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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인 글린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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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컬처넷 컴리 선정 위대한 웨일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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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2위 3위 4위 5위
어나이린 베번 오와인 글린두르 톰 존스 귄보 에반스 리처드 버튼
6위 7위 8위 9위 10위
게러스 에드워즈 딜런 토머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로버트 오언 손더스 루이스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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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와인 글린두르.png
성명 오와인 글린두르
Owain Glyndŵr
생몰년도 미상 ~ 1415년
출생지 웨일스 공국 포이스 사이차스
사망지 웨일스 공국
재위 웨일스 공국의 대공
1400년 ~ 1415년
아버지 그루퍼드 압 그루퍼드
어머니 앨렌
형제 로리, 이사벨, 튜더 압 그루퍼드
배우자 마거릿 핸머
자녀 그루퍼드, 마레두드, 알리스, 카트린, 이에우안( 사생아)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반란을 일으키다2.3. 프랑스와의 동맹과 삼자 동맹2.4. 쇠락
3. 후대의 평가

[clearfix]

1. 개요



중세 후기 웨일스의 지도자. 1400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뒤 여러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1404년 웨일스 공국의 대공을 칭하면서 한때 웨일스 대부분을 통치했다. 잉글랜드 왕국 백년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항전을 이어갔지만, 몬머스의 헨리 왕자가 주도하는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밀려 1409년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고, 헨리 5세의 사면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사후에 웨일스인들의 민속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웨일스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2. 생애

2.1. 초년기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국경 지대에 속힌 포이스 사이차스의 부유한 지주인 웨일스 영주 가문 출신이다. 출생년도는 여러 출처에서 1349년, 1355년, 1359년 등 다양하게 기재되었지만 정설은 없다. 오와인의 아버지 그루퍼드 압 그루퍼드[1]는 포워스 와독의 세습 터워소그[2]이자 글린디프위(Glyndyfrdwy)의 영주였으며, 잉글랜드 왕국이 정복하기 전 웨일스 왕실 왕조의 후손이었다. 어머니 앨런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와 카스티야의 레오노르의 장녀인 엘레노어의 증손녀였으며, 앨런의 아버지 토머스 압 리웰린은 사우스 웨일스의 영주였다. 형제로 로리[3], 이사벨[4], 튜더 압 그루퍼드가 있었다.

아버지가 1370년 이전에 사망한 뒤 영지와 직위를 물려받았으며, 변호사이자 훗날 잉글랜드 국왕 벤치 법원의 판사를 맡았던 데이비드 핸머의 집에서 지냈다. 이후 런던으로 상경해 런던의 변호사 협회인 인스 오브 코트(Inns of Court)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381년 웨일즈로 돌아와서 데이비드 핸머의 딸인 마거릿 핸머와 결혼했다. 1384년 잉글랜드군에 입대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 지대에 있는 베릭어폰트위드 성에서 웨일스 출신 장군인 디고리 세이스의 잉글랜드 수비대에 배속되었다. 1385년 8월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곤트의 존 휘하에 들어갔고, 1386년 9월 3일 초대 볼튼의 스크루프 남작 리처드 스크루프와 기사 로버트 그로스브러가 거의 동일한 문장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면서 벌어진 재판이 체스터에서 열렸을 때 증인으로 출석했다.

1387년 잉글랜드의 남동부 지역인 켄트 해안에서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에 복무했다. 1387년 말 장인인 데이비드 핸머가 사망한 뒤 웨일즈로 돌아가서 장인의 유언대로 유산 분배를 집행했다. 1387년 12월 리처드 2세의 총신인 로버트 드 베레와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옥스퍼드셔의 레드콧 브리지 전투를 치렀을 때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종자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렇듯 잉글랜드의 다양한 지역에서 복무하고 여러 전투에 참여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군사적 기량을 기를 수 있었다.

2.2. 반란을 일으키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왕좌를 위협하는 강력한 대귀족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는데, 이는 웨일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웨일즈는 반자치적인 봉건 국가, 주교령, 샤이어, 왕이 직접 소유하는 토지가 다양하게 섞인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리처드 2세에게 숙청된 이들의 땅이 몰수되어 왕의 지지자들에게 부분적으로 분배되었지만, 다수의 영지는 왕실 직할지가 되었다. 이때 많은 웨일스 사람들이 새로운 왕실 직할지를 대신 관리해주는 대가로 여러 직책과 지위를 획득했고, 이를 토대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출세길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던 1399년 9월 30일, 리처드 2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반란으로 폐위된 뒤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했다. 웨일스인들은 자신들에게 출세길을 열어준 리처드 2세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1400년 1월 헨리 4세를 암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던 음모가 발각되면서 여러 사람이 숙청되었을 때 웨일스 출신 잉글랜드 궁수 대장이 처형되자, 웨일스 국경 도시인 체스터에서 심각한 소요가 일어났다. 웨일스인들은 이 일을 계기로 헨리 4세가 웨일스인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으며, 리처드 2세에게 기용되었던 웨일스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되고 영지를 잃을 거라는 불안감을 품었다.

오와인 또한 리처드 2세의 폐위와 헨리 4세의 등극으로 인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당시 그는 웨일스 주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제3대 루틴의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와 오랜 영지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1399년에는 리처드 2세가 주재한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헨리 4세가 즉위한 뒤 새로운 왕의 추종자였던 레지날드 그레이가 재차 소송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그는 다음 군사 작전을 위해 민병대를 모으라는 왕명을 글린두르에게 의도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오와인이 이 때문에 민병대를 소집하지 않자, 헨리 4세는 그를 반역자라고 규탄하고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박탈했으며, 그레이 남작에게 반군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와인은 왕에게 서신을 보내 해명하려 했지만, 서신은 모종의 이유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는 끝장이라는 걸 직감한 오와인은 1400년 9월 16일 일가족과 성 아삽 교회 학장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웨일스 대공을 자칭했다. 그는 9월 19일 그레이 요새를 공략한 뒤 파괴했으며, 덴바이, 루들란, 플린트, 하워든 및 홀트를 며칠 만에 공략했다. 9월 22일 오스웨스트리를 습격해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9월 24일 남쪽의 웰시풀을 포함한 포이스의 여러 성채를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앵글시의 튜더 가문은 오와인의 형제인 튜더 압 그루퍼드의 지휘하에 봉기를 일으켰다. 튜더 가문은 앵글시의 저명한 가문이었으며,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 때 참여한 웨일스 궁수 대장 그윌림 압 튜더와 리스 압 튜더가 이 가문 출신일 정도로 리처드 2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곧 오와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원정을 벌이고 있던 헨리 4세는 오와인이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군대를 돌려 9월 26일 슈루즈버리에 도착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북웨일스 전역으로 이동했지만, 그 과정에서 악천후 속에서 산속에 숨어있던 웨일즈 유격대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고 막심한 피해만 입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0월 15일 병력이 크게 줄어든 채 슈루즈버리 성으로 돌아왔다. 오와인의 반란군이 헨리 4세를 물리치자, 그의 명성은 웨일스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1401년, 반란은 웨일스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웨일스 북부와 중부 시골 지역 전체가 오와인을 지지했으며, 북부 전역의 잉글랜드 도시, 성 및 사유지에 끊임없는 습격이 벌어졌다. 심지어 웨일스 남부의 브레콘과 궨트에서도 스스로 "오와인의 아이들"이라 자칭하는 이들의 봉기와 약탈이 벌어졌다.

헨리 4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약한 헨리 '핫스퍼' 퍼시를 웨일스 토벌대 지휘관으로 세웠으며, 14살된 아들 몬머스의 헨리 왕자를 헨리 퍼시의 부관으로 세웠다. 퍼시는 1401년 3월에 반란을 멈춘다면 오와인과 리스, 그윌림 튜더 형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사면하겠다는 내용의 사면령을 반포했다. 이후 리스와 그윌림 형제가 목수로 가장하여 성내로 진입하는 작전을 성사시켜 콘위 성을 공략하자, 헨리 퍼시는 120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궁수를 데리고 콘위 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녹록지 않자 튜더 형제 역시 사면해주는 대가로 5월 말에 콘위 성을 탈환했다. 이후 헨리 퍼시는 반역죄로 기소된 웨일스인 9명을 거세한 후 배를 찢어 내장을 제거하고 산채로 불태우는 형벌을 가해 죽였다.

1401년 6월 중순, 오와인은 장병 120여 명을 이끌고 마이니드 헤드겐에서 잉글랜드군 1,500명과 대적했다. 그는 지리를 잘 아는 이점을 제대로 살려 적군을 유인한 후 급습을 가해 적병 200명을 사살하고 생존자들을 생포했다. 이에 헨리 4세는 슈루즈버리와 헤레퍼드 성에서 대규모 병력을 집결한 뒤, 웨일즈 중부로 향했다. 그의 목표는 오와인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시토회가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악천후와 오와인 군대의 끊임없는 습격에 시달린 끝에, 헨리 4세는 스트라타 플로리다 수도원에 도착했다. 오랜 고생을 하느라 마음이 무척 상했던 헨리 4세는 이틀 간 공격한 끝에 수도원을 부분적으로 파괴한 뒤 오와인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의심되는 수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오와인이 대규모 왕실군과 전면전을 벌이길 기피하고 유격전을 끊임없이 구사하자, 헨리 4세는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그의 군대는 장대비로 인해 완전히 젖었고, 갑옷을 입고 잠을 자야 했다. 한 번은 거센 빗줄기로 인해 헨리 4세가 있던 천막이 떠내려가서 헨리 4세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채 막심한 피해만 입고 헤리퍼드 성으로 돌아왔다. 1401년 11월 2일, 오와인은 카나본 성을 포위 공격해 거의 함락시킬 뻔했지만, 성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피해가 커지자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반란 토벌을 맡은 헨리 '핫스퍼' 퍼시는 자신이 왕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헨리 4세의 억압적인 정책이 웨일스인들이 반란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협상과 타협 만이 오와인의 반란을 종식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강경책을 고수했다. 그는 웨일스에서 잉글랜드의 지배력을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새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웨일스인은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웨일스에서 공직을 맡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이유로도, 심지어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휴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웨일스인 어린이는 잉글랜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웨일스 사람이 잉글랜드 여성과 결혼하면 엄중한 벌금이 부과되고, 잉글랜드 남성이 웨일스 여성과 결혼하면 어떤 공개 집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조치를 통해 웨일스인들이 반란에 가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웨일스인들은 여기에 분노해 오와인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402년 1월, 오와인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인 레지날드 그레이가 루틴에서 오와인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사로잡혔다. 루틴 자체는 오와인에게 점령된 뒤 방화로 파괴되었다. 그레이는 1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헨리 4세가 10,000 마르크의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났다. 한편, 오와인은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와 아일랜드 지도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잉글랜드에 맞서 항전하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402년 6월, 오와인의 군대는 웨일스 중부의 브린 글라스에서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모티머를 생포했다. 오와인은 큰 몸값을 받고 모티머를 석방하겠다고 제안했고, 모티머의 친구들, 특히 모티머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헨리 '핫스퍼' 퍼시가 몸값을 모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모티머 가문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지 의심해 에드먼드 모티머의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급기야 에드먼드 모티머의 영지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드먼드 모티머는 격분해 오와인 편으로 돌아섰다. 1402년 11월 30일, 에드먼드 모티머는 오와인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 2세의 후계자는 헨리 4세가 아니라 자신의 조카이자 제5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 모티머라고 선포했다.

2.3. 프랑스와의 동맹과 삼자 동맹

오와인은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는 잉글랜드 왕국의 공세를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외세의 도움을 받기를 희망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지배자들을 대상으로 동맹을 요청해 봤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하자, 프랑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웨일스의 성직자인 '젊은 그루퍼드'와 존 핸머를 프랑스로 보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 왕국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웨일스와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이 키드웰리 성을 포위해 수 개월간 공성전을 치렀다. 여기에 스코틀랜드까지 프랑스 왕실의 설득을 따라 오와인을 돕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략선은 웨일스 주변에서 활동해 여러 잉글랜드 선박을 나포하고 오와인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1403년, 브르타뉴 함대는 영국 해협에서 잉글랜드 함대를 격파하고 저지 섬과 건지 섬, 플리머스 항을 황폐화시켰고, 프랑스 함대는 와이트 섬에 상륙했다. 1404년, 프랑스 함대는 웨일스 병사들을 승선시킨 뒤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해 다트머스에 불을 지르고 데본을 파괴했다. 한편, 오와인은 1403년에 사우스 웨일스를 습격해 애버개브니, 케얼리언, 우스크, 뉴포트 및 카디프를 심각하게 약탈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헨리 4세는 군대를 재차 파견했지만, 이번에도 오와인의 유격 전술에 휘말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후 오와인은 서남 방향으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대다수 마을을 복속시켰으며, 잉글랜드 영지와 성을 모조리 공략하고 파괴했다. 마지막으로 웨일스 남서부에 있는 잉글랜드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카마던 성이 오와인의 맹공을 받고 함락되었고, 뒤이어 글래모건을 황폐화했다.

이제 그의 명성은 웨일스를 넘어 잉글랜드 전역에 퍼졌다. 잉글랜드 왕실 관리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모든 웨일스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웨일스로 가 오와인에게 가담했으며, 웨일스 노동자와 장인들도 잉글랜드 고용주를 떠나 오와인에 떼를 지어 합류했다고 보고했다. 여기에 그동안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여러 전투를 수행했던 웨일스 궁수 수백 명과 숙련된 병사들이 반란에 가담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을 이탈했다. 이 당시 잉글랜드인들은 날씨가 나쁠 때마다 글린두르가 마법을 부리고 있다며 두려워했다. 잉글랜드군은 오와인에게 보복하고자 그의 집을 파괴했고 그의 영지인 글린디프위를 황폐화했지만, 그걸로는 아무런 위안도 얻을 수 없었다.

1403년 6월 초,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에서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게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숙부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함께 슈루즈버리로 행진하면서 오와인 글린두르와 합세하고자 했고, 그의 아버지이자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도 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와인 글린두르가 미처 합류하지 못한 사이, 헨리 '핫스퍼' 퍼시의 군대는 1403년 7월 21일 슈루즈버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와 대면했다. 이어진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전사했다.

1404년, 오와인은 할레치와 에버리스트위스 성을 공략했다. 그 후 그는 할레치에 궁정을 세운 뒤 '젊은 그루퍼드'를 총리로 선임했다. 또한 마킨레스에서 첫번째 의회를 소집해 웨일스의 귀족들로부터 정식으로 웨일스 왕자로 취임하고 국가 정책을 반포했다. 그는 웨일스를 웨일스 의회와 웨일스 교회가 존재하는 독립국가라고 밝혔고, 웨일스에는 2개의 국립 대학이 있으며, 선한 왕 허우엘 다가 제정했던 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 웨일스에 남은 잉글랜드의 세력은 몇 개의 고립된 성, 성벽으로 둘러싸인 몇 개 마을, 요새화된 일부 저택으로 축소되었다.

한편, 오와인은 헨리 4세에게 깊은 복수심을 품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았다. 1405년 2월, 오와인은 헨리 퍼시, 에드먼드 모티머와 삼자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오와인은 웨일스 국왕이 되고, 에드먼드 모티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되며, 헨리 퍼시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 잉글랜드 원수 토머스 모브레이,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머스 바르돌프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헨리 퍼시의 반란군은 1405년 5월 29일 쉽턴 무어 전투에서 패배했고, 생포된 스크루프 대주교와 모브레이 원수는 처형되었다. 이후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이끄는 왕실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퍼시는 바르톨프 남작 및 헨리 '핫스퍼' 퍼시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1405년 3월 11일, 오와인의 형제 튜더 압 그루퍼드가 이끄는 반란군이 그로스몬트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했고, 튜더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1405년 5월 5일, 푸울 멜린 전투에서 리처드 그레이와 '절름발이 데이비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검은 리스'와 오와인의 아들 그루퍼드가 이끄는 반란군 무리를 물리쳤다. 리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루퍼드는 생포되어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 연대기 작가 우스크의 아담에 따르면, 헨리 4세는 푸울 멜린 전투에서 생포된 웨일스인 300명을 우스크 성 앞에서 모두 참수했다고 한다. 란타르남 인근의 시토회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던 존 압 하이웰도 전장에서 죽은 자들을 수습하던 중 잉글랜드 병사에게 사살되었다.

1405년 7월, 장 2세 드 리외가 이끄는 3,000 가량의 기사 및 맨앳암즈로 구성된 프랑스-브르타뉴군이 브레스트를 떠나 웨일스 서부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한 식수를 못해 많은 말이 갈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장 2세 드 리외는 오와인에게 우수한 공성 장비를 제공했고, 오와인은 이를 토대로 헤이버포드웨스트 시를 공략했지만 성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웨일스-프랑스 연합군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글래머건과 궨트를 통과했고, 뒤이어 헤러퍼드셔를 지나 우스터셔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은 우스터 시에서 10마일 떨어진 그레이트 위틀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마주쳤다.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에버리 힐에 진을 쳤고, 오와인은 이에 맞서 반대편 언덕에 진을 쳤다. 이후 그가 진을 친 언덕은 '오와인 언덕'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양군은 8일간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않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양측 모두 철수했다.

2.4. 쇠락

1406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평화 조약 체결이 임박하자, 장 2세 드 리외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웨일스에서 철수했다. 이에 다급해진 오와인 그린두르는 웨일스 교회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받들게 할 테니 자신들을 계속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이후 웨일스 반란 진압을 전담한 몬머스의 헨리 왕자는 원정을 감행했다가 오와인의 유격전에 시달리는 대신 웨일스에 대한 경제적 봉쇄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는 웨일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성들의 도움을 받으며 반란군의 무역로와 무기 및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그 결과 1407년에 이르러 웨일스 영주들이 하나둘씩 잉글랜드군에 항복하기 시작했고, 애버리스트위스 성은 1407년 한여름에 몬머스의 헨리가 이끄는잉글랜드군에 포위된 뒤 가을에 함락되었다.

1408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로 잠입했다가 브램햄 무어에서 요크셔 보안관 토머스 드 로크비가 지휘하는 군대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1409년, 오와인의 근거지였던 할레치 성이 포위되었다. 오와인은 협상을 위해 부하들을 프랑스로 보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젊은 그루퍼드'는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어 잉글랜드에 대항해 군사 행동을 취하도록 설득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결국 할레치 성은 함락되었고, 그 때까지 오와인과 함께 있던 사위 에드먼드 모티머가 전사했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내이자 오와인의 딸인 카트린과 두 사람의 자식들은 잉글랜드군에 생포된 뒤 오와인의 아들 그루퍼드가 갇혀 있던 런던 탑으로 투옥되었다.

오와인은 할레치 성에서 노인으로 변장해 겨우 빠져나간 뒤 군대를 재건한 후 1410년 슈롭셔 중심부를 습격했다. 그러나 습격은 격퇴되었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오와인의 가장 충성스러운 사령관이었던 '카디건의 검은 리스'가 체포되어 런던으로 이송된 뒤 타이번으로 끌려가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유해는 4등분 되어 런던 시의 4개 구역으로 보내졌고, 수급은 런던 브리지에 전시되었다. 1411년 또는 1412년, 필립 스쿠다모어와 리스 압 튜더는 각각 슈루즈버리와 체스터에서 체포되어 참수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도시 입구에 세워졌다. 1412년, 오랜 세월 런던 탑에 감금되었던 오와인의 장남 그루퍼드가 옥사했다.

1412년, 잉글랜드군 장성 '절름발이 데이비드'가 브래컨에서 오와인이 이끄는 웨일스군의 습격으로 생포되었고, 나중에 헨리 4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이것이 오와인이 잉글랜드군에 목격된 마지막 행적이었다. 1414년 초, 롤라드파 지도자 존 올드캐슬이 해리퍼드셔에서 오와인과 서신을 교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스노도니아에서 잔여 봉기군을 이끌고 있던 그윌림 압 튜더가 1413년에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했지만, 오와인은 1412년 이후로 웨일스 산 속 깊은 곳에 숨은 채 잠자코 지냈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후, 몬머스의 헨리 왕자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로 등극했다. 헨리 5세는 웨일스인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폐위된 국왕 리처드 2세의 시신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했고, 웨일스 반란의 주요 지도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검은 리스의 형제인 하이웰 코트모어는 헨리 5세의 사면을 받고 잉글랜드군에 배속되었다. 1415년, 헨리 5세는 반란 지도자 오와인을 사면하겠다고 선언하고, 오와인의 아들 마레두드에게 사절을 보내 아버지에게 귀순을 권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레두드는 이를 거부하고 아버지 편에 계속 남았다. 한편, 오와인의 딸이자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내인 카트린과 그녀의 자식들은 1415년 런던 탑에서 사망했다.

많은 오와인 지지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 추방되었다. '젊은 그루퍼드'는 추방되어 파리에 머물다가 스코틀랜드의 로스 주교, 북아프리카의 히포 주교가 되었다. '하얀 헨리'는 웨일스를 떠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섬겼고,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오와인의 아들 마레두드는 1421년 헨리 5세의 사면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영지를 돌려받았다. 이후 오와인에 대해 막대한 현상금이 걸렸는데도, 그는 누구에게도 잡히거나 배신당하지 않았고, 사면을 끝까지 거부했다. 오와인의 옛 지지자였던 웨일스 연대기 작가 우스크의 아듬은 자신의 연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1415년에 추종자들에 의해 밤에 묻혔지만, 그의 적들은 매장 장소를 알고 다른 데로 옮겼으며, 지금은 아무도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웨일스 연대기 중 하나인 <오와인 글린두르의 연대기>는 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오와인의 체류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1415년에 그가 죽었다고 밝혔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와인의 딸 앨리스는 해러퍼드셔의 보안관으로 임명된 존 스쿠다모어의 부인이 되었다. 존 스쿠다모어와 앨리스의 손자 존 던은 훗날 헨리 7세 리처드 3세를 꺾고 잉글랜드 국왕이 되는데 기여한 뒤 궁중의 외교관이자 전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3. 후대의 평가

오와인은 사후에 카드왈라드르 압 카드왈론(Cadwaladr ap Cadwallon), 키난 압 클리드노(Cynon ap Clydno), 아서 왕과 함께 웨일스인들이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귀환하기를 기다리는 민속 영웅으로서 신화적인 지위를 얻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웨일스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추켜세웠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잉글랜드 태생의 웨일스계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카디프 시청에 세워진 오와인의 동상을 공개하는 등 그를 웨일스의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피델 카스트로는 오와인을 최초의 탁월한 게릴라 지도자로 평가했다. 1980년대에 스스로를 'Meibion ​​Glyndŵr(글린두르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단체는 웨일스의 잉글랜드 귀족 별장들을 방화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 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웨일스 전역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다. 오늘날 웨일스의 덴빅셔 코웬 시 광장엔 오와인의 승마 동상이 세워져 있다.


[1] 작은 그루퍼드(Gruffudd Fychan)로도 일컬어진다. [2] Tywysog, 웨일스어로 통치자, 지배자를 가리키는 용어. 영어로 Prince, 한국어로 공으로 번역한다. [3] 체스터, 슈루즈버리 및 플린트 지역의 여러 토지를 소유한 영주인 로버트 풀스턴의 부인. 풀스턴은 훗날 오와인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전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헨리 5세의 사면을 받고 영지를 돌려받았다. [4] 아다 압 이오워스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