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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5 21:01:26

파트리키

파일:파트리키 가족.jpg

1. 개요2. 기원3. 위상의 변화4.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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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atrici, patricius

라틴어 명사 "patres(아버지)"에서 비롯된 용어로, 고대 로마 귀족 계급 집단을 가리킨다. 로마 공화국 초기에 권력을 독점했지만, 평민( 플레브스)들과 거듭된 충돌과 타협을 거치면서 많은 권력을 평민들에게 넘겨야 했고, 그 과정에서 고대 로마의 사회 구조가 발전했다. 그러다가 거듭된 전쟁으로 대가 끊기는 가문이 많아지고 평민 출신의 신흥 귀족( 노빌레스)이 대두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권위만큼은 사회의 인정을 받았기에, 로마 공화국에서 로마 제국을 거쳐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명예 칭호로 사용되었다. 노빌레스가 평민 귀족이나 신흥 귀족으로 번역되듯 파트리키는 전통 귀족, 정통 귀족, 건국 귀족, 개국 귀족 등 로마 초기부터 있던 권력집단 씨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번역된다.

파트리키 가문들 내에서도 주요 씨족들(Gentes Maiores)과 그 외의 씨족들(Gentes Minores)이 구분되었다고 하는데, 주요 씨족들의 정확한 목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레리우스, 파비우스, 아이밀리우스 등 몇몇 가문들은 거의 확실하게 주요 씨족에 속했다고 여겨진다.

2. 기원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로마 왕국의 건국자 로물루스 원로원 의원으로 삼은 100명의 인사들이 "아버지(patres)"로 불렸고, 이들의 후손이 파트리키가 되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로물루스가 지혜로운 원로 100인에게 고귀한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일반 평민( 플레브스)들과 분리된 파트리키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로물루스가 부를 기준으로 삼아 파트리키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로물루스가 파트리키를 창설했다기보다는 부족 국가로 출발한 로마가 주변의 세력을 흡수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개념이 도래했다고 본다. 즉, 로마가 흡수한 부족의 옛 부족장은 파트리키, 부족민은 평민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자칫 소원해질 수 있는 부족장과 부족민들의 관계를 기존처럼 유지하기 위해 클리엔텔라 관계가 등장했다. 파트리키는 자신 휘하의 평민들을 "클리엔테스"로 삼아서 보호해줬고, 클리엔테스는 그런 그들을 "파트로누스"로 받들며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파트리키는 비단 로마 출신 귀족에 국한되지 않았고,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국 초기 시대에 로마로 이주한 타 도시의 귀족들 역시 파트리키로 인정받았다. 타 도시의 씨족이 파트리키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의 봉기로 축출된 지 5년 후인 기원전 504년에 사비니 귀족 아티우스 클라수스가 500명의 친족들과 함께 로마로 망명하면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형성한 것이었다.

3. 위상의 변화

로마 공화국 초기에는 파트리키의 위상이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대다수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원로원에서 국정을 이끌었다. 특히 신들과 소통하고 신성한 의식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 모든 사제직은 오직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평민이 관직을 맡는 게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출세 과정에서 많은 제약이 따랐고,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은 귀족들이 독점했다. 또한 정복지 중 가장 좋은 땅을 우선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고, 선거에서 우선적으로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로마 군단의 지휘권을 독차지했다. 평민들은 프라이노멘(개인 이름)과 노멘(씨족)만 사용한 데 비해, 파트리키는 코그노멘(가문)을 추가로 사용해 평민과 구별되었다.

이렇듯 파트리키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위를 갖추고 평민들을 통제했지만, 로마가 주변국들과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군공을 세우고도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고 착취만 당하는 것에 평민들이 불만을 품기 시작하면서, 사회 갈등이 심화되었다. 급기야 기원전 494년 평민들이 더이상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아니오 강 뒤편에 있는 성산(聖山)[1]에 집결해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 하는 성산 사건이 벌어졌다. 귀족들은 처음에는 이들을 힘으로 억누르려 했지만, 평민들의 협조 없이는 외적의 침략에 맞서고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타협하기로 했다.

이후 수백년간 파트리키와 평민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파트리키들은 평민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다. 기원전 494년 평민회가 창설되어, 원로원이 정책을 결정해도 민회의 동의를 거쳐야만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평민의 대표자로서 호민관이 신설되었고, 평민이 빚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노예로 전락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기원전 450년엔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표법이 도입되었다. 이때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이 기재되었지만, 기원전 445년 평민들이 또다시 성산 사건을 단행하며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폐기되고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허용하는 카눌리아 법(Lex Canuleia)이 도입되었다.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icinio -Sextian rogations)이 도입되면서 파트리키의 공공 토지 소유가 제한되고 호민관 직무를 수행한 인사가 원로원 의원에 우선적으로 편입되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2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무조건 평민이 선출되어야 했다. 파트리키는 이에 대응해 귀족만이 재임할 수 있는 법무관을 설립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게 했으나, 나중에는 평민 출신 인사가 법무관에 선임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lex Ogulnia)이 도입되면서 그동안 파트리키만 도맡았던 사제를 평민이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민회가 결정한 정책은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더라도 효력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평민들이 오랜 투쟁과 타협을 병행한 끝에 상당한 권력을 확보했지만, 파트리키는 여전히 강력한 재정적, 정치적 권력을 유지했다. 그들은 클리엔텔라 관계를 잘 활용해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최고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파트리키들의 전유물이었다. 또한 로마가 포에니 전쟁 등 수많은 대외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거둬들인 막대한 부와 토지를 독식하고 무수한 노예를 확보해 로마 사회의 최고 계급으로서의 특권을 돈독히 누렸다.

4. 쇠락

전쟁이 일상이나 다름없는 로마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으려면 전장에 나아가 군공을 쌓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파트리키들은 군공을 세우기 위해 전장에 앞장서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수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파트리키들은 양자를 맞이하는 방식으로 가문의 대를 이으려 노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공화정 후기에 무수한 가문의 대가 끊겼다. 급기야 기원전 1세기에는 파트리키가 거의 남지 않을 지경이었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새로운 파트리키의 등록을 위한 특별법인 카시야 법(lex Cassia)을 도입했다.

이들의 빈자리는 평민 출신이지만 출세를 거듭하면서 파트리키와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된 '평민 귀족'( 노빌레스, Nobiles)이 대체했다. 이들은 본래 평민 출신이었기에 평민만으로 구성된 민회에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하고 호민관으로 뽑히는 등 평민들의 대표자로 행세하면서도 잔존한 파트리키 가문과 거리낌없이 통혼하고 그들과 같은 특권을 누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조금이라도 제약하려는 움직임을 차단하는 데 있어 파트리키보다 더욱 열성적이었다. 한 예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에 전면으로 맞섰던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기원전 165년 집정관에 오른 노빌레스 계급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이었다. 또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을 훼방놓은 끝에 몰락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의 수호자" 칭호를 얻었다.

반면, 평민의 지지를 등에 업어 기존의 정치 판도를 뒤엎어서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원로원과 파트리키의 권위에 정면 도전했으며, 원로원에서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마다 민회를 이용해 법을 통과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투표권을 확장하고, 빈곤을 구제하고, 농업, 식민도시, 곡물법 등 광범위한 복지 개혁을 추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법질서를 유린하고 정치테러를 서슴지 않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령,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자기가 밀어주는 후보가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하자, 추종자들을 시켜 집정관에 당선된 자를 살해해 버렸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폭동을 일으켜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목숨을 위협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영합해 술라가 가지고 있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버렸다가 술라의 로마 진군을 초래했다. 그리고 마리우스는 술라에게 축출되었다가 도로 복귀한 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등과 함께 수많은 이를 살상했다. 이렇듯 파트리키와 영합하여 평민들을 위한 개혁을 저지하는 자들은 옵티마테스, 평민들의 대표를 자처해 기존의 정치 판도를 뒤엎으려는 자들은 포풀라레스라고 일컬어진다.

파트리키 및 그들과 결탁한 노빌레스로 구성된 옵티마테스 파벌은 특정인의 명성이 너무 높아져서 자신들의 영향력까지 위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가문이나 개인이든간에 동료 정무관들 위에 군림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고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신참자가 자기들과 동격이거나 심지어 윗선에 서는 일, 누군가가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일 등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됐다. 공화국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급하여 집정관을 맡은 뒤, 총독으로 부임하여 몇년간 일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원로원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진급 절차도 거치지 않고 벼락 출세하여 위세를 떠는 폼페이우스나 평민 출신으로서 7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하고 나중에는 수많은 귀족을 해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처조카로서 마리우스의 뒤를 따르겠다는 뜻을 대놓고 드러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경계대상이었다.

특히 카이사르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트란살피나, 일리리쿰 속주를 동시에 맡고 6만에 달하는 병력을 10년씩이나 이끌었다. 이는 한 개인이 누리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이었다. 그런 자가 마리우스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카이사르를 어떻게든 배제해야 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를 부추겨 카이사르와 상대하게 해서 카이사르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카이사르는 내전이 끝난 뒤 자신과 맞서다가 항복한 귀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정계에서 변함없이 활동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그들은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을 맡아서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집정관을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정한 대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꼭두각시로 전락한 것을 지켜보고, 카이사르가 종국엔 왕이 될 거라 여겼다. 특정인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그들로서는 이는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사태였다. 결국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해방자'를 자처한 이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러나 뒤이은 내전에서 해방자파가 카이사르의 후계를 자처한 제2차 삼두정치파에게 패하면서, 옵티마테스는 위세를 거진반 상실했다. 그 후 카이사르의 후계자들끼리의 내전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교묘한 정략을 통해 공화정을 가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정인 독특한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파트리키 신분이지만 다른 가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버린 이들을 후원해, 여전히 로마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그들을 자기 편으로 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파트리키들이 공화정 시절로 회귀하기를 원했고, 후대 황제들은 이들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파트리키들이 숙청되어 명맥이 끊겼고, 권력은 황제의 권력에 기생하는 에퀴테스에 넘어갔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수립한 뒤, 왕정~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파트리키 가문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통혼해 명맥을 이었다. 그렇지만 대개는 아우구스투스 암살 미수, 티베리우스 암살 미수, 칼리굴라 암살 미수 및 칼리굴라 암살 사건 등에 연루되거나 사건 발발 후 누명을 쓰고 숙청되거나 몰락귀족이 되어 북이탈리아나 남이탈리아 시골로 쫓겨나면서 그 위세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네로 시대에 벌어진 소 아그리피나의 정적 제거, 세네카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의 전횡,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무고 재판, 피소 음모 사건, 베네벤툼 음모 등 속에서 오래된 파트리키 가문들이 거진 피해를 입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네로 몰락 후 네 황제의 해를 거쳐 등장한 플라비우스 왕조 대에 이르게 된 뒤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아래에서 집중 견제를 받아 숙청이 네로 시대보다 가속화되고, 그 자리는 이들이 새로 파트리키 지위를 내려 원로원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 속주, 식민도시 출신 신흥 귀족들 몫이 된다. 그렇지만 몇몇 파트리키 가문은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해 군인 황제 시대 푸피에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등 일부 황제를 배출한다. 하지만, 군인 황제 시대가 끝날 무렵이 되면, 원로원의 위상 하락과 갈리에누스 대부터 떠오른 군인 귀족들의 연이은 집권과 발호 아래 종적을 감췄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고위 관직을 역임한 측근들에게 파트리키 칭호를 부여한 것을 시작으로, 파트리키는 고위 관료들에게 주어지는 명예 칭호가 되었다. 파트리키는 서로마 제국 말기에 드물게 사용되었고 높은 명성을 유지했으며,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콘스탄티우스 3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들은 하나같이 이 칭호를 사용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파트리키 칭호는 계속 사용되었다. 최고의 고위 직위를 보유한 자는 프로토파트리키오스(πρωτοπατρίκιος, "최초의 귀족")라는 칭호로 일컬어졌으며, 여성형으로 변형된 파트리키아(πατρικία)는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은 인물의 배우자를 나타냈다. 그러나 점차 마기스트로스(magistros), 안티파토스(anthypatos), 스트라테고스(strategos)에게 밀려 빈도가 줄어들다가 12세기 초 콤니노스 왕조 치세 동안 사라졌다.


[1] 현재 이탈리아 로마 몬테 사크로(Monte Sac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