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 라틴어: Lucius Gellius Poplico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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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3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그리스 악티움 앞바다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겔리우스(아버지) 발레리우스 메살라(양부?) 팔라(어머니)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이부 형제) 셈프로니아(아내) |
참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6년 |
전임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
동기 |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
후임 |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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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해방자파'와 함께 하다가 도중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와 맞서다 악티움 해전에서 전사했다.2. 생애
고대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기원전 72년 집정관을 역임한 평민 집안 출신의 루키우스 겔리우스이고, 어머니는 팔라이며, 형제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가 있었다고 한다. 로마 역사 연구가 뮌처와 에반스는 포플리콜라와 코르비누스는 이부 형제이며, 발레리우스 메살라가 포플리콜라를 입양했을 거라고 추정했지만, 이 설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의 이복누이인 셈프로니아와 결혼했다.그는 젊은 시절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부린 정치깡패에 소속되었으며,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시인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의 여러 시에서 삼촌의 아내, 자신의 누이, 심지어 어머니와 간통하는 등 성적으로 문란하고 방탕한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루키우스 겔리우스가 계모와 아들의 관계를 의심하여 원로원 의원을 대표로 세워서 가정 재판을 열기까지 했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서 무죄가 선고되았다고 밝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오랜 친구였다고 하며, 브루투스가 기원전 44년 여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함께 동방으로 떠날 때 함께 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브루투스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었다. 브루투스는 포플리콜라의 형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의 간곡히 호소를 받아들여 포플리콜라를 용서했다. 나중에는 카시우스를 암살하려 했다가 또다시 발각되었고, 이번에도 어머니 팔라의 구명으로 풀려났다.
그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귀순한 그는 기원전 41년 소아시아에서 재무관 또는 총독의 자격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초상화가 실린 동전을 주조했다.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그해 9월 1일에 사임하고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와 퀸투스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가 보결 집정관으로서 남은 임기를 수행했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 안토니우스 편에 섰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 때 안토니우스와 함께 북쪽 편대를 이끌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를 따라 이집트로 탈출한 뒤 남은 배를 이끌고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함대에 끝까지 맞섰다. 이후 기록상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