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우스 발비누스 막시무스 Valerius Balbinus Maxim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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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 | 미상,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전체 이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발비누스 막시무스 Lucius Valerius Poplicola Balbinus Maximus |
직위 | 원로원 의원 |
가족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증조할아버지) 코엘리아 발비나(증조할머니)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할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아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바실리우스(손자) |
경력 | 집정관(2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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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2. 생애
전체 이름이 길어, 통상적으로 발레리우스 발비누스 막시무스라고 부른다. 이름 중 발비누스에서 드러나듯이 발비누스 황제의 친척이다.증조할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가 직계조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의 어머니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의 딸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친정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으로 성씨를 바꾸며 탄생시킨, 3세기 이래 로마 제국 최고의 파트리키 명문가 신(新)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은 1세기 귀부인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남편으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가 데릴사위로 맞이한 에퀴테스 출신의 청년인, 17년 법무관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갈루스를 사실상 시작으로 본다. 이때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갈루스는 메살리누스의 딸로, 본인의 이모뻘 나이 차이였던 연상의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그는 두 아들을 얻었는데, 장인 메살리누스는 외손자 모두에게 일찍이 코그노멘으로 영원히 메살라를 쓰고, 나아가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의 대가 끊기고 난 뒤 원하는 경우 발레리우스 성씨를 쓰도록 허락받은 빕스타누스 성씨를 본래 노멘으로 쓰게 했고, 이 이야기는 당대부터 유명해, 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부터 원로원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따라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가 당대의 권세가 발비누스 가문 출신 아내를 맞이하고, 성씨를 빕스타누스에서 발레리우스로 환원한다는 식으로 성씨를 바꿀 때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당시, 로마인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발레리우스 발비누스 막시무스는 이 가문에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막시무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매우 길어, 당대부터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로 불린 원로원 의원으로 푸피에누스의 지지자였고, 발비누스의 조카뻘 친척이다.
그는 매년 에퀴테스로 구성된 세비 에퀴툼 로마노룸 중 한 명으로 지명된 것을 시작으로, 1년 동안 도시(로마) 관리를 맡는 업무를 첫 공직 경력에 담았고, 이후 쿠르수스 호노룸을 밞아 나갔다. 그는 재무관, 조영관을 지낸 다음, 240년 이전이던 고르디아누스 3세 등장 직전이던 시절이던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공동 통치 당시, 젊은 나이임에도 이미 법무관에 도달한 다음, 지명받는 형태로 프리토르 투텔라리스(후견 문제를 담당하는 관리)직에 후보자가 됐다. 이때 그는 대개의 파트리키 집안 후계자들처럼 두 황제 중 푸피에누스의 아우구스티로 지명받아 발비누스 쪽보다는 푸피에누스를 지지한 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할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1]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일으킨 프라이토리아니 일부의 궁중 정변으로 살해되고, 고르디아누스 3세가 등장한 시점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고위직, 선출직 경력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고, 필리푸스 아라부스 시대부터 다시 이름을 올린다. 이때 발레리우스 발비누스 막시무스는 아시아 지방의 레가투스 프로콘술리스로 임명돼, 아시아 속주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절, 그는 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황제의 추천을 받거나, 지명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지지했고, 두 황제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출신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만큼, 필리푸스 아라부스 몰락 이후부터 다시 경력을 쌓았다. 그는 253년에 집정관직에 올라 볼루시아누스 황제와 함께 집정관직을 맡았고, 그 해 첫 몇 달 동안 볼루시아누스가 살해될 때까지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이 당시, 그는 새로운 황제로 등장한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숙청당하지 않았다.
254년에서 260년 사이, 발레리우스 발비누스 막시무스는 이탈리아 두 도시의 공공 문제를 처리하고 감독하는 업무와 치안판사 업무를 함께 떠맡았다고 하며,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아래에서는 로마에서 물과 곡물 유통을 담당하는 관리직인 아쿠아룸 에트 미니아이가 됐다. 이후 플라미니아 가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임무와 함께 프라이펙투스 알리멘토룸이 되어, 로마에 식량을 제공하고 담당하는 중책을 떠맡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 역할 외에는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에게 다음 집정관 후보 출마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속주 총독 취임 기회도 박탈된 채 이탈리아 로마에서만 머물다가 죽었다.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280년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를 얻었다.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절 로마에 있던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의 저택 주인으로 유명하다. 발레리우스 발비누스 막시무스의 손자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이자 동료라고 찬사받은 원로원 의원이자 대정치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바실리누스이며, 증손자는 저명한 이교도 원로원 의원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이다.
[1]
236~238년의 기간동안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