몸이라는 일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고 여러분의 동료 일꾼이 정당하게 조언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논쟁은 쓸데없고 논쟁의 발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지 성경 구절, 아마도 신적 지혜가 말하는 잠언 8장 22절의 해석을 두고 싸웠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당신의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 길의 처음으로 나를 지으셨다." 콘스탄티누스는 논쟁을 철학적 토론의 영역으로 떠넘겼다. 곧, 개별 문제에서는 당연히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토대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신학 전문가들의 다툼에 백성을 끌어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에 관해서는 신앙 안에서 파악된 이해만 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와 다른 이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관해 각기 통찰력을 동원하여 생각해 낸 것은, 그들이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면, 사상의 비밀을 지키면서 그들 정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42]
-같은 책, 91-93쪽
승리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에게. 이 일에 관한 본인의 의도는 두 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본인은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를 위해 본인은 제 행위의 협력자이며 만물의 하느님이신 구원자를 증인으로 모십니다. 첫째로 본인은 모든 백성의 종교적 지향이 일치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느 정도 심한 상처를 입은 모두에게 공동인 지구의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결합하기 바랍니다. 본인은 이를 주시했고 한편으로 인식의 비밀스런 빛에서 저울질해 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무장한 팔의 힘으로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우 본인은, 하느님의 모든 종 가운데 제 기도에 따라 공동의 단결을 이룰 수 있다면, 국가 제도도 모든 이의 경건한 신념을 통해 적절하게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군사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교육을 통해 장려되어야 하는 것을 정확히 구분했다. 제국의 일치에 관한 정치적 측면은 신앙에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중략)
전능하신 하느님, 제 귀가, 더 심하게는 제 마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까! 본인이 아프리카에 남긴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논쟁이 여러분 사이에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지역이 다른 지역들을 치유해 주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여러분의 지역에 더 큰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논쟁의 발단과 대상을 살핀즉, 구실은 시시하고 그리 엄청난 불화를 일으킬 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점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잘못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아들 예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문제였다. 황제는 일치를 위해 논쟁을 의식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왜곡하고자 했나? 일치만 된다면 교의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나? 이로써 사람들은 이미 인용된 비난을 계속한다: "진리 대신에 정치". 하지만 그리스도교적으로 돌려 말해 단결이 문제라면, 사랑의 계명이 계속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일치concordia는 로마의 사상에 근거를 둔 목표였으니, 다른 모든 것은 이 목표에 굴복해야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 논쟁의 발생과 배경에 관해 무엇을 알았으며, 적어도 무엇을 안다고 둘러대었는가?
본인이 들어 알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대 알렉산더는, 그들 가운데 각자가 [구약성경] 율법서에 쓰인 구절에 관해, 오히려 쓸데없는 질문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대의 사제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그대 아리우스는, 그대가 처음부터 알 수 없거나 침묵으로 무시해야 하는 것을 경솔하게 답변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 가운데 불화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부인되며, 거룩한 백성이 둘로 분열되고 한 몸이라는 일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고 여러분의 동료 일꾼이 정당하게 조언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논쟁은 쓸데없고 논쟁의 발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지 성경 구절, 아마도 신적 지혜가 말하는 잠언 8장 22절의 해석을 두고 싸웠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당신의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 길의 처음으로 나를 지으셨다." 콘스탄티누스는 논쟁을 철학적 토론의 영역으로 떠넘겼다. 곧, 개별 문제에서는 당연히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토대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신학 전문가들의 다툼에 백성을 끌어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에 관해서는 신앙 안에서 파악된 이해만 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와 다른 이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관해 각기 통찰력을 동원하여 생각해 낸 것은, 그들이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면, 사상의 비밀을 지키면서 그들 정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42]
-같은 책, 91-93쪽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론 논쟁에 부정적이였던 것은 맞으나,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는 경우엔 신학 전문가들 논쟁으로 백성을 분열시키지 마라는 쪽에 가깝지, 종교 자체를 냉소적으로 본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당장 오늘날에만 하더라도, 학문적 최전선에서 열심히 구르는 신학자들이나 가능한 논쟁에 일반 평신도를 끌어들이는 것에는 충분히 비판 의견이 나올 수 있으며, 그 비판자가 종교에 진지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9. 출처(참고문헌)
- 영어 위키백과
-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 존 줄리어스 노리치 저
- 《 로마 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저
- 《로마 제국 최후의 백년》 / 피터 히더 저
- 《로마 멸망사》 /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저
-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두산백과)
- 《교회사 I》 / 에른스트 다스만 저
[1]
현
세르비아 니샤바구
니시(Ниш / Niš)
[2]
단 이때는 부제였다. 그러나 이미 4두정치의 균열이 생기고 있었으므로 정제니 부제니 하는 것들이 다 애매한 데다가 별 필요없는 구분이었다. 어차피 가장 강한 자가 승자고 정제, 나아가 단독(통일)황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막센티우스를 꺾고 서방을 온전히 점유한
312년에 가면 정제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312년부터 ' 'Undisputed' Augustus in the West'라는 표현을 써서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4]
324년 이전까지 사용
[5]
324년 제호 개명 후.
[6]
'마그누스·망누스(Magnus)'는 '위대한'이라는 뜻이다. 번역하면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
[7]
로마 제국의 최종 동서 분할은 콘스탄티누스 사후 60여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졌다.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테오도시우스 1세의 유언도 관례에 따라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두 아들에게 통치구역을 나누어준 것일 뿐이고, 그 후에 서로마가 멸망하는 바람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의 분열은 콘스탄티누스의 탓이 아니다.
[8]
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일각에서는 여기에 후대의 동로마 황제인
마누일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9]
합성론
교회들
[10]
성 콘스탄티노스 대제,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
[11]
다만, 비카리우스 밑의 관리들이 프로빙키아(속주)들을 통치하는데 이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의 명칭은 각 지역마다 제각기였다. 프라이토르도 그 중 하나다. 주의.
[12]
성경에서 가끔 '천부장'으로도 나오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래서였는지 제국 동부에서는 킬리아코스라는 중세 그리스어 별명이 붙었는데, 로마군의 다른 명칭들이 흔히 그렇듯 이라클리오스 이래로는 정식 명칭이 된다. 물론 가끔 공화정 로마사 덕후인 비잔틴 로마 황제들이 전혀 엉뚱한 라틴어식 이름으로 계급명을 바꿔서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주게도 되지만. 예컨대 고대 로마 때는 대장~중장 격이었던 코메스를 엉뚱하게 당대 비잔틴 군대의 대대 혹은 연대급 지휘관 명칭으로 바꾸거나 하는 등이다.
[13]
적어도 관습적으로는 이미 오현제 시절부터 상류층부터 시작하여 유명무실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법제화해서 명문화한 건 콘스탄티누스가 처음이다.
[14]
이슬람교의 금요일,
유대교의 토요일이 있긴 한데, 세계 표준 등에 있어서는 서구권에 비해 영향력이 거의 없다.
[15]
의외로 상당히 반복되는 오류다. 전기 로마사에만 정통하고 후기는 잘 모르는 서구 학자들 또한 자주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16]
다만 죽기직전 세례를 받는건 당시 로마에 퍼진 문화현상인데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를 다 씻게 되는데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만 받을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죽기직전 모든 죄를 씻기 위해서 일부로 죽기직전에 받은 것이다.
[17]
자신조차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견뎌 내기 힘든 삶에서 해방해 줄 수 있다면 해방해 주는 것이 부모의 애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8]
이를테면 부잣집 딸내미를 꼬신 평민 남자의 경우, 강간범이 아닌 애인이라고 봐야 하지만...
[19]
대신 적용된 게 간통죄였으나, 상대가 기혼자가 아니라면 적용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간통죄는 아무리 아우구스투스라도 죽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법정최고형은 유배형이었다.
[20]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즉위 이후 사실상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이후 이탈리아 일대의 제국의 행정 중심지는
메디올라눔 또는
라벤나였다.
[21]
시리아 출신이다.
[22]
이 가설의 경우, 파우스타가 처형된 이후, 복수에 성공한 아버지가 죽은 아들의 기록말살형을 철회해야 했다는 반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박에 관해, 도미나투스 체제 안에서 절대군주이자 신의 대리인이기도 한 황제가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있고 곤란에 처해진다는 합리적인 재반박이 나오고 있다.
[23]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인두세와 토지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과 초기 형태의 관료제는 이후 동로마 제국은 물론
압바스 왕조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물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세제 개혁, 체제 개혁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 기독교 공인보다 일반인에게 비칠 쇼맨십이나 상징성이 덜해보이는 것, 겨우 그뿐인 것이다.
[24]
당장 한국사의 고구려의
소수림왕을 생각해보면 백제와 후연에게 두들겨 맞아 산골짜기 나라로 전락했는데 내정을 안정시키고 재기할 가능성을 마련해 놓았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내정을 훌륭히 안정시킨 후에 여러 개혁에 성공한 왕은 그만큼 리더십과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25]
이런 이유로 독일
마인츠에는 로마군과 퇴역병 전우회가 세운 드루수스 스테인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곳은 콘스탄티누스 생전까지도 이 일대 사령관, 병사들이 매년 탑 주위를 돌면서 새해의 승리를 기렸다.
[26]
다만 인품 측면에서 보면 노예, 포로까지 친구로 여겨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 대 드루수스와 비교하면, 콘스탄티누스가 대단히 흉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노예나 포로는 고사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에겐 친족이든 적이든 필요 이상으로 잔인성을 보였고 욱하는 기질도 다분했다. 사정없이 쳐죽인 게르만인들의 시체를 강변 주위에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묻지도 않으면서 썩게 내버려둬 죽은 자를 모욕하는 대단히 잔인한 이런 행태는 적어도 로마사에선 선례가 없었다. 아내인 파우스티나의 친오라비이자 선황의 친아들인 막센티우스에 대한 처사도 마찬가지다. 파우스티나와 크리스푸스도 콘스탄티누스 특유의 의외로 격정적인 이런 부분에 희생되었을 개연성이 적지 않다.
[27]
동양사에서 콘스탄티누스와 가장 성격과 지휘 스타일이 비슷한 항우를 연상케 하는 부분으로, 사실 상식적인 현대인 입장에선 그닥 가까이 하고 싶진 않을 인물이다. 다만 그것과는 별도로 적어도 콘스탄티누스의 부하들 외엔 당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이런 어두운 부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정작 콘스탄티누스에게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게르만족들에겐 꽤 인기가 있었다. 이런 유의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자기 밑에 들어온 사람들은 게르만족이든 로마인이든 최대한 챙겨주기도 했으나, 역으로 콘스탄티누스처럼 잔인무도하면서도 교활한 인물이야말로 당대 게르만족이 이상형으로 삼던 두목감이었기 때문이다.
[28]
누군가는 지독한 권력욕으로도 폄하하지만. 마치
진시황과 명
홍무제가 하루에 서류 몇십kg 분량을 보고 결재했다는 것처럼.
[29]
보면 알겠지만 시 당국이나 기념사업회 정도의 행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은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어서 치른 세르비아 정부의 국가적인 공식행사였다. 동로마 제국을 여러 번 침략하고 파괴해 생명력을 갉아먹었던 중세의
세르비아 제국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한 이야기.
[30]
고대 그리스 시기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상과 유사한 형태
[31]
다만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이 거상을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진으로 썼는데, 유독 후기 로마사에서 근거 없는 오류와 왜곡이 두드러지는 그녀지만 이것만큼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이 거상은 콘스탄티누스의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우스 2세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만만찮다.
[32]
https://www.b-f-k.de/webpub01/cnt/schaichpic8.htm
[33]
https://roman-emperors.sites.luc.edu/icon.htm
[34]
태양숭배사상의 반영이다. 로마제국에서 솔 인빅투스 숭배의 정확한 기원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로마의 전통신이 아니라
아폴로와 같이 그리스 또는 로마가 정복한 다른 문화권에서 기원하거나 그 영향을 받은 새로운 정착신이거나 아예 상반된 주장으로 오래전부터 로마의 토착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찌됐건간에 시대별로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긴하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 여러 로마 황제들은 태양신 숭배를 선호해왔다. 태양신 숭배사상을 황제 숭배 사상과 결부시켜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주요한 정치수단이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세 기간에서도 다른 다신교 아이콘들이 사라져가는 와중에 솔 인빅투스만큼은 주화 등에서 장기간 꾸준히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인용문 참조.
[35]
(책 속 주석) DÖRRIES, Konstantin(30쪽) 42.190: Abb. 8,1f; BLEICKEN 38-43.
[36]
원제: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37]
(책 속 주석) 옵타투스 『도나투스파 열교』(부록) 5; 번역: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183f; 편지의 일관된 특성과 개찬 가능성에 관해서는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185-91; GIRARDET, Reichskonzil (46쪽) 168. Abn, 21; RITTER, Alte Kirche 123 참조.
[38]
(책 속 주석)DÖRRIES, KRAFT, LIETZMANN, VOGT 등의 주장이다. 참조: ALAND 239. BLEICKEN (64-6)은 이러한 견해를 내세우는 데 주저한다.
[39]
(책 속 주석) 문제점에 관해서는 P. STOCKMEIER, Glaube und Kultur (Düsseldorf 1983) 60-105.236-53, 특히 252f 참조.
[40]
(책 속 주석) R.M. GRANT, Chrsten als Bürger im Römischen Reich (Göttingen 1981) 169-73; H. BRANDENBURG, Römische frühchristliche Basiliken des 4. Jhs. = Heyne Stilkunde 14 (München 1979).
[41]
(책 속 주석)KRAFT, Religiöse Entwicklung (37쪽) 217.
[42]
(책 속 주석)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2,64-72; 번역: KRAFT, Religiöse Entwicklung (37쪽) 2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