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라틴어: Lucius Vitell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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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51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아버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형제) 퀸투스 비텔리우스(형제)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형제) 섹스틸리아(아내)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아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 사제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34년 |
전임 |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
동기 |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
후임 |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
임기 | 43년 |
전임 |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
동기 | 클라우디우스 1세 |
후임 |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
임기 | 47년 |
전임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동기 | 클라우디우스 1세 |
후임 |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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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감찰관이자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 사제.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형제의 아미쿠스 핵심 일원인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의 동생이자, 같은 일원으로, 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아버지다.2. 생애
2.1. 비텔리우스 가문 이야기
수에토니우스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본인의 대표 저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에서 비텔리우스 가문의 기원에 대한 2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하나는 이탈리아 원주민의 왕인 파우누스와 여신 비텔리아의 후손인 고대 귀족 혈통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노예 아버지와 매춘부 어머니를 둔 비천한 처지였다가 재산을 축적해 해방된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두 가지 이야기 모두 비텔리우스 가문에 긍정적인 이들과 비판적인 이들이 편향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하며, 아풀리아 지방의 루카니아를 기원으로 둔 지역 귀족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비텔리우스 일가가 본격적으로 로마 사회에 성공한 기반을 마련한 것은, 이들이 아우구스투스 가문, 카이사르 가문으로 불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클리엔테스가 된 직후였다.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집 관리인으로 일했는데, 이때 집사 노릇을 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일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는 총 4명의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32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는 내용만 전해질 뿐,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차남 퀸투스 비텔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치세 말기에 재무관을 역임했지만, 티베리우스가 집권한 뒤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원로원에서 제명되었다.
2.2. 셋째형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의 삼남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는 루키우스 이전 비텔리우스 가문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게르마니쿠스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아울러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후일의 클라우디우스 1세)와도 자연스레 소꿉친구[1]가 됐다. 게르마니쿠스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그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함께 직접적으로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이름을 올린 제위계승권을 가진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이었다. 이는 직접 명시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 상속인, 손자로 명시된 클라우디우스도 비슷했다. 따라서 이들이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와 친분을 맺게 된 이유 역시 대개의 로마귀족들의 관습 그대로, 가부장권을 가진 아우구스투스의 입김이 개입되었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2] 어쨌든, 그는 선대부터 쌓아온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게르마니쿠스와 교류를 할 기회를 얻었다.이런 배경으로 게르마니쿠스의 친구 집단 중 핵심 친구가 됐고, 공직 생활의 기회를 얻게 됐다. 그는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을 치른 직후, 게르마니쿠스의 법적 형제, 혈연상 사촌이자, 그의 여동생 남편인 소 드루수스를 도우며 이들이 카스토르와 폴룩스로 인기를 얻는 순간에 그 측근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런 배경으로, 자신의 두 후계자 홍보에 큰 돈을 들여 심혈을 기울인 티베리우스 황제는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에게도 기회를 줬다. 그 결과, 루키우스의 형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는 동방 총책임자로 파견된 게르마니쿠스를 따라 함께 동방의 핵심인 시리아 코엘레 지방으로 떠났다.
서기 20년 게르마니쿠스와 심한 갈등을 벌이다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혐의를 받던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재판에서 원고측 변호인을 맡았다. 이때 그는 피소 재판에서 모두를 주목하게 한 연설, 재치 등으로 주목을 받았고, 티베리우스 황제,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안토니아, 소 드루수스의 눈에 제대로 든다. 그 결과, 그는 게르마니쿠스 사후 게르마니쿠스 일가를 보호자로 나서 돌본, 소 드루수스의 친구 집단에도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이는 그가 법무관을 역임했고 티베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는 소 드루수스가 세야누스와 원로원 회의 중 주먹다짐을 벌이고,[3] 그 다음날 급사한 이후부터 대세가 된 근위대장 세야누스를 추종했다. 이런 행동은 후일 게르마니쿠스의 친구 중 세야누스에게 동조한 이들이 거진 티베리우스의 진노를 얻는 배경이 됐다. 그 이유는 자신의 조카이자 양자, 친아들의 친구 집단들인 그들이 세야누스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벌인 일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근위대장 세야누스를 추종했다가 세야누스가 몰락한 뒤 긴급 체포된 후, 반역죄를 다룬 특별재판소에 회부됐다. 이때 그는 감옥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3.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경력과 삶
아우구스투스의 집 관리인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의 네 번째 아들이 바로 서기 34년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이다.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의 남동생인 대 드루수스의 미망인,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의 막내딸 소 안토니아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이런 배경은,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제수씨 소 안토니아의 말은 전적으로 신뢰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그가 총애를 받는 배경이 됐다.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티베리우스가 27년부터 카프리에 은거했을 때, 카프리 섬에 별장을 구입할 특권을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황제를 옆에서 보좌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년 뒤인 서기 28년, 티베리우스는 그를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Fratres Arvales, 아르발 형제 사제단/들판 형제 사제단)에 지명했다. 이는 곧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반역을 저지르더라도, 그에게 반역죄 아래 처형은 할 수 있어도 기록말살형과 재산 전체 몰수는 하지 않는 특권을 준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서기 31년, 세야누스가 극적으로 몰락했고 대대적인 숙청 바람이 분다. 이는 서기 33년, 티베리우스의 긴급 명령 아래 가석방되어야 할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완전 사면 및 명예회복 칙령이 내려지기 9일 전에 황궁 노예와 간수들의 농간 속에 아사하며 터진 대대적인 공포 정치 정국 속에서, 그 누구도 쉽게 황제의 총애를 얻을 수 없는 환경으로 이어진다. 이 시절, 그의 셋째형과 티베리우스의 오랜 친구들 역시 줄줄이 숙청됐는데, 그럼에도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유지했다. 따라서 서기 34년, 그는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6월 26일 티베리우스의 통치 2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35년 샤한샤 아르타바노스 2세에게 반감을 품은 파르티아 귀족들은 로마에 밀사를 보내 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 프라아테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수락했지만, 프라아테스는 귀향하던 중 시리아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손자인 티리다테스를 보냈고, 루키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티리다테스를 돕도록 했다. 비텔리우스는 4개 로마 군단을 지휘했고, 이베리아 왕국의 군주 파라스마네스 1세의 형제인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내세우며 파르티아를 위협했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아들 오로데스 휘하의 대규모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했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알바니아인 및 사르마티아 지원군과 함께 이들을 물리쳤다.
이후 파르티아 일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일단 히르카니아로 물러났고, 루키우스의 후원을 받은 티리다테스가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에 입성한 뒤 티리다테스 2세로 즉위했다. 비텔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행진하며 로마군의 위용을 과시한 뒤 배다리를 단시일에 건설해 강을 건넌 후 시리아로 귀환했다. 그 후 킬리키아 부족들이 인구조사와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타우루스 산맥에 숨어서 반기를 들자, 그는 부관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에게 토벌을 맡겼다. 트레벨리우스는 4,000명의 군단병과 함께 타우루스 산맥으로 진군해 반란군을 2개의 고개에 몰아넣어서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티리다테스 2세는 일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들은 카스피해의 히르카니아로 피신한 아르타바노스 2세를 받들었고, 아르타바노스 2세는 사카족과 다하에 연합 부족을 이끌고 셀레우키아로 쳐들어갔다. 티리다테스 2세가 어찌해야 할 지 묻자, 여러 신하가 즉시 반격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티리다테스 2세를 샤한샤로 처음 추대한 귀족 압다게스는
"아르타바노스를 지금 추종하는 자들은 과거에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이다. 아직 그에게 복종할 마음이 충분하지 않을 테니, 일단 메소포타미아로 후퇴한 후 로마와 아르메니아 지원군을 결집해 대대적으로 반격한다면, 저들은 분명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라고 조언했다. 티리다테스 2세는 그의 조언이 옳다고 여기고 메소포타미아로 물러났다.그러나 병사들이 샤한샤가 겁을 먹고 후퇴한다고 여겨 도중에 뿔뿔이 흩어졌고, 로마가 제때에 도와주지 않는 바람에 모든 게 어긋나버렸다. 결국 티리다테스 2세는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시리아로 망명했고, 아르타바노스 2세는 다시 파르티아 전역을 장악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가자, 루키우스는 37년 유프라테스 강둑에서 아르타바노스 2세와 만나 협상했다. 그 결과, 파르티아는 로마와 동등한 주권을 갖는 걸 인정받았으나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가 세운 미트리다테스임을 인정해야 했다. 이에 더해 다리우스라는 이름의 왕자를 로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독일의 고전 역사가 카를 크리스트(Karl Christ, 1923 ~ 2008)는 이에 대해 티베리우스 시기 로마 제국의 가장 놀라운 외교 성과라고 칭송했다.
한편, 비텔리우스는 유대인을 통제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37년, 유대 왕국의 헤로데 안티파스와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4세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안티파스는 아레타스 4세에게 패배한 뒤 로마에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티베리우스는 루키우스에게 나바테아 왕국을 침공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굳이 안티파스를 위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보고 공세를 차일피일 미뤘다.
37년 초,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순례자들을 살해한 유대 행정관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고발했다. 필라투스는 바빌론 유수 때 잃어버린 언약궤와 하느님의 천막 등 많은 보물이 그리심 산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믿고, 이 보물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으로 의심된 사마리아 순례자들을 잡아들인 뒤 보물의 위치를 밝히라고 강요했지만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모조리 처형했다. 루키우스는 필라투스가 폭정을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그를 이탈리아로 압송시켜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게 했고, 친구 마르켈루스에게 유대 행정을 맡겼다.
37년 3월 초, 루키우스는 헤로데 안티파스를 지원하기 위해 2개 군단을 파견했고,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렀다. 그는 그곳에서 18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인 대제사장을 수행한 가야바를 해임하고 가야바의 매부 요나단으로 대체했는데, 아마도 필라투스의 면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헤로데 대왕 사후 로마가 관리하던 신성한 의복에 대한 통제권을 유대 성전 당국에 돌려줬고, 예루살렘에 매긴 과일 판매세도 면제했다. 얼마 후 대제사장 요나단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요나단의 형제 테오필로스로 교체했다. 그러던 중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망했고 칼리굴라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바테아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포기하고 시리아로 귀환했다. 이는 티베리우스가 서거 전에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 본인과 근위대장 마크로 등 황제 최측근들이 황제 서거 한달 여 전부터 기력이 급격히 쇠약해진 이유로, 티베리우스 명에 따라 관련 조치가 미리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리아로 돌아온 뒤, 중재안을 내면서 아레타스 4세가 그의 중재에 따라 유대 지방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일을 완료지었다.
칼리굴라가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선임한 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칼리굴라가 시리아에서 일처리를 잘하고 있던 그를 굳이 교체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나중에 페트로니우스에게 유대인 회랑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을 볼 때 유대인들에게 온건하게 대하는 그가 계속 집권한다면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철저히 복종하게 만들고 싶은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심지어 칼리굴라는 루키우스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루키우스가 자신의 발 앞에 몸을 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겠다고 맹세하자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자신이 달의 여신 루나와 대화하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루키우스가 "오직 신만이 서로를 볼 수 있다"며 자신은 여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밝혔고, 칼리굴라는 그런 그를 친구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기록 이전부터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칼리굴라의 최측근 집단이라는 증거는 많고, 티베리우스 서거 전에 내려진 조치와 칼리굴라와 그의 관계를 떠올리면 야사인 부분을 간과하면 안 된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칼리굴라와 일찍부터 관계가 특별했다. 그는 어린 칼리굴라가 할머니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노예 팔라스의 기지로 겨우 목숨을 건져, 카프리 섬으로 갈 때부터 그를 지켜준 게르마니쿠스 일가의 가신이었다. 팔라스가 여주인의 간곡한 호소에 감복했고, 본인의 충성심이 대단했다고 해도,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티베리우스에게 팔라스 접견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만큼, 그는 이때부터 칼리굴라에게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이는 서기 31년 이후에도 그랬는데,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측근들에게 감시받는 과정에서도 그를 보호한 이는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였다. 더군다나 그는 클라우디우스의 측근 중 측근으로, 자신의 삼촌을 중용하면서 황권을 키우려는 칼리굴라에게 여러 도움을 많이 준 인물이었다.
루키우스가 칼리굴라에게 가장 크게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전차 경주 예측에서 천재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오늘날 생각으로는 우습게 들릴 수 있는데, 승부예측은 로마 황제, 황족들의 위엄과 그들의 인기 유지에 가장 큰 업무 중 하나였다.
칼리굴라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루키우스는 원로원 소집 후 베스파시아누스 등 칼리굴라 측근들의 항의를 지지해주다가,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아레키우스 클레멘스 등에게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지지를 받는 것을 도운다. 그 결과,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24시간도 못 되어, 칼리굴라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등이 개입된 혼란을 수습할 수 있게 됐다. 당연한 말인데, 이를 시작으로 그는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43년에 클라우디우스 1세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가 브리타니아 침공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을 때, 그는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돌봤다. 45년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의 고위 사제가 되었으며, 47년 3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이후 황제가 아닌 인물이 집정관을 3번 맡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48년에는 클라우디우스 1세와 공동으로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루키우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 외에도 발레리아 메살리나 황후 및 황제의 해방노예 비서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메살리나가 몰락했을 때 재빨리 그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소 아그리피나와 협력했다. 49년, 클라우디우스 1세는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조카라는 점 때문에 민중과 원로원이 반발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루키우스가 원로원을 소집한 뒤 제국 통치를 위해서는 사소한 윤리적 문제 정도는 눈감아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재혼을 허락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 1세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자신의 아들 네로를 결혼시켜서 네로가 차기 황제가 되기를 희망한 소 아그리피나의 의중에 따라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약혼자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여동생 유니아 칼비나와 근친상간한 혐의로 고발했다. 이로 인해 실라누스는 원로원 의원직을 잃고 파혼당했고, 네로는 옥타비아와 결혼하여 차기 황제가 될 길을 열었다. 유니아 칼비나는 루키우스의 며느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권력에 아첨해 차마 못할 짓을 서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이 덕분에 아그리피나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51년 유니우스 루푸스 의원이 루키우스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을 때 아그리피나가 직접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루키우스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해 루푸스를 추방하게 했다.
얼마 후, 루키우스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타액에 꿀을 섞은 치료제를 매일 복용했고, 대중 앞에서 경동맥에 그림을 그렸지만 끝내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황제에 대한 확고한 의무감으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자"라는 비문이 새겨진 동상이 포로 로마노에 세워지는 영예를 누렸다. 타키투스는 루키우스가 지방 총독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로마로 돌아온 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 앞에서 아첨하느라 추악한 노년을 보냈다고 비평했다.
루키우스는 화폐 주조관 마르쿠스 섹스틸리우스와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파비우스의 딸 파비아의 딸인 섹스틸리아와 결혼해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를 낳았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네로 황제의 두터운 총애를 받으며 출세 가도를 이어갔고, 네로 황제 사후 집권한 갈바 황제에 의해 라인 전선 사령관에 선임되었다가 라인 군단병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뒤 갈바를 살해하고 황위에 오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물리치고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매우 무능하고 식탐이 심해 심각한 사치를 벌인 데다가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국정에 손 놓고 지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반란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또다른 아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48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고, 형과는 달리 기병대를 이끌고 최선을 다해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를 상대했지만 끝내 사로잡힌 뒤 형이 살해되던 날에 함께 죽었다.
[1]
흔히 로마 황제, 황족들의 '친구 집단'으로 불리는 최측근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해당 인물이 황제가 될 경우, 자연스레 그 요직을 차지했고, 그들의 리더는 해당 무리의 구심점을 한 황족이나 황제가 차지했다.
[2]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가 기원전 9년 요절한 이후부터, 이들 형제의 법적 보호자이자 할아버지로 이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주변을 관리했다.
[3]
싸움의 원인은 세야누스가 회의에서 헛소리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황태자 소 드루수스를 도발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따라서 인격자였던 소 드루수스는 끝내 참지 못하고, 회의 중 세야누스에게 달려 들어 주먹질을 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주먹질 한번으로 세야누스를 바닥에 처박게 하면서, 때려 눕히고, 엄청난 싸움실력과 위압감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래서 세야누스는 큰 굴욕을 느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놈이 제위에 오른 날에 날 죽일 것이다."며 부하들에게 드루수스 독살을 당장 시행해야 한다고 하고, 드루수스의 아내로 자신과 불륜 중인 리빌라 등과 공모해, 그가 갑자기 죽은 것처럼 죽였다. 이는 세야누스가 서기 31년 몰락한 직후, 그의 전처가 자살 강요를 당하기 전에, 편지로 모든 것을 밝히며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