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라틴어: Gaius Marcius Censor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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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후 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갈라티아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아버지)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년 |
전임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술피키아누스 |
동기 |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
후임 |
티베리우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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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처음으로 독재관과 감찰관을 역임하고 이후로도 로마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노빌레스 씨족인 마르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선조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는 감찰관을 유일하게 두 번 역임했다고 알려진 인물로, 그의 직계 후손들은 대대로 감찰관(Censor)를 따서 '켄소리누스(Censorinus)'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했다. 기원전 39년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가 그의 아버지로 추정된다.기원전 20년 또는 19년경에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Triumvir monetalis: 주화 주조자)로 선임되었고, 기원전 11년 이전에 아우구르를 맡았다. 기원전 8년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선거전에서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비난받았기에 선출이 불투명해졌지만,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개입하기를 거부한 덕분에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집정관 재임 동안 속주를 순방 중이던 아우구스투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자 유피테르를 위한 경기를 개최했고, 8월의 본래 명칭인 섹스틸리스(Sextilis)를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하기로 한 원로원 회의를 주관했다.
기원전 3년경 추첨을 통해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밀레투스를 후원했고, 말라스에서 "구세주이자 창시자"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첸소리네이 아라는 게임이 매년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열렸다. 기원후 2년 갈라티아의 총독을 맡아 동방에 머물던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접대했다. 그러나 그 해 총독으로 재직하던 중 사망했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를 기리는 송가를 썼고, 로마 역사가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그를 "가난한 남자에게서 태어난 훌륭한 인간(Vir demerendis hominibus genitus)"이라고 칭찬했다. 그의 배우자 및 자녀는 알려진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