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ia Soaemias
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인물.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이자 율리아 마마이아의 언니이며, 엘라가발루스의 모친이다. 아들이 황위에 오른 뒤 황제의 어머니로서 군림해 어머니와 함께 정계에 깊게 관여하였으나,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아들이 프라이토리아니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공식적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지지 않은 아들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원로원에게 정식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으며 '공공의 적'으로 의결돼 사후 로마 전체에서 금기시됐다.2. 생애
2.1. 초년기
서기 180년경 시리아의 주요 도시인 에메사에서 부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와 모친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로마의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모친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를 섬기는 대사제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딸이었다. 193년경, 그녀는 시리아 에메사 출신의 기사계급인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셀루스와 결혼했다.이모 율리아 돔나의 남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정적들을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한 뒤, 소아이미아스 부부는 로마로 이주하였고 남편 마르셀루스는 원로원에 입성했다. 부부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하나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로, 훗날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서기 208년 세베루스 황제가 칼레도니아 인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을 때, 소아이미아스는 영국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남편이 영국에서 징세관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세베루스가 죽고 카라칼라가 즉위한 뒤, 마르셀루스는 제국의 재정 관리인을 맡다가 다시 프리토리안 현과 로마시 주지사를 맡았고, 이후 누미디아 총독을 맡다가 217년 카라칼라가 암살되기 전에 사망했다.
2.2. 황제의 어머니
카라칼라 황제가 마크리누스의 꾀임을 받은 병사들에 의해 암살당한 뒤, 세베루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소아이마이스의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여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로 마음 먹고, 이를 위한 청사진을 기획했다. 그녀는 소아이미아스와 카라칼라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바시아누스가 사실 카라칼라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마이사는 외손자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데리고 시리아 군단을 방문하여 그가 카라칼라의 친아들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손자이니, 황위를 정당하게 계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3군단 갈리카는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녀의 말을 믿기로 하고, 서기 218년 5월 16일 바시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시아누스는 즉위 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했다.
이후 새 황제의 군대는 마크리누스와 격돌해 승리를 거뒀고, 마크리누스는 패배 후 로마로 가서 지원군을 규합하려고 북쪽으로 도주하다가 칼케돈에서 체포된 뒤 카파도키아의 아르켈라이스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새 황제는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고, 세베루스 왕조를 복구하겠다는 마이사의 계획은 성공했다.
소아이마이스는 아들과 함께 로마에 입성한 뒤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또한 엘라가발루스를 통해 '세나쿨룸'이라는 특별기구를 원로원에 설치한 뒤, 어머니와 함께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여 국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태양신 헬리오가발루스를 로마 판테온의 주요 신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14살 소년 엘라가발루스가 로마에 입성한 이래 태양신 숭배에 열을 올린 배경엔 그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218년 겨울 엘라가발루스와 수행원들이 니코메다아에 있을 때, 황제의 종교적 신념이 처음으로 문제로 대두했다. 안티오크 전투에서 마크리누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엘라가발루스의 등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간니스 장군이 엘라가발루스에게 살해당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간니스는 엘라가발루스에게 "절제하고 신중하게" 살라고 조언했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역시 소아이미아스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에 입성한 이래 수많은 기행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 급기야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의 아내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이혼하고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인 아퀼리아 세베라와 결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베스타 여사제는 은퇴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에, 로마인들은 이 결혼을 최악의 스캔들로 간주했다. 소아이미아스는 엇나가는 아들을 방치했거나, 제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율리아 마이사는 이런 외손자를 내버려두면 왕조가 무너지고 자신과 가문의 운명 마저 위험해진다는 걸 자각했다. 이에 221년 여름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자신의 또다른 외손자이자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양자로 삼게 했다. 또한 아퀼리아 세베라와 이혼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피를 물려받은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약혼하게 했다.
그러나 민심이 알렉산데르에게 급격하게 쏠리자, 엘라가발루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221년 12월, 엘라가발루스는 아퀼리아 세베라와 재혼한 뒤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려 했다. 222년 초 부터는 아예 알렉산드르와 함께 대중 앞에 함께 서지 않았다. 222년 3월 11일 또는 12일, 엘라가발루스는 근위대장에게 알렉산데르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는 알렉산데르 지지를 천명하고, 엘라가발루스를 체포했다.
소아이마이스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라이토리아니의 주둔지에 제발로 찾아갔지만, 결국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후 소아이마이스와 아들 엘라가발루스, 그리고 총신 히에로클레스의 시신은 온 로마 시내에 질질 끌려나다니다가 난도질당한 뒤, 머리는 사라지고 몸통은 티베리스 강 하수구에 버려졌다. 원로원은 소식을 접한 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황제로 인정하고 전 황제인 엘라가발루스와 더불어 그녀 또한 아들이 국가를 망치는 데 옆에서 말리기는 커녕 적극 기여한 점을 감안하여 기록말살형을 선고받았다. 아울러 그녀는 아들과 함께 '공공의 적'으로 단죄돼, 로마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