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라틴어: Servius Sulpicius Ru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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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05년 ~ 기원전 4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아버지) 포스투미아(아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아들) 술피키아(딸)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1년 |
전임 |
폼페이우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
동기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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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법학자.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파에 가담했지만 도중에 귀순한 후 새 체제에 순응하면서 법전 연구에 힘을 쏟았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가문인 술피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키케로는 기원전 63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집정관으로 당선된 후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되었을 때 무레나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면서, 낙선한 그를 가리켜 "매우 잘 태어난 사람'이라고 밝히면서도, "직계 조상은 공직에 있은 적이 없다. 조부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으며, 아버지 퀸투스는 단순한 기수였다. 그러니 그는 새로운 사람과 다를 바 없다"라고 비꼬았다. 일부 학자들은 퀸투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기원전 88년 호민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형제 또는 사촌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하지 않다.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그와 키케로 사이에 나이 차이가 거의 없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그의 나이가 기원전 105년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는 키케로와 법학, 웅변 등 동일한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민법에 관심을 많이 두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기원전 8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이 시기 공직을 맡았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82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잡자, 동방으로 떠나 로도스 섬에서 그리스 수사학자의 지도하에 교육받았다.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은 후 로마로 귀환하여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기원전 74~73년 즈음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와 함께 재무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65년 법무관을 맡아 여러 건의 횡령 사건을 법무관 자격으로서 심판했다. 기원전 63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데키무스 유니우스 살리누스, 카틸리나와 대결했다. 선거에서 패한 후, 그는 무레나를 유권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고발했다. 이듬해 호민관으로 선출된 소 카토와 그나이우스 포스투미우스가 고발자 측 변호사를 맡았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그리고 키케로가 피고인 측 변호사를 맡았다. 키케로는 무레나가 이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3위로 낙선한 카틸리나가 집정관이 될 테고, 그리 되면 그가 내세운 공략인 "채무자의 빚 전면 탕감"이 현실이 될 것을 우려했다.
키케로는 법정에서 긴 연설을 통해 그에게 존경을 표했지만, 동시에 그의 지적 업적을 무레나의 군사적 업적에 비해 덜한 것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그의 집안이 파트리키이지만 신참자와 다를 바 없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무레나는 무죄를 선고받고 집정관으로 인정받았다. 동문으로서 절친한 관계였던 키케로에게 모욕당한 게 큰 충격이었는지, 그는 오랫동안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기원전 59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함께 이듬해 집정관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장인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포기했다. 기원전 52년 초에는 인터렉스를 맡아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된 선거를 조직했다.[1]
기원전 51년,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걸 우려하여, 원로원에서 또다른 내전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료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를 겨냥한 두 가지 법안을 제안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카실피나의 노우보 코무스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걸 불법으로 선언하고 갈리아의 모든 속주에 총독을 미리 임명하자는 것과 사령관이 부재 중에 집정관 직에 출마하는 걸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카이사르는 심한 압박을 받아 무력을 동원하는 걸 고려하게 될 것이다"라며 반대했지만, 원로원은 마르켈루스의 제안을 승인했다. 다만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등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발효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킬리키아와 시리아에 파견할 증원군 모집을 반대했으며, 로도스와의 오래된 동맹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자, 그는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수도를 떠났다. 그러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희망해 캄파니아에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들 세르비우스를 브룬디시움을 포위하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폼페이우스가 발칸 반도로 가자, 그는 로마로 간 뒤 원로원에 출석해 카이사르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키케로에게도 로마로 돌아오도록 설득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그는 카이사르에게 히스파니아 원정을 감행하지 말고 폼페이우스와 화해하라고 촉구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카이사르가 유권자가 뇌물을 받은 것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폼페이우스의 법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깊은 실망을 느끼고 이탈리아를 떠났다. 기원전 47년 여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사모스 섬에서 그를 찾아간 걸 볼 때, 그는 내전 동안 사모스 섬에서 조용히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6년 초 카이사르의 부름에 응하여 그리스 총독이 되었다. 그는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이 임명을 수락한 이유가 "내전의 상처를 씻고 모두가 화합할 길을 열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했고, 키케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이 언급한 모든 이유는 합법적이며, 당신의 권위와 신중함에 완전히 합당합니다."
그는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을 가능한 온유하게 대해, 그들이 안심하고 새 정권에 순응하도록 노력했다. 기원전 45년 가을에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원로원에서 결정된 모든 사안을 대중에 공개하는 법을 폐지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원로원과 카이사르파 수장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간의 갈등이 또다른 내전으로 확대되려 하자, 그는 로마를 잠시 떠났다가 연말에 귀환했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명인 데키무스 브루투스로부터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쳐들어가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워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기로 했다. 그는 기원전 43년 1월 1일 회의 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에 규정된 연령 제한에 개의치 말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공직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워 안토니우스를 꺾으려는 키케로의 정책에 한 몫 거들었다.
이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데키무스 브루투스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청하려 했다. 당시 그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내전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 진영에 도착하기 직전인 기원전 43년 1월 중순에 결국 병으로 사망했다.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2월 4일 회의에서 공화국을 위해 희생한 그의 무덤을 조성하고 동상을 연단에 세우기로 결의했다. 키케로는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죽음은 공화국의 큰 손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대 로마 최고의 법학자였다. 키케로는 그가 법학에 깊은 이론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변증법을 통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생전에 180편에 달하는 법률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는데, 서기 2세기 법학자 섹스투스 폼포니우스가 그의 저서를 인용한 걸 보면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으며, 몇몇 로마 학자들의 저서에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진다. 그의 글을 인용한 학자들은 그의 법학에 대한 열성적인 탐구와 풍부한 지식을 칭송했는데, 특히 민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였다고 극찬했다. 키케로는 "만약 그가 민법에 도움이 되는 것만 웅변에 써먹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웅변에 전념했더라면, 이 시대 최고의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그는 키케로와 서신을 자주 주고받았는데, 현재 전해지는 건 다섯 통이다. 그 중엔 키케로의 딸 툴리아의 죽음과 관련하여 키케로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내용이 있었고,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는 생전에 포스투미아와 결혼하여 동명의 아들과 당대 로마의 저명한 여성 시인이었던 술피키아를 낳았다.
[1]
당시 로마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패거리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패거리간의 격렬한 시가전으로 혼란에 휩싸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선거가 불가능했다. 원로원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선출하려 했지만,
소 카토 등이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라"라고 요구하여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