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라틴어: Marcus Pupius Pisō Frugi Calpurn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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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15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푸피우스(양아버지) 안니아(아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1년 |
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
동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
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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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로마 왕국의 두 번째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인 칼푸스의 후손을 자처한 노빌레스 가문인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지만, 친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일찍이 마르쿠스 푸피우스라는 노인에게 입양되었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그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같은 해에 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15년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젊은 때부터 훌륭한 웅변술을 구사해 명성을 쌓았다. 키케로는 그가 그리스 문화의 전문가였으며, 자신과 함께 로마의 젊은이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젊은이의 성공에 관하여>를 공동 집필했다고 설명했다. 키케로는 훗날 저서 <브루투스>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자연은 피소에게 특별히 예리한 마음을 부여했고, 그는 그것을 과학을 통해 더욱 연마했다. 그것은 종종 악의적이고 간혹 강제적이지만 때로는 재치있는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소를 비판했다. 그는 피소가 어리석고 나쁜 사람이며, 공화국의 문제를 돌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의 게으름과 경험 부족 덕분에 나머지 부정적인 특성이 로마에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기원전 83년 재무관을 역임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 해에 술라의 내전이 발발했고, 그는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휘하 재무관으로 배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임무에 불성실하게 임했던 모양이다. 훗날 자신은 재무관으로서 돈을 만지지 않았고 병사들을 이끌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그가 명예나 조상의 관습을 배반하지 않고 정치적 신념을 보여주었다고 호평했다. 그는 마리우스파가 패할 거라 보고 승자의 편에 서기 위해 일부러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75년 조영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마르쿠스 세이우스에게 패배했다. 기원전 73년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베스타 여사제 파비아를 유혹했다는 고발을 받았을 때, 그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와 함께 카틸리나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얻어냈다. 또한 여사제 리키니아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간통 혐의로 고발당했을 때 역시 변호를 맡아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명성을 드높인 그는 기원전 72년경 법무관을 맡아 " 평민회가 소집되었을 때 원로원 의원이 여기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한" <푸피아 법(Lex Pupia)>를 반포했다.
임기가 만료된 후 가까운 히스파니아 또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해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막 종결되어 혼란스러웠던 그곳을 다스렸다. 기원전 67년부터 62년까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아 지중해 해적과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참전했으며,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을 습격한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다. 기원전 62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폼페이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와 함께 기원전 61년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가 집정관을 맡았을 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스캔들이 불거졌다. 클로디우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보나 데아(Bona Dea: 순결과 출산의 신) 여신에게 바치는 비밀제의가 열렸을 때, 남자는 절대로 출입할 수 없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여장한 채 카이사르의 집에 잠입하여 카이사르의 두번째 부인 폼페이아 술라와 밀회하려 했다가 발각되어 집밖으로 쫓겨났다. 카이사르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하녀들을 통해 소문이 점차 퍼지면서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다.
기원전 61년 1월 1일, 클로디우스는 신성모독을 저지른 혐의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등에게 고발당했다. 원로원이 법무관이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집행하려 하자, 호민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반대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클로디우스에게 적대적인 법무관들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려고 배심원들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소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민회가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지만, 클로디우스의 친구 쿠리오가 이끄는 클로디우스 추종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피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민회가 배심원단을 선출했고,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소 카토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는 피소의 이같은 행동에 권력자에게 아첨했다고 비난했다.
이후 기원전 60년도 집정관 선거를 주관한 피소는 폼페이우스의 심복인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의 당선을 이끌어내기 위해 정력적으로 협조했다. 심지어 그가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나눠줄 사람들을 자기 집에 정착시켰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의 집을 수색하는 것을 허용하고 뇌물을 분배하는 자를 집에 두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반포했다. 하지만 그와 폼페이우스의 후원 덕분에, 아프라니우스는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47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의 집에서 살았다고 하니 그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미망인이었던 안니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술라가 권력을 잡자, 그는 술라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안니아와 이혼했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이 사례를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 킨나와 이혼하라는 술라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망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대조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44년 법무관 '마르쿠스 피소'의 전체 이름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라고 추정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인물은 피소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