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라틴어: Libo Rupilius Frug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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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이름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
생몰년도 | 미상 ~ 101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
가족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할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아버지) 술피키아 프라이텍타타(어머니) 리키니아 프라이텍타타(누이)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형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카메리누스(형제) 비텔리아(첫번째 아내)[1] 살로니아 마티디아(두번째 아내)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딸) 대 파우스티나(외손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외손자)[2]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외손자) |
경력 | 로마 제국 집정관(보결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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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이름이 길어 보통은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리보 프루기라고 한다.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 조카 사위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황후 대 파우스티나의 외조부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조상으로, 2세기 로마 제국을 뜨겁게 달군, 노르바누스 리키니아누스 재판을 기록한 소 플리니우스는 전직 집정관 리보 프루기라고 했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이다. 이름이 길어, 종종 정식 이름이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로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리보 프루기 혹은 프루기로 적혀 있고, 보통은 전직 집정관으로 직책이 기술됐다.64년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와 그 아내 술피키아 프라이텍타타의 자녀 중 한명이다. 리키니아 프라이텍타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카메리누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4남매 중 한명이다.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출신 가문은 각각 왕정, 공화정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과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 사이의 상호 입양과 통혼으로 완성된 명문귀족 가문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 출신이다. 당대부터 조상 전체 중 집정관 경력자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평가받았고, 할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모두 집정관을 지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피소 음모로 친척 피소 등이 네로 황제와 근위대장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를 중심으로 한 이들에게 처형되거나 추방될 때,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는 66년 혹은 68년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따라서 여러 기록을 볼 때, 어머니 술피키아 프라이텍타타 손에 키워졌고, 이때 일찌감치 베스타 여사제로 살던 누이 대신 동생 2명을 데리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가문을 이끈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 술피키아는 남편을 잃은 뒤, 네 황제의 해가 베스파시아누스의 승리와 플라비우스 왕조의 탄생으로 끝나자마자, 70년 그를 포함한 네 자녀를 원로원 회의가 열린 쿠리아 율리아로 데리고 간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에게 피소 음모 당시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탄원했다. 이 사건은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원로원 모두를 감동에 빠뜨렸고, 이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에게 어거지로 누명을 씌워 재산 일부를 강탈해간 루굴루스와 그 동료들이 원로원에게 기소됐다.
형제인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와 마찬가지로, 잘생긴 외모를 가졌고, 기품이 넘쳤다고 한다. 하지만 성격 자체가 유순했던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와는 비슷하지는 않았고, 어머니 술피키아처럼 배짱 두둑하고 꽤 공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8년 보결 집정관에 지명되어 취임했는데, 그와 그 형제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를 이상할 만큼 미워한 소 플리니우스는 노르바누스 리키니아누스 사건 당시에 그를 은근 부정적으로 표현하며 전직 집정관임에도 원로원에서 공격적으로 발언했다고 적었다. 이 사건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노르바누스 리키니아누스라는 남자가 1세기와 2세기 초 바이티카( 스페인 남부) 파견 관료이자 현지 유지들의 민심을 맡은 특사 자격 총독 당시에, 부패한 총독 카이킬리우스 클라시쿠스를 감찰한 일로 시작됐다. 노르바누스는 상관과 같은 클라시쿠스가 지나치게 부패하고, 속주민을 쥐어 짜낸 행태에 질린 나머지 고발하했다. 이때 클라시쿠스는 본인 부하와 같은 노르바누스 리키니아누스에게 물귀신 작전으로 똑같이 부패했다고 맞대응을 했고, 결국 둘 다 기소됐다. 이에 성난 바이티카 지역 대표자들은 노르바누스를 편들며 클라시쿠스를 거세게 비난했다. 바이티카 지방 출신 인사들과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부정부패 처벌에 열을 올린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그 휘하 델라토르들의 노력으로 두 사람 모두 기소되는데, 주민들과 현지 관료들이 앞다퉈서 증거를 황제에게 보낸 까닭에 두 사람 중 클라시쿠스는 유죄판결만 받으면 사형이 확정된 상태로 로마 송환까지 앞두게 된다. 헌데 카이킬리우스 클라시쿠스가 법정 회부 전 기소된 직후 사망했다. 과거의 탐관오리 중 한 명인 마르쿠스 롤리우스처럼 부담감 때문에 정황상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원로원은 피고가 자살해도 재판을 집행해 죄를 묻겠다고 재판을 속개시켰다. 따라서 클라시쿠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고, 한참 시간이 흐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 결국 최종 유죄를 받고 유가족이 대신 처벌받고 관련자들이 추방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이 사건의 델라토르이자 검사를 맡은 소 플리니우스는 노르바누스의 고발을 방해하고, 원로원 안에서 공격적으로 발언한 이 중 마치 리보 프루기도 있는 양 묘사했다. 하지만 소 플리니우스가 젊을 적부터 유독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미움을 받지 않은 보결 집정관, 법무관들을 부정적으로 기술한 것을 생각해보면, 리보 프루기가 진짜 악인이나 이 사건의 방해꾼이었는가에 대해선 논쟁이 있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는 101년 병으로 죽었다. 일설에 따르면 아내 살로니아 마티디아와 이혼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현재는 그가 죽은 해에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세번째 결혼이 끝났다고 하여, 사별로 보면서 이혼했다고 확정하지 않고 있다.
최소 2번 결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첫 아내로 추정된 여성은 비텔리우스 황제의 딸인 비텔리아(비텔리아 갈레리아 파쿤다)인데, 비텔리아는 재혼이었고,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와의 결혼 전에 이미 아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비텔리아 전에 첫 결혼을 했을 수 있다고도 평가받는다. 비텔리아와는 사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동생과 본인의 친구인 트라야누스의 조카로 트라야누스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딸인 살로니아 마티디아와 결혼해 사이에 유일한 혈육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를 얻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가 어쩌면 비텔리우스 황제의 딸인 비텔리아일수도 있지 않느냐고 간혹 추정한다. 왜냐하면 비텔리아의 전체 이름 중 갈레리아 때문인데, 이 이름이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일가와 대 파우스티나의 친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가에서도 사용된 이름인 점을 떠올리면, 루필리아 파우스티나가 비텔리아의 딸이라고 온전히 평하는 이는 많지 않다.
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결혼해, 최소 세 자녀를 낳았다. 이중 딸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아내로 소 파우스티나의 어머니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모, 장모, 양모인 대 파우스티나이다. 아들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를 얻었는데, 이중 안니우스 베루스의 아들이 철인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이다.
[1]
네 황제의 해에 제위에 오른
비텔리우스 황제의 딸이다.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