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라틴어: Marcus Antonius Orat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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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43년 ~ 기원전 8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아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아들) 안토니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9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동기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티투스 디디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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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탁월한 웅변술을 발판삼아 로마 정계에서 맹활약한 인물이다.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조부다.2. 생애
헤라클레스의 아들 중 한 명인 안톤을 시조로 삼은 노빌레스 가문인 안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고 나라에 긴급한 일이 생길 때 이와 연관된 구절을 찾아본 뒤 원로원에 보고하는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를 역임한 티투스 안토니우스 메렌다, 기원전 422년 집정 무관을 역임한 퀸투스 안토니우스 메렌다, 기원전 333년 삼니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독재관으로 발탁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휘하의 기병장관을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1]를 자신의 역사서에 언급했다. 이렇듯 역사가 오래됐지만 집정관이 한 명도 없었기에, 로마 귀족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아버지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가 집정관이던 해에 태어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그보다 3살 어렸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43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유년기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웅변술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코그노멘으로 쓰인 '오라토르(Orator)'는 웅변가를 의미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법학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나 사전에 치밀하게 짜인 연설을 사람들 앞에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수려한 웅변을 통해 대중을 설득하는 데 능한 라이벌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는 달리 제스처 등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대중을 설득했다. 그는 자신의 연설이 책으로 출판될 때 미숙한 면이 많이 노출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출간을 거부했다.
기원전 113년 조영관을 맡아 아시아 속주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브룬디시움으로 이동하던 중 법무관 루키우스 카시우스로부터 근친상간 혐의로 고발당했다. 조영관은 "공공의 필요를 위해 로마를 떠난 사람"으로서 재판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로마로 돌아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속주로 계속 가기로 했다. 그는 재판에서 특유의 웅변술을 발휘해 배심원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년 후 로마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킴브리 족과의 전쟁에서 참패해 로마에게 굴욕을 안겨준 혐의로 고발했다. 카르보는 유죄 판결을 받고 막대한 벌금을 내고 추방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리자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이후 10여 년간 사료에 등장하지 않던 그는 기원전 102년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 무렵 중요한 법정 사건을 다루는 대중 연설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기사계급과 손잡고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했다. 기사계급과 종종 충돌하곤 했던 파트리키와 노빌레스가 지배하는 원로원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원로원은 군대를 지휘한 경험이 딱히 없던 그를 동방으로 보내 킬리키아 해적 토벌을 맡겼다. 하지만 그는 해적 토벌 임무를 잘 수행했고, 킬리키아 해안을 따라 여러 요새를 세워서 속주민들이 해적에게 더 이상 시달리지 않게 했다.
기원전 100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개선식을 거행한 뒤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기원전 100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던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이듬해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먹고, 마리우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당선시키는 대가로 그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글라우키아는 기원전 100년 12월 10일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당선되었다. 그러자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안토니우스는 가까스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멤미우스는 살해당했다. 이에 원로원은 사투르니누스를 암살의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압력에 못 이겨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체포해 신전에 가두고 원로원 지지자들이 신전 천장에서 돌과 기왓장을 떼네어 마구 던져서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하는 것을 방관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99년 집정관에 파트리키 출신인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선출되었다. 그는 호민관 섹스투스 티티우스의 농지 개혁안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통과되었지만, 누마 폼필리우스의 궁전에 전시된 마르스의 창이 움직였다는 징조가 보고되자 신들이 농지 개혁안에 분노했다고 해석한 원로원에 의해 파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신들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추가 희생제를 실시하는 법안을 반포했다. 한편 많은 귀족들이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의 압력에 시달린 끝에 로도스로 망명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척지고 싶지 않았는지 참여하지 않았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뒤, 안토니우스는 속주민들을 착취한 혐의로 고발당한 마리우스의 측근인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변호를 맡아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등 변호인으로서 활약했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아퀼리우스의 혐의는 명백했고 수많은 증인들이 그의 악행을 밝혔지만, 안토니우스가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그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기법으로 승부했다. 특히 연설 말미에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팔을 붙잡고 튜닉을 찢어서 모든 배심원과 판사가 가슴에 난 흉터를 보게 했다. 그리고는 아퀼리우스가 나라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여러 상처를 입어야 했다며, 운명이 적의 무기로부터 구한 사람을 법정에서 심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배심원과 판사는 그의 이같은 설득에 넘어가 무죄를 선고했다고 한다.
기원전 97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된 그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탈리아인들 중 시민권을 수여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또한 국가 행사에 들어가는 예산을 제한하는 법을 폐지할 것을 제안한 호민관 마르쿠스 드로니우스를 원로원에서 추방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드로니우스는 안토니우스의 검열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했지만 역시나 안토니우스의 탁월한 웅변술에 설득된 배심원이 무죄를 선고하는 바람에 복수에 실패했다.
기원전 95년,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103년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재판 때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로부터 호민관으로서 거부권을 남발하고 민중을 선동한 혐의로 고발당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또다른 추종자인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변호했다. 노르바누스는 안토니우스가 킬리키아에서 해적 토벌 작전을 수행할 때 레가투스(Legatus)로서 그의 지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상의 관습에 따라, 그는 내 아들이다."
술피키우스의 기소에 대한 주요 증인은 원로원에서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맡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였지만, 안토니우스는 스카우루스의 증인 체택을 거부했고, 노르바누스는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몇 년 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조카였던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의 변호를 맡았다. 고발 측 변호인은 그의 라이벌로 거론되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지만, 그는 이번에도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인들의 반란을 선동했다는 의심을 받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서 열성적으로 연설했다. 키케로는 그가 전쟁 기간 동안 로마에 없었다고 밝혔는데,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혐의를 벗고 로마군에 복무했다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자발적으로 망명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87년 로마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이를 막기 위해 양자의 군대를 해산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술라는 군대를 해산하기를 거부하고 로마 시를 정복했고, 원로원은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자는 술라의 제안을 거의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만이 반대했고, 안토니우스를 포함한 나머지는 침묵을 지켰다. 이후 술라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방으로 떠난 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술라파 척결을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원로원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안토니우스를 당시 동맹시 전쟁의 잔당 세력인 삼니움족과 대치하고 있던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보내 로마를 킨나 일당으로부터 지켜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나 메텔루스 피우스는 로마를 돕기를 거부했고, 결국 마리우스와 킨나는 로마 장악에 성공했다.
그 후 마리우스와 킨나는 정적으로 간주된 자들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 중에는 안토니우스도 있었다. 그동안 마리우스의 가족과 측근들을 위해 변호했던 그를 정적으로 간주한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마리우스와 연을 끊고 술라파와 제휴하는 것을 택하자 마리우스가 이를 배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로마를 포위했을 때 다른 집정관급 인사들과는 달리 마리우스에게 합류하지 않은 것을 괘씸하게 여겼을 수 있고, 마리우스파에 속했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기원전 112년 아버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고발하여 자살로 몰고 간 것에 원한을 품고 그를 숙청 명단에 넣어버렸을 수도 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한 친구의 집에 피신했다. 이 친구는 가난해서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구입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안토니우스를 위해 질 좋은 포도주를 사기로 했다. 노예가 가장 가까운 포도주 가게에 가서 상인에게 주문하자, 상인은 평소처럼 질 낮은 포도주가 아니라 질이 좋고 비싼 포도주를 사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노예는 주인이 안토니우스를 대접하기 위해 그런다고 밝혔다. 상인은 노예가 떠나자마자 서둘러 마리우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마리우스는 즉시 부관 아니우스에게 군인들을 맡겨 그를 처단하게 했다.
아니우스는 군인들을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 안토니우스를 처단하게 한 뒤 자신은 문 앞에 서서 그들이 수급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군인들이 나오지 않자, 그는 이상하게 여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병사들이 안토니우스의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차마 안토니우스를 해치지 못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에 아니우스가 직접 안토니우스를 죽이고 수급을 베어 마리우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마리우스는 그의 수급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수급 옆에 전시하게 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안토니아를 낳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는 기원전 74년 법무관을 맡아 크레타에서 해적들과 맞서 싸웠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기원전 71년 크레타 해안에서 사망했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는 기원전 63년 집정관을 맡았고 기원전 42년 검열관을 역임했다. 딸 안토니아는 미셀눔 인근의 별장에서 해적에게 납치되었고 큰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풀려났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 없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는 기원전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낳았다.
[1]
그러나 종교 의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 모두 같은 해에 사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