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6대 황제
마요리아누스 MAIORIANVS |
|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 (Flavius Julius Valerius Majorianus) |
출생 | 420년대 (추정) |
로마 제국 갈리아 혹은 로마 | |
사망 | 461년 8월 7일 |
로마 제국 토르토나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457년 4월 1일 ~ 461년 8월 2일 (4년 124일) | |
전임자 | 아비투스 |
후임자 | 리비우스 세베루스 |
부모 |
아버지 : 도미너스 어머니 : 불명[1] |
종교 | 기독교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의 제56대 황제이자 서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 최근까지도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시해당한 여러 허수아비 황제 중 한 명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가 서로마 시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상당히 유능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서로마 제국 말기의 황제들 중 가장(사실상 유일하게) 유능했던 황제로서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457년 권신인 리키메르에게 옹립된 후 갈리아 남부와 히스파니아를 평정해 서고트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고, 내정을 잘 닦아 멸망 직전까지 몰리던 서로마 제국이 소생할 길을 열었다. 마요리아누스는 즉위한지 불과 3년 만에 당시 로마 제국을 침공하고 있었던 반달족과 고트족의 군대를 격파하고 잃어버렸던 옛 서로마 제국령의 영토 대부분을 다시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실세였던 리키메르와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고, 결국 461년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빌미로 리키메르에 의해 기습적으로 폐위된 후 살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마요리아누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역사학계는 420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458년 젊은이[2]로 그가 지칭되는 것이 그 증거인데, 458년을 기준으로 30세 이전의 20대 나이였던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서기 5세기 당시의 대표적인 갈리아 일대의 로마 귀족 가문 태생으로, 조부 대부터 서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군인 귀족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할아버지는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기병대장으로, 일리리아 주둔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임할 당시인 379년 시르미움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라는 이름은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영광스러운 명칭으로 각광받았다. 마요리아누스 역시 할아버지처럼 군대에 입대해 명장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부하로서 갈리아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는 훗날 서로마 제국의 권신이 된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친구가 되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의 휘하에서 여러 게르만족에 맞서 싸웠고, 훈족과의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몇몇 사료에 따르면 450년 무렵,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서로마 제국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딸인 플라다키아와 마요리아누스의 결혼을 고려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요리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후계자로서 그의 사후 곧바로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이를 반대했고 자신의 아들과 플라다키아를 결혼시키려고 했다. 결국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로부터 군문에서 쫓겨나 고향에 은거했다.
2.2. 황제에 즉위하다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손으로 아에티우스를 살해했다. 그는 아에티우스를 따르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아에티우스에게 축출되었던 마요리아누스를 군대에 재복무시켰다. 하지만 이듬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 2명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제위 계승을 놓고 페트로니우스와 경합을 벌였지만 페트로니우스에게 뇌물을 받은 원로원과 군대가 페트로니우스를 지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그로부터 2개월 후, 페트로니우스는 반달 왕국의 국왕 가이세리크가 수도 로마에 쳐들어오자 이를 피하려고 도망치던 중 성난 군중에게 붙들려 살해되었다. 이후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한 후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한편 갈리아에서 황제로 추대된 아비투스가 455년 9월에 로마로 귀환하여 정식 황제로 등극했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가이세리크와 전쟁을 치르면서 민심을 잃었고, 결국 반달 해군을 격파해 민심을 얻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폐위되었다. 이때 마요리아누스가 친구 리키메르의 쿠데타에 가담했는지는 불확실하다.[3] 이후 리키메르는 친구인 마요리아누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리키메르가 아비투스의 사망 후 1년 가까이 밍기적거리며 새 황제를 뽑지 않다가, 원로원과 군대가 반발하자 억지로 마요리아누스를 제위에 앉혔다. 본인이 황제가 될 수는 없었던 리키메르는[4] 로마군이 이탈리아에 침공해온 알레마니족을 격퇴하고 돌아오던 마요리아누스를 방패에 올려서 황제로 추대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마요리아누스는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에게도 인정받아 서로마 제국의 정식 황제가 되었다.
2.3. 황제 마요리아누스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하기 1년전인 서기 460년경 서로마 제국의 모습이다. 서고트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를 모조리 점령당하고 아키텐만 간신히 건졌으며, 부르군트 왕국도 남부의 상당한 영토가 점령당했다.
2.3.1. 갈리아 남부 수복
458년 여름, 가이세리크의 처남이 이끄는 반달족 군대가 리리 강 또는 가릴리아노 강 하구에 상륙하여 캄파니아 일대를 약탈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을 공격해 가이세리크의 처남을 죽였으며 대부분의 반달족 또한 전사하고 일부 병력만이 북아프리카로 도주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모든 로마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고 훈족, 수에비족, 고트족을 포함한 많은 야만족 출신의 용병대를 모집해 제국군의 역량을 강화했다. 또한 동쪽의 라벤나와 서쪽의 미세눔 항구에 함대를 재건했다.한편, 서고트 왕국의 국왕 테오도리크 2세는 자신이 후원했던 아비투스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마요리아누스를 적대했다.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서고트 왕국과 맞서 싸우기로 하고, 458년 말에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로 진격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갈리아 남부를 서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테오도리크 2세는 마요리아누스와 새 조약을 맺어 그를 용인하고, 마요리아누스가 확보한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여세를 몰아 부르군트족을 격파하고, 루그두눔( 리옹)을 점령했다.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도시는 무거운 벌금을 내야 했고, 사로잡힌 부르군트족 전사들은 서로마군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갈리아계 로마 귀족층은 아비투스 황제의 편을 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마요리아누스는 그들을 처벌하기보다는 그들과 화해하기를 원했다. 아비투스의 사위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마요리아누스 황제를 기리는 찬양문을 반포했고, 그 덕분에 측근이 되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루그두눔 백성들의 요청을 받은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에 따라 벌금을 감면해주었다.
2.3.2. 히스파니아 정벌
459년, 마요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네포티아누스와 수니에리치를 파견해 히스파니아에 거주하던 수에비족을 격파하도록 했다. 두 장군은 루쿠스 아우구스티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하고, 스칼라비스를 점령했다. 그 동안 마요리아누스는 사라고사를 거쳐 히스파니아 깊숙히 진군해 카르타기니엔시스까지 나아갔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은 히스파니아에서의 종주권을 되찾았고, 서고트 왕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2.3.3. 내정
458년 3월 11일, 마요리아누스는 토지 소유자의 모든 세금 체납을 재심사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은 세금을 빼돌린 전적이 있는 공직자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명백히 금지했고 오로지 총독에게만 맡겨졌다. 그해 9월 4일, 마요리아누스는 또 다른 법령을 발표해 지방 법관들에게 스스로 모은 세금의 일부를 빼돌림으로서 황실의 재산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경고했다. 또한 마요리아누스는 지방 판결제도를 개선했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학대나 재산 몰수를 강요하는 것을 금지했다.한편 마요리아누스는 종교 방면에서도 손을 댔다. 당시 몇몇 부유한 가정에서는 딸이 순결을 맹세하고 결혼하지 않음으로서 자신들의 재산이 지참금으로 쓰이지 않게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이러한 풍습이 인구를 감소시키고 소녀들에게 평생 독신을 강요하는 등 제국에 해롭다고 생각했다. 이에 458년 10월 26일 순결 서약에 관한 법령을 공표했는데, 그 내용은 최소 40세가 넘은 처녀만이 순결을 맹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마요리아누스는 지참금과 혼인 전 선물 교환을 요구하는 관습을 금지함으로써 결혼을 기피하는 풍조를 바꾸려고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로마 귀족층을 포섭하는 데도 힘을 기울었다. 그는 전임 황제 아비투스가 몰락한 원인은 로마 귀족층을 무시하고 갈리아계 귀족층을 중용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후, 460년부터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귀족층을 요직에 임명했다. 또한 그는 원로원 의원이 고발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고 실제로 이를 지켰다. 그리고 마요리아누스는 혼란한 서로마 제국의 쇠퇴로 인해 재건축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공 건물에서 대리석 등 자재를 빼돌리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고, 이를 어긴 이들의 양손을 절단하는 엄혹한 형벌을 내렸다.
2.4. 반달 왕국과의 전쟁과 최후
461년, 마요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으로부터 수복하기 위해 해군을 카르타고노바로 집결시켰다.[5] 그런데 내부의 배신자들이 이 사실을 반달 왕국의 왕 가이세리크에게 알려줬고[6] 이에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이끌고 기습해 화공으로 서로마 함대를 궤멸시켰다.피해가 막심하자 결국 원정을 단념한 마요리아누스는 이탈리아로 쓸쓸히 귀환했다. 이때 마요리아누스의 친구이자 권신이었던 리키메르는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입지를 다지고 있었던 마요리아누스에게 불안과 불만을 동시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요리아누스의 북아프리카 원정이 실패로 끝난 틈을 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리키메르의 속내를 모르고 있었던 마요리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이끌던 군대를 해산하고 소수의 병력만 이끌며 이탈리아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중요한 패착이었다. 461년 8월 2일 리키메르는 무장해제 상태였던 마요리아누스를 토르토나 인근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후 그의 보라색 의복과 황관을 빼앗고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5일 후인 8월 7일 마요리아누스는 참수당했고, 그의 시신은 일리아 강에 던져졌다.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한 후 리키메르는 3개월 동안 뜸을 들이다가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충신이자 친우였던 갈리아 총독 아에기디우스[7]가 격하게 반발하자 리키메르는 어이없게도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굴복시킨 서고트군으로 아에기디우스를 막았고, 이 과정에서 마요리아누스가 힘겹게 수복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서고트와 부르군트에 팔아 넘겼다. 거기에다가 아에기디우스가 서고트 군대를 박살내면서 서로마군은 더욱 암담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3. 평가
보통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무너져가는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일컫는데 마요리아누스도 황제가 된 후 짧은 시간 동안 만만치 않은 군사적, 행정적 성과를 거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재위 기간이 4년밖에 안되는 데다가 반달족 정벌에 실패하고 비참하게 죽은 탓에 최근까지도 리키메르에 의해 살해당한 바지 황제 중 한명 정도로 저평가되어 있었다. 다행히 서로마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능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8]서로마 제국은 마요리아누스가 참담하게 살해당한 이후에도 명목상으로는 15년 동안 유지되었지만 서로마 제국의 수명은 그의 죽음으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마요리아누스가 처형된 후 그를 따르던 무장들이 대거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그가 수복한 영토는 금세 서로마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예를 들어 갈리아 주둔군을 담당하던 아에기디우스(Aegidius)나 달마티아에 있었던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 등의 장군들이 모두 황제를 시해한 권신 리키메르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고 이들은 사실상 독립 세력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마요리아누스야말로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타이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이하의 서술은 로마사와 관련된 인물들이 마요리아누스에 대해 남긴 이야기이다.
"신민들에게 친절했던 것, 적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었던 것, 모든 덕목에서 두루 뛰어났던 것은 그 때까지 로마인들을 다스렸던 모든 황제들을 능가했다."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9]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9]
"그는 모든 덕목에서 그 이전까지 로마인들을 다스렸던 황제들을 능가했다."
프로코피우스
프로코피우스
"그는 인류의 명예를 증명한 인물이며, 혼란스러운 난세에 나타난 영웅이다."
에드워드 기번
에드워드 기번
"5세기에 그 지위(로마 황제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자들 중에 그에 조금이라도 어울릴 만한 위대함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그가 유일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07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07년판)
보다시피 호평 일색이다. 특히 마요리아누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시도니우스의 평가는 현장 증인의 증언이라는 면에서 주목된다. 물론 "역대 황제들을 다 합쳐도 너님이 짱" 같은 서술은 당연히 과장된 것이지만 직접 아부하는 게 아닌 이상 평범한 군주나 암군을 이렇게 최고라고 치켜세우기는 어렵다.
4. 창작물에서
게임 < 토탈 워: 아틸라>의 역사적인 전투에 포함된 카르타헤나(461년)에서 플레이어는 반달족을 지휘해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만든 서로마 함대를 격파해야 한다.마요리아누스를 중심으로 서로마 말기와 중세 초기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영어 유튜브 채널이 있다. 채널 이름 자체가 Majorianus인데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1]
마이오리아누스의 딸로 추정.
[2]
라틴어: iuvenis
[3]
일부 기록에는 그가 아비투스를 굶겨 죽이거나 목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4]
리키메르는 순수한 게르만족인데다가 이단인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5]
카르타고노바는 오늘날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카르타헤나에 해당된다. 마요리아누스가 함대를 집결시킨 곳은 정확하게는 카르타고노바의 근처에 있는 일리키타누스 항구(Portus Illicitanus)였다.
[6]
애초에 리키메르가 이 배신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다.
[7]
서로마 제국 최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가운데 한 명으로 이른바
수아송 왕국이라고 불리는 갈리아의 서로마령 속주를 이끌었다.
[8]
이와 반대로 마요리아누스를 죽인 리키메르에 대한 평가는 계속 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예 서로마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9]
5세기 중엽을 살았던. 그러니까 마요리아누스의 치세를 직접 겪었던 로마의 시인이자 외교관,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