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 라틴어: Publius Cornelius Lentulus Su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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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63년 12월 5일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버지) 율리아 안토니아(아내)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1년 |
전임 |
루키우스 겔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 |
후임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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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기원전 63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재판없이 처형되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6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행적이 전해지지 않으나, 아피아노스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동맹시 전쟁을 치를 때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 삼은 푸블리우스 렌툴루스가 그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필사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고, 실제로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를 가리킨다는 의견도 제기되기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기원전 81년 재무관을 역임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해 말에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로부터 횡령 혐의로 고발당했다. 이에 원로원으로부터 해명을 요구받은 그는 경멸어린 표정으로 연단에 선 뒤 보고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공을 놓칠 때 소년들이 하는 것처럼 정강이를 보여줬다. 그 후 그는 수라(Sura: 정강이)라는 아그노멘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2번 재판을 받았지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명연설가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웅변술이 뛰어났고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수완이 훌륭했다고 밝히면서도, 그가 무척 뻔뻔하고 부정직했다고 비평했다. 저서 <브루투스>에서는 그가 “얼굴에 고상한 표정, 능숙하고 매력적인 몸짓, 유쾌하고 강한 목소리로 생각과 말의 무기력함을 숨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키케로가 훗날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던 그에게 품은 적대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학자들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키케로조차 웅변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로 당대 로마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본다.
기원전 75년 또는 74년에 법무관을 역임했고, 이듬해 시칠리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기원전 71년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지만 별다른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다. 1년 후인 기원전 70년, 감찰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와 루키우스 겔리우스가 원로원 의원 64명을 자격 미달을 이유로 원로원 명단에서 삭제했을 때, 그도 삭제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가 삭제된 공식적인 이유는 부도덕한 행동이었는데, 정확히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원로원으로 복귀하고자 기원전 63년 법무관에 재차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 해 가을이 되기 전에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에게 가담하여 부채를 전액 탕감하고 로마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그는 시빌라 예언서에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세 대표가 왕권을 가질 운명이라는 내용이 있다면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이미 그것을 받았으니 자신이 세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공모자들은 기원전 63년 10월 말 계획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가이우스 만리우스 가 이끄는 술라의 퇴역병들은 에트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카틸리나와 렌툴루스 등은 로마에서 정적들을 살해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해 집정관 키케로가 음모의 낌새를 눈치채고 수사에 들어갔다. 이에 거사를 서두르기로 한 그들은 11월 6일 밤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라이카의 집에서 비밀 회의를 연 뒤 내일 키케로를 살해하고 로마 시에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키케로는 11월 7일 원로원 회의에서 카틸리나를 성토하는 연설을 했고,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났다. 하지만 다른 공모자들은 도시에 남아있었다.
렌툴루스는 로마에 남은 이들의 지도자를 맡았다. 그들은 만리우스의 군대가 도시에 입성한 뒤 거사를 단행하기로 했다. 음모에 가담한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카테구스가 만리우스가 즉각 행군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그는 에트루리아에서 군대 모집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2월 17일에 거사를 단행하기로 했다. 12월 초, 갈리아 계통의 알로브로게스 족이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달라고 요청하고자 사절단을 보냈다. 그는 이들을 회유해 거사에 가담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사절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음모에 가담하느니 모든 사실을 로마 정부에 알리기로 하고 키케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키케로는 사절단이 음모에 가담하는 척하며 모임에 계속 참석하게 한 뒤, 그들로부터 음모에 가담한 이들의 정보와 계획을 습득했다. 12월 3일,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키케로는 음모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선언하고 렌툴루스가 사절단에게 보낸 서신을 회의장에 제출했다. 이후 렌툴루스 등 공모자들을 구금하고 그들의 집을 수색하기로 결의했다. 수색 결과 무기가 있는 무기고가 발견되었다. 렌툴루스의 해방노예와 클리엔테스들이 집결해 렌툴루스를 구출하려 했지만, 코르넬리우스 일족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틀 후인 12월 5일, 공모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듬해 집정관으로 선출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공모자 전원을 사형에 처하자고 주장했고, 키케로를 비롯한 다른 연사는 한결같이 실라누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듬해 법무관으로 부임할 예정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공모자들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보내 종신 금고형에 처해놓고 뒤이은 반란을 미연에 방지한 뒤 정식 재판을 열어서 음모자들을 심판하자고 주장했다. 카이사르의 주장에 여러 사람이 의견을 바꿨지만, 소 카토가 단호한 조치를 내릴 것을 요구했고 키케로도 뜻을 굽히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렌툴루스 등 공모자들은 회의 직후 마메르티네 감옥으로 끌려간 뒤 목이 졸려 처형되었다. 키케로는 "vixerunt(그들은 끝났다)"라는 단 한 단어를 군중에게 발표했고,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공모자들의 처형을 환영했다.
렌툴루스는 기원전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이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의 미망인이었던 율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했다. 율리아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두었는데, 그는 이들 모두를 친아들처럼 아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한 고대 작가들에 따르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런 계부를 무척 사랑했고, 계부를 죽인 키케로를 증오했다고 한다. 렌툴루스 본인의 친자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