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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13:27:54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54년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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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황제 겸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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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라틴어: Lucius Domitius Ahenobarbus
생몰년도 기원전 98년 ~ 기원전 48년 8월 9일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그리스 파르살루스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
포르키아(아내)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들)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국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54년
전임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동기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후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1. 개요2. 생애
2.1. 가문2.2. 초기 경력2.3. 고위 행정관 경력2.4.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의 행적
3. 후손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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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대표적인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소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적대했다.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에 대적했으나 파르살루스 전투 때 전사했다.

2. 생애

2.1. 가문

고대 로마의 오래된 평민 씨족인 도미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여러 지파 중 개인이름으로 루키우스를 선호해 물려 사용한 아헤노바르부스 가 사람이다. 도미티우스 씨족은 모든 지파들이 개인이름으로 그나이우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사람들은 씨족 가문 전통대로 이 개인이름과 함께 루키우스를 사용했고, 이 개인이름을 그나이우스와 함께 대대로 아들 중 한명에게 물려줬다.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한 사람이 신성한 모습의 쌍둥이 청년을 만나서 그들에게 뺨을 어루만져지자 수염이 붉게 변했다. 이 인물은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빨간 수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그의 후손들에게 통칭이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192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62년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을 맡아 친로마 성향의 부족 아이두이 족에게 해를 입힌 알로브로게스 족과을 상대로 빈달리움 전투에서 알로브로게스 족을 격파했다. 그 후 기원전 121년 신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와 함께 알로브로게스 족-아르베르니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그보다 높은 직위인 파비우스를 더 높게 평가해 두 사람이 개선식을 거행할 때 파비우스에게는 개선문을 수여했지만 도미티우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118년 식민도시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나르본)를 건설했으며,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연결하는 도로인 도미티아 가도를 건설했고, 기원전 115년 감찰관으로서 원로원 의원 32명을 추방했다.

그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 루키우스를 낳았다.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103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기원전 96년 집정관을 역임하였고, 기원전 92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감찰관을 맡아 공공도덕에 해롭다고 간주된 라틴어 수사학파를 탄압했다. 동생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96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에 근무했는데, 제2차 노예 전쟁 직후 시칠리아에서 노예들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한 노예가 사냥용 창으로 멧돼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그 노예를 십자가형에 처해, 너무 잔혹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일로 정치적 입지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고, 기원전 94년 집정관을 맡아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내전 때 술라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피살되었다.

기원전 96년 집정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낳았다. 그나이우스는 일찍 죽었고, 동생 루키우스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아버지가 기원전 88년에 사망했을 때, 삼촌 루키우스는 마리우스 일파에게 살해되었고 형도 일찍 죽었으므로, 그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가문을 홀로 이끌어야 했다. 선조들이 오랜 세월 집정관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축적한 재산이 엄청났기에, 그는 당대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인사 중 한 명이었다.

2.2. 초기 경력

기원전 73년, 그는 그리스의 도시 오로포스의 주민들과의 소송 때 로마의 농민 대표로서 법정에 출두했다. 기원전 70년에 시칠리아에서 학정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가이우스 베레스의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왔다. 고소인 역할을 한 키케로는 그에게 베레스와 헤테로 헬리돈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대답을 회피했지만, 키케로의 탁월한 논변에 넘어가 결국 키케로에게 귀중한 증거를 제시했다.

기원전 67년 호민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지중해에서 날뛰는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지중해 전체와 해안선의 50마일 이내를 관할을 권한을 주고 임기를 3년간 주자는 법안을 제시했을 때, 그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해적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후인 기원전 66년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대신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를 토벌하는 권한을 주자고 제의했을 때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민회가 압도적인 지지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 토벌은 물론이고 지중해 동방 질서를 재편성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그는 이후로 가장 강경한 옵티마테스 파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자신과 같은 입장을 취하던 소 카토의 동복 여동생인 포르키아와 결혼했다. 또한 키케로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기원전 65년 집정관을 역임한 키케로의 중요한 조언자로서 활약했다. 기원전 61년 수석 조영관을 맡아 로마 시민들을 위한 길고 호화로운 경기를 개최했다. 이 무렵 로마에 귀환한 폼페이우스가 부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려 하자, 그는 소 카토와 함께 아프라니우스의 낙선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집에 유권자에게 뇌물을 줘서 특정 후보를 뽑게 하는 이들을 거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위광이 워낙 대단했기에, 폼페이우스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아프라니우스는 기원전 60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소 카토와 함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를 지원하여 카이사르의 개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삼두정치에 가담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막강한 지원과 카이사르의 탁월한 정치력, 그리고 개혁을 찬성하는 민심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 그해 10월 초 대중 집회 때 루키우스 베티우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려다 체포된 사건이 벌어졌다. 베티우스는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그리고 현직 집정관 비불루스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암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비불루스는 베티우스에게 직접 단검을 줬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 증언을 믿지 않았고, 베티우스는 곧 옥사했다.

2.3. 고위 행정관 경력

기원전 58년 법무관에 선출된 그는 카이사르가 지난해에 통과시킨 모든 법률을 폐지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전임 집정관의 행위가 불법이라고 공표하고 농지법 폐기를 요구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갈리아 3개 속주와 일리리쿰을 5년간 맡는 걸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 정계를 꽉 틀어쥐고 있던 삼두정치 세력은 이를 묵살했고, 카이사르는 예정된 대로 갈리아와 일리리쿰의 총독으로 부임한 뒤 갈리아 전쟁을 단행했다. 기원전 58년 봄 키케로가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탄핵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그가 자신을 귀환시켜주길 희망했지만, 카틸리나 사건 때 로마 시민을 재판없이 처형한 키케로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지 않고 삼두정치파가 정계를 꽉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귀환을 감행할 여력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기원전 57년, 기원전 56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하여 카이사르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삼두정치파는 이에 위협을 느꼈고, 루카 회담을 통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도 집정관 후보로 출마하기로 합의했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장병들을 보내 투표에 참여하게 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투표일로 지정된 날에 폼페이우스와 아헤노바르부스 모두 새벽부터 투표장에 나왔다. 곧 그들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더니 투표장이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그를 칼로 내리쳤고, 사람들은 이에 기겁하여 도주했다. 그는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피묻은 옷을 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1] 이후 투표일은 기원전 56년 2월로 미뤄졌고, 그는 자택에서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의 포위 공격에 시달렸다. 결국 투표 결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분루를 삼키며 다음 기회를 노려야했다.

기원전 54년, 그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여기에 소 카토도 법무관이 되었다. 그는 즉시 카이사르의 임페리움(지휘권)을 박탈하려 했지만, 카이사르 지지자들의 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부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시리아 속주민들을 학대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부터 뇌물을 받은 일을 집요하게 공격해 가비니우스가 망명하도록 유도하였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사망했을 때 그녀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는 걸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기원전 54년 여름, 이듬해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집정관 후보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가이우스 멤미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그리고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가 출마했다. 그는 현직 집정관으로서 선거 운동을 공정하게 이끌어야 할 책무가 있었으나, 멤미우스와 칼비누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들을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만약 그들이 집정관 수행 후 예정된 속주를 배정받지 못할 경우 각각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동료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역시 스카우루스, 루푸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들을 돕기로 했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심각한 논란이 벌어졌다. 멤미우스는 폼페이우스의 요구에 따라 원로원에서 아헤노바르부스와 맺었던 계약서를 낭독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이 일로 위신이 땅에 떨어졌지만, 입지가 약화되지는 않았다.

이렇듯 후보 4명 모두 막대한 뇌물을 현직 집정관과 선거인단에게 뿌리다가 고발당하는 바람에 차기 집정관이 좀처럼 선출되지 않다가, 기원전 53년 여름이 되어서야 정치 세력들의 합의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기원전 52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하려는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메텔루스 스키피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그리고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의 지지자들이 서로 패거리를 결성했다. 옵티마테스파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밀로가 한 편이 되었고, 카이사르 파인 풀케르와 힙사이우스가 이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곧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고, 로마 시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여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 이에 그와 소 카토는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기원전 52년 초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심판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밀로는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로마를 떠나 각지를 떠돌았다. 기원전 51년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패배했다는 소문을 로마 전역에 퍼트린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한편 키케로가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서 외적에 맞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원로원에 사흘간 승리를 기념하는 감사 행사를 열자고 제안했지만 호민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되었다.

2.4.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의 행적

기원전 50년 겨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을 마무리하고 집정관에 재출마하려 했다. 하지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들어갔다가 정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에, 부재 중 출마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는 소 카토, 메텔루스 스키피오 등 강경파 인사들과 함께 군대를 당장 해산하고 로마로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한발 양보하여 부재중 입후보를 허가해 준다면 자발적으로 8개 군단에 이르는 자신의 군대를 즉시 해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폼페이우스의 군단 해산을 요청했다.

카이사르의 서신은 기원전 49년 1월 초 원로원에 도착했다. 많은 온건파 의원들은 이 정도면 받아들일만 하다고 여겼지만, 아헤노바르부스, 카토 등 강경파가 결사 반대했고 폼페이우스는 장교들을 대동한 채 카이사르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데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여기에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지지한다면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위해 의무를 다할 것이지만 만일 의원들이 등을 돌린다면 폼페이우스에게 나중에 도움을 요청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결국 온건파 의원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시켜야 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호민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하자,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포해 호민관의 거부권을 무효화시켰다.

그 후 원로원은 아헤노바르부스를 갈리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그는 카이사르의 권력을 박탈하기 위해 중부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결정 소식을 듣자마자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갔다. 아헤노바르부스는 2월 9일에서 10일까지 30개 코호트, 즉 15,000명의 군단병을 모아 코르피니움 시에서 농성했다.( 코르피니움 공방전) 그는 병사들에게 승리한다면 땅을 골고루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남이탈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하던 폼페이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예상과는 달리 민심이 자신을 따르지 않고 병사들이 계속 카이사르에게 투항하는 상황에서 카이사르와 당장 대적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고, 그에게 당장 남쪽으로 철수하여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코르피니움에서 카이사르군에게 포위된 채 농성하고 있다가 폼페이우스의 서신을 받자 큰 충격에 빠졌다. 일단 부관들과 밀담을 나누며 군대를 내버려두고 도시를 탈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모든 게 끝장났다고 여기고 노예 의사에게 독약을 달라고 요구하고, 의사가 건낸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곧 카이사르가 모든 포로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자신의 성급한 결정을 책망했다. 이때 의사가 "저는 독약 대신 수면제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몹시 기뻐하며 서둘러 카이사르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그를 포함한 모든 고위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각자 원하는 곳으로 가도록 했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마음속으로 원망했기에 당장 그와 합류하지 않고 에트루리아의 코자 시로 간 뒤, 그곳에서 7척의 배를 구입한 후 노예, 자유민, 선원들을 태우고 마실리아로 떠났다.

마실리아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가 도착한 후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다. 이후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로 진군하다가 마실리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따르라고 요구했지만, 마실리아는 단호히 거부했고 그가 수비대 지휘관을 맡았다.( 마실리아 공방전)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이끄는 3개 군단과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해군에게 도시를 포위 공격하도록 맡긴 후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폼페이우스는 마실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루키우스 나시디우스가 지휘하는 함대를 파견했으나,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격파당했다. 또한 트레보니우스는 도시를 공략하고자 거대한 탑을 건설했고, 공병대를 투입해 땅굴을 파서 성벽을 허물게 하였다.

성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거대한 탑 몇 개가 완성되자, 수비대는 곧 항복할 테니 공격을 미뤄달라고 청했다. 트레보니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그날 밤 수비대가 어둠을 틈타 출격하여 탑을 불태워버렸다. 이에 분노한 장병들은 탑을 빠른 시일에 재건하고 포위를 더욱 엄중히 했다. 이후 마실리아 시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결국 기원전 49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항복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급히 배에 올라 타 마침 불어닥친 폭풍우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함대가 육지로 흩어진 틈을 타 탈출하여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기원전 48년 무렵, 그는 테살리아에서 폼페이우스와 함께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메텔루스 스키피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함께 카이사르를 처단한 뒤 공백 상태가 될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위를 누가 가질 지를 놓고 매일 논쟁을 벌였다. 논쟁이 너무 격해져서 심각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회의에서 카이사르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립을 지킨 자들을 어떻게 다룰 지에 관한 논의가 있었을 때, 그는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요구한 형벌 수위에 대해 한 기록에서는 사형을, 또다른 기록에는 벌금 부과를, 일부 기록에서는 원로원 계급 박탈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 때, 그는 폼페이우스군의 측면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전투 결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폼페이우스군의 완패였고, 그는 산으로 달아나다가 카이사르의 기병에게 따라잡혀 살해당했다.

3. 후손

아내 포르키아 사이에서 낳은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파르살루스 전투 때 카이사르군에게 체포된 뒤 카이사르의 자비로 풀려난 후 더 이상 카이사르에게 대적하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해방자'를 자처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가담하였고, 기원전 42년 이오니아 해에서 50척의 함대를 지휘하여 제2차 삼두정치파를 상대로 승승장구해 부하들로부터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브루투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죽은 뒤에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한 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70척의 함대와 2개 군단을 이끌고 이오니아 해 연안을 약탈했다.

기원전 40년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중재를 통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화해하였고,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침공에 가담했다. 기웜전 35년 이후 비티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32년 집정관을 맡았다. 이 시기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내전이 발발하자, 급히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이집트로 돌려보내려고 애썼지만 안토니우스가 말을 듣지 않아 실패했다. 많은 병사들이 이집트 여왕에게 휘둘리는 안토니우스에게 혐오를 느끼고 그가 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나이우스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가담했다. 안토니우스는 의외로 그나이우스에게 속한 모든 친구와 수행원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 합류한 지 며칠 후 사망했기 때문에 악티움 해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자신이 저지른 배신에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나이우스의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의 큰 딸인 대 안토니아와 약혼했으며, 기원전 22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는 기원전 16년 집정관을 맡았고 기원전 13년부터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했다. 또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게르마니아 원정을 맡아 엘베 강을 건너 아우구스투스의 위업을 기리는 제단을 쌓기도 했으며, 라인 강과 엠스 강 사이의 습지 위에 폰테스 롱기라고 불리는 산책로를 건설했다. 한편 전차 기수로서도 맹활약해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

루키우스는 대 안토니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는데, 딸 도미티아는 결혼하기 전에 요절했고 장남 루키우스 역시 결혼 전 요절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요절한 장남 루키우스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술을 잔뜩 먹고 동방 현지에서 시비가 붙은 속주민을 죽을 때까지 폭행해 죽였을 정도로 잔혹하고 폭력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그가 요절한 뒤 아버지인 동명이인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속앓이를 했다. 둘째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역시 망나니로 악명이 대단했다. 그는 국고 횡령, 폭행, 협박, 여러 여성들과의 불륜, 도박,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기 중독, 고리대금업 등을 저지르고, 여동생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불륜을 맺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품행이 대단히 나빴다. 급기야 티베리우스 황제가 세야누스 몰락 후 국가 기강 잡기에 나서면서 국고 횡령, 간통, 강간, 폭행, 협박, 문서 위조 등 각종 범죄 혐의로 기소해, 재판을 열고 사형판결을 손수 내리고 죽이라고 서한장까지 보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내의 오빠인 칼리굴라가 즉위하면서 죄인들을 사면시켜줄 때 석방됐다. 그는 아들이 2살이 되던 40년에 사망했는데, 임종 직전에도 기분이 좋지 않다며 노예들을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 등 좋지 않은 행실만 보였다. 이 인물의 아들이 바로 로마 제국 제5대 황제 네로다.

4. 여담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 인물을 '에노발부스'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에이드리언 골즈워디의 카이사르 평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몇몇 로마사 서적에서 덩달아 에노발부스라고 번역되어 독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일본어 표준 표기도 アヘノバルブス인데 왜 에노발부스로 번역되었는지는 의문. 2010년대 이후 번역서에서는 아헤노바르부스라고 제대로 번역되고 있다.


[1] 이 피묻은 옷을 보고 임신 중이던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가 폼페이우스가 죽은 줄 알고 놀라 유산했고 이 때문에 두번째 임신 때 난산으로 죽게 되면서 카이사르-폼페이우스 동맹이 깨지는 나비효과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