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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89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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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콘스탄티노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
출생 | 855년 ~ 865년 사이 |
동로마 제국 | |
사망 | 879년 9월 3일 |
동로마 제국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868년 1월 ~ 879년 9월 3일 (11년) | |
전임자 | 바실리오스 1세 |
후임자 | 바실리오스 1세 |
부모 |
아버지 :
바실리오스 1세 어머니 : 에우도키아 잉게리나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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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868년 1월 아버지 바실리오스 1세에 의해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879년에 사망했다.2. 생애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생 레온 6세의 생년인 866년 이전 몇년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혈통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지금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로 명시되었지만, 10세기 동로마 역사가 시메온 로코고테테(Symeon Logothete)는 레온 6세가 미하일 3세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면서도 콘스탄티노스의 친부모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다고 기술했고, 시메온의 역사서 일부 사본에서는 콘스탄티노스 역시 미하일 3세와 에우도키아의 아들이라고 기술했다.현대의 상당수 역사가들은 바실리오스 1세가 에우도키아를 맞이하기 전의 아내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본다. 바실리오스가 에우도키아의 자식인 레온 6세 등을 미워하면서도 콘스탄티노스를 유독 감싸고 돈 까닭은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콘스탄티노스는 자기 자식이라고 확신했지만 미하일 3세와 줄곧 관계를 맺은 에우도키아가 낳은 레온 6세 등은 미하일 3세의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에우도키아의 자식이 아니라고 볼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반론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바실리오스가 콘스탄티노스를 이뻐하고 레온 등을 미워한 것은 어머니가 달라서가 아니라 성격 차이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렇듯 그가 바실리오스 1세와 마리아의 아들인지, 바실리오스 1세와 에우도키아의 아들인지, 아니면 미하일 3세와 에우도키아의 아들인지 여부는 현재까지 결론나지 않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867년 미하일 3세를 살해하고 황위에 오른 바실리오스 1세는 콘스탄티노스를 매우 총애했다는 것이다. 868년 1월, 콘스탄티노스는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선임되었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종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포티오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870년에서 871년 사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의 딸인 예르멘가르드(Ermengard)와 약혼했다.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사이가 돈독해졌을 테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 바리 수복 작전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은 것에 반감을 품은 동로마 제독이 루도비코를 '프랑크의 왕'으로 부르자 루도비코는 모욕에 분통을 터뜨렸고[1], 약혼은 얼마 안가 파기되었다.
878년 아버지의 시리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879년 1월 게르마니키아(현재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스) 일대 공략에 착수해 게르마니키아와 아다타를 약탈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급습했다. 또한 바실리오스 1세가 주관한 공의회에 언제나 공동 황제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바실리오스 1세 치세에 발행된 동전 대부분에 바실리오스 1세와 콘스탄티노스 부자를 동시에 담은 초상화가 실려 있었다.
그러던 879년 9월 3일, 콘스탄티노스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바실리오스 1세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아들의 사망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880년 3월 3일까지 6개월간 애도 기간을 가진다고 선포했다. 879년부터 바실리오스 1세가 사망하는 886년까지 발행된 동로마 동전에는 그를 추모하는 의도로 발행된 주화가 상당히 많았다. 이후 레온 6세와 알렉산드로스 2세가 차기 황제로 지명되었지만, 콘스탄티노스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이 컸던 바실리오스 1세는 두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특히 레온을 미워하다 못해 증오한 나머지 반역 혐의를 씌워 두 눈을 뽑으려 했다가 아내와 신료들의 간곡한 만류로 실패하고 감옥에 수감했다. 그러다 886년 8월 29일 바실리오스 1세가 의문사했고, 레온 6세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선임 황제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