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라틴어: Gnaeus Cornelius Lentulus Marcell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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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05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아버지) 코르넬리아(어머니)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형제) 스크리보니아(첫번째 아내) 파비아(두번째 아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6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
동기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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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파트리키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평민 지파이며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분전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후손이다. 그는 킴브리 전쟁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3,000명 가랴의 분견대를 이끌고 후방에서 킴브리족을 습격해 대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후 동맹시 전쟁 때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레가투스를 맡았으나, 이번에는 이세르니아 시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수비대가 항복하고 본인은 겨우 빠져나오는 등 잘 싸우지 못했다.마르켈루스의 막내는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렌툴루스 지파에 입양되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로 개명했다. 이 인물은 화폐 주조관을 역임했지만 그 이상으로 경력을 쌓지 못했다. 아내 코르넬리아는 기원전 11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1]의 딸이다. 푸블리우스와 코르넬리아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는 기원전 74년 재무관을 역임했다. 차남인 그나이우스가 이 항목의 주인공이다.
그는 기원전 105년경에 출생했다. 기원전 74년경 화폐 주조관으로 근무했으며,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주조된 데나리우스를 상당수 발견했다. 기원전 70년 시칠리아 속주민들을 심하게 수탈한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 재판이 열렸을 때, 그는 자랑스러운 선조가 시칠리아와 연관이 깊은 점을 고려해 시칠리아인들의 편에 섰다. 기원전 67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휘하 레가투스로서 지중해 해적들과의 전쟁에 참여해 아프리카 해안에서 해적들을 몰아냈다. 키레네 주민들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아폴로 사원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61년 보나 데아(Bona Dea: 순결과 출산의 신) 여신에게 바치는 비밀제의에 몰래 침입해 신성 모독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고발한 인사들에 가세했으며, 기원전 60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시리아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해 2년간 통치해 아랍인들의 습격을 격퇴했다. 로마로 돌아온 후 기원전 56년 집정관에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선임되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과는 달리 제1차 삼두정치의 구성원들에 반대했고, 클로디우스가 불법으로 평민이 되어 호민관으로서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클로디우스 지지자들에 의해 파괴된 그의 집이 있었던 팔라티노 언덕의 부지를 키케로에게 넘기는 안건을 제시해 원로원의 승인을 얻었지만 한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되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집트 파라오에 복위시키는 방안을 놓고 원로원에서 회의가 열렸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이집트에 파견하려 했지만, 그는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시리아 총독이자 폼페이우스의 심복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에 들어가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기원전 56년 4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루카에서 카이사르와 만나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그는 원로원 회의에서 두 사람에게 "세간에 당신들이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정말로 집정관이 되고 싶은가?"라고 대놓고 물었다.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 때문이 아니라 선동을 일삼는 자들 때문에 로마의 정세가 불안하니 집정관을 맡아야 한다면 맡겠다고 답했다. 반면에 크라수스는 자신은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으로 지명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몇 달 후 두 사람이 집정관 선거에 동시에 출마하면서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그는 이에 격분해 두 사람의 출마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호민관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를 회유하여 선거를 마르켈리누스가 퇴임한 후인 기원전 55년 1월로 미루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것은 공화정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다!"라며 공개적으로 항의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집정관에서 퇴임한 뒤 삼두정치의 권세가 로마를 지배하는 것에 신물이 났는지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삼두정치가 무너지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갈등이 불거졌을 때 별다른 언급이 없는 걸 볼 때, 그는 몇 년 안 되어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48년 재무관을 맡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마르켈리누스가 그의 아들로 추정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두번째 아내였던 스크리보니아의 첫번째 남편이 그였으며,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한 뒤 파비아와 결혼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1]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