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라틴어: Publius Servilius Vatia Isauric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30년 ~ 기원전 44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평민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조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아버지) 카이킬리아 메텔라(어머니)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아들) 세르빌리아(손녀) |
참전 | 술라의 내전, 해적 토벌, 이사우리아인 토벌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9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메텔루스 피우스 |
동기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기원전 7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78년부터 74년까지 킬리키아 총독으로서 해적과 이사우리아 부족들을 토벌해 '이사우리쿠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원로원의 중진으로서 활약했으며, 카이사르의 내전 때는 중립을 지켰지만 아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는 카이사르파로 활약했다.2. 생애
세르빌리우스 가문은 본래 알바롱가에서 기원한 6개의 귀족 가문 중 하나로 파트리키에 속한다. 하지만 이사우리쿠스는 귀족 가문의 후손이면서도 제2차 포에니 전쟁 전후로 플레브스(평민)가 되는 것을 선택한 지파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181년 군사 호민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는 기원전 120년대에 마케도니아에서 총독으로 활동했다. 어머니 카이킬리아 메텔라는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딸이다. 그는 이러한 혈연 때문에 강력한 귀족 집안인 메텔루스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고, 스키피오 나시카, 아이밀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집안과도 협력했다.키케로에 따르면, 기원전 100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과 원로원파간의 시가전이 벌어졌을 때, 공공 상점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신전에 들어가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을 공격한 귀족 중에 그도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98년 호민관을 역임했으며, 늦어도 기원전 90년에 법무관을 맡은 뒤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아 기원전 88년 10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어느 민족을 정복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이베리아 부족의 반란을 평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투입될 예정이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민회로부터 지휘권을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양도하라는 명령을 받자 이를 불복하고 로마로 진군했다. 술라는 집정관 선거에서 그를 지원했지만,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대신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후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 맞서기 위해 발칸 반도로 이동했고, 그는 로마에 남았다. 기원전 87년, 술라파 행세를 하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아프리카에 망명했던 마리우스를 불러들어 로마에 입성했다. 그는 집정관 옥타비우스를 지키려 했지만 끝내 옥타비우스가 피살되는 걸 막지 못했고, 여러 귀족과 함께 그리스로 도피하여 술라와 합세했다.
기원전 83년 술라가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내전을 벌였다. 그는 이에 적극 참여했으며, 로마에 입성한 뒤 술라 정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기원전 79년 자신의 사촌과 결혼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78년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해적 토벌을 맡아 타렌툼에 로마와 연합군 함대를 편성한 뒤 기원전 77년 토벌 작전을 시작했다. 크레타 섬, 키레네 섬 등 그리스 남부의 에게 해 섬들을 무대로 해적들을 공격했으며, 해적들이 산악 지대에 설치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특히 악명높은 해적 지도자 니콘을 체포했다고 한다. 그는 총 4개 또는 5개의 군단을 지휘했으며, 피키디아의 오로안다, 팜필리아의 올림포스 등을 점령했다. 그 결과 킬리키아 속주는 속주로 크게 확장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킬리키아 트라키아의 일부를 합병하여 소아시아 남부 해안 전체를 로마에 종속시켰다고 한다.
해적 토벌을 어느정도 완료한 뒤, 그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타우루스 산맥 북쪽 산악 지대에 거주하며 강도 행위를 일삼는 이사우리아인 토벌에 나섰다. 이사우리아인들이 숨은 산악 요새에 첫 공격을 가했으나 막심한 손실을 입자, 요새에 흐르는 강의 물길을 돌리고 고립시키는 작전을 벌였고, 이사우리아인들은 며칠 후에 항복했다. 그는 이들 모두를 노예로 팔았고, 도시를 불태웠다. 이 일이 알려지자, 다른 이사우리아인들은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지만, 100명의 인질을 바치고 모든 로마 탈영병과 무기를 넘기라는 요구를 받자 싸우기로 했다. 이에 그는 즉각 공격하여 또다른 도시를 공략했고, 살아남은 이사우리아인들은 산속 깊숙이 흩어졌다. 기원전 74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서 해적과 이사우리아인들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하였으며, '이사우리쿠스'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원로원의 중진으로 존경받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70년 시칠리아 총독 시절 주민들을 고통에 빠뜨린 혐의로 기소된 가이우스 베레스 재판에서 판사를 맡았고, 시칠리아 주민들의 변호인을 맡은 키케로의 탁월한 논변을 받아들여 베레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기원전 66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책임을 폼페이우스에게 맡기자는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의 제안을 지지했으며, 기원전 63년 12월 3일 원로원 회의 때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자들을 즉결 처형하자는 현직 집정관 키케로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무렵 메텔루스 피우스가 사망하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공석이 되자 이 명예로운 직위를 차지하려 했다. 당시 그의 상대 후보는 동료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와 이제 막 떠오르는 인사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선거는 백중세로 예상되었지만, 카이사르가 표를 더 많이 획득하면서 당선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카틸리나 지지자들을 재판없이 처형한 일로 지탄받고 추방된 키케로가 로마에 귀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에게 키케로와의 원한을 잊어버리라고 요청했으며, 폼페이우스에게도 개인적으로 찾아가 키케로 복귀를 호소했다. 그 덕분에, 키케로는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또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키케로를 추방한 뒤 키케로의 집을 허물고 세운 자유의 여신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키케로의 집을 재건하게 했다. 기원전 56년 1월 이집트에 대한 권력을 되찾으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지원을 제공하는 것에 반대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했으며, 그해 5월에 시리아와 마케도니아의 총독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를 폭정 혐의로 소환하자는 키케로의 주장을 지지했다.
기원전 55년 감찰관을 맡아 동료 감찰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와 함께 잦은 범람으로 시민들을 힘들게 하는 테베레강을 통제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고수했으며, 기원전 44년 초여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아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는 대표적인 카이사르파 인사였으며, 기원전 48년과 41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손녀 세르빌리아는 어린 시절 옥타비아누스와 약혼했으며,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다.