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라틴어: Lucius Scribonius Li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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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서기 16년 9월 13일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아버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쌍둥이 형제) 스크리보니아(누이) 스크리보니아(고모) 대 율리아(고종사촌)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외삼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친척) |
직업 | 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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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의 전처(前妻) 스크리보니아 집안 사람으로, 스크리보니아의 조카,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 대 율리아의 사촌이다. 16년 집정관 당시, 이란성 쌍둥이 동생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와 함께 티베리우스 황제와 황제의 외삼촌이자 혈연상 친척어른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를 암살하려는 반역 혐의로 기소돼, 처형되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2. 생애
로마 공화정 후기부터 이름을 떨친 노빌레스 가문 스크리보니우스 가문 출신이다. 그의 코그노멘 리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집안은 본래 로마의 여러 노빌레스 중 자타가 인정한 명문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조상이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에 입양되면서 시작됐다.아버지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이다.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항한 옵티마테스로, 기원전 49년 카이사르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편을 들었다. 이때 그는 에트루리아에서 카이사르에게 저항했고, 카이사르에게 패배 후 폼페이우스를 따라 그리스로 건너갔다. 비불루스가 죽은 후, 그는 폼페이우스 함대의 지휘권을 맡았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세력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했다. 이후, 그는 종신 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 밑에서 조용히 원로원 의원으로 있다가,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한 폼페이우스의 차남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다. 이때 그는 사르데냐,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섬을 장악한 사위를 도왔고, 카이사르의 외종손이자 양자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에게 맞섰다. 그러다가 기원전 40년 이복누이동생 스크리보니아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결혼을 전제로 양측은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정이라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결혼에서 그의 이복누이동생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친자녀 대 율리아를 낳았고, 그는 제2차 삼두정치 쪽과 연을 맺게 됐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 스크리보니아가 율리아를 낳은 직후 이혼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제2차 삼두정치 사이의 전쟁이 재개된다. 이때 그는 사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지나치게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모습 등에 실망해, 사위 폼페이우스를 포기하고, 기원전 35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쪽을 지지했다. 이후,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기원전 34년 집정관에 올랐는데, 임기 이후 사망했다.
어머니는 술피키우스 가문 출신의 귀부인으로 이름은 미상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남자형제는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다.
아버지의 외조카는 기원전 16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피키오였다. 추가로 후일 황제가 되는 갈바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술피키우스 가문 사람이라고 했다. 따라서 갈바 어머니와 친척이었던 술피키우스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서 리보의 친척이 갈바라는 추정도 종종 나온다. 하지만 학계에선 리보와 갈바의 혈연 관계에 대해 이야기가 많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이들 부부의 세 자녀 중 한명이다. 누나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스크리보니아이며, 남자형제는 이란성 쌍둥이 동생인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다.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나, 16년 집정관에 오를 때까지는 쌍둥이 동생 마르쿠스 리보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에게 큰 호의 아래 많은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쌍둥이 형제를 도운 사람은 아버지 쪽 친척들이었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그녀의 입양형제이자 아버지의 친척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였다. 리비아, 드루수스 리보 남매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쌍둥이 동생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에게는 특별히 자신들의 가족성씨 드루수스를 덧붙여 쓸 수 있게 허락했다고 하며, 그가 "부조리를 좋아하는 뚱보 청년"으로 악명을 떨쳤음에도 보호해줬다고 한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16년 집정관에 추천된 뒤, 취임했는데, 이때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를 크게 신임했다. 하지만 그는 집정관에 오른 뒤, 쌍둥이 동생 마르쿠스와 함께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리보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델라토르들과 원로원 의원 동료들에게 고발받아, 이 사건으로 9월 13일 처형되고, 가문은 멸문했다. 이때 그의 동생 마르쿠스는 끝까지 반역 혐의를 부인한 형 루키우스와 달리, 병을 핑계로 재판을 지연시켰다가, 선고 당일 자살했다.
3. 리보 형제 반란 사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14년 로마 역사상 최초로 프린켑스, 임페라토르,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위 등을 부자상속으로 승계해, 로마의 두번째 황제로 등극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즉위 직후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친딸로 자신의 아내였고 법적 여동생인 율리아의 막내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 사건을 시작으로 온갖 추문에 시달렸고, 아우구스투스 유언장 집행 촉구 등을 이유로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일대의 로마군에게 파업을 선포받았다. 또 그는 즉위를 원로원에게 승인받고, 모두의 앞에서 발표된 선황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유산 상속 순위 공개로 인해, 시작부터 징검다리 후계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 황제는 내적인 갈등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사방에서 위험이 대두되는 상황을 맞았고,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조심히 행동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황 아우구스투스의 지시 속에서 티베리우스가 처형을 명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 사건의 여파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던 클레멘스가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다가, 세야누스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조기 진압되는 사건 등이 터진다.서기 16년, 율리아의 사촌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이런 여파 속에서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신임을 받으며 정규 집정관으로 추천받아, 1월 1일자로 집정관이 됐다. 하지만 그는 델라토르들과 동료 원로원 의원들에게 쌍둥이 동생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와 함께 반란을 비밀리에 계획했다는 혐의로 고발받아 법정에 선다.
반란을 기획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쌍둥이 동생 마르쿠스의 처신과 행적이었다. 당시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부조리를 좋아하는 뚱보 청년"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럼에도 티베리우스 외삼촌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호의와 드루수스 리보의 누나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법적으로 인척 관계로 맺어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비호 아래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쌍둥이 형 루키우스가 집정관에 추천받은 뒤, 점쟁이들에게 거액을 주고 점을 치면서, 본인이 형 루키우스가 집정관이 된 뒤, 진짜 집정관이 되자, 자신 역시 그와 같거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서 용한 점쟁이를 만나, 그에게 브룬디시움이나 브린디시까지 돈으로 아피아 가도를 포장할 만큼 부자가 될지 묻고, 앞으로 어떤 지위까지 오를 수 있는가도 점을 치라고 재촉했다.
이 사건에 관해,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원로원 의원, 변호사,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리보에 대한 비판은 터무니없고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은 당시 로마인 사고방식, 로마의 풍습 등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을 심각하게 봤다. 더욱이 티베리우스의 외삼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본가 친척이자 항렬상 조카였고, 이런 점을 치거나 묻는 것은 로마 엘리트들에게 단순히 짚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충격은 배가됐고, 루키우스 리보 역시 동생 마르쿠스가 이런 일을 벌인 것에 경악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티베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외삼촌 드루수스 리보는 자신들이 크게 신임해 친아들처럼 대우한 리보 형제에게 진노했다.
어쨌든 루키우스의 동생 마르쿠스 리보 드루수스의 행동에 티베리우스는 큰 배신감을 느꼈고, 원로원은 두 사람과 그를 따른 인사들을 원로원 법정에 세웠다. 이때 쌍둥이 형제의 외가 친척으로 변호사로 형제를 비호한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는 형제의 억울함을 계속 소리 높여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마르쿠스 리보의 노예를 심문하고 싶어 했고, 원로원에 설치된 법정에서도 해당 노예의 의견 진술은 화제가 됐다. 하지만 당시 로마법상 노예를 고문하거나 심문해 얻은 증거물은 불법이라서, 마르쿠스 리보의 명령을 강압적으로 따라야 하는 노예를 설득해 증거를 얻기란 불가능 했다. 그런데 이때 기소된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가 건장한 뚱보 청년임에도 몸이 아프고 병이 들어 재판에서 제대로 변호를 할 수 없다며 발뺌하고, 재판을 계속 지연시켰다. 이렇게 사건이 흐르자, 티베리우스 황제와 리비아, 드루수스 리보 남매의 분노는 커졌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자신과 어머니, 외삼촌에게 불경을 저지른 마르쿠스가 비열하게 행동한다며 화를 냈고, 결국 선황인 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선례로 보여준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과거에 했던 명령 그대로, 마르쿠스 리보의 노예를 황제 휘하 재무부 관리에게 소유권을 넘긴 뒤, 그를 해방노예로 만들었다. 이후 그에게 증인 자격으로 재판 출석을 지시한 다음, 재판을 진행시켰다.
이렇게 되자, 리보 형제 측과 티베리우스를 안 좋게 본 원로원 반대파 인사들은 이런 그의 행동을 냉혹하고 잔혹하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리보의 외삼촌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를 돕기 위해, 아우구스투스의 전처로 형제의 고모인 스크리보니아가 가세해 리보 편을 들고, 황제의 태도를 비난했다. 이렇게 여론전이 터지고, 증거가 명확함에도 피해자인 황제가 나쁜 사람으로 매도되자 티베리우스는 격노하면서도, 자신의 상황이 곤혹스럽게 되었다고 신세 한탄을 했다. 이때 티베리우스 황제는 스스로를
"나는 늑대의 두 귀를 붙잡고 있다."
고 말하며, 리보 재판에 대한 억울함과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고, 리보 형제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분노했다. 이는 황제 측근과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황제파로 이름을 날린 원로원 의원들도 같았다. 마르쿠스 리보는 평소 비만인 것을 제외하면 건강했고, 루키우스 리보는 재판에 출두해, 억울함을 호소한 태도는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러니 마르쿠스의 재판 지연에 대해 티베리우스 황제는 "꾀병 부리면서 책임을 피하지 마라!"고 일갈하면서, 뚱보 마르쿠스에게 형 루키우스처럼 당당하게 재판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원로원 역시 마르쿠스가 꾀병을 부리는 것이 유죄의 증거라며 황제를 편들었다. 이에 마르쿠스가 자결을 결심하기전, 눈물을 쏟으면서 고모 스크리보니아에게 재차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스크리보니아는 조카 마르쿠스를 안쓰럽게 여겼던 전과 달리, 이렇게 혼을 냈다."다른 사람이 할 일을 스스로 하는 게 무슨 보람이 있는가? 재판에 출두해서 처벌을 달게 받아라."
재판이 마무리되던 서기 16년 9월 13일, 압박감과 유죄판결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고모와 외삼촌에게 그 심정을 말하고 스스로 복부를 두 번 찌른 뒤 죽었다. 반면,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재판장에 출석해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됐다.
이 날은 원로원이 재판 끝에 여러 증거가 명확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리보 드루수스의 재산을 모두 압류해 이를 국고에 귀속하겠다고 발표한 날이었다. 그래서 발표 직후 함께 기소된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형제와 그 추종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특별 공휴일로 지정됐다. 당연한 말인데, 반역법에 따라 원로원은 죽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의 장례식에서 그 조각상과 영예를 기록말살형 차원에서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이어 황제의 이름으로 티베리우스의 외가와 아우구스투스 일가에서 자랑스럽게 사용한 이름 '드루수스'는 리보 드루수스의 유가족 남녀 모두에게 영구히 금지당한다. 그렇지만 이 조치는 모두 티베리우스가 악감정을 가지고 모두 명령한 듯 알려져, 정적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 갓 즉위한 직후 암살미수로 신변을 위협받은 티베리우스는 권력을 위해 양부의 외손자에 이어, 전처 율리아에 대한 악연으로 그녀의 외가와 그녀의 친모 스크리보니아의 조카에게 죄를 덮어 씌운 파렴치한으로 뜬소문까지 퍼져 이미지가 최악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