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푸르니우스 라틴어: Gaius Furn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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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가이우스 푸르니우스(아버지)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동기 |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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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행적
아버지 가이우스 푸르니우스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친구였다. 기원전 50년 호민관을 역임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측근이 되었다. 기원전 42년 법무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36년에서 35년 사이에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다.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군이 참패한 후, 그는 아버지를 구명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선처를 호소해 사면을 받아냈다. 아버지 가이우스 푸르니우스는 기원전 29년에 실제로 집정관이 되지 않았지만 집정관 지정자로 선정되었다. 기원전 26년 아우구스투스가 칸타브리아 전쟁의 지휘를 맡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갈 때 레가투스로 서 동행했으며, 기원전 25년 몬스 메둘리우스 산채에서 농성하는 칸타브리아인들을 포위했다. 칸타브리아인들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포로가 되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칼로 몸을 찌르거나 독을 삼켜 자살했다.
기원전 22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을 역임하던 중 칸타브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으며, 뒤이어 먼 히스파니아 총독 푸블리우스 카리시우스가 아스투리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걸 도왔다. 기원전 17년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루디 사에쿨라레스(Ludi Saeculares) 행사를 주관했다.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17년 집정관을 역임한 후 기록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