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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5 00:43:10

아에기디우스

아에기디우스
라틴어: Aegidius
생몰년도 미상 ~ 464년
출생지 서로마 제국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루그두눔[1]
사망지 서로마 제국 갈리아 아우구스타 수시오눔[2]
지위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국가 서로마 제국
가족 시아그리우스(아들)
참전 마요리아누스 서로마 제국 회복 전쟁
갈리아 패권 전쟁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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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갈리아에 잔존한 로마군 사령관으로,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서로마 제국을 회복시키기 위한 전쟁에 착수했을 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461년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하고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자 이에 불복해 갈리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켰다. 이후 프랑크족과 연합하여 서고트 왕국, 부르고뉴 왕국을 상대로 성공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3년만에 사망했다.

2. 생애

그가 속한 시아그리우스 가문은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의 중심지인 루그두눔에 자리를 잡은 지역유지 집안으로, 382년 아프라니우스 시아그리우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이래 서로마 제국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일찍이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부관으로 발탁되어 446년 아에티우스가 살리 프랑크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일 때 루아르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아에티우스의 또다른 부관이었던 마요리아누스와 절친한 관계가 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451년 아에티우스가 훈족의 왕 아틸라의 갈리아 침공에 맞서 카탈라우눔 전투를 벌였을 때도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에티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피살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 마저 살해되고 반달족 가이세리크의 지도하에 로마를 약탈하는 등 로마 정계가 혼란에 휩싸인 가운데, 그는 변함없이 갈리아에 복무했다. 457년 아비투스를 폐위시킨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옹립한 마요리아누스에 의해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선임되었다. 서고트 왕국의 국왕 테오도리크 2세는 자신이 후원했던 아비투스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마요리아누스를 적대했다.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서고트 왕국과 맞서 싸우기로 하고, 458년 말에 군대를 이끌고 남부 갈리아로 진군했고, 그도 군대를 이끌고 마요리아누스에 가세했다. 마요리아누스와 아에기디우스는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남부 갈리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테오도리크 2세는 마요리아누스와 새 조약을 맺어 그를 용인하고 마요리아누스가 확보한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

한편, 아비투스를 지원했던 루그두눔 귀족들은 마요리아누스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부르군트 왕국에 도시를 넘겨줬다. 이에 아에기디우스는 459년 마요리아누스의 명을 받들어 살리 프랑크인들과 동맹을 맺고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해 단숨에 격파하고 루그두눔을 탈환했다. 사로잡힌 부르군트족 전사들은 로마군에게 강제로 편입되었고, 루그두눔 시민들은 처음엔 무거운 벌금을 내야 했지만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을 받아들인 마요리아누스가 관용을 베풀면서 벌금이 감면되었다.

그는 갈리아에서 상당히 강력한 영향력을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저술한《프랑크인의 역사》에 따르면, 그는 신하들의 아내들을 겁탈했다가 백성들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쫓겨났고, 백성들은 갈리아 민병대장 아에기디우스를 왕으로 모셨다. 그는 8년간 튀링겐에 망명하면서, 튀링겐 왕의 아내 바시네와 사랑에 빠졌다. 이후 프랑크인들이 돌아와서 왕이 되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귀국하면서 남편을 떠난 바시네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클로비스 1세가 태어났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별로 없다고 보지만, 조르주 보르도노브는 이 이야기는 킬데리크 1세와 아에기디우스의 대립을 암시한다고 본다. 당시 아에기디우스는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족, 프랑크족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만들어서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킬데리크는 이를 거부했다가 로마인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프랑크인들에게 축출되었고, 나중에 킬데리크가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한 뒤 아에기디우스의 승인을 받고 프랑크 왕에 복위했을 가능성이 있다.

460년, 아에기디우스는 마요리아누스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해 사라고사를 거쳐 히스파니아 깊숙히 진군해 카르타기니엔시스까지 나아가 서로마 제국이 히스파니아의 패권을 탈환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반달 왕국에게 빼앗긴 아프리카 속주를 탈환하고자 카르타고노바로 집결시켰다.[3] 그런데 내부의 배신자들이 이 사실을 반달 왕국의 왕 가이세리크에게 알려줬고[4] 이에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이끌고 기습을 가해 화공으로 서로마 함대를 구멸시켰다. 결국 마요리아누스는 아프리카 탈환 계획을 차후로 미루기로 하고, 이탈리아에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돌아가면서 아를에 주둔한 군대의 지휘관을 그에게 맡겼다.

461년,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마요리아누스를 체포해 처형한 뒤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세웠다. 아에기디우스는 이에 분노해 리비우스 세베루스와 리키메르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수시오눔[5]을 중심으로 한 북부 갈리아에서 독립하고, 리키메르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이에 리키메르는 462년에 자신의 추종자인 아그리피누스를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해 아에기디우스를 상대하게 했다. 아그리피누스는 마요리아누스의 통치 시기 국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가 리키메르에게 사면된 적이 있었다. 아그리피누스는 이 인연으로 리키메르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고 그의 의향에 따라 아에기디우스에 대항했다.

아에기디우스는 아를 전투에서 아그리피누스를 격파했지만, 갈리아 북부에 대한 이민족의 침략에 대처하고자 그곳을 떠나야 했고, 부르군트 왕국은 그 틈을 타 루그두눔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이리하여 그는 이탈리아로 축소된 서로마 제국 본토와 단절되었다. 한편 히스파니아 역시 마요리아누스에 의해 사령관으로 선임된 장군들이 리키메르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서고트 왕국 쪽으로 전향하면서, 마요리아누스가 4년간 이뤘던 업적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편, 아그리피누스는 서고트 왕국의 국왕 테오도리크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을 도와준다면 나르본 시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나르본 시를 공략하고 싶었던 테우도리크 2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프레데리크를 시켜 아에기디우스를 치게 했다. 그러나 아에기디우스는 오를레앙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했고, 프레데리크는 전사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아에기디우스는 여세를 몰아 쉬농을 포위하고 물 공급을 끊어버렸지만, 갑자기 장대비가 내리자 시민들이 빗물을 모아둔 바람에 단시일에 함락하기 어렵게 되자 철수했다고 한다.

이후 킬데리크 1세 프랑크족과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색슨족, 서고트 왕국을 상대로 루아르와 솜 사이의 영토를 유지한 그는 464년 5월 가이세리크에게 사절을 보내 이탈리아와 서고트 왕국에 대한 동시 공격을 제안했다. 그러나 464년 말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사망했다. "역병으로 사망했다."는 설, "리키메르에게 암살당했다."는 설이 제기되나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사후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했다.
[1] 오늘날 프랑스 리옹 [2] 오늘날 프랑스 수아송 [3] 카르타고노바는 오늘날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카르타헤나에 해당된다. 마요리아누스가 함대를 집결시킨 곳은 정확하게는 카르타고노바의 근처에 있는 일리키타누스 항구(Portus Illicitanus)였다. [4] 애초에 리키메르가 이 배신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다. [5] 현재 프랑스 수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